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기어가 된 조선 유학자, 윤휴 - 왕과 사대부, 그리고 사관마저 지우려 했던 조선 최초의 자유로운 사상가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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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후기

 

(선한리뷰 2021-032) 오직 백성을 생각한 진짜 북벌론자, 윤휴를 생각하다

 

책 이름 : 금기어가 된 조선 유학자, 윤휴

글쓴 이 : 이덕일

펴낸 곳 : 다산초당

펴낸 날 : 개정증보판 2021412(초판 1쇄는 2011712)

읽은 날 : 2021415

 

한줄평 : 소크라테스는 이름을 남겼지만, 윤휴는 이름마저도 지워졌다.

 

다산북스로부터 책을 지원받아 읽게 되었다. 학창시절에 역사를 암기과목으로 공부해온 터라 역사에는 지식의 끈이 짧고 특히 서인, 남인, 노론 등 당파에는 더더욱 취약하여, 책을 이해할 수 있을까, 저어기 고민되었으나, 이번 기회에 공부를 좀 하면 좋겠다 싶어 서평단을 신청하였었다.

 

책을 읽으며 나의 호기심은 지금까지 그를 몰랐던 미안함으로, 그리고 그가 학식과 인품을 두루 갖추고도 정치에 나가지 않는 강직함에는 존경함으로, 주변 학자들이 그를 찾아와 교분을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는 안도감을 느꼈다.

 

숙종은 자리에 오르자 계속해서 윤휴가 궁궐로 들어오기를 청했다. 주변 관료들도 윤휴만한 사람이 없다며 그를 천거했다. 윤휴는 계속 고사했지만 자신의 북벌론을 실행할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에 오십이 넘어 자리를 털고 궁궐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 길은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진혼곡이 되고 말았다. 결코 되돌아올 수 없는 길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송시열을 주축으로 한 서인들의 행태에 기가 막혔고, 오직 중국만을 왕실로 인정하고, 조선의 왕실은 중국 왕실 신하 격인 사대부로만 인정하려는 그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지 분노가 일었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남의 눈으로 우리 역사를 보는 사람들이 역사학계의 주류다. 이들이 과거에는 일제 식민 사관만 추종하더니 이제는 중국 동북공정까지 추종하는 것으로 악화되고 있다. 그렇기에 세상의 많은 이치를 어찌 주자 혼자 알고 나는 모른단 말이냐?”고 항변하던, 백호 윤휴의 목소리가 다시 절실한 시점이다. (9~10, 개정증보판 서문에서)

 

책을 덮자마자 인터넷으로 북벌론을 검색했다. , 주류 역사가 된 지식백과에서 밝혀주는 북벌론에 대한 이야기는 이번에 읽은 책 금기어가 된 조선유학자, 윤휴에 나오는 내용과 달랐다. 인터넷에서는 북벌론을 주장했던 사람은 송시열, 이완, 김집, 송준길 등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었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 마지막 쪽을 펼쳤다.

 

이후에도 노론은 자신들과 다른 정견을 가진 국왕 경종을 독살하고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등 정치공작을 자행했다. 그러면서 윤휴의 북벌론을 송시열이 주장한 것으로 역사 바꿔치기를 시도했다. 그렇게 노론은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집권하고, 조선이 멸망할 때는 일제에 가담했다. 그렇게 지금도 국사 교과서는 북벌의 자리에 윤휴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송시열의 이름을 올려놓았다. (396)

 

어쩌면 많은 역사학자들은 숙종실록에 기록된 내용을 근거로 자신들의 주장이 맞는다고 얘기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가 책에 옮겨 놓은 많은 실록 글을 읽고 맥락을 이해한다면, 실록의 글들은 같은 편에 있던 기록자들이 자기들만의 역사관으로 편향적이고 악의적으로 윤휴를 깎아내렸음을 알 수 있다. 송시열과 그 문하생들은 조선이라는 나라는 중국의 사대부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어린 윤휴가 서울에서 공부하던 광해군 15(1623) 3월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조선 후기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최대의 사건이었다. 율곡 이이의 제자들인 서인들이 선조의 서자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과 손잡고 광해군과 북인들을 내쫓은 쿠데타였다. 왕조 국가에서 군부(君父)라 불리는 임금을 쫓아내기로 결심한 서인들은 자신들의 임금은 조선 국왕이 아니라 명나라 황제라는 논리를 만들어냈다. (63)

 

그러니 조선을 중국과 동일한 국가로 인식하고, 민생을 최우선으로 여겨 양반들에게만 유리하게 되어 있고 서민들의 등골을 휘게 만드는 많은 악법을 철폐하고, 잘 정비된 군사를 이끌고 청나라를 오히려 치러 가자는 진짜 북벌론자인 윤휴는, 최대한 신분의 권력을 누리려는 그들에게 눈엣가시로 여겨졌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숙종에 의해 갑작스럽게 다시 궁궐로 들어와 권력을 쥐자 백호 윤휴를 없애는 길만이 자신들이 오래 권력을 유지할 수 있음을 알고 윤휴 저격 프로젝트에 돌입한다. 그들은 어떤 죄목을 뒤집어 씌우더라도 윤휴를 죽여야 했다. 윤휴가 궐내에 같이 있는 한 절대로 두 발 뻗고 잠을 편하게 잘 수 없다는 걸 알았다.

