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인과 서커스(트레이시 슈발리에, 이진 역. 비채. 2007. 436쪽)
: 목수 캘러웨이네 가족은 둘째 아들을 사고로 잃고 고향 도싯셔에서 런던으로 이주한다. 우연히 만났던 유명 서커스단장 필립 애스틀리가 그에게 일자리를 약속한 바 있기 때문. 캘러웨이네 막내 아들 젬은 이사 첫날부터 당돌하게 자신에게 다가온 동네 소녀 매기와 점점 친해지고, 캘러웨이네 옆집에 프랑스 혁명을 지지하는 의미의 붉은 모자를 쓰고 다니는 윌리엄 블레이크라는 사람이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고향에서 의자만을 전문적으로 만들던 캘러웨이는 서커스 무대 장식을 만드는 데 투입되고, 가족이 함께 서커스를 관람하던 날 젬의 누나 메이지는 서커스단장의 아들이자 마상 묘기를 선보이던 존에게 반한다.
프랑스 혁명 발발 3년 후, 바다 건너 런던의 분위기를 10대 아이들의 성장을 통해 잘 보여준다. 젬과 매기의 작은 모험과 일상들이 중심이기는 하지만 매기의 가족들 - 직업이 불분명한 아버지와 세탁일을 천직이라 생각하고 몸이 부서져라 일하는 엄마, 싸가지 없고 게으른 오빠 - 과 동네 사람들, 서커스단원들의 생활상도 촘촘하게 잘 짜여진 이 이야기의 일부를 훌륭하게 채우고 있다. 중간중간 블레이크의 시가 삽입된 것도 좋았다. 블레이크의 비중이 크지는 않지만 아이들의 성장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고 당시의 소수지만 올바른 신념을 지키는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어 블레이크가 등장할 때마다 짠하면서도 마음이 따뜻해져서 좋았다. 이렇게 좋은 어른이 곁에 있다는 게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행운이었는지. 결말이 조금 서글펐지만, 좋은 독서였다.
2. 더이상 도토리는 없다(최상희, 김려령 외. 돌베개. 2022. 224쪽)
: 도서관을 주제로 한 앤솔러지. 이 책을 오래전부터 읽고 싶었는데 도서관에 갈 때마다 시스템에는 대출가능인데 정작 실물 책이 있어야 할 위치에 없어서 대출을 못했고, 거의 1년을 찾다가 겨우 발견해서 빌렸다. 표제작이 정말 재밌고 귀여웠는데 나머지 작품들도 다 좋았다. 굳이 더 좋았던 걸 뽑자면 김려령의 「우리가 아주 예뻤을 때」, 김해원의 「황혜홀혜」. 1년을 찾아 헤맬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었다.
3. 자연과 함께한 1년(바버라 킹솔버,스티븐 L. 호프,카밀 킹솔버, 정병선 역. 한겨레출판. 2009. 532쪽)
: 저자는 애리조나 주 투손에서 살면서 자신이 사는 도시에서는 먹을거리 생산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식품들은 대부분 먼 거리를 이동해 오기 때문에 그에 따른 연료 사용을 비롯한 여러 문제를 야기한다는 생각에 애팔래치아 남부의 물려받은 농장에서 되도록이면 직접 기른 먹을거리들을 먹으며 살기로 결정하고 가족 전체가 이주를 한다. 이 책은 1년간의 기록이다. 사실 귀농 생활의 이야기는 전에도 읽었고 이 책도 크게 벗어나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그보다는 더 깊이 있는 이야기들이 전개된다. 일례로 저자는 비건 생활을 하다가 다시 육식을 하는 것으로 돌아왔는데 이유는 비건 생활로 부족한 영양소를 섭취하기 위해 재배되는 식물들이 결코 탄소를 적게 발생하지도, 더 적은 생명을 죽이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비건만이 절대 진리인 양 목소리를 높이는 일부 사람들에게 꼭 읽히고 싶은 대목이었다.
어쩌면 뻔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고, 굳이 이 책이 아니더라도 조금만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왜 우리가 지역(Local) 음식을 먹어야 하는지는 명확하다. 하지만 이렇게 한번씩 환기시켜 주는 것도 좋을 것이다. 비록 현실적으로는 실천이 쉽지 않은 부분이 있지만...
