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알레르기
고은규 지음 / 작가정신 / 2016년 7월
평점 :
품절


 

<죽음이라는 화두>

작년에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아흔이 넘은 연세였고, 사람의 일생 중 지극히 당연한 마지막 단계를 거치셨으니 참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많이 슬펐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 자꾸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할머니 장례를 치르면서 아버지가, 그리고 엄마가 참 많이 늙었음을 그제서야 깨달았거든요. 그리고 할머니와 이렇게 이별했듯 언젠가 부모님과도 이렇게 이별해야 하는 거겠지 생각하면 참 무서웠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자연의 이치이거늘 그래도 너무나 무서웠습니다. 때문에 파스칼이 말했던 것처럼 "인간은 죽음과 불행과 무지를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행복해지기 위해 그것들을 생각하지 않기로"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작품집의 7편의 단편들은 이 '죽음'이라는 화두를 애써 외면하거나 은폐하지 않고 오히려 전면에 내세웁니다. 각각 단편들 속 주인공들은 모두 누군가의 죽음을 경험합니다. 대학 선배의 죽음(오빠 알레르기), 가족의 죽음(엔진룸, 명화, 급류타기), 이웃의 죽음(맥스웰의 은빛 망치), 심지어 자기 자신의 죽음(차고 어두운 상자)까지. 여타 소설들이 으레 그렇듯, 그런 죽음들을 겪은 뒤엔 주인공들의 성장이 있었다....하는 못미더울 위로조차도 그려놓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인공들은 끊임 없이 아파하고, 상처받고, 평온하던 생활은 파괴되기까지 합니다. 참으로 냉정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냉정함 덕에 '죽음'이라는 화두를 좀 더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바라 볼 수 있게 되고, 그리하여 이 모든 것은 자연의 순리임을 '인정'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여전히 나의 그리고 내 소중한 주변 사람들의 '죽음'은 두렵고도 무섭지만, 아무때고 불쑥 불쑥 떠올라 사람을 조바심 나게 하는 녀석을 조금은 냉정하게 대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가족이라는 굴레>

작년 어느땐가 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에서 '가족'이 주제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 스튜디오는 그리고 그 프로그램을 보던 저 또한 눈물 바다가 되었었지요. 부모님을 형제자매등 가족을 떠올리면 눈물부터 보이는 사람들은 한국인들 뿐이라더군요. 엄마 뱃속에서 10달을 보내다가 나오는 순간부터 이미 아이는 엄마에게, 엄마는 아이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해서랍니다. 유독 '우리'라는 대명사를 좋아하는 것만 봐도 한국인들의 공동체의식, 가족의식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우린 때로 '가족'을 일종의 자신을 옭아매는 '굴레'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빚쟁이기에, 그 빚을 갚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그 굴레를 벗어버릴 수도 없습니다. 이 소설집에서도 그런 가족의 굴레를 벗어버리지 못하는 주인공들이 등장합니다. 중년의 이혼녀인 언니의 팬질 비용을 위해 상여금을 탈탈 털린 나(엔진룸), 20년 전 사라진 오빠를 기다리는 치매 걸린 엄마를 둔 나(딸기), 아버지가 버린 전처에게서 난 언니와 동거중인 명화(명화)등. 이들 모두는 가족의 그들의 굴레였습니다. 그리고 때로 이 굴레를 벗어버리려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그 굴레를 벗지 못합니다. 아니, 어쩌면 벗지 않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굴레를 벗어버린다는 것은 어쩜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일일 테니까요. 서로가 서로를 '빚'이라고 생각하면 어떻습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굴레'인들 어떻습니까? 그래도 피를 나눈 '가족'이 있단 것만으로도 세상 사는데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데요.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저도 결국은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인가 봅니다.

 

<인생이라는 급류타기>

30대를 훌쩍 넘고 보니, 인생이란 참 팍팍하기 그지 없음을 느낍니다. 하루 하루 위태위태 버티듯 살아갑니다. 10대 시절 그리던 미래는 분명 이런 모습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어버렸습니다. 생기발랄 에너지를 뿜어내던 새내기는 어느새 여자 꼰대가 되어버리고(오빠 알레르기), 어느날 갑자기 죽는다 해도 자신의 죽음을 확인해 줄 사람은 사채업자 뿐이고(차고 어두운 상자), 처자식을 둔 옛애인을 잊지 못해 스토커가 되어버리고(맥스웰의 은빛 망치), 연예인을 쫓아다니는 것 외엔 즐거움을 찾지 못하고(엔진룸). 그들이 사는 하루 하루가 너무도 위태위태한 급류 같아서, 그런 급류 위에서 간신히 균형을 잡으려고 애면글면 하는 그들의 이야기가 전부 내 이야기인 것만 같아서 자꾸 한숨이 새어나왔습니다.

 

<당근 대신 채찍>

'트렁커'나 '알바 패밀리'에서 작가가 보여주던 세상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 웃픈 이야기들이었습니다. 팍팍하고 서글픈 현실을 굉장히 리얼하게 그리면서도, 그 전달 방식은 개성 강하고 코믹하기까지 했지요. 알고보면 누구나 '희비극'인 우리네 인생이랑 꼭 닮은 그녀의 작품들이 정말 좋았습니다. 때문에 이번 작품집도 그런 '희비극'을 기대했었는데,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작품집은 참으로 냉정합니다. 웃음기를 쫘악 빼버리고 '리얼리즘'만 잔뜩 담았습니다. 그것도 결코 즐겁거나 행복하지 않은, 오히려 아이러니와 비극만이 넘치는 그 현실을 말이지요. 하여 이전 장편 소설들에선 웃다 울다 카타르시스를 느꼈던 반면 이 소설집에선 바로 내 앞에 놓여진 인생을 '직시'하게끔 합니다. 이전 장편들이 '당근'이었다면, 이번 소설집은 '채찍'이라고나 할까요. '당근'을 기대했던 제게 급작스럽게 훅 날아든 '채찍'은 많이 당황스러웠지만, 아슬아슬 급류 위에서 정신 단디 차려야겠다고 각성하게 되는 계기가 되어준 것 같습니다.

 

 

p.170 문득, 골짜기를 지나 거센 물결 위를 뒤집힐 듯 타고 내려오는 고무보트가 보인다. 노를 저으며 간신히 균형을 잡는다. 하얀 거품이 솟구쳐 올라 보트 위를 덮친다. 영훈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인도 한가운데에서 누군가에게 떠밀린 것처럼 그는 뒤뚱거렸다. 지하철에서 쏟아져 나온 인파들이 비틀거리는 경훈을 밀치고 앞서 걸어갔다. 그의 몸이 휘청 꺾이며 바닥에 쓰러질 듯했다. 가까스로 균형을 잡은 그는 몸을 곧추세웠지만 그래도 자꾸만 바닥으로 고꾸라질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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