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학기 한정 도서부(연여름. 위즈덤하우스. 2023. 120쪽)

: 어쩌다보니 1년을 쉬게 된 중학생 도하. 적응하기 힘든 학교 생활에서 도서관은 유일한 도피처다. 비록 이런저런 고전을 강제로 대출하게 하는 사서 선생님은 좀 불편하지만. 반납 기한을 넘긴 연체 도서에 대해 사서 선생님은 도서관에서 봉사를 하라고 하고, 2학기만 하기로 한 도하에게 도서관에 머무는 특별한 존재가 보인다.


짧은 게 아쉬울 만큼 재밌었다. 이런 한풀이((?) 스토리는 꽤 흔한 편이고, 주요 사건 자체는 좀 작위적이고 이야기의 진실은 시시할 수도 있다고 생각되지만 도서관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이 좋았다. 빌런이 없는 것도.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봐야겠다.



2. 밸런타인(엘리자베스 웨트모어, 허진 역. 시공사, 2022. 416쪽)

: 1976년 밸런타인데이, 라틴계 15살 소녀 글로리아가 백인 데일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글로리아는 데일이 잠든 사이에 도망쳐 가장 가까운 농장 주택으로 가서 도움을 청하고, 메리 로즈는 그 소녀를 도와준다. 하지만 곧 뒤쫓아 온 데일은 메리와 아이를 협박하고 메리의 남편 또한 법정에서 증언을 하기로 한 메리를 타박한다.


이 책에는 여러 여성들이 나온다. 모두 저마다의 아픔이 있다. 하지만 또한 저마다의 용기를 가지고 삶을 꾸려나간다. 육아보다는 경력을 택한 교사 출신 코린. 자력구제를 한 칼라, 어리고 자신 또한 많은 게 부족하지만 어려운 사람을 도운 데브라 앤, 비록 인종적인 편견을 갖고 있지만 자신의 삶에서는 최선을 다한 수잰, 그리고 모든 협박과 사람들의 냉대에도 불구하고 해야 할 일을 한 메리 로즈와 모든 걸 극복하고 나아갈 글로리.


역시나 읽기 쉽지는 않았다. 특히 법정신은 열이 확 올랐다. 역자도 말했듯 50년 가까이 지났지만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도대체 정의는 언제 실현되는가? 그나마 작은 희망은 여성들의 연대 뿐. 



3. 구미호 식당(박현숙. 특별한서재, 2018. 248쪽)

: 중학생 도영은 갑자기 저승길에 오른다. 망각의 강을 건너기 직전, 서호라는 존재와 맞닥뜨리는데, 서호는 식지 않은 피 한모금을 자신에게 넘기면 산 사람의 세계로 돌아가서 49일을 더 있을 수 있게 해주겠다 한다. 도영은 생에 별 미련은 없지만 길동무였던 40대 아저씨가 계속 함께하자고 졸라 그렇게 하기로 하고 돌아오는데, 아저씨가 자신이 셰프였다며 식당을 하자고 한다. 꼭 찾아야 할 사람이 있다면서.


누군가 오해한 채 죽었다면 그건 오해를 하게 한 사람들 잘못일까? 도영과 이민석은 이 문제에 관해 정반대의 입장이다. 이민석은 살아 생전 이해할 수 있었으나 귀막고 고객 돌렸고 도영의 할머니와 형은 보여줄 수 있었으나 그럴 맘이 없었다. 죽은 사람만 불쌍하진 않다. 이민석의 경우엔 산 사람이 불쌍하고, 도영은 글쎄. 난 도영에게 주어진 49일이 과연 좋은 거였나 싶다. 처음 도영이 심상하게 죽음을 받아들인 채로 가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 형과 할머니의 뒤늦은 후회나 친구 수찬의 죄책감을 몰랐다면 오히려 세상에 미련이 없어서 더 나았을 텐데. 물론 작가는 정석대로 도영과 가족의 화해를 그리고 싶었겠지만. 근데 그건 너무 전형적이지.