 

한때 그의 정적들은 이렇게 마지막 말 한 마디까지 거부당한 (윤휴는 사약 받기 직전에 마지막 유언을 글로 남기길 청했으나 이마저 거절당했다.) 윤휴를 당대 최고의 선비로 추앙했었다. 이 선비의 죄목은 놀랍게도 역()이 아니었다. 역은 커녕 임금과 백성을 너무도 사랑했고, 평생 일관되게 도()를 추구했다. 그의 길에 주자는 상대적 가치를 지닐 뿐이었다. 그 순간 그는 사문난적이 되었다. (12, 서문에서)

 

책 서두에는 왜 윤휴가 그렇게 북벌을 주장했는지 당시 중국의 상황을 잘 설명해준다. 청나라 강희제는 중국의 남방 지역을 점령했지만 삼번의 난이 일어나 완전한 중국 통일을 하지 못한다. 명나라의 마지막 장군인 오삼계가 10만 이상의 군으로 남부 지역에 저항선을 구축했다. 강희제의 군들은 오삼계가 차지한 지역을 정복하지 못했다. 사실상 오삼계를 위시한 삼번은 청 제국 남방의 독립된 왕국으로 유지되었다. 윤휴는 이때 조선의 정예화된 군으로 청을 공격하면 청은 양쪽에서 공격 받게 되어 분명히 몰락할 것이라고 했다.

 

사실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들이 북벌론을 먼저 주장했지만 그들은 말뿐인 주장이었고 실천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윤휴가 나타나 전차를 만들자고 하고, 계속해서 북벌에 대한 상소를 올리자 그들은 윤휴를 더 이상 존경하는 학자의 자리에 둘 수 없었다. 자신의 안위를 위협하는 적일 뿐이었다.

 

역사가 어찌 그리 야속한지. 북벌을 구상하고 곧 실천에 옮기려던 효종은 삼번의 난이 일어나기도 전에 그런 전망을 예측하고 오랑캐는 반드시 망하게 될 것이라며 군사를 길러야 한다고 했다. 포병 10만 양성. 효종은 10년을 잡았는데 그 전에 한족이 봉기한다. 그것은 천명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발생한 종기를 치료하지 못하고 급사하고 만다.

 

효종과 현종에 이어 13세의 어린 나이에 갑자기 왕이 된 숙종은 주변으로부터 윤휴만한 학자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간곡하게 계속해서 윤휴가 궁에 나와주기를 바랐다.

 

지금 시대에 학문이 박식한 사람은 장령 윤휴만 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가 초야에 있더라도 예를 갖추어 불러야 하는데 더구나 그는 지금 직명을 지니고 서울에 있겠습니까. 경연에 나와 돕기를 구한다는 뜻을 유시하신다면 그가 어찌 나오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승지 이동로도 경연 때 윤휴를 패초하여 입시하게 할 것을 청하고, 강관 이하진도 윤휴를 불러야 한다고 청했다. 숙종도 윤휴가 송시열의 빈자리를 대신할 만한 역량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윤휴를 다시 불렀다. 그러나 아직도 윤휴는 사양하고 있었다. (145)

 

숙종의 거듭된 요청에 윤휴는 마음을 굳혔다. 58세에 궁으로 들어간다. 윤휴는 오직 북벌을 하기 위해 궁궐로 입성했다. 그는 병법에 능했고 전략가였다.

 

우리나라의 정예 군사와 강한 화살은 천하에 소문이 났는데 여기에 화포와 조총까지 곁들이면 진격하기 충분합니다. 병사 1만 개를 뽑아 북쪽의 수도 연산(북경)으로 나아가 그 등을 치고 목을 조이면서 바닷길을 터 정경과 약조를 맺고 함께 병립하면서 그 중심부를 어지럽히는 것입니다.” (54)

 

윤휴는 북벌만을 위해 관에 나간 것이 아니었다. 그의 마음은 백성에게 가 있었다. 민생의 폐단을 제거하는 것이 그의 중요한 출사 목적 중 하나였다. 그가 유배를 가고, 사약을 받으러 다시 궁으로 잡혀 들어갈 때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길거리에 나와 울었는지를 본다면, 시대의 역사가는 그가 진정 백성을 위한 관료이며 위대한 학자였음을 알아차릴 것이다.

 

왜 숙종의 마음이 송시열에게로 다시 돌아섰을까. 숙종은 서인들의 농간에 마음을 합쳐 63세의 노구인 윤휴에게 30대를 치는 곤장을 두 번이나 명한다. 고문을 시키는 것이다. 그는 이미 피투성이가 되었다. 상상하기조차 끔찍하다. 윤휴는 결국 서인과 숙종의 배신으로 죽음의 길을 가게 된다. 300년이 지나고도 그들의 후손은 말을 아꼈다고 한다.

 

이제라도 편향된 관점의 역사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고, 그가 진정으로 임금과 백성을 사랑한 학자였음을 알게 되어 참으로 감사하다.

 

친일사관, 사대주의 사관으로 쓰여진 모든 역사는 바로 잡혔으면 한다. 윤휴는 실질적인 북벌주창자였고, 전략가였고, 실천자였고, 개혁가였다. 차별적인 조선 신분제를 없애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고위급 신분을 가진 사람들은 당연히 그를 미워했다.

