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마음산책 짧은 소설
이기호 지음, 박선경 그림 / 마음산책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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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유없이 무턱대고 강렬하게 끌리는 책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 작품이 저에겐 그랬습니다.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라는 제목. 당신은 아무렇지 않을 거다...하고 위로를 건네는 것도 같지만, 실상은 산전수전 다 겪어서 이젠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게 되어버렸다는 자조 섞인 푸념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그 제목의 중의성이 좋아 끌렸던 것이니 이유없는 끌림은 아닌게 되겠군요.

 

 

 

책 첫 부분에 실린 작가님의 소감을 읽으면서부터 저의 끌림이 옳은 것이었구나...하는 확신이 들기 시작합니다. 소설가가 시조로 쓴 어쩐지 경쾌하고 귀엽기까지 한 소감. 여기 실린 작품들도 다 이런 느낌들이겠구나 싶어 미소가 지어졌지요.

 

그리고 이어진 첫 단편에서 저는 이미 이 책에 완전히 반해버렸습니다. 벚꽃이 난분분 흩날리는 화창한 봄날, 나른한 경찰서에서 형사와 검도사범이 주고 받는 조사. 이건, 추리나 스릴러 소설인가?...하는 찰나 급 찾아와버리는 뜻밖의 결말. 그리고 이에 지을 수밖에 없었던 너털 웃음.

 

p.24 아니죠. 그러면 누굴 사랑하는 게 아니죠. 사랑이 어디 합의할 수 있는 거던가요? 』

p.24 봄이니까. 봄이니까. 최 형사는 혼잣말처럼 그렇게 중얼거렸다. 진짜 사랑은 그 사람이 없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법이니까. 창밖에선 또 한 번 난분분, 벚꽃이 흩날리고 있었다. 』

 

이 외에도 이 작품 속엔 총 40개의 웃음들이 등장합니다. 이 책은 250페이지밖에 되지 않는 얇은 책입니다. 거기에 이따금씩 삽화까지 등장을 합니다. 그런데 수록된 작품은 무려 40편이지요. 그렇습니다. 한 작품 당 대여섯 페이지가 고작이지요. 단편 소설이라 쳐도 많이 짧은 이야기들입니다. 때문에 너무나 쉽고 빠르게 읽히지만, 그렇다고 가볍고 유쾌하게 읽히진 않습니다.

 

p.132 침낭 속에서 그는 가만히 별을 바라보았다. 별은 좋겠다, 카드 값 걱정 안 해서............. 그는 잠깐 눈을 감았다가 이번엔 달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또 혼잣말을 했다. 달은 좋겠다, 다음 달에도 그냥 달이어서...... 』

 

한 집안의 가장, 청년 실업자들, 독거 노인들, 이혼한 싱글파더, 갱년기의 엄마들, 사업에 실패하고 자살을 결심한 남자, 삶에 찌든 중년들...... 이들은 이 작품속의 주인공들입니다. 헬조선에서 살며 산전수전 다 겪어 이제 정말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게 된' 사람들. 그렇다고 이 작품들이 또 한없이 무겁고, 삭막하고, 처량하고, 암울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짧게 짧게 끊어지는 40편의 이야기들을 읽노라면 앞에서도 언급했듯 끊임없이 웃음이 흘러나옵니다. 그렇다고 또 그 웃음이 박장대소나 파안대소의 느낌은 아닙니다. 이 이야기들 속에 담긴 웃음들은 아줌마들이 동네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말며 주고 받는 남편 걱정, 자식 걱정, 집세 걱정으로 늘어놓는 넋두리 속에 담긴 그런 웃음입니다. 그리고 가장이라는 무거운 짐을 등에 진 채 하루 하루 힘겹게 일하고 퇴근길에 들른 포장마차에서 소줏잔을 기울이다가 옆 테이블에 앉은 비슷한 연배의 아저씨와 술 한 잔 나누며 짓는 그런 웃음입니다. 그리고 그 웃음 끝에서 결국엔 코끝이 찡해지며, 책 속에 자주 등장하던 문장을 빌리자면 '어쩐지 좀 눈물이 날 것 같아'지는 것입니다.

 

p.171 그는 웃으면서 계속 비명 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아아아아. 우리는 너나없이 고통 속에서 태어난 존재들이란다. 아아아아. 그는 비명을 지르며 아이에게 속엣말을 했다. 고통 다음에야 비로소 가족의 이름을 부여받는 거야. 아아아아. 그래서 가족이란 단어는 들으면 눈물부터 나오는 거란다.

 

희노애락애오욕. 그 복잡한 감정들을 전부 '웃음'으로 승화해 버리는 작품. 그리고 그 '웃음'들 끝엔 카타르시스의 '눈물 한방울'이 존재하는 멋진 작품입니다. 

 

책 속 한 단편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치 '생각 기계'인 담배 마냥 40개 이상의 생각들을 하게 했던 작품. 하지만 너무도 방대했던 그 생각을 쉬이 글로 표현하지 못해, 작가님처럼 저도 답가 형식의 시조로 표현해 봅니다.

 

짧은 글 술렁술렁 쉽사리 읽어갔지

웃다가 울었다가 지지리 궁상이었

짧았던 이야길수록 여운은 짙고 긴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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