여러 생각을 하며 읽기는 했지만 이 시리즈를 다 읽을 필요는 없을 거 같다. 그래도 만족스러운 독서였다. 



4. 북호텔(외젠 다비, 원윤수 역. 민음사. 2009. 232쪽)

: 르쿠브뢰르 가족은 고만고만한 살림살이를 펴보고자 처남에게 돈을 빌려 생마르탱 운하 제마프 둑길 옆 낡은 호텔을 사들인다. 호텔에는 가난한 파리 노동자들이 세들어 살고 있다. 


마차꾼, 수문지기, 여공 등... 이들의 삶을 저자는 담담하게 때로는 건조하게 보여준다. 병에 걸려 요양원으로 실려가든, 동거남에게 버림받고 성노동자로 전락하든 혹은 아이를 잃든 그저 그들의 상황을 이야기해 줄 뿐. 이런 담담한 어조때문에 차분히 읽어나갈 수 있었다. 당대의 어쩌면 흔한 삶의 모습이었겠지. 백여 년 전의 하층민의 삶이 낯설지만은 않다. 



5. 두 늙은 여자(벨마 윌리스, 김남주 역. 이봄. 2018. 176쪽)

: 오래전, 추위가 한창인 한겨울, 알래스카의 그위친 족의 족장은 고심끝에 부족 내 가장 나이가 많은 두 노인을 지금 이 벌판에 남겨두고 떠나기로 한다. 언제나 불평을 늘어놓으며 가장 먼저 음식을 먹던 칙디야크(박새)와 사(별)는 가죽끈 한 뭉텅이와 털옷만은 가진 채 눈덮힌 벌판에 남겨지고, 그냥 잠에 들어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지만 곧 그러지 않기로 한다.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눈신을 만드는 것.


아침마다 몸을 일으키기 힘들 정도로 온몸이 쑤시고 결리지만 이들은 해야할 일을 알고 있었고 그 일을 해낸다. 둘이 합쳐 150년이 넘는 시간을 허투루 보낸 게 아니다. 몸에 밴 행동들 뿐 아니라 오래 전의 기억도 도움이 된다. 비록 부족은 그들의 효용성을 무시했지만, 그들은 스스로를 구원했다. 결말 부분도 좋았다. 흔히 생각하듯, 할머니라서, 노인이라서 모든 것을 그냥 포용하고 용서해 주는 게 아니라 정신 딱 차리고 챙길 것은 확실히 챙겨서. 이렇게 똑똑하게 늙을 수 있을까.



6.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정보라. 퍼플레인. 2023. 419쪽)

: 작가의 초기 단편 10선. 표제작이 가장 맘에 들었지만 제일 끔찍하게 인상 깊었던 건 「감염」. 「그림자 아래」는 많이 슬펐다. 그 다음 작품 「타인의 친절」을 읽으며 왜 「그림자 아래」가 더 슬플까 생각해 보았는데 아마 내겐 아이의 죽음보다는 나의 죽음이 더 슬픈가보다. 「타인의 친절」의 선미씨는 밀어내긴 했지만 사장님도 있고 사장님이 다시 다가오거나 선미씨가 갈 수도 있지만 「그림자 아래」의 '나'는 전화하고 싶어도 할 수 없으니까. 우린 모두 알고 있다. '나'가 깨어나지 못할 것임을. 내게 남은 온기는 목을 졸렸던 그것이 마지막임을. 


슬프고 끔찍했지만 작가의 필력에 새삼 감탄하기도 했다. 역시 잘 벼린 칼날처럼 번득인다. 이런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나오는지. 이 작가가 아주아주 다작을 해줬으면 좋겠다.



7. 통조림공장 골목(존 스타인벡, 정영목 역. 문학동네. 2008. 272쪽)

: 캐너리 로(Cannery row)의 중국계 식료품점 사장 리청이 외상값 대신 받은 어분 창고에 부랑아 다섯이 세를 든다. 맥, 에디, 헤이즐, 휴, 존스. 이들은 근방의 해양생물한 연구소를 운영하는 닥에게 뭔가를 해주고자 한다. 닥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골목 모두에게 도움이 되고 있고 모두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맥 패거리도 닥에게서 생물 수집 의뢰를 종종 받아 용돈을 벌곤 한다.


