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여행자의 밥벌이 다반사
유진아 지음 / 지음지기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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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에 한 번씩 직업을 바꾸면서 살아가는 것이 꿈이었던 시절이 있었다세상은 넓고, 직업은 다양한데, 죽으면 다시 태어날지 아닐지 불확실한 이 세상에서 평생 하나의 직업에 종사하다 죽는 것은 왠지 억울할 것 같았다. 3년은 좀 짧고, 10년은 너무 긴 것 같으니 5년마다 직업을 바꾸면 충분히 재미있는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20대 초반이었다.

 

20여 년이 지나, 툭하면 지인들과 이직, 퇴사, 투잡, 100세 시대의 새로운 직업 준비를 논하는 40대 중반의 중년이 되었다. 인구의 급격한 감소에 큰 영향을 받는 직종에 종사하다 보니, 이직이나 직종 변환에 대한 이야기는 자발적인 것, 즐거움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언젠가 밀려날 때를 위한 것,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던 중 이 책을 읽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탈북학생 대안학교, 위탁형 대안학교, 대학교까지 각종 학교를 도장 깨기하고, 의료용 SW회사, 출판사, 외교부 산하 공공기관에서 근무했으며, 강사, 퍼실리테이터, 시험감독관, 편집자, 연구원으로 모자라 이제는 일인 출판사를 오픈한 유진아 작가의 <직업 여행자의 밥벌이 다반사>를.

 

이 책의 매력은 다면적이다. 당장 이직이나 퇴사를 꿈꾸는 이들에게 이 책은 꽤 유용한 실용서가 될 것이다. 저자가 경험한 다양한 직종의 장단점을 가늠해볼 수 있는 정보, 소위 ‘N잡러가 되기 위해 필요한 마음가짐에 대한 조언, 심지어 백수가 되었을 때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꿀알바정보 및 생존법이 가득 실려있다.

한편, 당장은 아니지만 이직 또는 퇴사를 염두에 두거나, 또는 현재 자신이 종사하는 직업의 의미에 대해 성찰해본 지 오래된 나 같은 이들에게 이 책은 한 걸음 물러나 스스로의 현재를 돌아볼 수 있게 하는 울림있는 에세이다. 내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가만히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무엇보다, 이 책은 상당히 재미있는 여행담이다. 오랜 여행을 다녀온 친구가 글세, 거기에서 어떤 일도 있었냐면 말이야...”하고 풀어놓는 직업세계의 천일야화를 듣는 기분이기도 하다. 가망성 없는 사업에 매달려 있는, 그러나 월급은 빚을 내서라도 주는 사장에게 당신은 이 일을 그만 두는 것이 낫겠다를 설득하는 보고서를 작성해서 제출해 사장에게 감사 인사를 받은 한편 (그로 인해 사장이 회사를 폐업했으므로) 해고통지를 받은 장면(정확히는, 그러고 나서 다른 사업은 잘 하려나하고 사장의 미래를 염려하는 장면)은 마음 따뜻하게 유쾌하다.

 

진아씨는 의미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시군요.”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문장이었지만, 문득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그런 사람임을 새삼 발견해서가 아니었다. , 의미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도 있겠구나. 찬찬히 돌아보니 내 삶을 그려온 힘이 바로 의미였다. (pp.142~143)

 

저자가 한 여행의 동력(動力)의미이다. 이 책은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의미를 끊임없이 소환한다. 직업에서, 관계에서, 삶에서의 의미’.

의미라는 말을 이 책에서 처음 보았을 때는 마치 중생대 공룡의 학명을 본 것처럼 낯설었다. 아니, 왜 그 좋은 공공기관을 때려치워? ? 화를 내고 당장 때려치워야 할 학교에서 아이들 검정고시 걱정이 되어 더 있겠다고 부탁했다고??