4. 유골에 대한 기이한 취향(엘리스 피터스, 최인석 역. 북하우스. 2024. 352쪽)
: 캐드펠 수사 시리즈 1권. 1137년 영국 외곽 슈루즈베리의 성 베드로 성 바오로 수도원. 젊을 때 십자군 원정에도 참여했고 나름 산전수전 다 겪은 50대 후반의 캐드펠 수사는 신께 귀의하여 조용히 수도원의 약초밭을 가꾸며 살고 있다. 당시 수도원 사이의 명예 경쟁에 휩쓸려 이 수도원도 들썩거리는데, 때마침 한 젊은 수사가 웨일스 귀더린의 성녀 위니프리드를 꿈에서 영접하는 일이 생기고, 야심찬 부원장은 성녀의 유골을 가져오기 위해 길을 떠난다. 웨일스 출신이라는 이유로 이 행렬에 동행하게 된 캐드펠. 막상 도착해 보니 지역 주민들은 성녀의 유골을 가져가는 데 반발이 심하고, 설상가상으로 주민의 반대의견을 가장 역설하던 지주 리샤르트가 시신으로 발견된다.
아무래도 시리즈 첫 권이다 보니 인물과 배경, 분위기르르 드러내는데 앞부분이 많이 할애된다. 그래도 범인에 대한 추리보다도 당시 주민들의 분위기 - 특히 외지인에 대한 태도와 계급 의식 등이 흥미로웠다. 그리고 성녀의 유골을 과연 수도원에 안치할 수 있을지도. 단순(?)한 살인 사건일 뿐 아니라 성녀의 유골 안치와 수도원장 및 그 휘하의 출세욕, 그리고 두 커플의 사랑이 얽혀서 꽤 흥미진진했다. 그리고 이 사건의 해결 방식을 보고 캐드펠 수사가 정말 좋아졌다. 이런 멋진 어른이라니!
5. 시체 한 구가 더 있다(엘리스 피터스,김훈 역. 북하우스. 2024. 376쪽)
: 캐드펠 수사 시리즈 2권. 1138년, 영국은 내전 중이다. 헨리 왕이 죽으면서 후계로 정한 모드 왕후의 사촌인 스티븐 백작이 왕위를 찬탈한 것. 스티븐 왕의 편에 선 영주가 슈루즈베리를 점령하고, 모드 왕후 편이었던 귀족과 향사들은 도망친다. 하지만 미쳐 도망가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처형된다. 한편 수도원에는 갈 곳 없는 소년이 몸을 의탁하고, 갈 곳이 정해질 때까지 캐드펠을 도와 약초밭 일을 하기로 한 이 고드릭이라는 열일곱살 소년의 비밀을 캐드펠은 금세 알아챈다. 캐드펠은 수도원장의 명으로 처형당한 사람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일을 맡게 되는데, 처형당한 사람의 수보다 시체의 수가 한 구 더 많다는 걸 발견한다.
죽은 사람의 억울함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캐드펠의 선함과 올바름을 수도원장과 귀족들이 수긍한다는 게 인상깊었다. 물론 정치적인 의도도 있었지만. 그리고 귀족들의 줄서기와 적진에서의 탈출, 군자금 운반 등의 모험과 그 와중에 사랑에 빠지는 젊은이들까지... 흥미진진한 요소들이 가득해서 계속 즐겁게 읽었다. 스스로에게 좀 의아했던 건, 휴 베링어라는 인물에 대한 내 평가가 한순간에 바뀐 것. 처음에는 난봉꾼 기회주의자라고 생각했는데. 어찌됐든 해피엔딩이다. 그것도 캐드펠의 지혜에 기대어.
6. 수도사의 두건(엘리스 피터스, 현준만 역. 북하우스. 2024. 340쪽)
: 1138년, 내전의 아픔은 차츰 수습되는 중이다. 하지만 스티븐 왕에게 미운털이 박힌 수도원장 헤리버트는 직무가 정지된 채 소환되고, 야심찬 로버트 부원장이 직무대행을 맡는다. 급한 안건은 전 재산을 수도원에 기탁하고 수도원 경내에 머물며 편한 노후를 보내기를 바라는 영주 보넬과의 계약 문제. 계약 자체는 나중에 하더라도 일단 관내에 보넬의 거처를 마련하고 머물게 하는데, 갑자기 보넬이 사망한다. 원인은 독살. 부원장이 특별히 자신에게 올려진 요리를 보넬에게 나누어 줬는데 그 음식 속에 독이 들어 있었던 것. 캐드펠은 그 독극물이 자신이 '수도사의 두건'으로 알려진 투구꽃으로 만든 약제라는 걸 알아채고, 수사에 들어간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보넬의 의붓아들 에드윈. 하지만 음식을 가지고 온 하인 앨프릭과 보넬의 사생아 메이리그, 음식을 준비한 하녀 알디스도 의심스럽다.