 


(선한 리뷰)

이제는 잘못된 물줄기를 바로 잡아야 한다.

스스로를 딸랑이, , 노예로 전락시키는 역사관은 진짜가 아니다.

우리 자녀에게는 올곧은, 바른, 역사가 전달되길 소망해본다.

 

선하기만 하고 선한 동조자를 동역자로 모으지 못하면,

계획적인 악에 파멸을 당할 뿐이다.

선한 영향력도 조직이 있어야 한다.

 

(선한 실천)

함께 할 사람을 모으자.

 

잘못 전달된 왜곡된 지식을

진리로 바꾸는 데 힘쓰는 작가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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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의 인문학 - 삶의 예술로서의 인문학
도정일 지음 / 사무사책방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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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후기

 

(선한리뷰 2021-028) 삶이 곧 시가 되는 인문학에 관한 글, 도정일의 "만인의 인문학

 

"문학이 포착하는 인간의 진실은 더 많은 경우 진위 판단보다는 인간 그 자체를 이해하기 위한 진솔한 경험의 확장에 있다. 인간의 약함과 강함, 그의 허영과 꿈과 욕망, 패배와 고통, 사랑과 배반 - 이 모든 것들이 엮어내는 삶의 복잡성은 진위 판단의 인식론적 요구나 선악에 대한 좁은 윤리적 재단의 요구를 넘어서서 이해되어야 할 때가 많다.

 

관용(똘레랑스, tolerance)이란 강자가 약자에게 베푸는 자비나 허용이 아닌 '차이에 대한 존중'이다." (도정일, 만인의 시학, 1부 도입글 중에서)

 

문학가인 도정일은 문학의 개념에 대해서 인간 자체를 이해하기 위한 진솔한 경험의 확장이라고 말한다. 문학이 윤리적인 문제에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도덕적 요구보다 인간 그 자체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런 기본적인 개념에서 그의 시학, 문학론은 출발한다.

 

이 책은 이런 도정일식 시학론, 문학론의 확장된 텍스트이며 이야기이다. 작은 제목에 따라 3~4쪽의 짧은 글들이 에세이처럼 적혀 있어 깊이 있는 인문학 책이 아닌 느낌이 들 수도 있다. (도대체 인문학이 뭔지) 그러나 이 책은 정확하게 1, 2, 3부의 큰 카테고리를 가지고 그 안에 각각의 텍스트들이 배열되어 있다.

 

1부는 만인의 시학,이다. 그가 시를 읽는 방법, 작가의 정의, 은유와 비유의 시학, 신화에 대한 고찰 등이 깊이 있게 이어진다.

 

그가 생각하는 시학은 무엇일까, 그는 우리네 삶이 그 자체로, 이야기 자체로 시학이 된다고 말한다. 삶의 시학은 산다는 것의 예술이다.

 

"삶은 이야기처럼 짜여지고, 이야기처럼 진행된다. 삶이 이야기처럼 짜여지는 것은 인생살이가 이야기의 구조를 갖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시학은 문학에 대한 담론이지만, 삶이 마치 한 편의 이야기처럼 이야기의 구조로 짜여지고 진행되는 한 그 삶은 동시에 시학의 대상이다. 삶을 대상으로 하는 시학을 우리는 '삶의 시학'이라 부를 수 있다. 삶의 시학은 '산다는 것의 예술'에 주목한다. (30)

 

삶의 시학이라는 그의 관점은 정확히 나의 관점과 일치한다. 그래서 나는 그의 글을 무장해제한 채 읽었다. 가벼운 듯 잔잔하게 서술되는 그의 글들은 내 눈을 통해 가슴에 전달되면서 나만의 언어로 저장된다. 내 삶이 바로 시가 되는 것이니, 내 삶은 결코 허투루 사는 것이 아니다. 내 삶은 바로 문학이다. 이 얼마나 감격스런 선언인가.

 

"왕이었던 자가 졸지에 포로 신세로 영략하는 것은 크로이소스 이야기를 요약하는 핵심적 반전이다. 운명의 이 급작스러운 변화는 후일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공식화했던 '운명의 반전' 그대로이다. 아시다시피 '반전 reversal'이란 운명 또는 사건의 단순한 '변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운명이 한 상태에서 그 '정반대 상태'로 바뀌기이다. 주인이 종 되고 종이 주인 되는 혁명적 변화는 반대 상황으로의 상태 변화라는 점에서 모두 반전에 속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한 비극적 반전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굴러 떨어지는 반전을 의미한다. (56~57)

 

인생에서 한번쯤 높은 데서 낮은 데로 떨어져 본 사람이라면, 우리 인생이, 기가 막힌 삶의 웅덩이가 어떻게 한 편의 시가 되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운명적 반전'이라. 죽음의 끝 골짜기까지 가 봤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이 운명적 삶이 있기에 이 책은 내게 한 줄기 소망이 된다. 내 삶은 다시 혁명적 반전을 이루어냈다. 이렇게 책을 읽을 수 있는 오늘까지는 그렇다. 감사하다.

 

그의 '먹는' 것에 대한 인문학적 통찰을 조금 더 들여다보자.

