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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뜨겁게
배지영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10월
평점 :
품절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불안감도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던 일곱 살 때였다고 말하는 스물아홉의 제이. 그녀는 문학을 전공했고, 학원에서 국어 강사를 하다가, 지금은 잡지사의 비정규직 기자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 일곱살 때가 가장 행복했던 때라고 밝혔듯, 그녀는 인생 전반에 많은 굴곡을 겪었고, 현재도 겪으면 살아가고 있지요. 그녀가 겪었던 특히 큰 굴곡은 아무래도 남자친구와의 이별과 아빠와의 이별이었습니다.
선배가 개업한 학원에서 선배에게 이용당하면서 일하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동료 강사들에겐 원장의 친구라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던 제이에게 다가와줬던 그녀의 남자친구는 후에 본인이 원하던 대로 건축회사에 취업하게 되고 바빠진 생활덕에 제이와의 사이는 조금 데면데면하게 됩니다. 그런 관계 개선을 위해 떠났던 겨울 산행에서 그녀의 남자친구는 갑자기 사라지고 맙니다.
제이의 아버지는 성실한 시계 수리공이었습니다. 아이엠에프와 시대의 흐름을 타고 결국 일하던 백화점에서 퇴직을 당한 아버지는 부당해고에 대해 시위를 하다가 쓰러집니다. 병명은 폐암이었고, 수술 하루를 앞두고 사라집니다.
남자친구와의 이별도, 아버지와 이별에서 제이는 상처를 받습니다. 그 상처가 무서워서 제대로 이별도, 이젠 사랑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심지어 이명까지 생겨 난청이기까지 합니다. 그런 그녀가 취재를 하게 되는 인물은 배명호라는 외계인을 쫓는 사람. 그는 실종된 사람을 찾아준다고 소문이 난 사람이었지요. 제이는 그를 설계자로 부르며 자신이 기자임을 숨기며 그와 접촉합니다. 그러다 그녀의 남자친구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되고, 설계자와 함께 설계자의 아내와 제이의 아버지를 납치한 외계인에 대한 단서를 쫓게 됩니다.
이별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외계인을 쫓는다니 이 무슨 뜬금 없는 전개인가 싶죠?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랩틸리언이니 외계인이니 유에프오니 하는 소재들이 마구 등장을 하는데, 처음에 실소를 뿜다가 어느새 제이처럼 저도 설계자의 말에 몰입을 하게 되더라고요. 설계자의 아내는, 제이의 아버지는 진짜 외계인에게 납치된 것일까.... 아니면 그들이 좀처럼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기에 만들어낸 망상인 것일까... 마지막 책장을 덮고난 지금에도 저는 사실 어느쪽인지 판단이 잘 서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이 사랑하는 아내와, 사랑하는 아버지와 뜨겁게 이별할 기회조차 빼앗겼었던 점에 대해서 안타까웠을 뿐.
사랑에 대해서, 그리고 이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이 작품은 SF의 요소에 연쇄살인이 일어나는 등의 추리소설적인 요소 또한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흥미롭게 잘 읽힙니다. 게다가 제이나 설계자 뿐 아닌 주변 인물들의 입체감도 참 좋았습니다. 인생을 즐기며 살 줄 아는 제이의 엄마도, 바람둥이인 주제에 진정한 사랑에 빠져 버리고 마는 제이의 오빠도, 성인용품 가게를 하며 ㅅㅅ돌에게 순수한 애정을 보이는 미스터 리도, 보수 꼴통 사장도, 좀 재수없지만 어쩐지 친근한 보람 언니도. 다들 나 같고, 내 친구 같고, 내 부모 같고, 내 동료 같고, 내 이웃 같아서 나중엔 정이 들더라고요.
올 봄에 작은 아버지의 암 투병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보며 임종까지 지켰던지라 책을 읽으며 작은 아버지가 생각나 또 문득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졌더랬습니다. 만남이 있으면 으레 이별은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어떤 것이니 쿨하게 이별하는 게 좋다고들 하지만, 세상에 쿨한 이별이 어디 있을까요? 충분히 뜨겁게 슬퍼하고, 아파해야 방공호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닐른지.... 시크한듯 감성 충만하고 슬픈듯 유쾌했던, 하지만 그 끝맛은 따뜻했던 멋진 소설이었습니다.
『 271 전쟁 같은 삶을 살아가다 잠시 방공호에 몸을 숨길 수 있는 건 행운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곳에서 숨을 돌리는 건 절대 비겁한 것도 아니고, 현실 도피도 아니다. 살기 위해서 숨어든 거니까. 다디단 숨을 쉬려고 숨어든 거니까. 그러나 방공호에서 마침내 나올 수 있다면 그건 더 큰 인생의 행운이겠지. 그래서 삶이 조마조마하고 불안하하게 느껴지는 건 당연한 것이 아닐까. 』
『 299 작가의 말 中 그래서 난 J에게 말하고 싶다. 견디지 말고 조금 더 빨리 포기하라고, 열정이 없다고 꿈이 없다고 노력이 부족하다고 자책하지 말라고. 힘껏 지고 실컷 웃기를, 경쟁에서 지고 낙오된다고 해서 그 인생이 귀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말해주 싶다. 그리고 세상의 교훈이나 조언을 제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기를, 실은 이런 나의 말도 부디 흘려듣기를. 그리하여 비로소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노래를 부르는 날이 오기를 바라며, 세상의 모든 J에게 뜨겁게 안녕을 고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