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천명관 지음 / 창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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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9 어차피 섹시하지 않은 것들은 모두 사라지게 되어 있다. (봄, 사자의 서) 』

『 p.60 스티브 잡스는 어떻게 해야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지 그 비밀을 알고 있는 것 같다. 그 핵심은 바로 아름다움이며 세상은 이제 아름다운 것만이 윤리적인 것이 되었다. (왕들의 무덤) 』

 

오래 기다리던 천명관 작가의 신간이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굉장히 기뻤지만, 한편으론 단편집이라서 아쉽기도 했다.
(나는 소설은 은유보단 플롯이라 생각해 장편을 훨씬 선호한다. 게다가 천명관 작가는 타고난 이야기꾼인지라 확실히 단편보단 장편에서 그 진가를 발휘하기에.....)

하지만 천명관 스타일이 어디 가겠는가?

곡절 많은 주인공들의 한 많은 인생 이야기를 참으로 가볍기 그지없게 재치 넘치는 그만의 문체로 풀어낸다.
역시 천명관은 희비극 소설의 정수이다.

 

사실 그의 문장들은 상당히 남성적이고 거칠어서 여자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을 스타일이다.
나 또한 그런 마초적인 문장들은 좋아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묘하게 천명관 작가의 문장들은 싫지가 않다. 왜 그럴까 생각해봤는데 아마도 내용은 한없이 비극적인데, 그를 이야기하는 문체는 참으로 희극적이어서 슬프되 슬프지 않고, 거칠되 거칠지 않아 거부감이 생기지 않기 때문인듯하다. 거부감은 커녕 그 문체가 너무도 중독적이어서 읽고 또 읽게 만들기도 하니까 말이다.

다만 단편이어서 그런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처음엔 이게 뭔가 싶다가 읽다보면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 나오다가 막판엔 깔깔 웃을 수 밖에 없는 천명관식 재기발랄 나열식 만연체를 많이 접할 수 없어 그점만큼은 아쉬웠다. 8편 중 김유정의 동백꽃에 대한 오마주인 "동백꽃"과 "우이동의 봄" 제일 그 스타일에 가까웠고, 그래서 8편 중 제일 마음에 들었던 것도 바로 이 두편이었다.

8편의 단편 과 주인공들을 간단히 소개해 보자면 이렇다.

1. 봄, 사자의 서 - 노숙자인 실직 가장
2. 동백꽃 - 외사랑의 덫에 빠진 섬 처녀
3. 왕들의 무덤 - 한물 간 유부녀 중년 작가
4. 파충류의 밤 - 심각한 불면증에 시달리는 프리랜서
5.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 노동자 -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육체 노동자
6. 전원 교향곡 - 귀농에 실패한 이혼남
7. 핑크 - 대리 운전 기사
8. 우이동의 봄 - 가난한 70대 노인과 고졸의 손자


다들 힘겹게 하루 하루를 버티듯 살아가는 우리네 하층민들이며 소시민들이다.

 

『 p.110 고기는 질기고 소주는 쓰지만, 인생은 그마저도 달달하게 느껴질 만큼 쓰디 쓰다.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 노동자) 』
『 p.125 이 바닥에서 돈 내면 사장님이고 개털이면 개새끼였다. 그런거였다.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 노동자) 』

 

해피엔딩이라곤 없는 그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답답해지기도 하고 울컥 화도 난다. 내 이야기 같아서 한숨도 나고 코끝이 찡해지기도 한다. 그런데 왠일인지 마지막 이야기인 '우이동의 봄'까지 읽고 나선 미소가 지어지며 마음은 따뜻해지고 나도 모르게 "좋다."라고 뱉어내게 된다.

 

 

봄으로 시작해서 결국 봄으로 끝나는 이야기.

하지만 첫 이야기의 봄과 마지막 이야기의 봄은 사뭇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 이야기인 봄은 죽음과 절망의 계절인데, 마지막 이야기에서의 봄은 희망의 의미로 전환된다.

8편의 이야기의 구성과 순서가 왜 이러해야만 했는지 마지막 이야기인 '우이동의봄'까지 읽고 나면 자연스레 수긍을 하게 된다.

 

즉, 작가는 결코 아름답지도 즐겁지도 않은, 오히려 처절하고 절박하기만 한 우리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선, 누구나 인생은 매한가지이니 억울해하거나 슬퍼하지말고 한번 잘 버티며 즐기며 살아가 보자는 희망을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 p.182 얘야, 잊지 마라. 사는 건 누구나 매한가지란다. 그러니 딱히 억울해할 일도 없고 유난 떨 일도 없단다. (우이동의 봄) 』

 

독자에게 책을 읽는 중엔 웃음을, 책을 읽고 난 후엔 큰 울림을 안기는 작가.
역시 천명관 작품은 좋다^^


덧) 한 인터뷰에서 보아하니 역시 "핑크"라는 소설은 작가가 장르로 써보자 작정하고 쓴 것이었다. 작가는 10년쯤 후에 문단에서는 은퇴를 하고 한국형 범죄소설을 쓰며 지내고 싶으시단다. 아무래도 문단안에 소속되어 있을 땐 제약이 많을테니...... 천명관의 범죄소설이라니 이 얼마나 설레는 단어인가? 작가님 빨리 늙으시라 고사라도 지내고팠지만, 그럼 나도 같이 늙어간다는 슬픈 함정 ㅠㅠ


『 p.221 어느 인터뷰에서 한 말이 생각나는군요. '세상을 떠났을 때 자신의 묘비명에 어떤 문구가 새겨지길 원하느냐"는 질문이었는데 저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작가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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