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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화두, 혹은 코드 ㅣ 우리 시대의 인물읽기 1
장정일 외 지음 / 행복한책읽기 / 2001년 11월
평점 :
품절
장정일, 하면 떠오르는 두 구절 :
<돌아온 탕자는 쳐죽여야 한다. 왜나하면 더 나쁜 것(보수반동)을 가져오니까. 진정한 탕자는 사막 끝으로 나가 죽어야 한다. ... 그래서 인간은 하나의 오아시스 주위에만 국한되지 않은 더 넓은 세계를 자신의 인성으로 삼을 수 있게 되고, 마지막엔 인간도 신과 같이 될 것이다.>
<어린시절의 내 꿈은 이런 것이었다. 동사무소의 하급 공무원이나 하면서 아침 아홉시에 출근하고 오후 다섯시에 퇴근하여 집에 돌아와 발 씻고 드러누워 새벽 두시까지 책을 읽는 것. ... 나는 그 단어가 가진 가장 엄밀한 의미를 쫓는 쾌락주의자가 되고 싶다.> (모두 독서일기 1권에 나온다)
나는 장정일 문학의 텍스트'보다' 컨텍스트를 더 좋아한다. '나는 동키호테고, 나는 보바리 부인이다. 우리 셋은 삼위일책(三位一冊)이다(p.68)'라고 쓸 수 있는 작가는 장정일 뿐이다. 극단적인 자기추구-탕진의 욕망과, 그 욕망을 거세한 자리에서 누릴 수 있는 사제司祭적 쾌락에의 욕망 사이에서 진동하던 그의 안부가 늘 궁금했다. 자신이 설정한 '사막'의 끝을 향해 갔으되 그 끝을 보지도, 신이 되지도 못한 그는 이제 어느 곳의 누구일까. 책이 배송되는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서점에 달려가 '아무 뜻도 없어요'라는 그의 단상들을 먼저 읽었다.
<보트하우스>와 <중국에서의 편지>를 거쳐, 그는 이제 많이 변한 것 같다. (시민운동 및 몇몇 사회적 이슈들에 대한 언급에도 불구하고,) '내 속을 채우고 있던 그것들은 모두 사라져 없어졌다(p.123)'라고 담담하게 말하는 그는, 위치를 파악할 수 없는 사막 한 가운데에 서있는 사제의 삶을 살고 있는 듯 보였다. 그는 더 나아가지도 못하지만 귀환하지도 않는다. '아무 뜻도 없어요.' 그는 랭보처럼 절필하지 못한 자신을 씁쓸히 자책하고, 사회부조리에 대한 보다 온건하고 육체적인 저항방식인 시민운동에 관심을 가지며, 책이나 영화에서 훔치고자 하는 즐거움은 인생의 실제적 즐거움들(예컨대 김희선과 최지우와의 포도주 한 잔)의 빈약한 대체물이라 생각하는 중이지만 아직도 밤을 새워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아무 뜻도 없어요.' 이제 마흔이 된 그가 말한다. : 아무 뜻도 없어요. 내가 있는 이 곳은 아직 사막이고, 나는 실체 없는 신을 섬기는 사제예요. 나는 충직하고 성실한 사제지만, 이봐요, 내 제의祭儀에는 아무 뜻도 없어요. 앞으로도 제의는 계속 될 테지만.
탕자로서의 반항적 질주의 끝에서 사제로서의 부동적 관조의 시선을 얻은 듯한 그를 응원한다. 적의로부터 비롯된 그의 창작 에너지는 많이 약해지거나 좀 더 온건한 쪽으로 전환되었고(나는 그가 시민운동에 개입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상관없는 얘기지만 김희선과 최지우에게 '책 읽지 말고 인생을 즐기세요'라고 충고-물론 그 자신을 위한 발언이었겠지만-할 필요가 있었을까.), 많은 '뜻'을 지향하던 전투적 글쓰기 양상도 달라졌다. 그는 <보트하우스>에서 너털웃음을 짓던 노인처럼 아직(혹은 여전히) 피곤하다. 그러나 이것을 나쁜 징조라 할 수는 없다. 최선을 다해 갈 수 있는 곳까지 갔던 사람만이 그 길의 무의미를 만난 곳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의 문학적 2기가 새로 시작되었으면 좋겠다. 사막의 사제님. 아무 뜻이 없어도 좋아요. 이야기 외에는 아무 것도 욕망하지 않는 즐거운 이야기꾼이 되어도 좋고,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따뜻한 필치로 그려내는 휴머니스트(이문열의 휴머니즘과 대척점에 있는) 작가가 되어도 좋겠네요. 실은 내가 읽고 싶은 건 장정일표 아동문학이지만(너무 이른 주문인가요?). 당신이 '빈껍데기(p.123)'라면(아무 뜻 없는 빈껍데기가 되기까지는 얼마나 힘들었나요. 그거 아무나 되는 거 아닐텐데요), 빈껍데기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를 속히 들려주세요. 아무 뜻이 없어야 더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