 

"마음먹기가 의지에 더 많이 관계되어 있다는 것은 '밥먹다''마음먹다'의 차이에서 드러난다. 밥과 마음은 모두 '먹다' 동사의 문법적 목적어 자리에 있지만, 먹는 행위의 성질은 두 경우가 아주 다르다. 밥을 먹는 것은 오줌 누는 행위처럼 인체의 생물학적 기능이다. 그것은 특정의 의지를 전제하는 목적적 행위가 아니다. 배는 우리가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고프기도 하고 고프지 않을 수도 있는 통제 대상이 아니다.

 

사람은 굶어 오랫동안 밥통을 비우면 죽지만, 마음을 비운다고 해서 꼭 죽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음을 비웠기 때문에 죽는 일은 없을지 몰라도, 어떤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죽는 수는 있다. 밥을 먹으면 최소한 죽지는 않는데, 마음은 먹으면 죽는 수가 있다니 기이하지 않은가." (80~81)

 

, 마음을 먹는다,는 표현을 이렇게 표현하다니, 정말 깜짝 놀랐다. 마음을 먹는다는 것은 의지를 다지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요인으로만 생각했는데, 무언가에 저항하기 위해 마음을 먹으면, 죽기를 각오하고 마음을 먹으면, 그는 죽을 수 있다. 그때의 마음먹기는, 죽기를 각오하는 것은 비우는 것이며 동시에 채우는 것이다. 혁명적 운명의 반전으로, 우리 개인의 인생은 때로 죽기를 각오하는 마음먹기가 필요할 수 있다. 내게도 그런 삶의 순간들이 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때가 생각나 참으로 아득해졌다.

 

그의 글 제2부는 책 제목과 같은 '만인의 인문학'인데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전체적으로 조금 방만한 느낌은 들지만 그의 박학다식하며 전 영역을 아우르는 인문학적 사고를 엿볼 수 있어서 좋다.

 

3부는 '다시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제목으로 문명, 생물학적 인간, 인간과 문화의 도전, 과학기술, 문화와 욕망 등을 다룬다. 마지막으로 그는 '무엇이 인간을 인간이게 했는가'로 이 책을 마무리한다.

 

그가 각종 신문과 매체에 기고한 글들을 엮어 모아 만든 책이고, 연도가 다르지만 이렇게 통일된 주제에 엮으니 그가 한 평생 어떤 인문학적 고찰을 하며 살아왔는지가 보다 투명해진다.


(선한리뷰)

광활한 우주에 태어나 인간으로 존재하는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우연히 태어나 아무 목적 없이 삶을 살아가는 진화론적 존재인가.

그럴 순 없다.

우리는 우리가 곧 우주이며, 우리의 하찮게 보이는 삶이 곧 예술이며 시가 되는

소중하고 위대한 존재이다.

 

좋은 마음을 먹자.

세상을 살리는 마음을 먹고,

이웃을 살리는 마음을 먹고,

나를 살리는 마음을 먹자.

 

(이 리뷰는 출판사의 지원을 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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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행관들
조완선 지음 / 다산책방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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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후기

[선한리뷰 2021-024] 법은 공정한가, 멈출 수 없는 몰입도 <집행관들>

 

법치가 무너진 사회.

그들이 직접 심판하기 시작했다.

 

신간 중에서 워낙 좋은 소문이 많았던 책.

기회가 닿아 책을 구할 수 있었고, 책을 잡자 손을 떼기가 어려웠다.

하루에 여섯 권의 책을 읽으면서도 이 책을 이틀만에 독파할 수 있었다. 그만큼 흡입력이 좋았다.

 

한국 땅에서 온갖 비리와 불법을 저지르고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 갑 중의 갑. 그들은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대단한 인맥을 가지고 있어서 법이 무서워 벌벌 떨었다.

 

아직 친일파 후손들이 여전히 떵떵거리며 부와 권력을 챙겨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마치 독립투사들의 자손은 독립운동을 위해 전 재산을 헌납하고 그들의 후손은 이름도 삼켜진 채 가난의 어둠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이땅은 여전히 불공평했다. 21세기 수많은 경찰과 검찰과 정부가 사법부의 칼날을 쥐고 있어도 부자와 권력자는 불법이어도 당당한 세상이다.

 

그런 세상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며 스스로 심판관이자 증언자이자 법 집행자가 된 사람들이 있다. 이 책은 그들의 활극을 소설로 만나는 공간이다. 치밀한 자료 수집으로 그들의 불법을 밝혀내고, 법으로 다스리지 못한 법 조항을 가지고 직접 응징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불공평한 법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트라우마를 가지게 되었고, 불신의 화살을 정의 실현으로 보상하려 한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야. 그러나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지.”

(141)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에게는 죽음의 집행이 내려졌고, 사람들은 법이 집행하지 못한 정의의 실현이라며 오히려 집행관들을 영웅시하게 된다.

 

검찰은 발칵 뒤집히고, 수사본부는 확대되고 치열한 머리싸움이 벌어진다.

연이은 살인 사건, 발톱이 하나씩 뽑혀있는 사건 현장, 시체에 쓰여있는 의문의 숫자들.

