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해리 세트 - 전2권
공지영 지음 / 해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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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는 해리성 인격장애자인 '이해리'와 위선적인 카톨릭 신부 '백진우'로 대표되는 불의한 인간 군상들이 만들어낸 악의 카르텔을 포착하고 이에 맞서고자하는 약자들의 투쟁을 담은 이야기다. 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종교라는 성역 안에 도사리고 있는 악의 존재를 파헤치는 과정이 자못 충격적이다. <도가니>와 마찬가지로 소설의 배경이 되는 가상의 도시 무진에 펼쳐진 안개는 진실이 은폐되고 거짓의 치부가 가려져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하게 되어버린 현실세계를 상징하고 있다. 안개는 손에 잡히진 않지만 우리 곁에 뚜렷이 존재하면서 아직 어둠이 내리지 않은 곳까지 진실을 질식시키고 악이 번성하게 만든다. 안개는 모든 것을 가리는 환하고 하얀 어둠이다. (1112)

 

카프카는 "악은 선을 알지만, 선은 악을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악은 항상 선을 의식하기에 선을 알고 있지만, 선은 악을 의식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악을 모른다는 것이다. 선은 상식의 영역에서 옳은 것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비상식의 악의 세계를 알 필요가 없지만, 악은 비상식의 영역에 위치하면서 상식의 가면을 쓰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선을 의식하게 된다. 밝은 곳에서는 어두운 곳이 잘 보이지 않지만, 어두운 곳에서 보면 밝은 곳의 세세한 부분이 잘 보이게 마련이다. 하지만 카프카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선도 악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 아니었을까? 동기적인 측면에서 선은 악을 알 필요가 없지만 악은 선을 필연적으로 알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악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선도 악을 알려고 노력해야만 하는 것이다. 선은 상식의 기준으로 내린 자신의 결정이 악을 번성하게 하는 끔찍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어리석고 악에 대해 무지하다. 이에 반해 비상식의 영역에 위치한 악은 선을 알고 이를 이용하면서 수더분한 얼굴과 선한 목소리로, 또한 자기 합리화라는 도구로서 자신을 포장할 정도로 치밀하고 영악하다.

 

안타깝게도 삶은 상식만으로 구성되지 못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자행되고 있을 악은 이에 대한 반증일 것이다. 알프레드 델프가 '악이 역사 속에서 번창했던 이유를 선이 삶에 대한 시험의 극복을 삶의 한복판이 아닌 그 주변에서 행하기 때문이라고 한 것'(280)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해리>를 읽으며 어쩌면 세상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가시화된 폭력과, 권력화된 악 때문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악의 없는 무심함, 자신의 상처에 갇혀 발동되는 이기적 방어기제, 행동하지 않는 지식 등이 누적된 결과가 아닐까 생각했다. 자기기만과 진실에 대한 외면이, 그 오만한 태도와 피상적 단면에 대한 섣부른 판단이 '잔디에서 하나둘씩 싹이 돋아나듯, 작은 실개천이 하나둘 모여들듯, 어느 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192)의 도래를 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인간이 쌓은 언어들, 이념들 혹은 평가들은 그저 허구에 불과했다.'(2273)는 작가의 말처럼 이념이라는 것은 불완전하고 모순투성이인 인간의 산물이기에 본질적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면 안개라는 환하고 하얀 어둠에 둘러싸여 있을 때 인간은 해가 솟고 바람이 불어 세상이 스스로 정화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는 것일까? 중요한 것은 안개 속에서 진실을 가려낼 수 있는 깨어 있는 비판의식과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였을 때 침묵하지 않고 여기 악이 있다고 외칠 수 있는 용기이다. '안개를 뚫고 나올 수 있는 단 하나의 것은 소리이며, 그 소리는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입을 통해야 한다.'는 소설 속 이나의 말은 이를 잘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지난날의 경험을 통해 인간 스스로 빛을 내고 바람을 일으켜 어둠을 몰아낼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201610월 광화문을 밝힌 촛불은 20174월까지 전국 150여개 시군으로, 전 세계 31개국 71개 도시로 퍼져나갔다. 누군가는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고 했지만, 1,700만여 개의 빛은 대한민국 헌정 사상 첫 대통령 파면을 이끌어내며 찬란하게 빛났다. 독일의 에버트 재단은 촛불집회에 참여한 우리 국민을 2017'에버트 인권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특정 국가의 국민이 수상자로 선정된 것은 상이 제정된 이래 최초의 사례였다. 재단은 민주적 참여권의 행사와 평화적 집회의 자유는 생동하는 민주주의의 필수적 요소이기 때문에 집회에 참여한 모든 분들을 대상자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우리를 만드는 것은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경험에 반응하는 태도이며, 악을 극복하게 하는 건 두려움을 떨쳐내고 이루어낸 신뢰와 연대이다. 쉽사리 변하지 않는 사회에 절망하지 않고 신뢰하고 연대하며 협력과 공생의 질서를 만들어나가는 것, 그것이 비록 사소하고 미약한 성공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사람'''이 빛나는 사회로 나아가는 동력은 그러한 곳에서 나온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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