캐드펠의 과거가 살짝 드러난다. 보넬의 아내 리힐디스와의 이야기. 캐드펠이 십자군에 참전하기도 전의 이야기이다. 전권에서 리힐디스가 언급되었는지 기억을 더듬었지만 생각나지는 않았다. 여러 명의 여자가 언급되었던 거 같은데, 아니었나? 암튼 이런 '특수관계' 때문에 이 수사에서 배제될 뻔 했지만 휴 베링어의 도움으로 캐드펠은 수사에 조금이나마 참여할 수 있게 된다. 범인은 예상 못했고, 범인을 잡는 과정도 꽤나 역동적이었다. 하지만 가장 흥미로웠던 건 보넬과 수도원의 계약 내용. 그렇게 세세하고 구체적이라니. 웨일즈의 법제도 흥미로웠다. 책을 읽으면서 얻는 이런 부수입 같은 자투리 지식들 정말 좋다.
7. 성 베드로 축일(엘리스 피터스, 송은경 역. 북하우스. 2024. 368쪽)
: 아직도 내전의 여파를 수습중인 슈루즈베리에 성 베드로 축일을 맞아 수도원이 주관하는 장터가 열린다. 슈루즈베리의 지역 유지들은 내전 피해를 복구하는데 수도원이 도움을 줘야 한다면서 삼일장의 수익을 재분배해 주기를 요구하지만 신임 원장 라둘푸스는 원칙을 내세워 거절한다. 한편 장이 서기 전날 잉글랜드 전역에서 영향력 있는 상인들이 속속 슈루즈베리에 도착해서 가게를 차리는데, 늦은 밤 브리스틀의 토머스가 알몸에 칼에 찔린 시신으로 발견된다. 용의자는 시장의 아들 필립 코비저. 전날 술집에서 축일 장터에 불만을 터트리고 만취 상태로 엉뚱한 곳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립이 수감된 사이 피살자의 배가 강도를 당하고, 토머스의 조카 에마는 뭔가를 숨기는 듯 하다.
난 물건을 좀 쟁이는 편이라서, 장갑이 그렇게 유용한 단서가 될 줄 몰랐다. 여름에 겨울 물건 좀 쟁일 수도 있지, 그게 뭐? 그런데 이렇게 정치적인 문제까지 얽혀 있을 줄이야. 게다가 난 이번에도 캐릭터 분석에 실패했다. 그 놈이 그렇게까지 나쁜 놈일 줄은. 하지만 또 금세 다른 남자한테 마음 주는 것도 좀 이해가 안 되. 물론 시대적 배경상 그럴 수 있기는 하지만. 그래서 이번에는 정말 에마가 궁금하면서도 답답했다. 그래도 이 시리즈에는 자기 주장이 분명하고 적극적인 여성 캐릭터가 늘 등장해서 기분이 좋다.
8. 세인트자일스의 나환자(엘리스 피터스,이창남 역. 북하우스. 2024. 328쪽)
: 캐드펠 수사 시리즈 5권. 전편에서 캐드펠을 돕던 신참 마크 수사는 수도원 근처의 나환자 전문 세인트자일스 병원에 파견 나가있다. 한편 수도원에서 결혼식을 올릴 행렬이 마을에 도착하고, 세인트자일스 환자들도 화려한 행렬을 보기 위해 나온다. 그리고 그 중에는 유독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키 큰 노인 환자가 있다. 결혼식을 올릴 커플은 누가 봐도 이상한 조합이다. 60대의 귀족 노인 휴언 드 돔빌과 열여덟 살의 고아 소녀 이베타. 이베타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지만 아버지가 십자군 전쟁에서 돌아가신 후 자신에 대한 권리를 모두 가져간 삼촌 부부의 재산 욕심 때문에 억지로 돔빌과의 혼인에 떠밀린 것. 하지만 결혼식 당일에 신랑은 시신으로 발견되고, 전날 억울하게 도둑 누명을 쓰고 해고된 향사 조슬린이 용의선상에 오른다. 조슬린은 도망쳐 세인트자일스에 숨는다.
나환자 라자루스의 정체가 많이 궁금했고, 그가 할 역할이 무엇일지 흥미진진했다. 배경이 중세이니만큼 전작들에서도 고딕 분위기가 살짝 풍기긴 했지만 전작에서는 중세 마을 자체의 느낌이 강했는데 이번 작품은 라자루스라는 존재의 신비감과 더불어 추악한 양부모(여기서는 삼촌 부부)와 출생의 비밀 등의 요소가 고딕 소설같은 분위기를 강하게 풍긴다. 하지만 피살자의 마지막 행적을 밝혀내는 결정적 증거가 캐드펠의 전문 분야인 허브라는 점에서는 현대의 과학 수사도 떠오른다. 해피엔딩이기는 한데, 마지막 라자루스의 행적이 마음 아프다. 그러지말지... 이 시리즈는 단순한 추리물 이상으로 천 년 전에도 또 지금도 삶에 대한 고민과 추구해야 할 가치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9. 제 꿈 꾸세요(김멜라. 문학동네. 2022. 344쪽)
: 모두가 들여다보지는 않는 구석진 곳을 잘 볼 줄 아는 작가의 단편집. 표제작이 가장 맘에 들었다. 혼자 죽은 사람에게 다른 사람의 꿈에 들어갈 수 있게 이끌어줄 가이드가 오다니. 사후 세계 따윈 믿지 않지만 고독사가 두려운 1인가구로서 크게 공감했다. 「논리」는 다른 앤솔러지에서 읽었는데 다시 읽으면서 내가 왜 이 작가가 좋아졌는지 다시 한번 느꼈다. 나머지 작품들도 대체로 좋았지만 「코끼리」는 글쎄...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는 알겠으나 작중인물의 행동은, 회피 아닌가.