이들은 사회에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아주일보에 정의 사회 구현을 외치며 칼럼을 연재하던 역사학자 최주호 교수는 기억에도 없던 동기 허동식의 전화를 받고, 최후 생존 친일파 노창룡에 대한 자료를 구해주게 된다. 그리고 조금씩 집행관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글의 힘에서 칼의 힘으로 옮겨가게 된다. 하지만 그는 정말 이 방법밖에 없는지 주저하게 된다.

 

굳이 말하자면 우리 같은 사람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 분노를 실천으로 옮기는 사람들

하지만 방법이 틀렸어. 다른 방법도 많잖아.”

이게 가장 확실해.”

(161)

 

하지만 아무리 흉악하고 악질의 죄를 지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과연 그들의 죄를 정당한 법 울타리 밖에서 직접 응징하는 것이 용인될 수 있을까. 그들의 행위는 또다른 범죄행위는 아닐까. 그리고 과연 그렇게 한다고 해서 이 세상이 달라지기나 할까. 집행관은 말한다.

 

그들 몇 명을 없앤다고 해서 세상이 변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아. 그저 이 땅에 존재해서는 안 될 쓰레기를 청소하고 싶은 것뿐이지.”

…….”

누구나 하나쯤은 그런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174)

 

촛불의 힘으로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서 가장 크게 힘을 준 명제가 공정이었다.

공정한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하지만 공정은 우리 피부에 와 닿지 않았다.

우리는 안다. 하지만 그것이 어느 정도까지인가 하는 것이다.

 

불의한 자를 직접 심판하는 것이 정당할 수는 없다.

그것은 소설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검사와 집행관의 쫓고 쫓기는 두뇌싸움과 추격신도 소설의 재미를 배가시켜 준다.

페이저 터너다. 여름에 출간되었다면 더 시원하게 더위를 날려주었을 것이다.

그들의 다시 일어설 것인가? 2편이 기대되는 책이다.

 

 

(선한리뷰)

책은 이틀만에 순삭하며 읽었지만, 사회파 미스터리답게 가슴에 묵직한 돌 하나를 매달아준다. 바로 내가 발 딛고 사는 세상에 대한 애정이다.

 

세상은 여전히 불공평하고, 가진 자가 법 위에 있음을 안다.

책 속 주인공처럼 글로 울분을 토해낼 수도 있지만, 집행관들처럼 대신 응징할 수는 없다. 우리는 최소한 법의 심판대에서 최대한 공정하게 그들이 심판을 받기를 기대할 뿐이다.

 

오늘 읽은 다른 책에 나온 글이 떠오른다.

 

내가 나를 위하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위해 줄 것인가?

그러나 내가 나 자신만을 위한다면, 나는 누구인가? (현자, 힐렐의 말)

 

이 세상은 나 혼자 사는 곳이 아니다. 함께 더불어 사는 곳이다.

내가 괴물이 되지 않으려면, 나는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

나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과 함께, 나를 조금 양보하며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괴물이 아니다.

 

나는, 나를 심판하자.

너만을 위한 하루를 살았느냐!!

 

(이 책은 출판사의 지원을 받아 개인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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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 쓰다 걷다, 어느새 - 세가지 재산
시우안미정 지음 / 선한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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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후기

[선한리뷰 2021-020] 안미정의 읽다 쓰다 걷다, 어느새

 

한줄평 : 인생의 세 가지 보석을 가지게 된 이야기.

 

내 인생에서 세 가지 보석을 고르라고 하면 나는 무엇을 선택할까. 그것은 유형의 어떤 재산 같은 것일 수도 있고, 무형의 기억 같은 것이 될 수도 있다. 만약 눈에 보이는 유형의 물질로 한정하면 무엇이 내 보물이 될 수 있을까. 자기 집에 불이 났다고 할 때 단 한 가지만 들고 나올 수 있다면 무얼 들고 나오겠는가. 이런 질문으로 간단하게 알아보는 게임도 있다. 자신의 삶을 바꿔 준 단 한 권의 책이 될 수도 있고, 가족과의 소중한 추억을 담은 앨범이 될 수도 있고, 결혼반지가 될 수도 있고, 편지나 엽서가 될 수도 있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은 값을 매길 수 없고, 나에게 소중한 것이 너에겐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못할 수 있다. 가장 소중한 보석은 그렇게 상대적이다.

 

<읽다 쓰다 걷다, 어느새>의 저자 안미정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세 가지 보물로 읽기” “쓰기” “걷기를 선택했다. 날마다 수행하는 습관과 같은 그 일을 가장 소중한 보물로 낙점한 것이다. 과연 우리 인생에서 읽기를, 쓰기를, 걷기를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로 둘 수 있을까. 과연 그럴까. 그녀에게 읽기는 무엇이고 쓰기는 무엇일까.



 

지금 생각해보면 나에게 읽다는 피신처 같았다. 2.8킬로그램의 바들거리는 아이의 엄마가 된다는 것은 만만한 게 아니었다. 그렇게 버둥거리다 아이가 잠든 시간, 책 속 문장은 도망치고 싶었던 마음을 눌러앉게 해주었다. ‘읽다가 준 작은 위로들이 나를 변화시키고 있었다. 그때 깎여 내려갔던 생채기 또한 읽다가 어깨를 어루만져 주었고, 등을 토닥거려주며 괜찮아, 속삭여주었다. (16~17쪽 중에서)

 

그녀를 위로해 준 책들을 만난다. 작가를 작가되게 한, 읽기를 쓰기로 이끈 그 책들을 만나는 즐거움은 크다. 내가 읽었던 책이 나오면 더 반갑고, 아직 읽지 않은 생소한 책이 나오면 책을 찾아보고 카트에 담아둔다.