이제껏 읽은 이 작가의 작품들 중 가장 서정적이다. 이유는 닥 때문에. 그레고리안 성가를 즐겨 듣고 리청에게 이백의 시를 읽어주고 연구소를 늘 열어두고 다니며 사람을 용서할 줄 아는 닥. 


닥은 아무리 허무맹랑한 소리라도 귀 기울여 듣고는 그것을 어떤 지혜로 바꾸어 주었다. 그의 정신에는 한계가 없었고, 그의 공감에는 비꼼이 없었다. (중략) 그를 아는 모두가 그에게 빚을 지고 있었다. 그가 머릿속에 떠오르면 모두 이런 생각을 했다. "정말이지 닥에게 뭔가 좋은 일을 좀 해줘야 하는데."(42 - 43쪽)


닥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달콤한 목요일』도 얼른 읽어보고 싶어졌다. 어릴 때 이 작가를 읽고 나서는 괜히 부담스러웠는데 그 부담감을 싹 씻어준 작품이다. 



8. 네버 노잉(체비 스티븐스, 노지양 역. RHK.2014. 504쪽)

: 목재 가구 복원 일을 하는 세라. 입양아이자 싱글맘인 그녀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안정적인 남자 에번을 만나 결혼을 결심하고, 오랫동안 궁금했던 친부모를 찾아보기로 한다. 겨우 찾은 친모는 멀지 않은 곳에 살지만 눈에 띄게 그녀를 피하고, 세라는 친모가 30여년 전 악명 높은 연쇄살인자에게서 도망친 유일한 생존자라는 것과 그 살인자가 자신의 친부라는 걸 알게 된다. 그런데 이 사실이 언론에 새어나가고, 오랫동안 살인마를 쫓던 형사들이 협조를 요청한다.


불쌍한 세라. 긁어부스럼 만드는 사람들 안 좋아하지만 세라는 그냥 친부모를 찾고 싶었을 뿐인데. 하지만 생모가 거부했을 때 그만뒀어야지. 세라는 생부에게 말리지 않게 온힘을 다했지만 이걸 읽고 있는 내가 그에게 휘둘리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작가는 상황에 따라 꼬여만 가는 심리묘사에 탁월한 솜씨를 보여준다. 게다가 노골적으로 친딸들과 차별대우하는 양부와 정반대로 친절함을 넘어 따뜻하기까지 한 생부라니. 잘 쓴 소설이지만 읽으면서 너무 스트레스를 받았다. 읽는 내내 너무 열받아서 끊은지 6년된 술이 너무 땡겼다(마시진 않았다). 모든 캐릭터가 짜증났다. 범죄 소설 읽으면서 그 끔찍함이나 압박감에 시달린 게 처음은 아니지만 이 책이 단연코 1등인 거 같다. 이 작가를 다시 읽기까지는 오래 걸릴 것이다.



9. 지구에서의 내 삶은 형편없었다(임승훈. 문학동네. 2019. 432쪽)

: 이렇게 재미없는 소설은 진짜 오랜만. 작가의 자의식 과잉. 별점이 높은 게 정말 이상했다. 나와만 맞지 않는 걸까. 



10. 미드나잇 칠드런(단 거마인하트, 이나경 역. 다산책방. 2023. 388쪽)

: 여름방학, 열세 살 소년 라바니는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 창밖을 내다본다. 비어있던 옆집 앞에 트럭이 주차하더니 다양한 연령대의 7명의 아이들이 내려서 차례로 집 안으로 들어간다. 라비니는 또래 소녀를 보며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한다. 


아무 정보도 없이 집어들었는데 재밌게 읽었다. 청소년들에게 읽히려면 약간의 가이드가 필요하긴 하겠지만, 이건 기본적으로 성장 소설이고 우정과 모험에 관한 멋진 이야기이다. 다만 빌런이 제대로 벌받지 않은 게 약간 아쉬웠다.