10. 홀리데이(T. M. 로건, 천화영 역. 아르테. 2022. 620쪽)
: 20년지기인 대학 친구들 가족들과 함께 남부 프랑스로 휴가 여행을 온 케이트. 쉬려고 온 휴가지만 10대 아이들과는 오는 길에서부터 편치 않다. 겨우 도착해서 이 별장을 빌린 로언의 환대 속에 짐을 푸는데, 우연히 보게 된 남편 숀의 핸드폰에 '코럴 걸'이 보낸 의심스러운 문자가 온 것을 발견한다. 케이트는 모르고 있을 거라는, 프랑스에서 얘기하자는 문자. 케이트는 잘 나가는 컨설턴트인 로언, 숀의 예전 애인이었던 미녀 제니퍼, 숀과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던 이지 등 모두를 의심하게 된다.
재밌다. 잘 쓰는 작가다. 근데 초반에 너무 오랫동안 쪼인다. 그래서 살짝 지치기도 한다. 등장인물들도 하나같이 맘에 안 들었다. 케이트의 시점으로만 보아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결말에 이르기까지 모두 조금씩은 비호감 면모를 보이지 않는다. 그 중에서 진짜 빌런도 물론 있고. 결말은 나름 깔끔하지만 그 와중에 죽은 사람과 타버린 숲은 안타깝기 그지없지. 한동안은 이 작가 안 읽을 거 같다.
11. 막 너머에 신이 있다면(김준녕. 허블. 2022. 456쪽)
: 277년 전, 우주에는 지구 외에 생명체가 서식하지 않는다는 게 증명된다. 그리고 우주의 끝에는 투명한 막이 있어서 그 너머를 더이상 탐사할 수 없다. 막은 찢어지거나 부서지지 않으며, 재질을 알아내려 해도 긁히지도 않는다. 막을 탐사하려면 직접 닿을 수 밖에. 전세계적으로 휘몰아친 기근으로 식량은 고갈되고 특히 한반도의 상황은 처참한 가운데, 한반도의 독재자는 어린이들을 선발해서 막으로 보내 직접 탐사를 하기로 결정한다. 처참한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주선에 올라야 한다.
1부와 2부의 화자가 다르고 분위기도 많이 다르다. 이토록 처참한 SF라니. 수많은 디스토피아 소설들을 읽어왔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비참함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저자는 계급 갈등과 그에 따른 불평등, 불합리 그리고 사회 전복 시도를 날것 그대로 그려낸다. 그게 참 슬프면서도 믿고 싶지 않다. 저자의 날카로운 시선이 수상의 큰 이유였을 거라 생각되는데, 결말이 좀 약했다. 마냥 희망적이거나 갑자기 아름다워지기를 바란 건 절대 아니지만, 약간의 여지를 놓아두었어도 괜찮았을텐데. 그래도 흥미롭게 읽었다. 하지만 우린 모두 알지, 그 어디에도 신 따위는 없다는 걸.
12. 내 식탁 위의 개(클로디 윈징게르, 김미정 역. 민음사. 2023. 396쪽)
: 80대의 작가인 소피는 남편 그리그와 3년 전부터 숲 속에서 살고 있다. 추방당한 숲이라는 뜻의 이곳 '부아바니'는 아주 가끔 등산객이 지나갈 뿐인 분지 지형의 조용한 곳이다. 어느 날 아침, 크게 학대당한 모습의 개 한마리가 문 앞에 나타난다. 소피는 개를 집 안으로 들이고 잠시 교감하지만 개는 부엌문으로 달아나 버린다. 일정이 있어 파리에 다녀온 며칠 뒤, 개는 다시 소피의 집에 와 있다. 개에게 '예스'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함께 생활하는 소피와 그리그.
이야기의 시작은 개이지만 저자가 살피는 생명체는 숲 전체를 아우른다. 개와 함께하면 변화하는 생활과 구체화되는 생태 철학. 그리고 당연하게도 젠더 의식도 포함되어 있다. 화자의 조용한 어조와 숲의 분위기가 맘에 들어서 좋았지만 남편 그리그 캐릭터는 좀 별로였다. 그런 삶이 부럽기는 하지만, 같이 살고 싶지는 않아. 마냥 평화로운 일상만은 아니어서 개가 관광객을 위협하거나 관광객에게 위협을 당하는 일도 일어난다. 일방적인 시선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반려동물이 우리 삶에 주는 영향은 큰 것이겠지.