 

저자가 의미를 선택한 어떤 길목들에서, 나는 마치 이 자본주의 사회에 잘 적응해서 살아남은 여우처럼 눈을 휘둥그레 뜨고 의미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탄식했지만, 실은 잘 알고 있었다. 자본주의와 세월의 마늘을 먹고 곰에서 여우가 됐다고 자부하며 살아가는 우리 중 정말 여우가 된 이는 별로 없다는 것을. 대부분은 곰 머리 위에 여우 탈을 어찌어찌 뒤집어쓰고, 사회와 조직, 상황과 주변인, 그리고 나 자신과 타협하며 살아간다. 스스로 여우라고 생각하면서, 혹은 아직 곰이라는 것을 숨기면서. 그런데 저자는 여우탈 없이 이 험한 세상을 즐겁게 행보한다. ? ? 곰 처음 봐? , 곰으로 사는 재미를 모르는구나, 하며. (그렇다. ‘의미는 곧 재미이기도 하다.)

 

저자와는 직장 동료다. 저자가 올봄에 새롭게 이직한 곳에서 만났다. 아니 만나서 긴 이야기를 나눈 바 없으니 마주친 사이 정도였달까. 친하지도 않은 사이에, 우연히 이 책의 미리보기를 읽고 저자에게 불쑥 연락을 했다. 뒷부분을 얼른 읽고 싶은데 배송을 기다리기 어려우니 저자 사인본 한 권만 판매해줄 수 있으시냐고. 저자가 경계하지 않고 흔쾌히 승낙해주어 점심시간 한 시간을 함께 했다. 직장에서 만난 사이에 쉽게 경계를 해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저자와는 보호막 없이 편안하고 즐겁게 수다를 떨다 헤어졌다. 우리는 직장이 아니라 여행지에서 만난 사이이므로. 혹은, 모든 직장이 실은 여행지라는 것을 저자의 책이 말하고 있었으므로.

 

 