11. 서로의 계절에 잠시(천선란, 정보라 외. 큐큐. 2023. 204쪽)

: 퀴어 문학 시리즈. 차별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정보라는 예상 외로 딱딱했지만 작가 자신이 언젠가는 꼭 써야 했을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긴 생각을 하게 했다. 하지만 제일 인상깊었던 작품은 천선란. 



12. 티처(서맨사 다우닝, 신선해 역. 황금시간. 2024. 504쪽)

: 미 동부 명문 사립학교 벨몬트 아카데미. 극성스러운 상류층 부모 밑에서 자만심을 끊임없이 주입받으며 자란 엘리트주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역시 자부심으로 꽉 찬 교사들. 이 중 영어 교사인 테디 크러처는 주위 선생들 모두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혼자서 견제하고 경쟁한다. 얼마전 아내도 떠나고, 학교 생활이 전부이게 된 테디는 건방진 학생들과 자신을 무시하는 선생들을 조종하기 위해 '실험'에 들어가고 자신의 실험이 성공하자 적극적으로 이를 활용한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사고가 일어나고 테디는 이를 바로잡고자 하는데...


확실히 테디는 꼬였다. 하지만 이해가 전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그나마 학생들을 위하는 마음이 있다는 게 독자에게 일말의 희망을 주기는 하지만, 결말은 필연적으로 파국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부차적 피해가 생각보다 많이 발생한 게 안타까울 뿐. 이건 사망자들 뿐 아니라 자신의 손으로 결말지은 그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작가의 전작이 내 타입이 아니어서 좀 망설였는데, 재밌게 읽었다.



13. 알래스카 한의원(이소영. 사계절. 2023. 304쪽)

: 사진 리터치를 업으로 삼고 있는 이지는 9개월 전 작은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로 오른 팔 전체에 통증이 점점 심해진다. 손톱도 못 깎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어느 병원을 찾아 검사를 받아봐도 특별한 이상은 없다. '복합통증증후군'이라는 병명을 받긴 했으나 치료는 요원하고, 결국 일자리마저 잃게 된다. 답답한 마음에 찾은 환우모임에서 인형 탈을 쓴 소녀로부터 알래스카 한의원에서 완치를 한 사례가 적힌 논문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들었는데 전혀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마냥 심각한 이야기도 아니다. 처음에는 이지의 행보가 간절함보다는 치기어린 행동으로 보이지만 알래스카 한의원의 치료는 이지를 다독이며 독자의 마음 또한 쓰다듬는다. 책 속에서는 깊고 어두운 진실을 깨닫고 그 트라우마의 근원까지 해치우지만 사실 정말 중요한 건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나 자신을 잘 돌보는 것. 현실에서는 알래스카 한의원이 없으니 내가 나 자신에게 해주는 수 밖에. 뜻밖의 힐링을 선물받은 기분이었다.



14. 크리스마스 잉어(비키 바움, 박광자 역. 휴머니스트. 2023. 180쪽)

: 단편 4편. 4편 모두 초반을 읽으면 뒷이야기는 어느정도 짐작이 가능하다. 하지만 저자의 문장력은 단순히 작품의 내용만으로는 줄 수 없는 기쁨을 주었다. 또한 이 작품들을 통해 당대 오스트리아의 사회 분위기와 중산층 혹은 하층민들의 생활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것도 새로웠다. 


사실 내 마음을 가장 울린 건 등장인물들. 표제작의 경우 각 인물들이 지닌 아이러니함에 더 주목하였으나 「길」의 친칸 부인과 「굶주림」의 가브릴로프스키는 가난이 여성을 어떻게 억누르는지, 여성의 삶이 얼만큼 피폐해지는지를 보여주어 마음이 아팠고, 「백화점의 야페」는 그의 어리석음이 안타까웠다. 그리고 이 작품의 결말에서는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리고 그 비극성에도 불구하고 꽤 세련됨이 느껴졌다. 좋은 작품들이다. 



