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렁커 - 제2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고은규 지음 / 뿔(웅진)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Trunker : 멀쩡한 집 놔두고 트렁크에서 자는 사람

 

제목부터 눈길을 끈다.​
멀쩡한 집 놔두고 차 트렁크에서 자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인간들이란 말인가?!
놀랍게도 그들은 '슬트모(슬리핑 트렁커들의 모임)'라는 동호회까지​ 조직하여 활동하며, 온라인 회원은 988명. 회원 가입은 기존 회원의 추천으로만 이루어진다 한다. 비가입 회원까지 감안하면 5000여 명으로 추산한다고.....(물론 소설안에서^^;)

 

'이온두'라는 여자가 있다. 그녀는 잘 나가는 유모차 판매원이다.​ 유모차에 대한 논문을 쓰기 위해 학자들이 그녀에게 조언을 구할 정도로 베테랑이다. 그러나 그녀는 까질하다. 그것도 매우 많이. 그런 그녀의 태도에 손님들은 불만을 품고 자주 온두와 말다툼을 하지만 결국 그들에게 꼭 맞는 유모차를 구입해 만족하며 돌아간다. 그렇게 유모차 판매일을 마치고 퇴근하면 온두는 집에 돌아가 나름 정성스럽게 저녁을 해 먹는다. 그리고 수면 가방을 들고 온두의 차가 세워져 있는 아파트 근처의 공터로 간다. 온두는 그 차의 트렁크에서 잠을 잔다. 새벽 일찍 일어나 다시 집으로 돌아가 아침을 먹고 출근을 한다. 도대체 왜....?!

 

『 p.44 트렁크에 오늘 하루를 밀폐시키면 좋겠어. 어제가 돼버린 기억들이 빠져나오지 못하게. 그렇다면 내일은 오늘과 다르게 순조로울 것 같아. 』

 

그런데 어느날.....​ 온두의 차(정확히 말하면 트렁크) 옆에 다른 차(역시 정확하게 말하면 트렁크)가 등장한다. 먼저 정착해 있는 슬트가 있다면 거리를 두고 주차해야한다는 슬트의 규칙을 깨고 말이다. 하지만 온두는 이를 따질 수 없다. 이 차의 주인은 공터의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차를 빼달라 하면 그녀는 갈 곳이 없어지므로. 그래서 온두답지 않게 (나름) 상냥하게 그를 대한다. 그의 이름은 '이름'이라한다. 이름이 '이름'이라니! 온두와 이름은 매일밤 차 앞에 매트를 깔고 이름이 만든 '치킨차차차'라는 기억력 증진 게임을 한다. 그리고 게임에서 진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씩 털어놓는다.

 

 

『 p.232 목적을 가지고 움직일 수 있단 건 행복한 일이에요. 』​

 

온두는 과거 기억이 별로 없다. 아니 있는데 그게 정말 온두의 과거인지, 온두가 마음대로 꾸며낸 이야기인지 본인 조차 구분 할 수가 없다. 이름에게 처음 게임에서 졌을 때도 온두는 진짜 기억과 거짓을 섞어 이름에게 들려준다. 그녀는 어쩌다 과거를 잊게 되었을까? 그녀는 어쩌다 자신의 진짜 이야기를 하지 못하게 되었을까? ​이름은 중지 손가락 마디가 하나 없다. 이름은 그의 이야기를 전부 온두에게 털어놓는다. 그런 이름의 이야기를 들으며 온두 또한 그녀의 진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가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기 시작한다.

 

『 p.234 사람이나 건물이나 몸과 마음이 기우는 쪽이 있어요. 그 끌림이 사랑일 때도 있고, 증오나 분노일 때도 있죠. 무너질 것들은 서둘러 무너져라. 그것이 내 생각입니다. 다른 밸런시스트들과는 생각이 다르죠.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는 건 옳지 않다고 봅니다. 』

 

온두와...그리고 이름의 과거 이야기는 참으로 아팠다. 그들의 대화나 개성 강한 성격은 통통 튀며 유쾌한데도 그들의 속 깊은 이야기는 뼈저리게 아팠다. ​마음 속에 아픈 상처 하나쯤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냐만은....그럼에도 그들의 이야기는 참 많이도 아팠다. 그래도....아무리 아파도 우리는 살아가야한다. 그리고 고통과 상처를 인정하고 맞서야 한다. 온두와 이름은 트렁크라는 공간에 숨 쉴 공간을 마련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갔고, 서로의 이야기를 털어 놓으며 고통과 상처에 맞섰다. 어쩌면 그들의 상처는 영원히 치유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금씩 조금씩 무뎌지지 않겠는가?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나 또한 아팠고, 하지만 위로 받았고, 그래서 따뜻해졌다.

 

『 p.252 나는 경주에 있는 모든 탑을 조사했습니다. 그중 균형을 제대로 잡고 있는 탑이 몇 개인 줄 아세요. 완벽한 균형은 없었어요. 모두 조금씩 기울고, 비틀어진 상태예요. 탑뿐 아니라 현대식 건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눈은 그걸 확인하지 못할 뿐이죠. 』​

 

세상에 오롯이 행복하기만 한 삶을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들 조금씩 기울어진 채로, 균형을 잡아 살아가는 것이겠지.

 

 

 

(덧붙임)
희비극을 아우르는 문체나 온두의 과거 이야기에선 천명관 작가의 느낌이, 이야기가 전하려는 전체적인 메시지와 여운에선 정유정 작​가의 느낌이 났다. 어설프게 비슷한 느낌이 아니라 두 작가의 장점이 조금씩 잘 버무려진 느낌이랄까.....작가 본인이야 이렇게 다른 작가들과 비교하여 말하면 기분 나빠할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나는 그런 어우러짐이 싫지 않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