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 라이프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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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7 콜트레인의 명곡이야. Lush Life. 풍요로운 인생. 좋잖아? 난 지금 이 순간, 다른 장소에서 이 시간을 살고 있는 누구보다도 풍요로운 인생을 살고 있어. 그렇게 장담할 수 있고말고. 상상해봐, 멍청한 실업자는 물론이고 잘 살고 있다고 착각에 빠져 있는 도둑이나 종교인을 통틀어서,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사는 누구보다도 풍요롭게 살고 있어. 』

 

<인생은 릴레이.>

며칠전 서울에 잠시 나갔었는데 지하철 역에서 어떤 할머니께서 (아마 지방분이었지 싶습니다.) 길(?)을 물으시길래 가르쳐드렸습니다. 전 지하철에서 내리고 할머니는 막 타시려던 참이었어요. 그래서 역을 나와서도 할머니께서 잘 타셨는지 괜히 신경이 쓰이더군요. 그 할머니 목적지까지 잘 가셨겠죠? 그리고 그 할머니는 지금쯤 무얼 하고 계실까요? '러시라이프', 이 작품은 바로 이런 의문에서 파생된 상상으로 시작되고 전개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의 인물이 등장하고 그 인물은 다른 인물과 스치죠. 그리고 그 다른 인물은 또 자신의 이야기속에서 스쳤던 앞의 인물은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지 상상해 봅니다. 이렇게 다섯개의 이야기, 다섯개의 시점이 릴레이처럼 진행됩니다. 마치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이지만, 내 주변 인물들의 인생 속에선 조연일 것이고, 또 길에서 그저 스치는 사람들의 인생에선 엑스트라인 우리 인생사처럼 말입니다.

 

『 p.15 세상은 결국 사람과 사람 간의 연결을 통해 어떻게든 잘 풀릴 거라고 믿는 구석이 있었다. 』

『 p.15 '연결'이라는 그림이 굉장히 좋았어. 그건 릴레이를 의미하는 거지? 분명 모두들 누군가에게 배턴을 넘겨주기 위해 인생을 살아가는 거야. 오늘 나의 하루가 다른 사람의 다음 하루로 이어지는 거지. 』

 

<신의 레시피.>

사람은 누구에게나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이웃이 있습니다. 또 그 가족이나 친구나 이웃 또한 또다른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이웃이 있을 테고요. 이처럼 나 혼자 사는 인생이 아니기에 한 사람의 인생은 다른 사람의 인생에 크게 작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어디에서 누굴 만나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알수가 없지요. 그래서 우리는 흔히 '운명'이란 단어를 쓰곤 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선 '운명'이란 거창하거나 진부한 단어가 아닌 '신의 레시피'라는 말이 자주 언급됩니다. 동료를 배신하고 거대 화상 밑으로 들어간 시나코, 빈집을 털러 온 대학 동기를 마주치는 도둑 구로사와, 17층에서 뛰어 자살한 아버지를 둔 가와라자키, 내연남과 남편을, 그리고 내연남의 아내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는 교코, 정리해고 후 40번의 면접을 보고 40번 모두 미끄러진 도요다. 누구나 한 번 사는 인생, 하여 각자의 인생에서는 아마추어이기에 이들은 모두 각자 기구하고 긴박하고 스펙타클하고 파란만장한 하루 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아마추어인 그들이 겪는 사연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가 모여 하나의 더 큰 이야기가 되는 건 모두 어쩌면 신이 미리 준비해놓은 레시피 대로였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들은 인생에 관해서 모두 아마추어인 우리들에게 이런 위로를 전합니다. '우리는 모두 인생에 있어서 신인이고 아마추어이며 이 인생이 바로 첫 출전이라고, 인생에 프로는 없다고. 처음 시합에 나간 신인이 실패했다고 낙담하면 안된다.'고 말이죠.