결말은, 내게는 역자가 해석한 대로 해석되지 않았다. 그 문장은 이 소설의 첫머리잖아. 처음으로 돌아왔다는 얘기야.
13. 13. 시간 여행자, 비밀의 문을 열다(앨리슨 어틀리, 김석희 역. 비룡소. 2011. 432쪽)
: 1930년대, 런던에 사는 페넬로피는 건강이 좋지 않아 시골에서의 요양이 필요하게 된다. 엄마의 이모와 외삼촌이 거주하는 새커스의 농장으로 보내진 페넬로피는 남들과는 다르게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낯설다. 우연히 2층의 어느 방문을 열자 그곳에는 옛날 옷을 입은 여인들이 있다. 곧 자신이 4백여 년 전으로 시간 이동을 했음을 알게 되고, 조상과 꼭 닮은 자신의 외모로 금세 이 곳에 받아들여진 페넬로피는 당시가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이 언니 엘리자베스 여왕에 의해 유폐된 당시라는 것과 이곳의 영주였던 앤터니 배빙턴이 메리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려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 이미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는 페넬로피는 앤터니 나리가 안타까운 나머지 뭔가를 말하고 싶기도 하고 말리고도 싶지만 그럴수록 기억은 희미해진다.
페넬로피가 문을 열고 과거로 가는 게 정말 매끄럽게 잘 서술되어 있다. 타임슬립 소설들은 대부분 이벤트를 강하게 부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책은 물론 문을 연다는 이벤트가 있긴 하지만 그외에도 현재에서 페넬로피에게만 들리고 보이는 것들을 자연스럽게 보여줌으로써 읽는 사람도 페넬로피와 함께 그 공간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줬다.
결말 부분이 많이 안타까웠다.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 거겠지. 그렇게 이별하고 그렇게 잊혀지고...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좀더 깊이 이해할 수는 있는 것이다.
14. 어메이징 브루클린(제임스 맥브라이드, 민지현 역. 미래지향. 2022. 500쪽)
: 1960년대 브루클린 커즈하우스 주택단지. 스포츠코트로 불리는 유색인 교회 집사가 술에 취한 채 동네의 유명 조폭이자 마약상인 열아홉 살 딤즈에게 총을 쏴 그의 귀에 상처를 낸다. 동네 사람들은 이제 스포츠코트는 죽은 목숨이라면서 온순한 잡역부이며 성실한 집사였던 그가 왜 그랬는지 수군댄다. 스포츠코트의 아내 헤티는 몇 년 전 한밤중에 익사한 채로 발견됐는데 그 시신을 건져낸 건 이탈리아계 운송업자 엘레판테다.
스릴러라고 생각하고 집어들었으나 그보다는 그저 당시의 삶의 모습들을 그려냈다. 스포츠코트가 주요인물이긴 하지만 파이브엔즈 교회를 중심으로 똘똘 뭉치는 흑인 사회 커뮤니티의 많은 사람들 이야기가 빠지지 않고, 엘레판테와 그에게 갑자기 찾아와 그의 아버지와의 인연을 이야기하는 늙은 거버너가 찾는 비너스 상 이야기를 통해 미스터리적인 요소도 놓치지 않았다. 인종 차별과 계급 의식을 당연히 드러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사는 사람들 끼리의 연대와 서로를 향한 연민과 동정, 포용력도 충분히 보여준다. 읽기 전엔 한국어판 제목이 좀 촌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읽고 나니, 이 제목을 붙인 사람은 확실히 이 책을 읽었구나 싶었다.
15. 우리는 사랑했다(강화길, 키미앤일이 그림. 미메시스. 2018. 88쪽)
: '나'는 죽었지만 그의 곁을 떠날 수 없다. 그는 아직도 슬픔에 젖어 있다. 하지만 새로운 여자를 계속 만난다. 오늘은 나의 기일, 그는 지금 만나고 있는 여자를 집에 초대한다. 오늘 같은 날은 특히 더 힘들다며. 나는 어떻게든 여자를 그의 곁에서 떨어뜨려야 한다.
작은 반전이 있다. 반전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이 작가가 이렇게 평이한 이야기를 쓸 리가 없는데, 라는 생각을 갖고 읽어 나가다 보니 왜 화자가 못 떠나는지, 왜 여자들을 내보내려 하는지가 서서히 드러난다. 약간의 짜릿함과 많은 안타까움을 느끼며 읽었다.
