히피
파울로 코엘료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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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미쳐 돌아갈 때 누구를 미치광이라 부를 수 있겠소? 세상에서 가장 미친 짓은 현실에 안주하고 꿈을 포기하는 것이요. 현실은 진실의 적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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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겔 데 세르반테스, <돈키호테> -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는 매트릭스는 진실을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리는 세계를 의미하며, 이는 모든 곳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네오에게 두 가지 형태의 알약을 건넨다. 파란 알약은 비록 허구로 이루어진 세계이지만 그러한 현실에 안주하며 살 수 있는 약이고, 빨간 알약은 참혹하고 고통스럽지만 거짓을 꿰뚫고 불편한 진실을 바라볼 수 있는 약이다. 네오는 단 한번의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의 순간에 빨간 알약을 삼키고 진실을 택한다. 파울로 코엘료의 <히피>를 읽고, 알록달록한 주홍빛의 표지를 바라보며 나는 매트릭스의 빨간 알약을 떠올렸다. 산업혁명은 인류에게 풍족한 삶을 가져다 주었지만, 자본의 가치가 노동의 가치를 능가하게 되면서 개인은 거대한 자본주의 시스템의 부속품으로 전락되어왔다. 눈부신 고도성장의 이면에는 부의 양극화와 불평등도 존재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히피운동은 기존의 제도와 가치관을 부정하고 인간성 회복과 동등하고 평등한 사회 구축을 기치로 내세우며 등장했다.

 


 


파울로 코엘료의 <히피>에는 저마다의 환경 속에서 진실한 삶을 위해 '빨간 알약'을 삼킨 다양한 히피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매직버스 안에서 자신을 향한 진실한 여정의 동반자로 만난다. 여행 속에서 진리를 찾는 파울로의 이전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이번에도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여타의 소설과 다른 점은 이번에는 작가 파울로 본인도 여행에 참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소설 속의 파울로는 작가의 젊은 시절 모습으로 <히피>는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다. 브라질 청년 파울로는 삶의 지혜를 구하기 위해 홀로 여행을 떠났다. 여행 중 만난 동반자들과의 소통을 통해 많은 것을 느끼지만 신은 어디에나 존재하며, 곤충이나 모래알 등 지극히 사소한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달은 그는 중도에 여행을 멈추고 수행하는 삶을 택한다. 인생의 진리는 어디에든 존재한다는 늙은 수피스트의 말은 매트릭스는 모든 곳에 존재한다는 모피어스의 말을 연상시킨다. 진실은 항상 그 자리에 존재할 뿐, 진실을 스스로 차단하는 것은 어쩌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우리들 자신 아닐까?

 

네덜란드 여성 카를라는 매력적인 외모와 번듯한 직장 등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녀 자신이 바라보는 삶은 평생 남을 넘어서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결코 그녀 자신을 넘어서 본 적이 없는, 모든 것을 가졌으나, 아무것도 즐기지 못하는 고독하고 우울한 삶이었다. '진실한 사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 여기 (Now and Here)를 살지 못한다'는 정신과 의사 남자친구의 말은 그녀를 여행으로 이끌었다. 여행 중 파울로를 만난 그녀는 거짓을 진실로, 폭력을 평화로,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변화시키는 진정한 사랑을 체험하게 된다. 결국 사랑을 통해 그녀는 미지의 세계에 한걸음 더 다가설 수 있었다.

 

매직버스의 운전사인 영국인 마이클의 꿈은 진정한 세상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의대를 졸업하고 인턴까지 마친 그는 세계 각지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성직자가 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그의 명성을 탐낸 영국정부가 그를 스파이로 활용하려 하고, 그는 정부의 제의를 거절하고 매직버스에 오른다. '뒤를 돌아보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쇠사슬이 감기고, 인류에게서 모든 희망의 흔적이 사라질 뿐이다.' (215)라고 말하는 마이클은 그가 쌓아온 과거 보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프랑스인 자크와 마리는 부녀지간으로 함께 여행길에 오른다. 그들 부녀의 존재는 중요한 것은 여정 그 자체일 수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프랑스 유명 화장품회사의 마케팅 디렉터였던 자크는 68혁명과 임사체험이라는 두 가지 강렬한 경험 후에 딸과 함께하는 여행을 계획한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그가 낡고 오래된 버스를 선택한 이유는 열두 시간 동안 같은 공간에서 비행하면서도 옆 사람과 한마디도 나누지 않는 에어프랑스 일등석은 그가 원하는 여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학생인 자크의 딸 마리는 여행중에 마약 LSD를 체험한다. 마약을 통해 그녀는 자신의 심연에 도달하는 경험을 하지만 동시에 세상과의 접속을 끊고 타인의 행운이나 불행에 무심한 채 환각과 황홀경에만 집중하게 되는 어두운 단면도 깨닫는다. 결국 그녀는 마약의 유혹을 극복하고 세상에 재접속하여 일상의 전투에 참여하는 것을 택한다.

