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나방
장용민 지음 / 엘릭시르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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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궁극의 아이>라는 소설을 읽고 나는 생각했었다. 일본의 추리 소설이 판을 치는 출판계에서 크게 주목받지도 돋보이지도 못하는 국내 장르 소설의 자존심과 같은 존재는 장용민 작가라고. 그만큼 <궁극의 아이>를 처음 읽었을 때의 그 (좋은 의미에서의) 충격과 만족감은 대단한 것이었다. 게다가 작가는 1년에 1편씩 신작을 내놓을 거라고 하니 차기작에 대한 기대감과 설렘은 또 얼마나 컸던가. 하지만 1년 후 차기작으로 나온 <불로의 인형>은 재미는 있었으나, 장용민 작가에 대한 크나큰 기대를 완전히 충족시켜 주지는 못했다. 어마어마한 스케일과 미친 듯이 책장을 넘기게 되는 페이지터너로서의 작가의 역량은 여전했지만, 소설 속 상황들이 너무나 작위적으로, 억지스럽게 느껴졌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장용민 작가를 국내 장르 소설의 자존심이라고 생각했기에 다시 1년 뒤에 나오게 될 신작을 기대와 설렘을 가지고 기다렸다. 하지만 그 기다림은 예정되었던 1년을 넘고 2년 그리고 결국 4년을 훌쩍 넘어가고 차차 그의 신작을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게 되던 차였다. 드디어 4년 만에 그의 신작 소식이 들려왔다.


2002년부터 현재까지 방영되고 있는 신기한 TV 서프라이즈라는 프로그램에는 몇 가지 단골 소재가 있다. 그리고 그 단골 소재들 중에서도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건 단연 '히틀러'다. 어디 비단 서프라이즈뿐이겠는가. 전 세계의 소설 속, 영화 속에서도 히틀러는 단골손님이, 아니 단골 주인공이다. 히틀러만큼 유명하고, 영향력 있고, 악랄하고, 그렇기에 그보다 더 흥미로운 악인은 아마 없을 테니까. 음모론 좋아하는 호사가들 입맛에도 그는 최고로 구미를 당기는 소재일 터다. 그렇기에 역으로 히틀러라는 인물을 소설 속에 끌어들이는 것은 위험할지도 모른다. 분명 흥미롭지만 바꿔 말하면 닳고 닳은 소재이기에 지극히 식장해질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귀신 나방>의 프롤로그에서의 "아돌프 히틀러. 너를 내 부모와 형제, 그리고 인류의 이름으로 처단한다!"라는, 이 역시 어찌 보면 조금은 식상할 수 있는 대사에 흠칫하고 말았다. 그 긴긴 기다림 끝에 들고 나온 게 결국은 식상한 히틀러란 말인가. <불로의 인형>에서 느꼈던 그 작위성을 또 느끼면 어쩐단 말인가. 시중에 나와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과 경쟁해서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작가는 그만큼 자신감이 있다는 말일까? 뭐, 이런 여러 기우들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론 또 히틀러란 인물과 음모론에 상당한 흥미를 가진 독자이기에 기대감 역시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는,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오토 바우만이라는 전직 형사가 뮤지컬 극장에서 열일곱 소년인 애덤 스펜서의 머리에 총탄을 박아 넣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돌프 히틀러. 너를 내 부모와 형제, 그리고 인류의 이름으로 처단한다!"라는 대사와 함께. 그는 당연히 현장에서 체포되어 역시 당연하게도 사형 선고를 받는다. 하지만 왜 소년을 죽였는지는 털어놓지 않는다. 그러던 중 사형 집행 이틀을 앞두고 바우만은 크리스틴이라는, 퓰리처상까지 수상했으나 2년 전 한 사건 때문에 절필한 기자를 데려다 달라고 요구한다. 바우만은 크리스틴에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렇게 크리스틴과 함께 독자들은 바우만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된다.


