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김영하 작가가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김영하 작가는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행복해지기
위해 ‘감성 근육’을 키우라는 조언을 했지요. ‘감성 근육’이 없는 사람은 뭔가를 느끼려 해도 쉽게 피곤해진다며 ‘감성 근육’을 키우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독서’라는 답을 제시했습니다. 참으로 소설가다운 답변이었고, 또한 굉장히 공감이 가는 명 강연이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보았습니다. 나는 탄탄한 ‘감성 근육’을 가지고 있는가? 그래서 나는 지금 행복한가? 제 ‘감성 근육’을 탄탄하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저는 책을 읽음으로, 특히 ‘소설’을 읽음으로 매우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의 성인 1년 평균 독서량이 10권도 안된다고 합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도 과거에 평균을 한없이 낮추는데 한 몫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1년에 책 한권을 읽을까 말까 했지요. 그야말로 ‘감성 근육’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었던 사람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1년에
50권 정도의 책을 읽습니다. 비록 읽는 책의 99퍼센트가 소설인, 지독한 편독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1년에 1권도 안 읽던 책인데, 이젠 저의
너무도 소중한 취미 생활이 독서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는 과정엔 저의 ‘감성 근육’을 단련시켜, 책을 읽는 행위 자체의 즐거움을 깨닫게 해준
소중한 몇 권의 소설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 소설들을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관점에서 말입니다.
[미야베 미유키 – 모방범] 起 - 장르 소설에 눈뜨다.
제가 처음 책과 친해지게 된 결정적
계기는 장르소설을 읽은 것이었습니다. 한때(지금도 그러하지만) 한창 일본 추리 소설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지요. 초동급부에 귀가 얇은 저는
‘어디 그럼 나도 한번?’이란 마음으로 일본 추리 소설을 읽어 보자 마음먹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히가시노게이고나 미야베미유키라는 작가의
소설들을 권하더군요. 그래서 저와 마주하게 된 소설이 바로 ‘모방범’입니다. 그즈음 ‘추격자’라는 영화가 흥행했었고, 그 영화를 굉장히 인상
깊게 보았기에 ‘모방범’이 더욱 궁금했습니다. 사실 저는 여전히 이 소설을 ‘추리 소설’로 분류해야하나 의문입니다. 제가 느끼기엔 굉장히 잘
쓰여진 사회소설 같았거든요. 며칠 전에도 팔달산에서 토막 난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무서운 소식이 있었지요. 우리는 이렇게 내 주변에선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는 살인사건을 뉴스에서 자주 접하곤 합니다. 이 소설은 여타 다른 추리 소설들처럼 살인 사건의 범인은 누구인가? 왜
죽였는가? 등의 답을 찾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난 후의 우리 사회의 모습을 굉장히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즉
그러한 사건 후 피해자의 가족(유족이라 해야겠지요.)과 주변 사람들이 겪는 이야기, 범인을 쫓는 경찰과 그 주변의 이야기, 사건의 진실을
보도하려는 기자와 그 주변의 이야기, 사건의 용의자와 그 주변의 이야기들이 매우 리얼하게 묘사됩니다. 그리고 그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으나,
분명 이런 사건으로 트라우마를 겪을 일반 대중들의 이야기까지 묘사합니다. 바로 이 점이 저는 가장 공감이 가는 부분이었고, 그래서 상당한
공포심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러하였기에 1년에 책 1권도 제대로 읽지 못하던 제가 1800페이지라는 어머어마한 분량의 책을 단숨에 독파해
버렸습니다. ‘무서운데 재미있다.’ 이런 모순을 두고 친구가 저에게 묻더군요. 그런 소설이 도대체 왜 재미있느냐구요. 글쎄요. 왜일까요? 공포나
두려움도 결국엔 인간의 본능적인 감정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장용민 – 궁극의 아이] 承 - 한국 장르 문학의 자존심을 만나다.
‘추리소설’이란 단어를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셜록홈즈, 히가시노게이고, 미야베미유키, 명탐정코난, 소년탐정김전일 등등의 답변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마
저 역시 이런 답변들을 내놓았을 겁니다. 대부분 일본의 것들이지요. ‘모방범’ 이후 저는 일본의 추리 소설들을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지요. 우리나라에는 이런 장르소설(사실, 이제 와서 밝히는 거지만 저는 이렇게 ‘장르’라는 단어를 넣어 선긋기를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소설은 그냥 모두 소설인 것이지 ‘순수’네 ‘장르’네 구분하는 것 자체가 참 마음에 들지 않지만 편의상 계속
사용하겠습니다.)이 없는 것일까? 이왕이면 친숙한 우리 소설을 읽고 싶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할 즈음 만나게 된 소설이 바로 장용민 작가의
‘궁극의 아이’입니다. 주인공은 ‘신가야’라는 한국인이지만 소설의 모든 배경과 다른 인물들은 여러 외국과 외국인인 독특한 소설이었습니다. 이
소설에는 소설이 독자에게 줄 수 있는 거의 모든 ‘재미’가 담겨 있습니다.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그렇고, 치밀한 플롯이 그렇고, 사회적인 메시지가
그렇고, 결말의 통쾌함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제가 느끼기에는 그러한 모든 것들이 일본의 장르 소설들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습니다. 너무도
세련됐고, 너무도 매력적이고, 결정적으로 너무도 재미있었으니까요. 저는 독서는 곧 휴식이고 오락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저에겐 ‘재미있는’
책이 가장 훌륭한 책이지요. 이런 이유로 ‘궁극의 아이’는 제게 매우 훌륭한 책입니다. 그리고 분명 일본 추리 소설을 즐겨 읽으면서도 ‘우리
소설도 결코 일본 소설에지지 않아!’ 하는 참 유치한 자존심을 지켜준 소설이기도 하니까요.