15. 이 안에 당신의 수명이 들어 있습니다(니키 얼릭, 정지현 역. 생각정거장. 2023. 496쪽)

: 평범한 이른 봄날, 만 22세 이상의 전세계 모든 사람들의 현관에 작은 상자가 놓인다. '이 안에 당신의 수명이 들어 있습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이름이 적혀 있고, 그 안에는 수명을 나타내는 은색 끈이 들어 있다. 이 상자를 받은 후 전세계는 혼란에 휩싸인다. 끈의 길이를 서로 비교해 보고 곧 구체적인 남은 수명이 계산되며, 짧은 끈을 받은 사람들을 위한 모임이 생겨나고 뒤이어 짧은 끈을 받은 사람들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하기 시작한다. 


이 작품에서는 나름 다양한 상황과 직업을 가진 8명의 이야기를 보여주기는 하는데, 너무 단순화한 것 같은 생각도 든다. 모든 사람이 긴 끈을 바라는 것도 아닐텐데. 게다가 책에서는 잠깐 언급만 하고 지나가는데, 유병장수의 괴로움은 왜 아무도 생각 안 하지? 병상에 누워서 꼼짝도 못하면서 20년을 더 살게 되면 어쩌려고? 


나라면 열어봤을까? 아마도. 짧은 끈이라면 차라리 감사했을지도 모르겠다. 소설에서는 끈을 수용하는 게 거의 10년은 지나야만 된다고, 끈에 감사하는 사람도 생겼다(477쪽)고 하는데 현실이라면 오히려 10년까지는 안 걸렸을 것 같다. 적어도 동양에서는. 작가는 번득이는 아이디어와 함께 인생의 어떤 변수라도 차별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나아가 성악설을) 경고하고 싶었던 거 같은데 말했듯 너무 단순화한 세계관이 아쉬웠다. 



16. 돈 키호테, 부딪혔다, 날았다(서영은. 비채. 2013. 475쪽)

: 부제 '라만차 돈 키호테의 길' 그대로 저자가 돈 키호테의 길을 여행하며 그 생각을 풀어낸다. 저자 자신이 신앙심이 깊은 것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돈 키호테를 '정신나간 모험가'로 보기보다는 순례자로 보고 그의 영성에 주목한다. 동행한 편집자가 말했듯 소설 『돈 키호테』를 '재미있는 신앙 지침서(406쪽)'로 보며 이 텍스트를 기본으로 성지를 순례하듯 길을 간다. 사진이 많아서 금방 읽을 거라고, 편하게 풍광이나 구경하듯 읽으면 될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며 내 마음까지 살피느라 페이지를 넘기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게다가 돈 키호테를 읽은지 너무 오래됐어. 언젠간 완역본으로 읽으려고 사두긴 했지만... 


어쨌든 좋았다. 이 작가의 글을 원래도 좋아하지만 점점 더 원숙해지는 저자의 이러한 순례가 계속되기를, 그래서 이런 에세이를 계속 써주기를 바란다. 



17. 스웨덴 장화(헤닝 만켈, 이수연 역. 뮤진트리. 2018. 628쪽)

: 전작 『이탈리아 장화』의 후속작이긴 하나 이 책만으로도 충분히 좋다. 다도해의 물려받은 섬에 홀로 사는 불명예 퇴직한 의사 프레드리크. 겨울이 시작되는 어느날 밤 잠에서 깨어보니 집이 불타고 있다. 집은 토대까지 다 타버리고 맨몸으로 달려나온 그에게 남은 건 잠옷과 짝짝이 장화 뿐. 당장의 불편함에 신발 가게로 가지만 죄다 중국산이고 그나마 치수 맞는 것도 없어서 스웨덴산 장화를 주문해 놓는다. 