 

『 p.263 인생에 관해서는 모두가 아마추어야, 그렇잖아? 모두가 첫 출전이야, 인생에 프로는 없어. 뭐, 이따금 자기가 인생의 프로인 것처럼 으스대는 놈도 있지만, 어쨌든 실제로는 모두가 아마추어고 신인이지. 처음 시합에 나간 신인이 실패했다고 낙담하면 안 돼. 』

 

<매력적인 플롯과 복선 & 이사카 코테일>

이 작품이 재미있는 건, 인물과 인물의 각각의 이야기가 산발적, 동시다발적으로 각기 진행되다가 막판에 하나의 이야기로 짜 맞추어 진다는 점입니다. 각각 인물들의 대사 속에서 공통으로 언급되는 소재들이 있긴 하지만 그거야 같은 도시(센다이)에 살고 있기에 공통 화두로 떠오를 수밖에 없는 것들이라서 도무지 이 이야기들이 어떻게 합을 이루게 될 지 감이 잘 오질 않습니다. 그럼에도 작품 말미에 가면 아주 자연스럽게 합을 이루며, 그 절묘한 자연스러움에 놀라게 되지요. 마치 1000피스 퍼즐 조각을 처음 흩뜨려 놓고 보면 한숨이 나오지만 하나 하나 맞추어 큰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는 크나큰 만족감을 느끼게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점은 이야기가 말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갑자기 느닷없이 짠! 하고 맞춰지는 건 아니라는 겁니다. 작가가 작품 초반부터 은근하고 은밀하고, 그러면서 매우 치밀하게 복선들을 곳곳에 뿌려놓았던 것이지요. 저는 이 작품을 수년 전에 이미 한번 읽은 상태였고, 이번에 개정판이 출간되어 재독을 하는 거였기에 세세한 줄거리는 잊어버렸지만 이야기의 큰 구성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그 복선들을 모조리 찾으면서 읽어보자 마음 먹었지요. 물론 몇몇 복선들은 눈에 보였습니다. 하지만 정독으로 재독을 끝내고, 삼독이랄 수까지야 없겠지만 두어시간에 걸쳐 다시 한번 책을 훑다보니 그 복선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음을 깨닫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작품을 읽으신 분이라면 꼭 완독 후 바로 속독으로 재독을 해보십시오. 곳곳에 뿌려진 복선을 줍는 재미가 쏠쏠하며 그 치밀한 구성에 감탄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사카코타로라는 작가 앞에 흔히 붙는 수식어가 '천재'라는 진부한 단어인데, 러시라이프라는 소설을 읽고나면 그 진부한 단어를 작가 이름 앞에 붙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플롯이 상당히 복잡하면서 복선들은 치밀하고 상세하니 허구일 뿐인 이야기에 디테일이 살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과연 작가는 다섯 개의 이야기를 각각 써서 적당히 잘라 섞어 놓은 것인지, 아니면 독자들이 읽게 되는 순서 그대로 이야기를 썼던 것인지, 정말이지 궁금합니다. 영화 감독 봉준호의 연출은 그 디테일이 살아있어서 사람들은 흔히 그를 봉테일이라고 부르는데(여담이지만 저는 국내 감독중에 봉준호 감독을, 그리고 그의 디테일한 연출을 사랑합니다.) 이사카코타로도 이쯤되면 이사카 코테일이라고 불러야하는 건 아닐까 싶습니다.

 

『 p.78 다정하다는 건 남의 근심을 헤아린다는 의미라고 생각해. 다정하다는 건 그런 뜻이요. 요컨대 상상력이야.

 