[무라카미 하루키 – 여자 없는 남자들] 轉 - 견고했던 선입견에서 벗어나다.
10년도 훨씬
전부터 불기 시작한 하루키 신드롬은 여전하네요. 아니 오히려 더욱 뜨거워진 것도 같습니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제가 귀가 얇은지라 한창 ‘상실의
시대’가 붐을 일으켰던 때 저도 친구 따라 강남 가듯 그 소설을 읽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너무 어렸던 걸까요? 아니면 감성 근육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했던 걸까요? 제겐 너무도 어렵고, 낯설고 거칠고, 그래서 이 작가는 결코 나하고는 친해질 수 없겠구나 싶었습니다. 저는 첫인상이란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람도, 그리고 책도 말이지요. 이런 부정적인 첫인상 덕에 하루키라는 작가는 제게 늘 철저하게 관심 밖의
작가였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이립(而立)의 나이를 훌쩍 넘긴 올해 여름 하루키의 소설이 읽고 싶어졌던 겁니다. 그냥 느닷없이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말이지요. 어쩌면 확고하게 자리 잡은 선입견이 혹시 졸렬한 아집은 아니었을까 싶은 마음이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오랜만에 다시
만난 하루키에게 놀랍게도 저는 친근감을 느꼈습니다. 상실의 시대에서 느꼈던 낯섦이 이제는 친숙함으로 느껴졌던 겁니다. 저는 하루키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우리 현실의 모습이 ‘모순’과 ‘공허’라고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에는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그의 소설을 기피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이립을 훌쩍 넘긴 나이이기에 지금은 오히려 솔직한 그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그로 인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저는
하루키의 소설을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마주할 수 있는 감성 근육을 갖게 되었습니다.
[천명관 – 고래] 結 - 진정한 ‘이야기꾼’의 종결자, 그것은 천명관의 법칙이었다.
혹시 각종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한국 소설 추천’ 이라고 검색하면 보이는 가장 많은 답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천명관 작가의 ‘고래’라는
소설입니다. 이 소설에 대한 감상을 한 단어로 표현해 보자면 그것은 바로 ‘놀라움’입니다. 일단 날 것 그대로의 거친 문장이 놀라웠고, 끊임없이
이어지고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 서사가 놀라웠고, 어느 소설 속에서도 보지 못한 독특한 문체가 놀라웠고, 희극인지 비극인지 판단하기 애매한 낯섦이
또한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놀라운 것은 이 소설이 문학 공모전 수상작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분명 그동안 접했던 여러 (순수)문학상
수상작들하고는 전혀 다른 작품이었으니까요. 그런 낯섦과 신선함이 좋았습니다. 메타포니 뭐니 해도 일단 소설은 ‘이야기’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서사에 충실한 소설들이 좋습니다. 게다가 이 ‘고래’라는 작품은 소설의 기본적인 서사에 충실하면서도 그 서사를 풀어내는 방식은 또한
굉장히 신선하니까요. 저는 아직 ‘고래’를 읽지 않은 많은 사람들에게 늘 ‘고래’를 읽어 볼 것을 적극 권하곤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제게
간단한 줄거리를 말해 달라 하지요. 하지만 저는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과연 어느 누가 ‘고래’라는 소설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줄여 소개할 수
있을까요? 이는 아마 천명관 작가 본인조차도 불가능한 일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고래’라는 작품은 이야기라는 용암이 폭발하는 활화산
같은 소설입니다.
어떤 책 속에서 ‘상냥함은 상상력이다.’라는 구절을 본 적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희노애락애오욕’을 보았을 때 그 사람의 감정을
상상해 보고, 이해하고, 그에 공감하는 것. 그것이 바로 상냥함이고 그래서 ‘상냥함은 곧 상상력’이라고 한 것이 아닐까 저는 생각했습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희노애락애오욕’이라는 인간의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감정들을 잘 느낄 수 있어야 인간은
행복해진다고도 생각합니다. 아마 김영하 작가가 말한 ‘감성 근육’이라는 것도 ‘희노애애락애오욕’과 같은 감정에 충실 하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감성 근육을 단련시키기 위해, 그리고 조금 더 상냥해지기 위해, 그래서 더욱 행복해지기 위해 오늘도 소설을
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