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가와 란포 결정판 1 에도가와 란포 결정판 시리즈 1
에도가와 란포 지음, 권일영 옮김 / 검은숲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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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가와란포의 어마무시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처음 읽어 보는 그의 작품입니다. 요코미조 세이지와 쌍벽을 이룬다기에 흥미진진한 추리 소설을 기대했었지요. 그런데 왠 걸! <애벌레>는 전혀 추리 소설이 아니었군요. 물론 간략한 소개를 보고 추리 보단 기괴나 공포에 가깝다는 건 알았지만 또한 이런 분위기의 기괴, 공포이리라고도 예상치 못했습니다.

 

주인공은 도키코와 그의 불구자 남편 스나가 전 중위. 스나가 중위는 참전했다가 팔도 잃고, 다리고 잃고, 청각도 잃고, 말도 잃어버리고 그저 목숨만 부지해 돌아옵니다. 기적처럼 말이지요. 그런데 이런 상황을 '기적'이라 부를 수 있을지. 애초에 전쟁에 나가지 않았다면 죽을 뻔한 고비도 겪지 않았을 테고, 불구의 몸이 되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스나가 중위에게 남은 딱 한가지 감각기관은 '눈'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도키코는 이런 살덩어리에 불구한 불구자 남편을 자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생각하게 됩니다.

 

작가는 도키코와 스나가가 나누는 성행위를 통해 인간의 정욕이나 쾌락을, 그리고 불구가 된 스나가 중위와 그를 대하는 도키코를 통해 고통이나 참극을 그려내고 싶었다고 하네요. 결코 '반전'의 의식을 담을 생각은 없었다고 거듭 강조합니다. 하지만 독자들은 어쩔 수 없이 이 작품에서 '반전 코드'를 읽을 수밖에 없지 싶습니다. 불가가 되어버린 스나가가 느낄 공포도, 도키코와 스나가가 나누는 기괴한 행위도, 그리고 그를 통한 쾌락이나 참극도, 결국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전쟁'을 통해 기인한 것들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 작품을 읽어나가며 얼마 전에 읽은 오르부아르라는 작품이 떠올랐습니다. 그 작품에서도 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어버린 두 젊은이가 등장하거든요. 인간은 '인간'으로 살아야지, 인간이 '벌레'로 살아가야 하는 비극은 없어야하지 않을까요. 때문에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 불릴 만큼 결코 전쟁 없는 세상은 있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전쟁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이상'까지야 버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p.31 거기 누워 있는 것은 틀림없이 하나의 생명이었다. 폐도 있고 위도 있다. 그런데 사물을 볼 수 없다.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말을 전해 할 수 없다. 뭔가를 쥘 손도 없고 딛고 일어설 다리도 없다. 그에게 이 세상은 영원한 정지이며 부단한 침묵이고 끊없는 어둠이다. 일찍이 누가 이런 무서운 세계를 상상할 수 있었을까. 그런 세계에 사는 사람의 마음은 무엇에 비할 수 있을까. 그는 틀림없이 '사람 살려'라고 외치고 싶을 것이다. 아무리 어렴풋하더라도 좋으니 사물의 모습을 보고 싶으리라. 아무리 희미해도 좋으니 어떤 소리든 듣고 싶으리라. 무엇인가에 의지해 뭐든 꼭 움켜쥐고 싶으리라. 하지만 그에게는 그 어떤 것도 완벽하게 불가능했다. 지옥이다. 지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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