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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책 들 여 다 보 기

한국현대소설 - 어렵다?
한국현대소설을 꽤나 좋아하지만, 시작하기도 전에 덜컥 겁을 먹는 경향이 있습니다. 바로 작품 자체의 수준이 제 독서 이해력의 정도를 벗어난 것에 대한 불안인데요. 한국현대소설이 던져주는 심오한 주제라던가 그 주제를 이끌어가는 이야기의 추상적 요소들에 익숙치 못해서지요. 시작은 창대하여 재밌게 읽어나가지만 끝에 가서는 이 소설의 주제가 뭔지, 결말이 의미하는 바가 뭔지 하는 류의 의문으로 책장을 덮는 경우라 하겠습니다. 숲 전체를 보지 않고 눈 앞의 나무만 좇아가다 길을 잃어버리는 경우랄까요. 읽고 있는 부분에만 집중 가능한 수준낮은 독서력(?) 탓이겠지요(아직 멀었네요 ㅠㅠ) 특히 이번 소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처럼 제목부터 메타포를 한껏 머금은듯 힘을 꽉주고 들어오면 그 불안감이 배가가 되지요.

베스트셀러 - 쉽다
허나 베스트셀러는 괜히 되는게 아니었나봅니다. 물론 작가 '최인호'의 네임벨류도 기여를 했겠지만, 그것도 어느정도의 일단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을때의 이야기이겠지요.
이야기는 주인공 K가 주위의 사물을 낯설게 느끼면서 시작됩니다. 당연하게 존재한다고 느끼던 주위의 물건들에 자신의 것이 아닌듯한 위화감을 느낍니다. 심지어 아내마저 낯설게 느껴집니다. 전날밤 술에 거하게 취한후 끊겨버린 1시간 30분의 기억에 그의 낯섦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고 어제의 동선을 따라나갑니다.
자신의 주변에 대한 낯섦의 인식..... 시작부터 범상치않은 사건으로 덜컥 부담을 줍니다. 기억과 망각의 심리작용, 그로인한 정체성의 침식, 자아분열, 인지장애..... 온갖 심리적 관념을 총동원해야할 줄 알았습니다. 허나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술술 잘 읽힙니다.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의 미스터리를 파헤치는 한 권의 추리소설을 읽는 것 같았습니다. K라는 탐정이 기억의 공백을 메우기위해 주변인물을 탐문하기도 하고 직접 해결을 위해 행동합니다. 띠지에 소개한 '빠르고 흥미로운 전개'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입니다.
소설의 가독성을 도와주는 또다른 장치로는 직설적인 비유법들도 한몫을 합니다. 상황을 온갖 은유와 상징을 이용해 추상적으로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적절한 단어를 던져줌으로써 한결 이해가 빨라졌습니다.
섀도 박스
같은 종이를 여러 겹 오려 필요한 조각을 만든 후 실제 상황에 맞춰 입체감 있게 재배ㅣ해서 만든 전위적 예술 공간..... 그 상자속에 K가 갇혀 있는 것이 아닐까. K가 겪고 있는 이 수수께끼의 상황은 섀도 박스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제 3의 입체 공간일지도 모른다. - p.55
- 낯이 익지만 어제의 것이 아닌 주변의 모든 것들. K의 주위에 들이닥친 혼란의 공간을 섀도 박스라는 단어로 정리해줍니다.
중간중간에 비현실적인 요소들이 삽입되어 있지만 오히려 이런 소재들이 미스테리함을 가중시킵니다. 도대체 어느정도길래?? 궁금하시다면 일단 읽어보시길!

여기서 부터는 소설의 내용 및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 어렵다
책장이 쉽게 넘어간다고 책이 쉽다고는 말 못합니다. 갑작스러운 낯선 느낌의 이유를 수사해나가는 탐정 K. 허나 주위 상황은 점점 더 노골적으로 K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주변 인물들의 중첩이 점점 가중되면서 주변 사람이 정말로 내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인가 하는 의심이 피어오릅니다. 빅브라더라는 초월적 존재의 장난에 놀아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K는 소파에 앉았다. 두 사람이 앉기에도 좁은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던 사내가 흘깃 K를 보았다. 얼핏 보기에 어제 처제의 결혼식에서 만났던 장인이자 좀 전에 JS집에서 본 매형과 닮아 있었지만 분명히 그 사람인지, 복제인간인지, 닮기만 한 다른 사람인지는 분간이 가지 않았다. - p.258
- 똑같이 생긴 사내와 장인과 매형. 과연 누가 진짜이고 누가 거짓일까. 혹은 모두 진짜일까. 모두 가짜일까.
그리고 그 의심의 범위는 신이라는 시원적 존재에까지 뻗어나갑니다.
내가 믿고 있는 하느님은 우주 만물과 인간을 창조한 창조주인가, 아니면 하느님으로 위장한 거짓 하느님의 헌신인가. 내가 믿는 예수는 과연 인류를 구원한 구세주인가, 아니면 살아 있는 사람처럼 실리콘으로 정교하게 만든 인형 리얼돌과 같은 적 그리스도인가, 아니면 리얼돌과 같은 모조품이 아니라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관능까지 지닌 살아있는 악신인가 - p.289
그리고 그 의심의 원인이 주변상황의 왜곡이 아닌
자신의 왜곡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모든 가상현실에서 바뀐 사람은 다름 아닌 K다.
K 본인이 가짜이며, 짝퉁이며, 복제인간이자, 추적자이며, 위조인간이다. 이러한 기현상은 다름 아닌 K의 탓이고, K의 탓이며, K의 큰 탓 때문인 것이다.....K는 K가 아니다. 그러면 지금의 k는 누구인가. -p.296
이후 K가 자신과 똑같지만 다른 K를 만나게 됩니다. 이정도가 되니 서평을 쓰면서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안됩니다. 책장이 잘 넘어간다고 책이 잘 이해되지는 않는 노릇이지요. 누가 실제 존재하는 현실이고 누가 환상인지 그 경계가 점차 허물어집니다. 이러한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사건들이 소설후반부가 되면서 극단적으로 배치됩니다. 특히 마지막 3장에서 주인공이 지난 앞의 모든 등장인물들과 재회하고 이후 K2와도 만나 합일을 이루는. 진정한 K가 되는 부분에서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도통 알 수가 없었습니다. 즐겁게 읽은 소설이었지만 또 한번의 한계가 다가온 듯 하네요.
K1과 K2는 합쳐짐으로써 그들의 의문을 푼 것 같습니다.
저의 의문은 이제부터 시작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