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춤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1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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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만남...그리고 첫인상>

 길에서 자주 마주치는 얼굴이 있다. 이름도 모르고 말 한마디 섞어 보지 않은 데서 오는 낯섦과, 자주 마주치다 보니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것 같은 친근함을 동시에 느끼는 사람. '온다 리쿠'는 나에게 바로 그런 작가였다. 내가 읽는 책의 상당 부분의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일본 소설이기에 자주 들어 친숙하기 이를데 없는 바로 그 이름. 하지만 정작 작품은 전혀 읽어 보지 못한 낯섦. 그렇게 자주 마주치는 사이인데 인사 한번 건네 볼까 하는 생각 비슷한 것으로 접하게 된 작품이 바로 '나와 춤을'이다.

 작가와의 첫만남이 '책'이라면, 책의 첫인상은 '표지'일 것이다. 서평을 쓰며 표지 이야기를 늘어 놓는 것이 어쩌면 우습기도 하지만, 이 책은 표지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가 없다. 알록달록 봄날 같은 색감에 여러 단편들에서 소재를 따온 일러스트들이 오르골 위에 몽환적으로 펼쳐져 있다. 이 겉표지도 꽤나 매력적이지만 내가 표지 이야기를 꺼낸 것은 바로 이 겉표지를 벗겼을 때 등장하는 양장 커버 자체의 디자인 때문이다. 평소 독서 습관대로 양장본의 겉 표지를 벗겨내고 책을 읽으려는데, 자줏빛 매혹적인 양장 커버가 나를 반긴다. 그런데 거기에는 책 제목이 아닌 '교신'이라는 단어와 함께 알 수 없는 문장들이 나열되어 있다. 어찌 보면 주문 같기도 한 기묘한 문장들. 알고 보니 그것은 총 19편의 단편들 중 마지막 작품인 '교신'이었다. 마지막 작품이 제일 처음 나를 반긴다. 그것도 표지에서 대놓고, 하지만 은밀하게 숨어서. 그 깜찍한 은밀함을 발견한 기쁨으로 이미 첫인상은 합격점이다.

 

 

 

 

 

<경쾌하고 몽환적인 스타카토와 심호흡의 향연>

 고백하자면, 사실 나는 단편 소설을 별로 즐기지 않는 편이다. 장대하고 화려하고 복잡한 서사를 즐기기에, 서사나 플롯 보다는 '은유'에 치중하는 단편 소설은 전혀 내 취향이 아니다. 그리 두껍지 않은 이 책에는 무려 19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그러니 당연히 '은유'가 강한 작품들도 상당수이다. 그런데 그게 이상하게 싫지가 않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는 표현이 옳을 것 같다. 개별 작품들은 마치 스타카토처럼 짧은 호흡이 느껴진다. 그런데 한 작품을 그렇게 빨리 읽어내리고 나면 그를 음미하기 위한 긴긴 심호흡이 이어진다. 퀵퀵, 슬로우 슬로우. 마치 제목처럼 작가가 나를 리드하며 추는 춤 같다. 그 춤사위는 때론 경쾌하고, 때론 몽환적이다. 그렇게 그 춤에, 그녀의 이야기에 시나브로 빠져든다.

 

 

『 몸이 그렇게 가볍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더없이 해방되었다. 기쁨이 느껴지고, 음악이 들렸다. p.246 - 나와 춤을 』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허물어 빚어 낸 노스탤지어>

  가끔 새벽에 잠 못 들 때, 혹은 새벽에 잠이 깨었을 때 갑자기 찾아오는 적막감을 달래려 TV를 켜 채널을 이리 저리 바꿔 보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하루는 문득 어떤 프로그램의 배경 음악이 너무 좋아 TV 화면에, 아니 그 음악에 잔뜩 취해 넋을 잃었던 적이 있다. 새벽이면 으레 찾아오는 센치함의 절정 때문이었는지 흔히 듣던 가요나 팝과는 너무 다른 제 3 세계 음악(아마 아일랜드 음악이었던 것 같다.)의 몽환성 때문이었는지 나는 그만 그 순간 감성이 폭발하여 울고 말았다. 그날 그 감성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곰곰 생각해 보니 그것은 바로 오랫동안 고향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다 보니 늘 가슴 한켠에 존재하면서도 애써 잊고 지냈던 향수와 이젠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 대한 향수였다. 이젠 내 힘으로 어찌하지 못하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원시에의 노스탤지어.

 이 작품들 중 상당수를 읽으며 나는 다시 한번 그날 새벽에 느꼈던 것과 비슷한 향수를 느꼈다. 아마도 먼 미래의 어느날이 배경인 듯한 '소녀계 만다라'에서는 시간 뿐만 아니라 공간 까지도 움직이고 있음을 묘사한다. '타이페이 소야곡'과 '화성의 운하'는 과거라는 시간이 특정 장소로 인물들을 이끌고, 다시 그 장소가 과거로 인물들을 되돌린다. '성스러운 범람'과 '바다의 거품에서 태어나', '꼭두서니 빛 비치는'등의 작품들에선 과거에 찍힌 사진 한장이 우리를 그 사진 속 장소와 시간으로 끌어들였다 다시 내놓기도 한다. 이렇게 작가는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아주 가볍게 허물고 무너뜨린다. 그리고 그것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원시에의 향수를 아주 멋지게 빚어낸다. 아아, 참으로 부럽고도 탐나는 재능. 때문에 이런 작품과 이를 써 낸 작가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질투와 동경을 감출 수가 없다.

 

<온다 리쿠, 그녀와 점프, 점프, 점프.>

  친근하지만 또한 낯설었던 온다 리쿠, 그녀에게 나는 이렇게 첫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19편의 단편 중에는 그녀의 다른 작품들의 후일담 같은 것들이 몇 편 있다. 나는 그 작품들을 전혀 모르는데..... 때문에 공통 화제를 찾지 못해 대화 중 때때로 어색함이 끼어드는 것처럼 아직은 그녀와 조금 데면데면하기도 하다. 그 어색함을 어서 떨쳐 버리고 싶기에, 이제 그녀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 봐야겠다. 그럼 그녀는 내게 다시 멋진 춤을 청하리라. 그렇게 작가인 그녀와 독자인 나는 함께 점프, 점프, 점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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