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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티
시즈쿠이 슈스케 지음, 김미림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4월
평점 :
품절
한 번 펼치면 덮을 수 없는, 그래서 벽돌에 가까운 두께의 책의 결말을 보기 위해 밤을 꼴딱 새게 만드는 철야책의 작가 시즈쿠이 슈스케의
신간입니다. 작년엔가 검찰측 죄인이라는 법정 사회 미스터리 작품도 상당히 재밌게 읽었던 터라 신간에 대한 기대가 컸었지요.
소설은 이사오라는 재판장이 등장하여 일가족 몰살 사건의 용의자 다케우치 신고에게 사형이 아닌, '무죄'를 선고하면서 시작됩니다. 때문에 이
작품 역시 초반에 법정 소설인 줄 알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다케우치라는 인물이 그동안 경찰에게 어떻게 (임의 동행이라는 이름으로) 취조를
받고, 어떻게 협박을 받았는지, 언론들에게 어떻게 물고 뜯겼는지를 상세히 서술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 과정이 제가 최근에 읽은 정통 법정
미스터리에서의 원죄 사건과 너무도 흡사했거든요.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다케우치는 '무죄'를 선고 받은 반면 다른 법정 소설 속 피고인은 극형을
선고 받았다는 점만 다를 뿐... 아무튼 그 소설을 매우 흥미롭게 읽었던 터라, 게다가 시즈쿠이 슈스케의 법정 소설은 믿을만한 것이기에 본격
법정 소설을 기대하며 책장을 넘겨갔더랬지요.
그런데 초반의 제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이사오가 판사직에서 물러나 고급 주택가로 일가족과 이사를 간 후부터는 거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집안일에 한없이 무관심하기만 한 조금은 무책임한 가장의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지요. 그러면서 이야기는 이사오의 가족들
이야기에 더욱 초점이 맞춰집니다. 노모 요코, 아내 히로에, 아들 도시로, 며느리 유키미, 손녀 마도카 등 대가족이 모여 살면서 일어날 수 있는
갈등이나 소란 등이 서술되지요. 뭐랄까 조금 고급진 '사랑과 전쟁'을 보는 기분이었달까요? 특히 이사오의 아내인 히로에, 며느리인 유키미의
관점에서의 그들의 심리 묘사는 압권이었습니다. 요코가 자신의 유산을 배분하는 장면이나 유키미가 마도카를 다루는 데 힘겨워 하는 장면들은 작가가
정말 남자가 맞는지 싶게 여성들의 심리 묘사에도 상당히 탁월하다고 느꼈습니다. 히로에와 요코 사이의 미묘한 심리 갈등이나 유키미의 육아
과정에서의 고뇌 등은 시어머니가 계신 것도 아니고, 육아를 해 본 적도 없지만 '여성'으로서 어찌나 그들의 입장에 몰입하게 되던지요.
하지만 이들 가족 바로 옆집에 다케우치가 이사를 오게 되면서 이 소설은 분명한 심리 스릴러적 성격을 띄게 됩니다. 다케우치 자신은 너무나
신기한 인연이라고 말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절대 우연일 것 같지 않은 다케우치의 이사. 다케우치는 그렇게 점점 가지마 집안에 발을 들여갑니다.
엄청난 물량공세 및 봉사로 집안 사람들의 호의를 사지요. 하지만 그의 호의가 부담스럽기만 한 이사오와 의심스럽기만 한 유키미. 그리고 가지마
가족 주변에서 연이어 일어나는 미스터리한 사건들.
다케우치의 이사는 정말 우연이었을까요? 다케우치의 무죄 방면은 정말 옳았던 판결이었을까요? 다케우치는 대체 가지마 일가에게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요? 이런 의문점들에 대한 답이 궁금해서 자꾸만 페이지를 넘기게 됩니다. 그리고 자주 자주 소름이 돋지요. 작품 중후반으로 갈수록 쫀쫀한
긴장감은 더해만 갑니다. 요즘 통 독서 진도를 내지 못하는 제가 이 두꺼운 책을 이틀만에 끝냈으니, 과연 철야책이 확실하군요.
소설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모두 법정에서 그려지고는 있지만 이 소설은 확실히 법정 소설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아주 아주 재미있는 심리
미스터리인 것은 확실합니다. 이웃으로 인해 일어나는 한 집안에서의 기묘한 일들과 이때문에 형성되는 긴장감, 다케우치의 정체를 파헤치려는
유키미(나중엔 이사오도 합류합니다.)가 고군분투하는 과정은 분명한 추리소설로서의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에서의 사법
체계에 대한 비판이라든가 고령화 문제, 여성들의 육아 문제 등을 그리고 있는 점에선 사회파 미스터리의 성격도 많이 가지고 있지요. 꽤나 묵직한
주제들인데 이렇게나 몰입하여 휘리릭 읽어버릴 수 있다니 작가의 역량이 정말 대단하네요.
이 작품을 읽고 났더니 그런 생각이 듭니다. 누군가 나에게 한없이 호의를 베푼다면 나는 과연 그 호의를 정말 호의로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누군가에게 오롯이 순수하게 호의를 베풀 수 있을까? 인간 관계란 것은 역시 너무 깊지도 얕지도 않게 적당해야 하는 것인가
보다...하는 씁쓸한 생각이 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