"진아씨는 의미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시군요."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문장이었지만, 문득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그런 사람임을 새삼 발견해서가 아니었다. 아, 의미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도 있겠구나. 찬찬히 돌아보니 내 삶을 그려온 힘이 바로 ‘의미’였다. (중략)
의미도, 돈도 충분한 일터가 있으면 작히 좋으랴. 얄궂게도 둘은 반비례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의미 있는 일을 추구하는 곳일수록 급여는 형편없고 직원의 헌신을 기대한다. 건강하고 바른 가치를 지키는 기업이 있긴 하지만, 그들이 칭송받는 현상 자체가 희귀하기 때문임을 방증한다.
그래서 선택해야 한다. 가고자 하는 직장은 그 비율이 어떠한지. 나는 어떠한 사람인지. 얼마만큼의 돈과 얼마만큼의 의미에 만족할 수 있는지. 돈이 자신을 얼마나 버티게 해주는지.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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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홀렸던 글과 사람. 가장 좋아하는 책 최대 세 권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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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의 위상 / 문학사회학
김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1년 6월
25,000원 → 22,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2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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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47년 <의향>사건 이후의 길고 지루한 순수참여논쟁을 조명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은, 아직 내가 그에게 '홀린 자'라는 것이다. 많은 문학청년들의 홀림의 계보에 나 역시 있다는 것. 홀린 자의 한계는, 홀린 대상이 전체의 어느 좌표에서 어떤 전략을 구사했던 것인가를 보는 순간에도 심정적으로는 아직 그 대상이 내 지평의 전체라는 데에 있다. 그러나 시간이 좀더 흐르면, 그가 지평의 전체가 아닌 후에도 그를 좋아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길 바란다.
풍경과 상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1994년 1월
7,500원 → 6,750원(10%할인) / 마일리지 370원(5% 적립)
2003년 10월 03일에 저장
구판절판
<밥벌이의 지겨움>에 대한 어느 서평에서 '사람은 멀리 하고 글은 가까이 하고 싶은 이'라는 탁월한 구절을 봤는데 상당히 공감한다. 그 미묘한 긴장이 시작된 책. 미문에 대한 어느 정도의 경계심이 있는데, 김훈 앞에서는 무장해제.
지배와 그 양식들- 이행총서 1
이종영 지음 / 새물결 / 2001년 1월
16,000원 → 14,400원(10%할인) / 마일리지 800원(5% 적립)
2003년 10월 03일에 저장
품절
내 방에 쌓여있는 수 백권의 인문사회과학 관련 서적은, 언젠가 아저씨가 프랑스로 떠날 때 '이젠 필요없다'며 주고 가신 책들이다. 덕분에 희귀본이 많다. 사유의 흔적들을 따라가며 읽는 독특한 즐거움. 그러나 아저씨의 저서를 포함, 대부분의 책들을 아직 (수준 문제로..) 읽지 못했으므로, 일단 人香만을 기록하자.
왜 동양철학인가
한형조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12월
9,000원 → 8,550원(5%할인) / 마일리지 270원(3% 적립)
2003년 10월 03일에 저장
구판절판
꽤 길었던 동양철학순례를 일매듭 지을 때쯤 읽었다. 그동안 쌓인 얄팍한 지식이, 어쨌든 이 책을 이해하는데 쓰일 수 있어 기뻤다. 동양철학 입문서로, 쉽고 평이한 학부수준의 책으로라면 <우리들의 동양철학>(동녘>을, 보다 깊이있는 이해를 위한 책으로라면 <왜 동양철학인가>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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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으로 일본순정만화 몇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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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의 나레이션 1- 시공 애장 컬렉션
강경옥 지음 / 시공사(만화) / 2003년 2월
7,000원 → 6,300원(10%할인) / 마일리지 350원(5% 적립)
2003년 09월 30일에 저장
품절
"17세에도 세상은 살기 힘들어요.. 17세의 눈으로 밖에는 세상을 볼 수 없으니까."
<레옹>보다 몇 년은 앞설 이 득의의 구절을 접했을 때 15세의 우리들은 절망했다.
'세상에! 2년을 더 살아도 삶은 여전히 힘들단 말인가.'
엘리오와 이베트 1- 애장판
원수연 지음 / 시공사 / 2003년 9월
8,000원 → 7,200원(10%할인) / 마일리지 400원(5% 적립)
2003년 09월 30일에 저장
품절
점프트리 A+ 4 - 완결
이은혜 지음 / 시공사(만화) / 1999년 4월
3,500원 → 3,150원(10%할인) / 마일리지 170원(5% 적립)
2003년 09월 30일에 저장
절판
<댕기>에 연재되어 두터운 이은혜 매니아층을 형성한 작품. 특히 '난 만화 같은 건 안 봐.' 하던 애들이 '점프트리는 다른 순정만화 같이 유치하지 않고 재밌더라.'고 말해 입에 거품을 물게 했다.
블루 7
이은혜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1997년 7월
3,000원 → 2,700원(10%할인) / 마일리지 150원(5% 적립)
2003년 09월 30일에 저장
절판
<점프트리>는 그래도 꾹 참고 볼 수 있었지만 이 작품은..
학년이 바뀌어 동류 발견을 위한 대대적인 탐색기간이 시작되면 흔히 좋아하는 만화 취향이 짝짓기의 중대한 기준(장정일의 표현으로는 문화적 할부, 인문학 유행어로는 아비투스)이 된다. <블루>를 말하는 아이들과는 절대 친해질 수 없었는데,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나도 그 본질적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A+의 대성공에 이은 이은혜의 야심작으로, 신성우가 모델이 되어 신드롬 조성에 한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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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화두, 혹은 코드 우리 시대의 인물읽기 1
장정일 외 지음 / 행복한책읽기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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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하면 떠오르는 두 구절 :

<돌아온 탕자는 쳐죽여야 한다. 왜나하면 더 나쁜 것(보수반동)을 가져오니까. 진정한 탕자는 사막 끝으로 나가 죽어야 한다. ... 그래서 인간은 하나의 오아시스 주위에만 국한되지 않은 더 넓은 세계를 자신의 인성으로 삼을 수 있게 되고, 마지막엔 인간도 신과 같이 될 것이다.>

<어린시절의 내 꿈은 이런 것이었다. 동사무소의 하급 공무원이나 하면서 아침 아홉시에 출근하고 오후 다섯시에 퇴근하여 집에 돌아와 발 씻고 드러누워 새벽 두시까지 책을 읽는 것. ... 나는 그 단어가 가진 가장 엄밀한 의미를 쫓는 쾌락주의자가 되고 싶다.> (모두 독서일기 1권에 나온다)

