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맞이언덕의 안개
김성종 지음 / 새움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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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103 안개가 지독해요. 하지만 모든 걸 가려줘서 좋아요.

 

 

 

학창 시절 처음 '무진 기행'이라는 소설을 접했을 때의 충격 비슷한 것을 나는 여전히 잊지 못한다. 당시 나는 아주 어렸고, 또한 순진했기에 어딘지 퇴폐적으로 느껴졌던 작품 속 주인공의 일탈, 그리고 어쩌면 그의 일탈을 가능하게 했을 무진의 명물인 안개의 이미지가 아주 오랫동안 내게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렇게 '안개'라는 그 뿌연 속성 때문에 일탈이나, 은폐, 관능 같은 것을 떠올리게 한다.

 

부산 해운대 근처의 달맞이 언덕이란 곳은 여름이면 늘상 안개가 자욱하다 한다. 그곳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유명한 추리소설 작가 노준기(실제로 작가인 김성종씨도 이 곳에 추리문학관이란 곳을 지어 살고 있다.). 그는 70세가 넘은 고령으로, 예쁜 여자엔(특히 어리고 예쁜 여자) 맥을 못추는, 여태 잠자리를 같이 한 여자가 수백인 엄청난 호색한이다. 여기 실린 25편의 단편은 그 노준기라는 추리 소설 작가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 사기사건, 그의 과거 등의 이야기이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안개'라는 소재와 아주 적절히 버무려지고 묘사되는 묘한 소설.

 

솔직히 말하자면 추리소설적인 요소가 강한 편은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노준기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한 '안개'를 소재로 한 '일상 미스터리 시리즈.' 때문에 '본격 추리 소설'을 기대하고 책을 펼쳤던 나는 초반에 조금 당혹스러웠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장이 무섭게 넘어간다. 단편이기에 한편 한편의 호흡이 스타카토처럼 펼쳐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주인공인 '노준기' 때문일 것이다. 정말 내 스타일 아닌 변태 영감탱이임에도 묘하게 매력적이던 노준기. 그의 과거속엔 우리 아픈 현대사가 있었고, 그의 기행 속엔 인간의 본능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때문에 읽는 중간 중간 자주 웃음을 터뜨리며, 결국 작품 말미에선 그에게 애정이 생겨버리고 만다. 마치 우리도 모르는 새에 슬그머니 다가와 온 몸을 휘감아 버리는 치명적이게 매혹적인 안개처럼 말이다.

 

추리도 있고, 스릴도 있고, 관능도 있고, 역사도 있고, 여운도 있던 안개 같은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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