16. 스티븐 킹 단편집- Night Shift(스티븐 킹, 김현우 역. 황금가지. 2003. 576쪽)
: 20편의 단편들. 평소 습관대로 추천사와 서문부터 열심히 읽고 있는데 서문이 너무 지루해서 고민하던 중에 끝부분에 다다랐고, '서문을 읽는 사람은 최측근 뿐'이라는 말에 조금 빡쳐서 책을 던져버릴 뻔 했으나 끝까지 읽었다. 이 작가가 잘 쓰는 작가라는 건 내가 말 안 해도 전세계가 인정하는 거니까 중간중간 지루하거나 평범한 이야기라고 생각되어도 꾹 참으며 읽었는데, 다 읽은 후 역시 이 작가는 나와 맞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17. 달빛수사(연여름. 황금가지. 2023. 448쪽)
: 국내 굴지의 게임 회사 법무팀에 속한 변호사 김선우. 면접 첫날 우연히 도움 받은, 회사 대표가 사랑해 마지 않는 막내딸 백가연의 호출을 받고 나간 자리에서 개인적인 의뢰를 받는다. 중학생 가연의 요청은 싸운 뒤 연락이 두절되고 학교조차 나오지 않는 친구 이하나를 찾아 달라는 것. 의뢰를 거절할 수 없는 김선우는 망설임끝에 전에 같이 일했던 한재은에게 연락을 한다. 함께 법률사무소까지 운영했지만 1년이 넘게 연락을 안 한 상태이고, 그 이유는 재은의 특별한 능력 - 사이코메트리 - 에 대한 선우의 태도 때문이다.
사건의 시작이 대표 딸의 갑질 때문이라는 게 좀 별로이긴 하지만, 김선우와 한재은의 관계성을 따라가는 게 재밌었다. 사실 이건 추리보다는 로맨스에 더 초점이 맞춰진 이야기. 뭔가 심각한 사이코메트리와 미스터리를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 있다. 하지만 나처럼 조금 신박하고 말랑한 코지 미스터리를 기대했다면 재밌게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평범함 이상의 능력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사회의 편견과 은근한 차별도 놓치지는 않는다. 이 작가는 읽을 수록 좋아진다.
18. 그만해 거짓말(필리프 베송, 김유빈 역. 니케북스. 2018. 212쪽)
: 유명 작가인 '나'는 보르도의 한 호텔에서 신간에 관한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기 로비를 지나는 어떤 청년이 눈에 들어오고, 나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청년의 뒤를 쫓는다. 청년을 불러세운 뒤 나의 첫마디는 '아버님을 많이 닮았군'. 23년 전인 1984년, 열일곱 살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가진 토마에게서 눈길을 거둘 수 없다. 일찌감치 성적 정체성을 자각한, 교장 선생님의 아들이면서 이 작은 마을을 떠나 크게 될 아이로 점찍힌 삶을 살던 나는 농부의 아들인 토마가 자신을 알 리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느날 토마는 마을 외곽의 카페로 나를 부른다.
아련한 첫사랑의 추억. 끝이 정해져 있는 사랑이란 그 자체만으로도 아픈데 그 끝이 생각지도 못했던 순간에, 예상보다 너무 빠르게 닥친다면... 하지만 이들의 사랑이 슬픈 건 단순히 끝이 오기 때문만은 아니다. 주위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거짓말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거짓말은 누군가에게는 평생 벗을 수 없는 족쇄이기에.
프랑스판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라는 광고 문구가 있던데 내겐 이 소설이 훨씬 아팠다. 결국 진짜 사랑은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지속되는 것.
19. 배우자의 죽음에 관하여(아밀,김종일. 텍스티. 2024. 272쪽)
: 한 가지 주제로 두 작가가 쓴 단편들. 아밀 작가의 「아름다움에 관한 모든 것」과 김종일 작가의 「해마」이다. 아밀 작가가 더 좋았다. 부유한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연인과 소박한 결혼식을 올린 화자가 우연히 남편이 자신의 못생긴 외모를 폄하하며 자신의 돈을 바라고 결혼했다는 걸 알게된 은진은 화해를 시도하는 그를 밀쳐내고 그는 죽어버린다. 망연자실 길거리를 헤매던 은진에게 어떤 할머니가 다가와 남편을 살려주겠다 하는데... 미스터리와 판타지가 섞여 독자의 흥미를 계속 잡아끌고, 그 와중에 사회의 미의식에 대한 비판과 내면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위선을 비꼰다. 뻔하지만 뻔하지 않은 당의정을 씌워 작가의 주제의식을 명료하게 드러낸 잘 쓴 작품이었다.