모성애도 그렇지만, 내게 부성애는 정말 어렵다. 사실 내게는 프레드리크 자신이 가장 어려웠다. 전작에서 만나게 된 딸 루이제와의 이야기가 큰 줄기를 이루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프레드리크의 인생 이야기이다. 말하기도 전에 자신에게 옷가지와 장화를 가져다준 얀손을 비롯한 이웃들과의 관계는 미묘하고, 노년이지만 이성적인 뭔가를 기대하는 여기자 리사 모딘과는 불투명하고, 뒤늦게 알게 된 딸과의 관계는 어렵고. 그 와중에 자신을 방화범으로 의심하는 당국과 보험사는 짜증나는데 나중에 알게된 진범은...  읽으면서는 프레드리크에게 어떻게든 공감을 해보려 애썼지만 역시나 그건 무리였고. 다만 진범에 대해서는 연민이 솟았다. 


작가에게 프레드리크의 마지막까지 써달라고 조르고 싶은 마음이지만...



18. 뒷모습(미셸 투르니에, 에두아르 부바 사진, 김화영 역. 현대문학. 2002. 98쪽)

: 뒷모습 사진을 본 투르니에의 글들. 이 저자의 글을 좋아하지만 이 책을 읽을 당시의 내 상태가 좀 안 좋았어서, 공감을 크게 못하면서 읽었다. 다만 뒷모습도 글도 각각은 아름다웠다. 내가 공감을 못한 건 사진과 글이 잘 매치가 안 된다고 느낀 거. 물론 내 짧은 생각 탓이다.



19. 겨울을 지나가다(조해진. 작가정신. 2023. 140쪽)

: 엄마의 암 간병을 했던 정연은 엄마의 장례식 후 엄마의 집에 그대로 머물며 겨울을 난다. 엄마가 들인 마지막 식구를 챙기고 엄마의 옷을 입고 집을 돌보며, 엄마의 이웃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이 힘들까봐 지레 겁먹고 읽기 시작했는데 시나브로 나아지는 정연의 마음을 따라가며 나도 괜찮아졌다. 정연이 괜찮아질 수 있었던 건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기 때문이고 정연 자신이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며 이 모든 건 엄마가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목수 영준의 존재가 조금 아쉽긴 하지만 - 없이도 봄을 맞이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사실 가장 아쉬운 건 김혼비의 추천사를 앞에 배치한 거. 스포일러 있다. 물론 스포일러에 휘둘릴 작품은 아니지만, 그건 나처럼 작가에 대한 애정이 굳건해야 가능한 거지, 처음 읽는 사람이라면... 



20. 다라야의 지하 비밀 도서관(델핀 미누이, 임영신 역. 더숲. 2018. 244쪽)

: 시리아 내전의 한가운데에 있는 다라야. 저자는 2015년 우연히 다라야에 있는 지하 비밀 도서관의 존재를 알게 되고, 어렵사리 도서관 운영자인 아흐마드에게 연락을 한다. 스카이프를 통해 이루어진 수차례의 인터뷰를 통해 저자는 현재 다라야의 상황과 폐허 속에서 건져낸 책들로 도서관을 시작하게 된 계기, 그리고 도서관이 현재 다라야의 고립된 젊은이들에게 어떤 희망을 주고 있는지를 들을 수 있었다.


고백하자면, 시리아 내전에 관해서는 대략적인 거 밖에 몰랐고 그나마도 자세히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2대에 걸친 독재에 맞서는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가 다라야라는 것도 사실 이 책을 읽으며 처음 알았다. 난 그냥 봉쇄된 도시에서의 도서관 운영이 궁금했을 뿐이지만 이 책을 통해서 책이 주는 의미, 독서의 힘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것을 선택하고 해야할 일을 해내는 힘을 볼 수 있었다. 



21. 오전 9시에서 10시 30분 사이(이브 그르베, 김주경 역. 씨드북. 2021. 248쪽)

: 시작은 국어 과제였다. 모두 시내로 나가서 한시간 반 동안 작가가 되어 자신이 관찰하고 생각한 걸 써보라는 숙제. 에르완의 반 전체는 오전 9시에서 10시 30분 사이에 시내 곳곳에 머물렀고, 그 사이에 법무사가 살해되어 자신의 차 뒷자리에 실린 채 강가에서 발견되었다. 에르완은 반 친구들의 에세이에 단서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과제물들을 모으는데, 카상드라가 합류한다.