바우만이 털어놓는 이야기에는 놀랍게도 히틀러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음모론 좋아하는 호사가들이 좋아하는 각종 소재들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 존 에프 케네디, FBI, 모사드, 그림자 정부...심지어 치정까지. 하지만 생각해보라, 눈코입을 각각 가장 예쁜 사람에게서 떼어와 만들어진 사람의 얼굴이 어떠한지. 사상 최고의 미녀가 탄생할 것 같지만 실상은 어색하기 짝이 없는 거부감을 일으키는 얼굴일 뿐이다. 그렇기에 이 작품 속 이 엄청난 소재들이 계속해서 등장할 때엔 또다시 기우가 앞섰다. 이러다 배가 산으로 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하지만 그건 역시 쓸데없는 기우일 뿐이었다. 이 수많은 소재들이 너무나 절묘하게, 그리고 맛들어지게 버무려 버리는 작가의 상상력과 필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해 보니 각종 소재들이 어우러져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것도 세상엔 존재하고 있었으니 그건 비빔밥이 아니던가. 


이 작품은 바로 그런 비빔밥과 닮은 작품이었다. 그리고 놀라운 건 첫 입부터 마지막 한 숟갈까지 숟가락질을 멈출 수 없을 정도로 정말 맛있는 비빔밥이라는 것이다. 바우만이 애덤의 머리에 총탄을 박어 넣는 순간부터 크리스틴이 안개 낀 거리에 홀로 남겨지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숨돌릴 틈도 없이 독자는 바우만과 크리스틴과 함께 내리 달릴 수밖에 없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똑똑한 독자들은 이미 뒷일을 그리고 결말을 미리 예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끝까지 방심하지 마시라. 만 4년 만에 신작을 내놓은 작가 또한 만만치 않은 상대일 테니.


그리고 그렇게 바우만과 크리스틴과 함께 내달리던 내가 가장 숨이 차올랐던 순간은 휘슬러가 린츠라는 시골 마을에서 어떤 일을 벌이던 순간이었다. 인간의 욕망에 쉽게도 흔들리는 자본주의의 민낯이 철저히 까발려지는 그 부분이 나는 정말이지 소름끼치고 공포스러웠다. 아마 그건 내가 뼛속까지 자본주의의 노예이기 때문에 그랬던 건지도 모를 일이다. 린츠에서의 일은 극히 일부일 뿐, 이 작품은 전반에서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인간의 뒤틀린욕망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휘슬러'는 지극히 극화된 인물일 뿐, 어쩜 자본주의에 찌들어 살아가는 우리는 이미 우리 주변에 산재되어 있는 '휘슬러'에게 휘둘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작가 장용민은 이 작품을 철저하게 엔터테인먼트 소설로 냈을 테지만, 그 안엔 내심 그런 자본주의에 물든 인간의 욕망에 대한 경계도 말하려 했던 게 아니었을까. 지극히 재미를 추구하는 오락 소설에 이런 걸 숨겨놓다니 참 영리한 작가임을 인정할 수밖에.



이 작품은 배경과 인물들 모두 대한민국과 동떨어져 있다. 대한민국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작가 이름을 보지 않고 책 내용만 본다면 아마 외국 작품으로 오해할 정도다. <궁극의 아이>에서도 주인공이 한국인이긴 했지만 일들은 전부 미국에서 벌어졌었다. 이러한 점들은 아마 해외 진출을 위한 노림수가 아닌가 싶다. <궁극의 아이> 같은 경우엔 해외에서의 반응도 상당히 좋았었다고 알고 있다. 앞에서 나는 장용민이 국내 장르 소설의 자존심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었다. 그리고 해외에서 한국 음식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는 건 역시 비빔밥이 아니던가. 맛있게 비벼진 비빔밥 같은 이 소설 역시 한국의 대표 음식 비빔밥처럼, 국내에서도 그리고 나아가 해외에서도 한국의 자존심을 지키며 그 명성을 떨치길, 한 사람의 독자로서 그리고 한국인으로서 응원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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