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의 반격 - 2017년 제5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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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170 그래서 이젠 편안해지고 싶은 것뿐이에요. 꿈 같은 거, 하고 싶은 거 따위 생각할 필요 없이 남한테 치이지나 말고 하루하루 편안하게 살아보고 싶어요. 내가 제일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하는 말이 뭔 줄 알아요? 치열하다는 말. 치열하게 살라는 말. 치열한 거 지겨워요. 치열하게 살았어요, 나름. 그런데도 이렇다구요. 치열했는데도 이 나이가 되도록 이래요. 그러면 이제 좀 그만 치열해도 되잖아요. 』

 

자신이 보통 사람임을 믿어 달라고 강조하는 코가 큰 남자가 대통령이던 1988년, 김추봉이 될 뻔했던 김지혜 씨가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올해로 딱 서른이 되었죠. 88만원 세대인 그녀는 서른이 되었지만 비정규직으로 일하며 반지하에 살고 있습니다. 그녀는 나름 태어나서 지금까지 부지런히, 열심히, 정말 치열하게 살아왔는데 어째 그녀에게 세상은 팍팍하기만 합니다. 그런 그녀 앞에 규옥이라는 인물이 나타납니다. 그는 그녀가 비정규직으로 몸 담고 있는 디아망 아카데미에, 그녀와 똑같이 비정규직으로 일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저 '보통'만 되도 좋겠다며 아등바등 사는 지혜와 다르게 규옥이라는 인물은 보통을 넘어서는, 상당히 진취적이며 개혁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결국 그의 주도로 지혜를 비롯한, 무인, 남은, 네 사람은 작당모의를 하게 되고, 그들에게 갑질하던 모종의 세력에게 회심의 일격을 가하게 됩니다. 그 과정이 상당히 경쾌하게, 유쾌하게, 하지만 깊이 있게 그려지는 소설입니다.

 

『 p.69 억울함에 대해 뒷얘기만 하지 말고 뭐라도 해야죠. 내가 말하는 전복은 그런 겁니다. 내가 세상 전체는 못 바꾸더라도, 작은 부당함 하나에 일침을 놓을 수는 있다고 믿는 것. 그런 가치의 전복요.』

『 p.86 놀아보고 싶어요. 세상은 경직되어 있고 모두가 무기력증에 빠져 있죠. 난 반기를 들어보고 싶어요. 치기 어리다고 욕 들어도 좋으니 적어도 반항을 해보고 싶다고요. 역사가 말해줬듯 급진적인 혁명은 실패할 겁니다. 세상은 점점 팍팍하고 딱딱해지고 있어서 겉으로 보이는 움직임은 통제되거나 검열되니까요. 난 통제나 검열이 불가능한 일들을 해보고 싶은 겁니다. 재미있게, 놀이처럼 말이죠.』

 

사실 지혜라는 인물보다 저는 나이가 다소 많지만 그녀가 태어나면서 여태까지의 인생 속에서 겪는 여러가지 일들이 저와 너무나 비슷해 지혜라는 인물에 한없이 몰입하며 책을 읽어나갔습니다. 저 역시 남매 중 맏딸로 태어났고, 세상 흔한 이름을 가지고 있어 작은**이라고 불렸고, 가장 중요한 건 저 역시 지혜 못지 않게 '보통 사람'을 꿈꾼다는 거였습니다. 나름 열심히 살고 있는 거 같은데 늘 제자리걸음인 것 같은, 아니 오히려 자꾸만 퇴행하고만 있는 것 같은 패배감, 그저 튀지 않고 남들과 똑같이 살고 싶어하는 소시민적 소망, 불합리가 판을 친다고 말은 하지만 섣불리 대항하지거나 행동하지는 못하는 용기 부족 등. 그런 그녀를 각성시키는 인물은 바로 규옥이었습니다. 규옥은 끊임없이 말합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뭐라도 행동을 해야 하는 거라고, 뭔가 세상에 반격을 가해야 한다고, 그걸 놀이처럼 한번 즐겨 보자고. 이런 규옥이라는 캐릭터에게 저는 상당히 모순적인 감정을 품었습니다. 뭐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그에 대한 경외와 함께, 하지만 그것은 결국 그가 보통 이상의 사람이기에 이상을 꿈꿀 수 있는 거 아니겠느냔 불편함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지혜 역시 그랬는지 그녀는 규옥을 사랑하게 되지만 결국 그에게서 멀어지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또한 패배의식이자 피해의식인 거겠지요. 사실 이 세상은 규옥처럼 '변화'를 위해 크고작게 노력하는 사람들 덕에 약진하며 지금이 되었을 테니까요. 게다가 규옥은 결국 결말에서 그 역시도 각성하여 피상적인 '이상'을 넘어 구체적인 '현실'에까지 나아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지혜 역시 한발짝 더 나아가지요. 그리고 지혜는 깨닫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도 되어 보겠다고 그토록 아등바등했던 그녀를 비롯한 우리 모두는 사실 알고 보면 처음부터 다들 특별한 존재였다고.

