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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피라미드 - 세계문학전집 212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2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6월
평점 :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왕의 무덤이다. 실제로 그 안에 관이 있고 보물이 있고 왕의 미라가 있었다고 배웠다.(지금은 도굴되었거나 어딘가 안전한 곳으로 옮겨졌겠지만 말이다.) 이스마일 카다레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왕의 무덤을 왜 그렇게 거대하게 지었어야만 했는가?
언뜻 생각해보면 단순하게 대답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고인돌 같은 거대한 무덤을 보면 흔히들 하는 설명이 있지 않은가. 거대한 무덤은 무덤 주인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고, 크면 클수록 무덤 주인의 권위가 높았다 등등등. 이 소설은 조금 다른 답을 내놓는다. "피라미드는 거대한 묘소임에 틀림없지만, 그걸 만들게 된 원래의 의도에 무덤이나 죽음은 전혀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이다.
이집트의 쿠푸 왕은 자신의 피라미드를 짓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신하들에게 전한다. 하지만 신하들은 파라오에게 피라미드가 단순한 왕의 무덤이 아니라고 설명하며, 피라미드를 만들게 된 진짜 의도는 백성들의 에너지를 빨아먹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안락한 생활 탓에 사람들은 독립심과 훨씬 자유로운 정신을 갖게 되어 권위 일반에, 특히 파라오의 권위에 더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는 것을 깨달은 과거의 파라오와 정부 관료들은 어떻게 하면 백성들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거대한 피라미드를 쌓자는 아이디어를 고안해냈다. 즉, 피라미드가 왕의 무덤이라는 건 겉으로 드러낸 핑계일 뿐이고 실은 이집트 백성들이 안락하게 살지 못하도록 그들을 괴롭히기 위해 고안된 건축물이었다. 왕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크게 지은 게 아니라, 백성들을 크게 괴롭히기 위해 크게 지어야만 했던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4000년 전에 지어진 피라미드의 진짜 건축 의도를 알기는 어렵다. 오죽하면 외계인이 지었다는 설까지 나오겠는가. 그래서 이 소설은 피라미드의 건축 의도를 설명하는 이 지점에서부터 정치적인 우화로 나아가게 된다. 이집트의 실제 역사를 기반으로 한 소설이 아니라 피라미드라는 소재를 이용해서 독재자의 심리와 그로 인해 고통 받는 일반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내가 가장 인상깊게 읽었던 부분은 일반 민중들의 심리 변화였다. 쿠푸 왕의 피라미드가 곧 만들어질 예정이라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대부분 그 일을 피하려고 했다. 피라미드를 짓다가 자신의 인생이 끝날 수도 있는데 누군들 그 공사에 참여하고 싶을까.
그런데 피라미드 건설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 건설에는 어떠한 음모가 숨어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수도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음모와 연루되어 죽어나가고 있다는 이야기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진다. 일반 백성들은, 자신도 모르게 음모에 연루될까봐 너무 불안한 나머지 이렇게 생각하기에 이른다. 차라리 피라미드를 짓고 싶다! 얼른 공사가 시작되었으면 좋겠다!
이스마일 카다레는 이런 장면들을 통해 대중 선동 정치의 작동 원리를 보여준다. 작은 공포는 큰 공포로 덮으면 된다. 정치인들이 일반 대중들을 세뇌하는 것은 의외로 간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등골이 오싹해졌다.
피라미드를 바라보는 쿠푸 왕의 심리 변화도 재미있는 부분이다. 자신의 죽음을 상징하는 거대한 피라미드를 보면서 쿠푸 왕은 서서히 미쳐간다.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든 대피라미드의 주인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죽음 앞에 나약한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이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아무튼 독재는 나쁜 거야'라는 단순한 메시지 대신 '도대체 인간이란 왜 이렇게 생겨먹은 존재일까'를 고민하게 만드는 복잡미묘한 소설이다.
이스마일 카다레는 이 소설을 통해 그의 조국 알바니아의 정치를 비판하고 있다고 한다. 알바니아는 나에게 너무 생소한 국가고 그곳의 정치에 대해서는 더욱더 무지했다. 이 소설을 읽고 나서 알바니아라는 곳에 대해 궁금해졌다. 이런 게 문학이 가진 힘이라고 생각한다. 이야기와 상징을 통해 은근하게 말을 걸어온다. 내가 몰랐던 세계에 대해 좀더 알고싶지 않느냐고 말이다. 내 대답은 언제나 '예스'다. 알바니아와 이스마일 카다레에 대해 좀더 알고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