김종일 작가의 작품은 머릿속 해마와 바다의 해마, 그리고 작가가 창작해 낸 괴물 해마를 솜씨좋게 뒤섞어 역시 흥미진진한 스릴러를 만들어냈다. 잘 나가는 웹소설 작가인 희영은 1년전 남편과 함께 당한 끔찍한 교통하고 이후 매일밤 악몽을 꾼다. 꿈 속에서 사고는 되풀이되고, 현실과 달리 상대 운전자의 몸이 우리 차의 앞유리를 뚫고 들어오는데, 그때마다 남편은 그에게 잡아먹힌다. 그리고 요즘 남편은 예전과 너무 다르다. 과연 내가 아는 그가 맞는 걸까? 차 사고는 정말 남편이 말하는 대로 상대방만 죽고 우리는 에어백 덕분에 거의 안 다친 채 이렇게 마무리된 걸까?
(약스포)
설정이 기발하고 전개도 빨라 재밌게 읽긴 했지만 사실 반전은 처음부터 예상됐다. 그리고 그 반전대로라면 남편 캐릭터가 너무너무너무 비호감이어서 읽는 동안에도 너무 싫었다. 그냥 결혼 전과 후가 다른 비열한 인간인 거잖아. 이건 아내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는 없는 거지. 암튼 앞으로 아밀 작가의 작품을 좀더 읽어 볼 생각이다.
20. 뜨거운 유월의 바다와 중독자들(이장욱. 현대문학. 2024. 184쪽)
: 기후위기 이후 거의 무정부 상태가 된 이 나라의 끝, 서서히 물에 잠기고 있는 섬의 해변에서 모텔을 운영하던 모수가 죽은 후 연은 혼자서 모텔을 운영하며 한편으로는 모수가 남긴 것들을 수습하는 중이다. 여느때처럼 모텔 옥상으로 담배를 피우러 올라온 연은 장기투숙자 천과 마주친다. 연극배우 출신 천은 아나운서 출신이었던 연인 한나와 이별하고 그 이별을 견디는 중이다.
강한 제목과는 달리 아련하고 희미해져 가는 삶의 이야기였다. 언젠가 오고야 말 종말 때문은 아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걸려 죽어가는 전염병 때문도 아니다. 삶이라는 건, 살아있는 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지리멸렬한 질병같은 게 아닐까. 망망대해에서 홀로 떠다니는 부표처럼, 누군가 잡아채거나 끌어내지 않는 한 계속 떠돌 수 밖에 없는 삶.
21. 로봇 동화(스타니스와프 렘, 정보라 역. 알마. 2023. 360쪽)
: 제목을 보고, 그리고 첫번째 작품을 읽고 나머지를 꽤 기대하며 읽었는데, 절반 정도는 내 취향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SF이며, 단편이지만 세계관이 나름 탄탄하다. 하지만 나처럼 말랑한 SF만 좋아하는 독자에게는 지루할 작품들이 꽤 된다. 물론 진짜로 다시 쓴 동화들도 포함되어 있고, 그런 작품들은 재밌었다.
'로봇을 위한 동화'라는 건 리뷰를 쓰려고 알라딘에 들어갔다가 처음 알았다. 아마 그래서 내 취향이 아니었던게지. 이런 식으로 인간성을 증명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22. 환희의 책(김멜라. 현대문학. 2024. 220쪽)
: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생명체인 우리 육발이들은 인간들을 '두발이엄지'라고 부른다. 우리는 항상, 모든 곳에서 이 두발이엄지들을 관찰하며 기록한다. 누에나방의 후손인 나는 거미, 톡토기, 모기와 함께 '비생식 동거 집단'인 호랑과 버들의 생태를 관찰하여 보고서를 만들고 후대의 교육자료로 쓰고자 한다.
비인간 생명체의 인간 관찰 일지. 그들은 객관적이고자 했으나 인간인 독자는 안타까울 뿐. 버들과 호랑의 행간을 읽으며 그들의 환희를 느껴보려 했으나 슬픔이 더 컸다. 크게 소리쳐 자랑할 수 없는 사랑이란...
23. 오트란토 성(호레이스 월폴, 하태환 역. 황금가지. 2002. 222쪽)
: 오트란토 성의 대공 만프레드는 자신의 유일한 후계자를 어서 결혼시켜 후손을 보고 싶다. 그래서 열다섯 살 어린 아들을 부모가 없지만 유서깊은 공작 가문의 이사벨라와 약혼을 시키고 이사벨라를 오트란토 성에 데려와 머물게 하는데, 혼인날 아들은 거대한 투구에 깔려 죽고 만다. 만프레드는 더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을 거 같은 부인과 이혼을 하고 이사벨라와 결혼을 하고자 하고, 놀란 이사벨라는 성의 비밀통로를 지나 수도원으로 달아나려하는데, 그 과정에서 한 젊은이의 도움을 받는다.