 

나도 읽고 감동을 받았던 책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 그녀를 책 중독에 빠지게 한 첫 책이었다. 죽음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처럼, 저자는 죽음을 이야기하는 책을 읽으며, 생에 대하여 치열한 통찰을 얻는다.

 

생은, 한 치도 질서정연하지 않다. (23)

 

어린왕자와 박완서에 이어 김훈의 <자전거 여행>을 만난다. 내가 김훈의 그 책을 읽으며 느꼈던 그 흥분이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글 한 줄 한 줄 허투루 읽어내릴 수 없었던 단단한 문장들에 대한 놀라운 기억. 저자 역시 같은 책을 읽고 같은 감동을 받고 있었다.

 

모든 문장을 기억하고 싶을 정도로 탐났다. 묘사가 어떤 것인지 김훈은 <자전거 여행>에서 잘 보여주었다. 묘사란, 기술이 아닌 진심이란 걸, 온 마음을 다해 들여다보는 데서 시작된 것이란 걸 알 수 있었다. (36)

 

김훈이 자전거 여행에서 묘사하는 목련에 대한 글을 보자. 안미정 작가가 따온 글이다.

 

목련은 세상의 꽃 중에서 가장 남루하고 가장 참혹하다. 누렇게 말라비틀어진 꽃잎은 누더기가 되어 나뭇가지에서 너덜거리다가 바람에 날려 땅바닥에 떨어진다. 목련꽃은 냉큼 죽지 않고 한꺼번에 통째로 툭 떨어지지도 않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꽃잎 조각들은 저마다의 생로병사를 끝까지 치러낸다. 목련꽃의 죽음은 느리고도 무겁다. (37)

 

사람마다 선호하는 문장의 틀이 있다. 김훈은 짧게 툭 쳐내는 맛이 있는데 이런 투의 글을 좋아하지 않는 분도 있었다. 하지만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깨달으려면 <자전거 여행>을 꼭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 나는 개인적으로 김훈의 <자전거 여행>과 곽재구의 <포구기행>을 최고의 책으로 꼽는다.

 

작가가 소개한 <카바레>는 처음 들어보는 책이었는데 굉장히 큰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예상 밖의 전복의 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읽어보지 못한 책들에 대한 소개는 차곡차곡 카트에 담겼다.

 

그녀의 쓰기에서는 모 수필 대상을 받으며 세상에 나오는 글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책을 읽다 좋은 문장에 대한 필사를 하게 되고, 필사를 하다 일기를 쓰게 되고, 일기를 쓰다, 글앓이를 하며 긴 문장을 쓰기 시작한다.

 

걷기에 대한 그녀의 시작은 나와 매우 비슷했는데, 나는 아직 평지 만보 걷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반면, 저자는 많은 산을 탔다.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에서 독자는 또다른 도전을 받는다.

 

얇은 책이었다. 다른 출판사는 겨우 200쪽 수준의 책도 꽤 두껍게 보이는 책으로 펴냈는데, 너무 얇은 종이를 사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속도 얇을까. 200쪽이 채 되지 않는 이 책은 가볍게 펼칠 수 있으나 가볍게 닫을 수가 없다. 저자의 삶과 땀과 피와 눈물이 종이 한 장 한 장 가득 배여 있어 묵직했기 때문이다. 쉬이 다음 장으로 넘길 수 없었다. 저자의 생각따라, 의식의 흐름을 따라 같이 사고하고 흐름의 결을 따라간다.

 

소설이 아닌 다음에야, 독자는 저자의 흐름과 같이 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런 류의 책 속에는 저자의 사상과 가치와 삶이 날 것으로 진하게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저자와 친구가 되고 만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꽤 오랜 시간 함께 한 동료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책에는 저자의 삶이 오롯이 담겨져 있다. 그래서 책을 다 읽고 내려놓을 땐 190쪽 책이 300, 400쪽 책처럼 무겁게 느껴진다. 쉬이 닫을 수 없는 책이 되고 만다.

 

시작은 읽기였으나 끝은 알 수 없다. 그녀는 책을 펴내고 출판사를 만들고 또 책을 펴내고, 그렇게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녀의 계속되는 행진을 보고 싶은 마음은 또 하나의 욕심이다. 이제 시작했으니까.




(선한리뷰)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들이 실려 있다. 날 것으로 가공되지 않아 오히려 더 친숙해보인다. 그런 사진과 글 속에서 고무나무에 대한 글을 읽는다. 오늘 교회에서 목사님이 직접 나무를 구해다 심었다며 작은 고목나무 화분을 보여주셨다. 고목나무를 보자 봄이 바로 앞에 성큼 다가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

나는 그의 책을 <읽고> 후기를 남기면서 글을 <쓰고> 하면서 그녀의 보물을 공동으로 채취하고 있다.

 

.

걷기에 딱 알맞은 계절이 오고 있다.

두꺼운 옷을 걷어내고, 땀을 조금 흘리며,

봄을 온몸으로 맞이하는 내일을 기대해본다.