<만담 속 잔소리의 미학>

이사카코타로의 대부분의 작품들은 참 쉽게 읽히고 가독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흔히 가독성이 높은 소설들은 서술이나 묘사 보다는 대사가 많다는 공통점이 있지요. 러시라이프를 비롯한 이사카코타로의 대부분의 작품들 역시 인물들이 주고 받는 대사의 비중이 아주 높은 편입니다. 그래서 평론가들로부터 '만담 같다.'라는 평을 듣고는 한다더군요. 서술이나 묘사가 거의 없고 대사로만 이루어진 소설은 평단에서 결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카코타로가 평단에서도 좋은 평을 받는 이유는 제가 생각하기엔 그의 작품에 담긴'잔소리의 미학'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 작품속에서 예를 들어보자면, 도둑인 구로사와는 빈집에 침입한 대학 동기를 마주칩니다. 그런데 구로사와는 전혀 당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상황을 매우 즐기며 도둑이 된 친구와 계속 대화를 시도하지요. 그렇게 그 친구 또한 구로사와에게 감화되어 대학 시절의 추억담, 현재의 각박한 삶 등을 늘어놓습니다. 그것도 무슨 예능이나 토크쇼에서 진행자와 게스트가 대화하듯이 말이죠. 상황도 말도 안되지만, 그런 상황에서 주고 받는 두 인물의 만담 같은 대화라니 상상하면 상당히 우습습니다. 그리고 그런 만담 같은 대화 속에 여러 사회문제(경제문제, 부부문제, 노인문제, 종교문제 등)라든지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충고라든지에 대해 독자들에게 작가가 전하는 잔소리(상상력을 키워야 한다, 사고를 해야한다, 즐겁게 살아라 등)를 담아놓습니다. 잔소리를 잔소리로써 전하면 듣는 사람은 매우 지겹고 짜증이 날 수밖에 없는데, 이사카코타로는 독자에게 그런 잔소리 같은 메시지들을 이런식으로 자신의 작품 속 인물들의 유쾌한 만담 속에 은근하고 은밀하게 담아 전하는 것이지요. 게다가 그런 잔소리는 대부분 독자들을 웃게하며, 독자에게 따뜻한 위로 및 격려가 됩니다. 작가의 이런 상당히 치밀한 구석이 있는 만담 속 잔소리의 미학을 정말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p.399 구로사와는 보행자 통로의 벤치에 걸터앉아 길을 가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돈을 가진 사람, 돈이 없는 사람, 사치스러운 사람, 빈곤한 사람, 미래를 찾는 사람, 미래를 기다리는 사람, 포기한 사람, 다양한 인생이 지나간다. 모두들 심각한 얼굴이었다. 좀 더 편하게 살아. 구로사와는 그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

 

<Welcom to 이사카월드>

앞서도 밝혔지만 저는 이 작품을 수년전에 읽고 이번에 개정판이 출간되어 재독을 했습니다. 처음 이 작품을 읽었을 즈음엔 읽는 소설 마다 제 취향에 꼭 들어맞았기에 작가의 거의 모든 작품을 미친듯이 무턱대고 대중없이 찾아 읽는 중이었었습니다. 출간 순서와 상관없이 뒤죽박죽 말이지요. 그런데 이사카코타로의 작품들은 사실 크고 작은 연관성을 가지며 오밀조밀, 그리고 치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를 '이사카월드'라고 부르지요. 러시라이프라는 소설은 작가가 오듀본의 기도라는 작품으로 데뷔한 후 나온 두번째 작품입니다. 때문에 오듀본의 기도와 함께 이사카월드의 원형을 많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 그것을 수년 전 처음 읽을 때는 잘 몰랐다가 이번에 재독을 하며 찾을 수 있었습니다. 오듀본의 기도에 나오는 말하는 허수아비와 주인공 이토, 동물원의 엔진에 나오는 동물원에서 잠을 자는 남자, 원래 직업은 도둑이었는데 중력 삐에로에서는 탐정이라는 부업을 하고 있는 구로사와. 이 모든 이야기가 알고보니 러시라이프에도 담겨있었던 겁니다. 러시라이프라는 작품은 그 자체가 다섯 인물들의 릴레이처럼 이어진 하나의 큰 이야기이면서, 결국 초기 이사카월드 전체를 아우르는 작품이었던 것이지요. 때문에 러시라이프를 재독하고 났더니 이제는 오듀본의 기도나 중력삐에로, 피시스토리(...안에 동물원의 엔진이란 단편이 수록되어있습니다.)도 재독을 하고 싶어지는군요. 그런데 아마 그 작품들을 재독하면 또 그 안에서 다른 작품과의 연계가 형성이 되기 때문에 또 다른 작품들을 재독하고 싶어지겠지요. 그야말로 돌고도는 웰컴 투 이사카월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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