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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아래
야쿠마루 가쿠 지음, 양수현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책 들 여 다 보 기

불편한 주제
책 소개를 처음 접했을 때는 기대감 반 우려 반이었습니다. 성범죄라는 다소 불편한 주제에, '개인적 단죄'라는 좀 더 묵직한 주제의식을 끌어왔기 때문입니다. '이 두가지 소재를 얼마나 잘 활용할 수 있을까?'하는 기대감과 '다소 버거워 보이는 두 주제를 통해 소설을 잘 마무리 지을 수 있을까?하는 우려가 동시에 들었습니다. 책의 두께를 보았을 때는 생각보다 얇아서 약간 걱정도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단죄'라는 테마에 대해서는 '갈때 까지 가보자'는 식의 극한의 상황 설정을 통해 한번 진지하게 다가가보고 싶었던 지라. 주제의 무대로는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 정도의 분량과 스케일정도까지는 되어야 만족을 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지요. 허나 작가 '야쿠마루 가쿠'에 대한 평이 꽤나 좋은 편이라, 믿음을 가지고 한번 도전해보았습니다.
소설의 묵직한 주제 의식과는 달리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아동을 상대로 성범죄를 저지르고 이것이 살인으로까지 이어지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건들 후에는 자신을 '상송'이라고 칭하는 살인마가 행동합니다. 상송은 아동 성범죄가 일어날 때마다 과거에 성범죄를 저지른 경력이 있는 전과자들을 단죄라는 명목하에 무참히 살해합니다. 그리고는 성범죄가 사라질때까지 그의 살인 또한 이어질 것이라고 경찰과 매스컴에 성명서를 보냅니다. 자신의 여동생을 성범죄 살인 사건을 통해 잃은 경찰관 나가세, 철저히 경찰의 입장에서 상송을 잡으려하는 무뚝뚝한 경찰 무라카미, 그리고 성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단죄를 행하는 살인마 상송의 시각으로 사건이 진행됩니다.
그들의 시각
작가는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통해 단죄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요소요소 마다 배치합니다. 많은 생각을 유발 시킵니다. 특히 자신의 여동생을 성범죄자에게 잃은 연유로 동종 전과자에게 큰 분노를 느낄 수 밖에 없는 인간 나가세와 상송을 단지 범죄자로만 취급해야 하는 경찰관 나가세와 사이의 고뇌가 많이 와닿습니다.
나는 어느 쪽일까. 경찰관으로서 이 범인을 꼭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만약 카나와여동생 에미 같은 피해자가 줄어든다면
이대로 범인이 잡히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조금이라도 하는 이상, 나는 이 수사본부에 있을 자격이 없는 것이다. - p.188
- 자신의 혈육을 성범죄자에게 빼앗긴 나가세. 거의 상송의 논리에 마음이 기운 듯한데
그의 가정사를 보면 충분이 공감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상송이 사회의 구세주인 양 옹호하고 떠받들기도 하지만
놈이 한짓은 단순한 살인이다.
나가세가 그런여론에 휩쓸리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고서 수사에 임해주길 바랐다. - p.196
- '상송은 단지 범죄자'라는 철저한 경찰관의 입장을 보여주는 무라카미.
"지난 달 27일, 사이타마 현내의 자택에서 키무라 마사츠구가 살해되었습니다.
알 고 계십니까?"
" 신문에서 읽었어요. 누가 죽였는지는 모르지만 감사하고 있어요.
사법 대신 리츠코의 복수를 해 줬죠." 마사오가 무라카미를 쏘아보며 말했다. - p.175
- 자신의 아이를 성범죄자에 의해 잃은 가족. '사법 대신 리츠코의 복수를 해줬죠'라는
한 구절이 그의 깊숙한 아픔을 낱낱이 보여줍니다.
일찍이 죄 없는 아이들을네놈의 더러운 욕망을 위해 죽인 너희들은,
결코 그 죄에 합당한 보답을 받지 않았다.
이 썩어 빠진 사회를 정화하기 위한산 제물이 되는 것 외에 너희의 가치는 없다. -p.130
- 머리로는 잘못된 것을 알지만 마음으로는 공감될 수 밖에 없는 논리를 펼치는 상송.
복잡합니다.
나의 시각
성범죄 관련 뉴스가 전파를 탈때마다 온갖 괘씸함과 분노가 마음을 가득 채웁니다. 동시에 범인들에 대한 단죄를 상상하면서 그 분함을 억누르곤 합니다.
제 자신은 그의 행동 역시 또 하나의 '범죄'라는 현실적인 논리를 생각하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사형집행인 '상송'을 두둔하고 그를 통해 통쾌함을 맛보기도 합니다. 이 문제, 제 자신도 아직 한쪽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기가 애매모호 합니다. 어쩌면 이 때문에 한판 제대로 벌이는, '갈때까지 가는' 소설을 바라고 있는 것도 이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소설은 제대로 한판 벌이지는 못했지만, 두께에 비해 알찬 생각거리를 던져 준 것 같아 만족스럽습니다.
노파심
이 범인을 잡지 않으면 언제 제2, 제3의 모방범이 나타날지 모른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범죄. 살인을 긍정할 수도 있는 범죄. 어떤 목적이 있든지 여론이 범죄를 긍정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이 범인을 놓쳐 버리면 사법의 이념이 붕괴될지도 모른다. - p. 138
이 소설의 주제인 '단죄'가 약간 불편하다고 앞서 언급했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소설을 통한 모방범죄에 대한 노파심이랄까요. 영웅심리에 심취해 혹여나 극단적인 형태로, 따라하는 범죄는 생기지나 않을까?... 전부터 들었던 생각인데, 콕 집어 주는 군요.

여기서 부터는 소설에 대한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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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리한, 허나 떳떳하지 못한
결말이 참으로 영리했습니다.
조그마한 반전을 준비해두었습니다. (물론 중간 중간에 서술트릭을 연상케하는 다양한 복선들이 눈에 띠기는 했지만요) 더 영리한 면은, 소설의 주제라 할수 있는 단죄에 대한 정당성에 대한 대답을 능숙하게 피해갔습니다.이미 성범죄의 전력이 있는 범인이자신의 딸마저 탐할까봐 자신을 상송의 마지막 제물로 바치는 발상. 단죄라는 표면에 드러난 동기를 묽게 만들어 그에 대한 논의는 피해가면서 이야기는 깔끔하게 완성시키는 참 영리한 구성이었습니다. 또한 복수라는 소재를 개입시켜서 '단죄'에 대한 논의를 또 한번 능숙하게 희석시키기까지 합니다.
영리하게 반전과 스토리는 완성시켰지만 주제의식을 정면으로 받아내진 않아 조금 아쉽고 떳떳하지 못했던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