나는 장정일 문학의 텍스트'보다' 컨텍스트를 더 좋아한다. '나는 동키호테고, 나는 보바리 부인이다. 우리 셋은 삼위일책(三位一冊)이다(p.68)'라고 쓸 수 있는 작가는 장정일 뿐이다. 극단적인 자기추구-탕진의 욕망과, 그 욕망을 거세한 자리에서 누릴 수 있는 사제司祭적 쾌락에의 욕망 사이에서 진동하던 그의 안부가 늘 궁금했다. 자신이 설정한 '사막'의 끝을 향해 갔으되 그 끝을 보지도, 신이 되지도 못한 그는 이제 어느 곳의 누구일까. 책이 배송되는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서점에 달려가 '아무 뜻도 없어요'라는 그의 단상들을 먼저 읽었다.

<보트하우스>와 <중국에서의 편지>를 거쳐, 그는 이제 많이 변한 것 같다. (시민운동 및 몇몇 사회적 이슈들에 대한 언급에도 불구하고,) '내 속을 채우고 있던 그것들은 모두 사라져 없어졌다(p.123)'라고 담담하게 말하는 그는, 위치를 파악할 수 없는 사막 한 가운데에 서있는 사제의 삶을 살고 있는 듯 보였다. 그는 더 나아가지도 못하지만 귀환하지도 않는다. '아무 뜻도 없어요.' 그는 랭보처럼 절필하지 못한 자신을 씁쓸히 자책하고, 사회부조리에 대한 보다 온건하고 육체적인 저항방식인 시민운동에 관심을 가지며, 책이나 영화에서 훔치고자 하는 즐거움은 인생의 실제적 즐거움들(예컨대 김희선과 최지우와의 포도주 한 잔)의 빈약한 대체물이라 생각하는 중이지만 아직도 밤을 새워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아무 뜻도 없어요.' 이제 마흔이 된 그가 말한다. : 아무 뜻도 없어요. 내가 있는 이 곳은 아직 사막이고, 나는 실체 없는 신을 섬기는 사제예요. 나는 충직하고 성실한 사제지만, 이봐요, 내 제의祭儀에는 아무 뜻도 없어요. 앞으로도 제의는 계속 될 테지만.

탕자로서의 반항적 질주의 끝에서 사제로서의 부동적 관조의 시선을 얻은 듯한 그를 응원한다. 적의로부터 비롯된 그의 창작 에너지는 많이 약해지거나 좀 더 온건한 쪽으로 전환되었고(나는 그가 시민운동에 개입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상관없는 얘기지만 김희선과 최지우에게 '책 읽지 말고 인생을 즐기세요'라고 충고-물론 그 자신을 위한 발언이었겠지만-할 필요가 있었을까.), 많은 '뜻'을 지향하던 전투적 글쓰기 양상도 달라졌다. 그는 <보트하우스>에서 너털웃음을 짓던 노인처럼 아직(혹은 여전히) 피곤하다. 그러나 이것을 나쁜 징조라 할 수는 없다. 최선을 다해 갈 수 있는 곳까지 갔던 사람만이 그 길의 무의미를 만난 곳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의 문학적 2기가 새로 시작되었으면 좋겠다. 사막의 사제님. 아무 뜻이 없어도 좋아요. 이야기 외에는 아무 것도 욕망하지 않는 즐거운 이야기꾼이 되어도 좋고,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따뜻한 필치로 그려내는 휴머니스트(이문열의 휴머니즘과 대척점에 있는) 작가가 되어도 좋겠네요. 실은 내가 읽고 싶은 건 장정일표 아동문학이지만(너무 이른 주문인가요?). 당신이 '빈껍데기(p.123)'라면(아무 뜻 없는 빈껍데기가 되기까지는 얼마나 힘들었나요. 그거 아무나 되는 거 아닐텐데요), 빈껍데기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를 속히 들려주세요. 아무 뜻이 없어야 더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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