 

이 책은 봄을 기다리는 책이다.

나도 봄을 기다리는 중이다.



 

고무나무가 새순을 밀어 올리기 위해 몸을 부풀리면서 자신의 과거를 뚫는 중입니다. 이 과정은 아주 더디게 멈춘 것처럼 진행됩니다. 팽팽한 저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워 해를 향하게 화분을 돌려주고 물을 주었습니다. 물론 저렇게 고통을 통과하고 나면 연둣빛 새순이 봉긋 자신을 드러낼 것을 압니다. 고무나무는 그렇게 자신의 외피를 만들어가는 중입니다.

 

생사고락. 생과 락만 있어도 좋을 텐데, 우리는 사와 고도 기꺼이 마주해야 합니다. 이렇게 고와 락은 함께 존재하고, 그 어떤 것도 아름다운 봄입니다.

 

저는 지극히 봄으로 올해의 봄을 만끽하는 중입니다.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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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어디에서 왔니 - 탄생 한국인 이야기
이어령 지음 / 파람북 / 2020년 2월
평점 :
품절


#독서후기 [선한리뷰 2020-014]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탄생편

 

로마에 로마인 이야기가 있다면 대한민국에는 한국인 이야기가 있다.

이어령 선생님만이 쓸 수 있는 지극히 한국적인 우리네 이야기.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의 굴렁쇠 소년을 기억하나요? 당시 총괄 기획자였던 이어령 선생님에 의해 상상되고 실천된 이 굴렁쇠 소년은 세상 모든 사람의 머릿속에 가장 한국적인 이미지로 강하게 인식되었습니다. 모든 시간이 멈추고 소리도 멈추고 오직 드넓은 평면만 가득한 세계. 초록의 스타디움을 가로질러 굴렁쇠를 몰고가는 어린 소년.

 


 

 

그는 당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창조 뒤에는 늘 외로움과 정적, 그리고 암흑이 온다. 한밤의 태양이 아니라 대낮의 어둠이 있다.” 그는 77세가 되던 2009년에 그동안 신문에 연재한 내용과 텔레비전에서 강연한 내용을 풀어, 로마에 로마인 이야기가 있다면 한국에는 한국인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며 총 12권의 대규모 기획으로 77세에 첫 책 탄생편에 대한 집필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무리한 집필로 인해 뇌 수술을 받았고 10년의 긴 세월 동안 두 번의 암 수술과 투병을 거치며 2019년에서야 첫 책을 세상에 내놓게 되었습니다.

 

그는 병원에서도 집필을 이어갔는데 더 이상 컴퓨터에 있는 자료를 이용하지 못해 순전히 그의 기억에 저장된 내용만으로 이야기를 쓰고 고치고 다시 쓰기를 반복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탄생했다는 사실은 책 마지막 부분의 인터뷰 글을 읽고서야 알게 되었는데, 미리 그 부분을 읽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면 좀더 정성껏 한쪽 한쪽을 읽을 것인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이어령 선생님은 제가 참으로 존경하는 학자요 작가입니다. 그의 스토리텔링 기법은 탁월합니다. 이번 책에서도 그는 꼬부랑’ ‘아리랑’ ‘쓰리랑’ ‘너랑 나랑등 한국인이 즐겨 쓰는 랑 첨미소에 대한 탁월한 분석을 합니다. 그 분석에 콩고물을 입히듯 그가 어린 시절 경험한 과거의 옷을 입히고 그가 학자로서 연구한 세계의 지식들을 인문학적으로 편집해 탈색합니다.

 

오래 전 그가 주장한 보자기론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은 과학적 논거가 없는 자기 주장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하기도 하고 그래서 그가 싫다는 사람들도 간혹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의 그런 상상력이 가미된 이야기가 좋습니다. 한국인이 무심코 써오던 오래된 것들은 연구한 학자가 없기 때문에 당연히 자료나 사료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어령 선생님은 이번 책에서 상당한 자료들을 첨언하여 자신의 주장에 대해 학문적 논거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어린이를 업는 포대기가 서양에서 유행하고 있는데, 포대기의 영어 이름은 ‘podaegi’입니다. 한국의 호미가 영어로 ‘ho-mi’인 것과도 맥을 같이 합니다. 서양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전통적으로 스와들링이라는 걸 하는데, 이는 부모의 작업과 효율성을 위해 아이를 부모로부터 떨어뜨리려 했고 이는 아이를 꽁꽁 묶어 세워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루소는 에밀’ 5부 중 1부에서 이를 비판하는데 할애합니다. 서양에서 처음으로 자신들의 전통적인 육아 방식을 비판한 것입니다.

 


(인터넷 구글에서 ‘podaegi’로 검색한 화면)

 

이어령 선생님의 분석에 의하면 한국의 포대기는 아이와 접촉성과 밀착성을 최대한 높이는 매우 훌륭한 도구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오히려 한국 사람들이 서양식을 따라가 우리나라에서 포대기는 점점 사용이 줄어들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이 책은 우리가 어린 시절 할머니나 부모로부터 잠들 때 듣던 꼬부랑 할머니노래나 이야기로부터 시작합니다. ‘한국인 이야기의 첫 책 탄생편은 바로 꼬부랑 할머니이야기입니다. 그것이 바로 한국인의 시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국어에는 유난히 이응으로 끝을 맺는 말들이 많습니다. 구부러진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다리, 굴뚝, 건물은 모두 직선이지만, 처음부터 만들어져 있는 강, , 길은 모두 곡선입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의 말들도, 이야기도 모두 구부러져 있습니다.