형식은 추리 소설이지만 내용은 풋풋한 우정과 사랑 얘기. 물론 추리 부분도 약하지는 않다. 균형이 잘 잡힌 이야기. 그 와중에 사회 계층 차이와 인간의 탐욕에 대해서도 건드린다. 흥미와 교훈 둘 다 만족시키는 좋은 청소년 소설.



22. 그러나 누군가는 더 검은 밤을 원한다(우다영. 문학과지성사. 2023. 344쪽)

: 믿고 읽는 작가. 첫번째 작품「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를 읽으며 많이 울었다. 나를 가장 상처주는 건 나 자신이라는 생각에. 내가 만약 트윈으로 분리되어 오랜 시간 떨어져 있다가 다시 만난다면 나의 알파 혹은 오메가가 어떤 말로 날 평가하고 비판할 지 너무 명확했다. 


그 뒤로 이어지는 작품들 모두 좋았다(표제작 빼고. 표제작은 지루했다). 다만 딱 떨어지는 결말이 아니어서 조금 아쉽긴 했다. 물론 작가는 이야기의 결론을 내주기보다는 독자가 더 오래 생각하길 바랐을 테지만. 이 작가를 아주 오래 좋아할 거 같다.



23. 우리의 베스트셀러(엘자 드베르누아, 김주경 역. 바람의아이들. 2022. 224쪽)

: 클레망스와 알리시아는 둘도 없는 단짝이다. 둘은 늘 클레망스의 집에서 소설가가 되기 위한 습작에 몰두한다. 하지만 사실 클레망스에게 글쓰기는 너무 부담스럽다. 다만 알리시아가 좋아하니까 함께할 뿐. 클레망스의 휴가 여행 때문에 떨어져 있는 동안 각자 습작을 한편씩 해보기로 했던 여름 방학이 끝나고 클레망스의 집으로 달려온 알리시아는 방학 동안 아빠의 타임 머신을 타고 2년 후의 미래로 가서 또래인 10대 소녀가 쓴 베스트셀러를 복사해 왔다고 하고 원고를 클레망스에게 보여준다.


두 소녀의 우정 이야기이고, 갈등이 있을지언정 잘 봉합하고 화해할 줄은 알았다. 이렇게 흐지부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묻어버릴 줄은 몰랐지. 권선징악 따윈 없다. 사이다도 없다. 착해빠진 피해자의 권리는 아무도 구제해 주지 않는다. 10대의 심리묘사는 현실적이지만 분량 때문인지 급하게 마무리한 것도 별로. 클레망스가 퍽이나 좋은 어른이 되겠다.



24. 뒤마 요리사전(알렉상드르 뒤마, 홍문우 역. 봄아필. 2014. 452쪽)

: 뒤마의 마지막 저서. 미식의 역사를 간략하게 소개한 후 이 책을 집필하게 된 계기를 얘기하는데, 마음이 아팠다. 자세하진 않지만 성공한 저자를 시기한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음해당한 듯. 저자의 전기를 읽어보고 싶어졌다. 


Abaisse(밀대로 얇게 민 제빵용 밀가루 반죽)부터 Zeste(감귤류의 겉껍질)까지, 당대의 식재료들 뿐 아니라 화상(190쪽), 냄비(205쪽) 등 요리와 관련된 항목들을 죽 망라한다. 당대의 식재료들이 특히 흥미롭기는 했다. 미식가이자 요섹남답게, 음식에 관한 한 편견따윈 없어서 식재료에 개, 캥거루, 개구리, 공작새 등도 편안하게 언급하고 당시의 분위기도 전한다. 사실 저자의 개인적인 에피소드들이 가장 재밌었다. 특히 멜론 연금(206쪽) 같은 거. 



25. 굿 드라이버(강지영. Story.B. 2023. 376쪽)

: 꽤 주목받는 소설가이자 대학 강사인 수현. 몇 년 동안 제대로 소설은 못 쓰고 있고, 사실은 머릿속에 언제 터질 지 모르는 뇌동맥류가 있다. 몇 년 전 실종된 아꼈던 제자 안다정을 찾으러 전국의 시체 안치소를 뒤지던 어느 날, 한 수녀님이 자신에게는 더이상 필요 없다며 푸른사향노루 향낭을 건네고, 그 뒤로 수현에게는 죽은 사람들이 보인다.