 

『 p.233 내가 우주 속의 먼지일지언정 그 먼지도 어딘가에 착륙하는 순간 빛을 발하는 무지개가 될 수도 있다고 가끔씩 생각해본다. 그렇게 하면, 굳이 내가 특별하다고, 다르다고 힘주어 소리치지 않아도 나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존재가 된다. 그 생각을 얻기까지 꽤나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지만 조금 시시한 반전이 있다.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애초에 그건 언제나 사실이었다는 거다. 』

 

<아몬드>라는 전작에서는 현대인들의 공감 불능에 대해서 얘기했는데, 이번 작품에서 다루는 사회 의식은 더욱 다채롭습니다. 드문드문 정치나 역사 의식도 담겨 있고, 세대 간의 갈등, 계층의 갈등, 대기업의 횡포, 갑질 논란 등 그리 길지 않은 분량에 이 모든 것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또 그리 산만하지 않게, 내용 전개 과정 중 아주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어 가독성마저도 좋습니다. <아몬드>라는 작품에서도 느꼈지만 작가의 경쾌하면서도 묵직한 필력은 새삼 놀랍습니다. 분명 작가가 작품 속에서 다루는 세상은 무언가 불합리하고, 인물들이 겪는 일들도 내내 속상하고 억울하기만 한데, 어쩐지 작품은 경쾌하게 술술 읽힙니다. 심사평에서 이 작품을 '미쁘다'라고 평가했는데 이 작품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서술어인 것 같습니다.

 

p.128 언젠가 그런 얘기를 아빠한테 했더니 무거운 표정으로 겪어보지 않고 쉽게 말하지 말라는 무뚝뚝한 답이 돌아왔다. 아빠 세대와 우리 세대가 서로를 이해하고 바라보는 방식은 그런 건지도 모른다. 각자의 세대가 더 힘들다고 주장하고 그에 비해 상대의 세대를 쉽게 얘기하며 평생선을 달린다. 그런 걸 보면 삶을 관통하는 각박함과 고단함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공통인가보다. 』

 

제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세상 살이 너만 힘든 건 아니야, 인생은 누구나 다 고달프단다.'라는 말을 듣고 싶어서입니다. 또 '그런데 세상은 말이야, 또 그렇게 팍팍하지만은 않아. 네가 있고 내가 있어 우리가 되어 살다보면 인생은 꽤 즐거운 거란다.'라는 위로를 받고 싶어서입니다. 손원평 작가의 작품들은(이제 겨우 두 작품을 냈지만) 이런 따뜻한 위로가 담겨 있어 좋습니다. 그래서 전 이미 그녀의 팬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벌써 다음 작품이 기대가 되고 기다려지는 것을 보면요.

『 p.180 그래도 위로가 될 사실이 있지요. 우리는 모두 보잘것없다는 것. 정말로, 하찮기 그지없는 존재들이죠. 특별한 척해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누구나 아등바등 살아가요. 어떻게든, 그저 존재를 확인받으려고 발버둥치면서. 』

『 p.180 아마 그 고민은 죽을 때까지 하게 될 거예요. 백 살이 될 때까지 같은 생각할걸요. 외롭다고,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고. 내 인생은 어떤 의미가 있었으냐고.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괴롭고 끔찍하죠. 그런데 더 끔찍한 거는요, 그런 고민을 하지 않고 사는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질문을 외면하죠. 마주하면 괴로운 데다 답도 없고, 의심하고 탐구하는 과정만 있으니까. 산다는 건 결국 존재를 의심하는 끝없는 과정일 뿐이에요. 스스로의 존재를 의심하는 게 얼마나 드물고 고통스러운지 알아가는 과정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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