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나, 밀레나, 황홀한 경기문학 3
배수아 지음 / 테오리아 / 201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밀레나, 밀레나, 황홀한" 과 "영국식뒷마당" 이 담긴 얇고 가벼운 책. 산책에 들고 나갔다가 다 읽고 돌아왔다. 예전엔 그저 두툼해서 이야기가 길게 진행되는 책만 좋았는데, 요즘은 오히려 얇고 가벼운 책에 손이 더 간다. 친구나 버스를 기다리는 살짝 뜨는 시간에 읽기도 좋고, 어깨에도 부담스럽지 않기 때문. 일회용 밴드 한두 개 챙기듯이 항상 가방에 넣어 다니기 딱 좋다.


눈앞에 그려지는 듯한 아니, 정말 그 장면이 펼쳐지고 그 인물이 헛것처럼 보일 정도의 묘사에 반했다.

게다가 나와 닮은 부분이 보이는 이야기의 등장인물과는, 마치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 '맞아, 나도 그랬어'라고 동감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공감대가 만들어져서 더더욱 이야기에 빠져들 수 밖에 없었다.

길가 카페에 앉아 있을 때는 주로 희곡들을 읽는다...그때 그의 눈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자신들도 깨닫지 못하는 시이 그가 읽는 희곡을 즉흥적으로 공연하는 배우들이 된다.

이미 다 읽은 책들이 대부분이지만 몇 페이지만 읽은 후 책장에 꽂아 두고 잊어버린 책도 있고 절반쯤 읽다가 만 책, 너무 오래전에 읽어서 다시 읽으면 거의 새로운 독서라는 기분이 들게 하는 책, 그리고 아예 첫 페이지도 펼쳐 보지 않았으므로 정말로 새로운 독서가 되는 책도 있다.

게다가 더욱 결정적인 것은, 난 아무것도 아닌걸요. 영화감독이 아니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 어떤 측면에서 보아도, 난 철저하게 아무것도 아니에요. 재단의 임시직 비서였기 때문에 하는 말만은 아니에요. 어차피 6개월 계약이었던 그 일도 오늘로 끝났답니다. 오늘이 마지막 출근이었단 말이죠. 그러니 이제 난 더더욱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시간 낭비라니,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요? 그런 말은 나에게 해당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나는 어차피 시간이 없으니까요. 원래 의미의 시간은 나에게 처음부터 부여되지 않았어요. 내 시간은 그냥 밤뿐이니까요. 바로 지금처럼요. 오래오래 계속되는 밤. 영원히 끝나지 않는 밤. 내 시간은 보이지 않고, 불분명하고, 흐릿할 뿐. 가만히 있으면 나는 밤 속에서 연기처럼 흩어지고 점점 엷어지다가, 아무도 모르게 완전히 사라질 거예요.

사내아이처럼 마르고 길쭉한 몸매는 비현실의 종이처럼 엷고 부피감이 없었다. 너무 작고 말라서 종이로 만든 인형처럼 보였다...수십 수백 개의 작고 가벼운 종들이 아주 미세한 시차를 가지며 한꺼번에 울리는 듯했던 경희의 목소리...

믿을 수 없게도 담장 너머로는 초록이 눈부신 들판이 가득 펼쳐져 있었지. 나지막한 구릉들이 고요한 파도처럼 겹겹이 넘실대는 전원 풍경이었어... 숲 가장자리 텅 빈 오솔길 양 옆으로는 높이 솟은 사이프러스나무들이 움직이지 않는 불꽃처럼 짙은 초록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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