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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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년이 또 다른 소년을 칼로 찔러 살해 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보통 이런 경우의 원인은 십중팔구가 학교 폭력이지요. 때문에 그런 학교 문제를 다루는 소설인가 싶었습니다. 아니면 어쩌다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는 추리나 스릴러 소설인가도 싶었습니다. 그런데 금세 서술자가 학습 만화를 만드는 여성 편집자로 바뀝니다. 연이어 공모전의 수상작이 언급되고, 표절이 등장하고...그러다 하나의 챕터가 끝나버립니다. 다음 챕터의 구성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10여페이지에 여러 시공간의 이야기와 서술자들이 뒤죽박죽 섞여 버립니다. 이 소설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를 빌려 말하자면 이것은 바로 이 소설의 '패턴'이 되겠네요. 이런 패턴은 가독성을 높입니다. 그러나 우습게도 그런 빠른 가독성 덕에 소설 말미에선 혼란에 빠져 버리고 맙니다. 미친듯이 목적지를 향해 달려왔는데 달리는 동안 중요한 물건들을 길 곳곳에 흘리고 온 느낌이랄까요. 어쩌면 두번 세번 읽어야 그 진가를 더욱 깨닫게 되는 소설일른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고등학교 시절 살인자가 되어버린 한 남자입니다. 그 사건이 있은 후 경찰서, 소년교도소, 일반교도소, 병원을 전전하며 살아야 했던 소년. 정당방위를 인정 받았다 해도 그가 한 사람을 살해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패턴이란 것은 결코 전과자에게 너그럽지 못합니다. 게다가 그 사람의 직업이 작가라면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때문에 남자가 사회에 발 붙이고 살아가기란 결코 녹록치가 않습니다. 그리고 자 또한 그런 상황을 체념하듯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단 하나 그에게도 구원이란 것이 필요했기에 남자 곁에는 사랑하는 연인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 남자를 쫓는...혹은 항상 주변을 맴도는 한 중년 여성이 있습니다. 과거 그 사건 피해자 소년의 어머니. 학교 폭력이란 문제와 엮여 피해자가 가해다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어버린 상황. 우리는 자식을 잃은 어미의 심정이 오죽했을까...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며 다들 쉽게 말하지만 솔직히 그 상황이 되어 보지 않고서야 오롯이 그 심정을 이해하긴 힘들겁니다. 때문에 그녀가 벌이는 여러 일들과 병적인 행동들은 충분히 이해가 가면서도 또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습게도 이 두 사람은 과거의 기억들을 오롯이 자기만의 방식대로 뒤틀어 간직하고 있습니다. 남자의 경우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해 사건 당시 그 분노가 폭발한 것 까진 기억하지만 정작 사건 당시 어떻게 소년을 살해했는가의 기억은 전혀 없습니다. 아마 너무도 끔찍한 기억이었던 나머지 애써 그 기억을 지워버리는 방어 기제였을겁니다. 중년 여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자신의 아들은 그저 착하고 순하기만 하여 다른 사람을 따돌리는 일 따위 절대 했을리 없다고 기억합니다. 그녀는 심지어 자신의 아들이 어떤 음식을 좋아했는지에 대한 기억조차 자기 편할 대로 왜곡해버립니다. 이 역시 아마 그렇게라도 하여 자식을 잃은 상처와 죄책감을 덜고 싶은 방어 기제였겠지요.

 

그리고 이들 사이에 한 여자가 있습니다. 그녀는 남자가 사랑하는 연인이자, 피해자였던 소년의 고교 동창이기도 합니다. 학습 만화 편집자로서 지극히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는 여자. 어쩌면 그녀는 독자인 우리를 대변하는 인물인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객관적인 시선과 관점을 가질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끔 가끔 남자에게 그리고 중년 여성에게 그녀의 기억으로 그들의 기억을 바로잡아 주는 역할도 해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소설 말미에서 그녀 역시 자신만의 방식으로 기억이란 것을 만들고 다듬고 왜곡하였음이 밝혀집니다.

 

결국 우리 인간들은 모두 이런 방식으로 기억의 패턴을 만들어 간직하는 것이겠지요. 한없이 뒤틀리고 은폐하고 왜곡된... 세 사람의 주인공과 세 사람의 과거와 세 사람의 시공간이 뒤죽박죽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는 짧지만 긴 이야기.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 이토록 뒤틀려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작품의 형식과 주제가 이토록 절묘하게 들어 맞다니 솔직히  감탄했습니다.

 

그믐, 음침하고 어둡고 쓸쓸함을 자아내는 단어. 때문에 제목에서 이미 이 작품의 결말이 결코 해피엔딩은 아니란 것을 짐작했습니다. 그리고 남자가 선택한 속죄와 용서와 구원의 방식이란 것이 어찌 보면 그믐이라는 배경과 제일 어울리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이러한 결말이 정말 속죄가 되고 구원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그렇기에 해피엔딩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비극적인 결말이라고도 볼 수 없는 그믐밤 같은 결말. 어쩌면 이 또한 이 이야기의 한 패턴일지도 모르겠네요.

 

요즘 가장 핫하다는 작가 장강명. 한국이 싫어서라는 작품을 읽고난 후의 그에 대한 첫인상은 느낌표였는데, 그믐을 읽고난 후의 감상은 물음표입니다. 그 답을 얻기 위해 그의 작품을 또 읽어봐야할 것 같네요. 한 작가가 관심이 가면 줄줄이 그 작가 작품만 읽어대기. 이는 제 독서 방식의 한 패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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