 

임어당은 서양과 중국의 예술을 비교한 아포리즘을 남겼다. ‘이 세상 살아 있는 모든 것은 곡선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죽어 있는 것은 모두가 경직된 직선이다. 자연은 항상 곡선을 탐한다. 보아라. 초승달이 그러하지 않은가. 솜 같은 구름. 꼬부랑 언덕, 굽이굽이 흐르는 냇물이 그렇지 않는가. 한편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 마천루, 철도선로, 공장굴뚝, 모든 게 그렇듯이 언제나 직선적이고 꼿꼿이 솟아 있다.’ 꼬부랑 고갯길은 인간이 만든 게 아니라 자연=이 만든 길이다.” (372, 373)

 

1880년 서주당 이씨가 작성한 태교신기라는 세계 최초의 태교지침서라는 책을 통해 전 세계에서 대한민국이 유일하게 태교를 시작했다는 그의 이야기는 어머니 양수로, 기저귀로, 포대기로, 옹알이로, 우리의 숨어 있는 먹거리 나물에 이어 콩잎에 이르기까지 그의 시선을 피해갈 한국적인 것은 없습니다.

 

어머니 자궁의 양수를 이루는 원소 순위가 바닷물의 원소 순위와 거의 똑같다는 그의 이야기 앞에서는 그만 넋을 놓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저의 상상력도 날개를 펼쳐 또 다른 저만의 이야기가 만들어졌습니다.

 

그의 지성은 우리나라에서 유럽으로 중국으로 일본으로 거침없이 세계를 넘나듭니다. 서양에서는 아직도 태교라는 개념이 정확하게 없다고 합니다. 태명 또한 유일하게 한국식 문화이며 그 기원을 찾아 나선 그의 노력들이 자세하게 소개됩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왜군에서 조선의 최고 장수가 된 김충선 사야가3권짜리 소설로도 읽은 바 있는데, 그가 왜 조선인이 되었는지에 대한 뒷이야기는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새삼 다시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그는 임진왜란 때, 선봉장이 되어 남원으로 쳐들어온다. 그런데 왜군의 칼을 피해 쫓겨가는 와중에도 조선인들은 등에 하나씩 뭔가를 업고 뛰는 게다. 먹을 쌀, 보리 자루가 아니라 늙으신 어머니, 아버지였다. 이것을 본 사야가 장군은 야만한 국가가 문화의 나라를 쳤구나했단다. (231)

 

그는 우리나라의 어부바 문화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김충선까지 끄집어냅니다. 포대기의 어부바. 어린 동생이 더 어린 동생을 업는 어부바. 나이 들어 자녀들이 부모를 업는 어부바. 결혼식 모든 행사는 서양식으로 바뀌었지만 폐백에서 신랑이 신부 업어주기는 빠지지 않습니다. 칠순 잔치, 팔순 잔치에서도 자녀들의 부모님 어부바는 이어집니다.

 

그가 만들어 놓은 이야기를 들으며 꼬부랑 열두 고개를 넘다 보면 그 두꺼운 책이 어느새 끝납니다.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어 뭐를 하나 꼭 집어 얘기하기 어렵습니다. 그만큼 방대한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사실 한국 사람이라는 이름은 1962년 조선일보에 처음 나온다고 합니다. 그만큼 한국인의 역사는 짧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도 조선이나 고려, 꼬레아로 외부에 더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인의 역사는 짧지만 꼬부랑 할머니 이야기로 들어가면 우리의 이야기는 몇 천 년 저 아래 깊숙한 근원에 가 닿습니다.

 

세계의 석학들이 한국의 나물문화, 채집 역사를 알았다면 그들의 저술은 바뀌었을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아직도 우리나라는 유일하게 채집해서 먹는 음식 문화가 있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미역을 그저 sea weed 바다 풀이라고만 부릅니다. 미역, , 자반, 톳 등 온갖 바닷나물을 채집해서 먹는 유일한 한국인입니다. 달래를 캐고, 쑥을 캐서 반찬으로 먹는 나라입니다. 유럽에서는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채집하면 불법행위가 되어 경찰에 잡혀갑니다. 실제로 외국에서 자녀를 따라 이민 간 한국인 할머니가 공원에 마구 자라고 있던 쑥을 캐다 경찰에 잡혀간 뉴스도 있습니다. 제 사설도 길어졌네요.

 

아무쪼록 존경하는 선생님이 건강하여 그가 뜻한 바 열두 고개, 열두 권 한국인 이야기책을 모두 완성하여 소중한 대작으로 후손에게 남겨놓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선한리뷰]

이어져 내려오는 것들은 소중하다.

너랑 나랑 계속 사랑하자.

가슴이 아리어 아리랑, 가슴이 쓰리어 쓰리랑.

코로나로 우리 가슴이 아리고 쓰립니다.

그렇지만 봄이면 함께 쑥이랑 달래 캐먹고 자라난 우리 한국인.

쑥처럼 일어나고 또 일어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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