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솔린 생활
이사카 고타로 지음, 오유리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1월
평점 :
절판


연말이 다가오며 축축 처지는 나를 위해 힐링과 유쾌함이 필요한 시기.

해서 아껴두었던 이제 몇 편 남지 않은 이사카코타로 책을 폈다.

(예정된 신간 출간 소식이 속속 들리는지라 그만 아껴 읽어도 되겠다 싶어서.)

 

이 책의 역자인 오유리씨는 역자 후기에서 자신을 이사카 빠(!)라고 지칭했던데, 나 역시 오유리씨 못지 않은 이사카 빠(!)이다.

이사카코타로가 왜 좋으냐고 묻는다면, 여타 다른 이사카 빠들이 그렇듯 나 역시 개성 강한 인물, 치밀한 복선과 플롯, 쿨내나는 대사, 유쾌한 사건 전개, 따뜻한 결말, 여운있는 메시지 등이라 식상하게 말하겠다.

식상해도 그게 사실이니까.

 

 

2011년 일본에서 대지진이 났을때, 굉장한 피해를 입었던 곳 중 하나가 센다이시였다.

이사카코타로는 센다이에 거주하고 있으며, 그의 작품 대부분의 배경이 또한 센다이이다.

때문에 그 큰 재해를 바로 눈앞에서 지켜보았고(물론 작가가 직접 겪기도), 작가라는 직업이 참으로 허망하게 느껴졌다 한다.

그러다 문득 그럼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해 "재미있는" 글을 써보자, 그게 작가의 본분이 아닐까 깨달았다 한다.

그리하여 탄생한 작품이 바로 "가솔린 생활"이다.

 

 

모치즈키가의 장남인 요시오와 차남인 도루는 쇼핑하고 돌아오는 길에 센다이의 유명인사인 여배우 아라키미도리를 우연히 차에 태우게된다. 그런데 다음날 그 아라키미도리가 터널사고로(영국 다이애나 비 사고와 매우 흡사한 사건) 죽고 만다. 사고 전날 아라키미도리를 태웠다는 이유로 한 기자와 인터뷰를 하게 되고, 이사카코타로 소설 속 여느 주인공들처럼 오지랖을 200% 발휘하는 주인공(이 소설에선 초등학생인 도루) 덕에 사건은 점점 복잡해져만간다.

 

 

 

 

 

  이사카코타로의 소설 속 인물들은 워낙 개성이 강하고 평범한 사람이라고는 없는데(그렇다고 또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영웅도 아니다.) 이 소설의 경우는 서술자가 다름아닌 초록색 경차로, 마쯔다사에서 나온 데미오라는 차종이다.(여기에도 얽힌 사연이 있는데, 처음에 편집자가 후에 혹시 자동차 회사에서 책을 읽고 차 한대 내어 줄지 모르니 비싼 외제차로 하자는 걸 이사카코타로는 초등학생까지 술술 재미있게 읽으려면 친근한 국산차가 좋을것이라며 데미오를 골랐다한다.) 이는 얼마전에 출간된 "밤의나라쿠파"의 서술자였던 "톰"과 비슷하지만, 톰 같은 경우는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그들의 대화나 행동을 관찰할 수 있었던 반면 데미오는 무생물이기에 상당한 제약을 갖고 있다. 즉, 이 소설은 오로지 차들끼리의 대화와(배기가스가 닿는 범위내에선 모든 차들은 그들끼리 대화가 가능하다.) 차안에서 주고받는 사람들의 대화만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때문에 한창 사건이 전개되나......싶을때 종종 사람들이 차에서 내려버려 데미오 못지 않게 독자들은 궁금증에 휩싸이게 되고, 안달이 나게 된다. 상당한 두께임에도 책장이 빠른 속도로 넘어가게 되는 포인트는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역시 인물들 얘기를 안할 수 없겠다. 여타 이사카코타로 소설들이 다 그렇듯 모든 인물들이 개성이 강해 누구 하나 매력적이지 않은 캐릭터가 없지만, 내게 가장 매력적이었던 인물은 역시 '도루'였다. 초등학생 답지 않은 방대한 상식을 자랑하며 어린애다운 귀염성이라곤 눈꼽만치도 없는, 그래서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다고 본인 스스로 당당하게 밝히는, 데미오와 함께 이 소설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며 사건의 탐정 역할을 하는 도루. 전혀 귀염성이 없는 면이 참으로 귀여웠다고 하면 모순이려나? ^^; 그외, 이름처럼 착한 사람 요시오, 쿨내가 심한 나머지 위기 상황에서도 유머를 던지는 이쿠코, 모치즈키가의 옆집에 사는 초등학교 교장 선생인 호소미, 호소미의 오래된 자가용 자파(개인적으론 자파도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참 수다스러운것이...ㅋㅋ;) 다들 말도 안되게 개성 강하고 매력적인 인물들이다. 이런 인물들이 아기자기한 조화를 이루어가며 사건 또한 흥미진진해진다.

 

 

 

  이사카코타로의 스타일은 참 시덥잖아 보이는 사소한 떡밥(작은 소품 하나, 그냥 스치듯 던져놓는 대사 하나 등)을 잔뜩 뿌려놓은 후에 막판에 한방에 모든 것을 거둬들이는 식이다. 이 작품에서도 역시 그런 떡밥은 여기저기 뿌려져 있었고, 또한 다른 작품들에 비해 그 떡밥이 조금은 노골적인(?) 경향도 있었기에 이사카코타로의 작품들에 이미 익숙해저버린 독자들이라면 어느 정도의 사건 전개와 반전을 중간쯤에 접어들면 금새 눈치채게 될지도 모른다.(맞다. 내가 그랬다;;) 때문에 약간은 밍밍함 같은 것도 느껴져 아쉬움도 있었는데, 그런 아쉬움의 반쯤을 훅 날려버린 것은 깜찍하기 짝이 없는 에필로그였다. (그게 무엇이었는지는 스포가 될 수 있으므로 여기서 밝히진 않겠다.)

 

 

 

  나는 마지막 책장을 덮었을 때, 나의 안면 근육이 살짝 아팠으면 좋겠다. 무슨 말인고 하니, 책을 읽으면서 때때로 미소가 지어지며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는 것을 반복하다 보면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쯤이면 안면 근육이 살짝 당긴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뱉곤 한다. "좋다." 나는 이런 소설이 좋다. 그래서 이사카코타로가 좋다^^

 

 

 

덧 또는 팁) 독서할 때 음악을 들으며 독서하는 스타일이라면, 프랭크자파의 음악을 BGM 삼아 독서하면 좋을 것이다. 이 소설을 읽고 나면 그가 누군지 궁금해지며 그의 음악이 듣고 싶어질테니까.

 

 

 

 

 

 

 

p.24 호소미씨는 아침 조례 시간에 자주 아이들에게 말하는 모양이야. `잘 들어라. 인간들이 하는 짓 중 구십구 퍼센트는 실패다. 그러니 무슨 일을 하든 망설이거나 창피해할 필요는 없다. 실패하는 게 보통이니까 밀이다.`라고 말이야.

p.64 인간은 혹시나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뭐든 보유하려고 하지. 그러니 쓸데없는 것들이 죽을 때까지 쌓여 있단 말이야.

p.290 "본인보다 나이가 어리고 덩치가 작다고 해서 아이가 어른보다 어리석다고는 볼 수 없다. 때 묻지 않은 직감이 얼마나 큰 힘을 갖는지 어른들은 깜빡하는 거다."라고 프랭크 자파가 말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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