그냥 죽은 자들을 위한 택시 기사 노릇하는 가벼운 얘기일 줄 알았는데 오랜만에 저자가 각잡고 앉아서 제대로 실력발휘를 했다. 물론 강지영이야 늘 재밌지. 하지만 내 기준으로 저자가 그냥 가볍게 힘빼고 해주는 이야기와 정자세로 앉아서 해주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 이야기는 후자다. 인간의 끝없는 욕심과 악의 침투성, 옳은 선택과 악의 없는 영혼들, 그리고 연대. 읽으면서 내내 내가 이 상황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 옳은 선택을 할 수 있었을지, 선함을 믿고 버틸 수 있을지 생각했다. 난 책 속의 지민처럼 좋은 언니도, 다정처럼 좋은 제자이자 순수한 영혼도 되어주지 못하기에. 



26.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정보라. 래빗홀. 2024. 268쪽)

: 연작 SF 소설집. 문어 외계인을 비롯해서 각종 말하는 해양 생물체들이 등장하는데, 이거 어쩌면 스포일러일 수도 있겠지만, 진짜 주인공은 '나'도 '구 위원장님 현 남편'도 아닌 검은 덩어리다. 모든 작품에 등장한다. 


저자의 소설답게 해양 생물체를 내세워서 환경과 인간다움, 교육의 질과 공공성, 비정규직의 현실, 인권 문제 등을 이야기하고, 우리는 절대 항복해서는 안 될 것임을 역설한다(누구한테?). 저자의 촌철살인은 여전하다.



27. 죽음에도 지혜가 필요하다(헨리 마시, 이현주 역. 더퀘스트. 2023. 240쪽)

: 신경외과 의사였던 저자가 전립선암을 진단받고 쓴 에세이. 항상 의사와 환자를 분리하여 생각해왔고 환자가 될 일은 없을 거라 믿으며 최선을 다해 환자를 치료해 온 저자가 환자가 되어서 겪는 영국 의료의 현실과 투병 생활, 죽음에의 자세 등이 섬세하게 그려진다.


딱딱하지 않으면서 진지하고 슬프지만은 않지만 숙연하다. 그러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다. 특히 방사선 치료를 위해 직장에 24k 위치표지자 3개를 삽입하고 난 후 입속의 금니 3개를 떠올리며 "소화기관의 시작과 끝에 모두 금이 있다는 사실을 자랑해야겠다고 생각(187쪽)"했다는 데에서는 빵 터졌다. 이 책을 통해 죽음 뿐 아니라 노화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막연하게야 알고 있었고 일부 증상은 내게도 벌써 나타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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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도 지혜가 필요하다 - 노화와 질병 사이에서 품격을 지키는 법
헨리 마시 지음, 이현주 옮김 / 더퀘스트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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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하지 않으면서 진지하고 슬프지만은 않지만 숙연하다. 그러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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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 정보라 연작소설집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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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소설답게 해양 생물체를 내세워서 환경과 인간다움, 교육의 질과 공공성, 비정규직의 현실, 인권 문제 등을 이야기하고, 우리는 절대 항복해서는 안 될 것임을 역설한다(누구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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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드라이버
강지영 지음 / STORY.B(스토리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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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끝없는 욕심과 악의 침투성, 옳은 선택과 악의 없는 영혼들, 그리고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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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누군가는 더 검은 밤을 원한다
우다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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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작품「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를 읽으며 많이 울었다. 나를 가장 상처주는 건 나 자신이라는 생각에. 내가 만약 트윈으로 분리되어 오랜 시간 떨어져 있다가 다시 만난다면 나의 알파 혹은 오메가가 어떤 말로 날 평가하고 비판할 지 너무 명확했다....

이 작가를 아주 오래 좋아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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