 

아일랜드인 라이언은 네팔에서 평행현실 속 시간을 초월하는 경험을 하였고, 그 경험이 연인 미르트와 다시 여행을 떠나는 계기가 되었다. 평행현실이라는 말은 소설 속에서 자주 등장한다. 평행현실은 라이언에게는 여행의 계기가 되었지만, 파울로에게는 트라우마로 남았다. 파울로는 이전의 여행에서 사회주의 운동가로 몰려 투옥되어 고문을 당했고, 그 고통스런 기억은 그의 물리적 현실에서는 사라졌지만, 평행현실, 즉 그가 동시에 살아가는 수많은 현실들 중 하나에서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메트릭스의 설계자 아키텍트 (The Architect)와 만났을 때 등장한 수많은 모니터들은 네오의 선택에 따라 미래에 실현되는 수많은 평행현실을 나타낸다. 우리의 의식세계에서 현실은 고정된 실체처럼 인식되지만, 현실은 수많은 평행현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무한한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는 평행현실 중 하나를 실현시키는 것은 나의 행위, 즉 선택이다. 라이언은 평행현실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이며, 그들이 지금 이 버스 안에서 같이 여행하는 것은 그들 각자가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제 수천 킬로미터를 가야 하는데, 이게 어떤 여행이 될지는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달렸어. 이제까지는 불가능해 보이던 꿈을 추구해나가느냐. 아니면 불편한 좌석과 거슬리는 승객들한테만 얽매이느냐. 지금 우리가 머릿속에 그리는 모든 게 여행하는 내내 우리의 현실이 될 거야." (171)

 


 


소설을 읽으며 오늘날의 우리는 히피운동을 어떻게 봐라봐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히피운동은 사회에 대한 분노와 절망감 속에서 현실을 거부하고 이상을 추구했던 젊은이들의 치기 어린 반항에서 비롯된 실패한 혁명에 불과한 것일까?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날 일을 선택할 수 없지만 그것에 대처하는 방식은 선택할 수 있다." (71)는 말처럼 우리는 저마다 삶이 던지는 질문에 답하며 세상을 살아간다. 소설 속 히피들도 서로가 여행의 동반자가 되지만 그들 각자가 도달하는 진리는 저마다 다르다. 히피들은 현실적 제약에서 벗어나 더 나은 세상을 갈망했고, 이를 다양한 방식으로 추구해나갔다. 소설 속에서 '하루 5달러로 유럽 여행하기'는 세계 각지로 여행을 떠났던 히피들에게 경전으로 통하지만, 또 다른 책을 경전으로 삼았던 히피들도 존재했다. 바로 반권위주의와 사회변혁의 분위기는 받아들이면서 정치와 환경운동 보다는 테크놀로지에 주목했던 이들이다. 테크놀로지를 통해 평등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이들에게는 <홀 어스 카탈로그 (Whole Earth Catalog)>라는 잡지가 바이블이었다.

 

<홀 어스 카탈로그>는 당시의 첨단기술 또는 아직은 기술로 구현되지 않았지만 히피사상을 현실화시킬 빛나는 아이디어로 무장된 제품과 서비스들이 소개된 잡지였다. 자유와 공생, 공유와 개방의 히피문화는 이들의 존재로 인해 오늘날의 PC와 인터넷, SNS로 구체화될 수 있었고, 애플과 구글, 페이스북과 트위터라는 글로벌 혁신기업들도 탄생할 수 있었다. 시대의 화두로 남아 있는 스티브 잡스의 말 "Stay Hungry, Stay Foolish (항상 갈망하고, 우직하게 살아가라)" <홀 어스 카탈로그>의 폐간호에 등장한 세상과의 마지막 작별 인사를 10대의 잡스가 읽고 기억하고 있다가 세월이 흘러 재인용한 것이다. 잡지의 창시자 스튜어트 브랜트는 1995년 타임지 기고문을 통해 PC와 인터넷 혁명은 모두 대항문화의 산물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그의 기고문의 부제는 "우리는 모두 히피에게 빚을 졌다."였다.



 

 

"카를라 여기에 있니?" (356)

 

책의 마지막 대목에서 파울로가 외친 이 말은 내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며 가슴에 스며 들었다. 파울로는 왜 히피 시절을 떠올렸을까? 무엇이 세계적 작가가 된 그가 수많은 대중과 언론이 주목하는 컨퍼런스에서 카를라의 이름을 부르게 했을까? 젊은 시절 파울로가 자신만의 진리를 탐구했던 기억은 그가 작가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근간이 되었다. 그 시절 진실한 사랑에 눈을 뜬 카를라는 그 이후 어떤 삶을 살게 되었을까?

 

"언젠가 뒤를 돌아보고 여정의 초기를 떠올리는 순간이 오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미소를 지을 것이다.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나 실은 극히 하잘것 없었던 이유들 때문에 걸었던 그 모든 길들을 통해서도 우리는 성장할 수 있다. 우리에겐 필요한 순간에 길을 바꿀 능력이 있다." (160)

 

파울로의 외침은 그 시절 진리를 탐구하는 여정을 함께 했던 길동무에 대한 그리움과, 자신들의 힘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온 것에 대한 자랑스러움, 앞으로도 세상이라는 진실한 교실에서 주도적인 삶을 살아갈 것임이 분명한 그녀의 삶을 응원하고 지지한다는 의미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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