(강스포)
고딕 소설의 효시라고 해서 일부러 보존 서고의 책을 상호대차까지 하며 읽었는데, 내용이 너무 막장이라 웃음이 나왔다. 만프레드가 이사벨라를 탐하는 것도 그렇지만 만프레드에게서 오트란토 성의 지배권을 돌려받으러 온 이사벨라의 아버지 프레데릭 후작이 만프레드의 딸 마틸다에게 반해서 자기 딸을 탐내는 만프레드와 의기투합하는 건 정말이지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차라리 만프레드의 부인에게 반했다면 내가 이해를 하지. 이 무슨 골빈 귀족 늙은이들의 난리 부르스란 말인가.
한편으로는 당대에 이런 일이 꽤나 흔했을 거라는 게 씁쓸했다. 힘없는 어린 여성과 늙고 힘있는 남성의 강요에 의한 매매혼. 만프레드가 딸 마틸다를 홀대하며 정신적 학대에 가까운 폭언을 퍼붓는 것도 당대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아닌가. 대공의 딸도 그런 취급을 받았을진대 하물며 더 낮은 계급의 여성들을 어떠했겠나. 그러다가 만프레드가 마틸다의 죽음으로 정신을 차리는 것도 웃겼다. 이렇게 한 방에 개과천선한다고? 말이 되? 그냥 자식 없는 지 팔자가 서러웠던 게지. 그리고 이런 정도에서 그치는 걸로 마무리되는 것도 별로였다. 만프레드가 멀쩡히 살아 있어?!
암튼, 여러모로 찝찝한 소설이었다. 게다가 번역마저...
24. 정성다함 생기부 수정단(설재인. 이지북. 2024. 228쪽)
: 가까운 미래, 전국민은 서로의 생활기록부를 열람할 수 있게 된다. 워낙 여기저기서 발생한 인성논란 때문. 셀럽들의 경우만 생각하며 찬성했던 국민들은 곧 회사에 취직을 못하거나 파혼을 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당황한다. 한편 쌍둥이 성다함과 성다정은 아버지와 셋이서만 사는데, 엄청난 천재였지만 모종의 이유로 재야에 파묻힐 수 밖에 없게 된 아버지는 머리 좋은 쌍둥이들에게 늘 튀지 말고 있는듯 없는듯 살아가도록 가르친다. 하지만 다정은 못 참고 수학 시험에서 백점을 맞아 버리고, 갑자기 아버지는 쓰러져 혼수상태가 된다. 병원비가 필요한 남매는 과거에 개발했던 타임머신을 이용해 과거로 돌아가 사람들의 생기부를 고쳐주는 일을 하기로 한다.
잘 짜여진 플롯과 빠른 스토리 전개, 내용의 적당한 무게감, 캐릭터의 뚜렷한 개성 등 뭐하나 빠지지 않는 좋은 소설이다(약간의 과장은 있을 수 있지만, 소설이니까). 주위에 청소년이 있으면 권해 주고 싶을 정도. 아, 물론 어른들에게도 추천한다. 과거의 내가 했던 작은 행동과 결정이 미래의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지 일일이 생각하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래도 조금은 나의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였다.
25. 첫사랑의 침공(권혁일. 안전가옥. 2024. 228쪽)
: SF 로맨스 단편집. 네 편 다 좋았다. 표제작이 처음 실려있는데, 소재가 기발하면서도 질질 끌지 않아서 좋았다. 다만 결말은... 님아, 그 돌 던져버리지 마오. 그게 있어야 네가 살아. 뻔하지만 아름답고 이상적이었던 「세상 모든 노랑」과 「하와이안 오징어 볶음」도 재밌고 좋았지만 난 「광화문 삼거리에서 북극을 가려면」이 가장 슬프면서도 좋았다. 우주에서 단 하나의 존재만큼은 날 사랑해 줄 거라는 그 믿음은, 종교가 아닌가. 그 믿음 하나만으로도 세상은 견딜만 한 곳이 되는 것. 비록 다시 만날 수 있는 확률이 0에 가깝다고는 해도, 0은 아니니까.
26. 밤이 영원할 것처럼(서유미. 문학동네. 2024. 244쪽)
: 오랜만에 읽는 이 작가의 단편집. 믿고 읽는 작가라서 맘 편하게 집어들었고 역시나 기대가 충족됐다. 사실 그 이상이었다. 작가의 연륜이 점점 깊어지는 느낌. 모든 작품들이 다 좋았고, 다 밤처럼 고요했으며 그 정중동의 시간 속에서도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휴식이 있었다. 비록 내게 일어난 일 때문에 뒤늦은 눈물이 터질 지라도.
삶이야 늘 예측불허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야 하는 것이지만, 우리에겐 쉴 수 있는 밤이 있어 그래도 내일 아침의 태양을 맞이할 수 있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