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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기어가 된 조선 유학자, 윤휴 - 왕과 사대부, 그리고 사관마저 지우려 했던 조선 최초의 자유로운 사상가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1년 4월
평점 :
#독서후기
(선한리뷰 2021-032) 오직 백성을 생각한 진짜 북벌론자, 윤휴를 생각하다
책 이름 : 금기어가 된 조선 유학자, 윤휴
글쓴 이 : 이덕일
펴낸 곳 : 다산초당
펴낸 날 : 개정증보판 2021년 4월12일 (초판 1쇄는 2011년 7월12일)
읽은 날 : 2021년 4월15일
한줄평 : 소크라테스는 이름을 남겼지만, 윤휴는 이름마저도 지워졌다.
다산북스로부터 책을 지원받아 읽게 되었다. 학창시절에 역사를 암기과목으로 공부해온 터라 역사에는 지식의 끈이 짧고 특히 서인, 남인, 노론 등 당파에는 더더욱 취약하여, 책을 이해할 수 있을까, 저어기 고민되었으나, 이번 기회에 공부를 좀 하면 좋겠다 싶어 서평단을 신청하였었다.
책을 읽으며 나의 호기심은 지금까지 그를 몰랐던 미안함으로, 그리고 그가 학식과 인품을 두루 갖추고도 정치에 나가지 않는 강직함에는 존경함으로, 주변 학자들이 그를 찾아와 교분을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는 안도감을 느꼈다.
숙종은 자리에 오르자 계속해서 윤휴가 궁궐로 들어오기를 청했다. 주변 관료들도 윤휴만한 사람이 없다며 그를 천거했다. 윤휴는 계속 고사했지만 자신의 북벌론을 실행할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에 오십이 넘어 자리를 털고 궁궐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 길은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진혼곡이 되고 말았다. 결코 되돌아올 수 없는 길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송시열을 주축으로 한 서인들의 행태에 기가 막혔고, 오직 중국만을 왕실로 인정하고, 조선의 왕실은 중국 왕실 신하 격인 사대부로만 인정하려는 그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지 분노가 일었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남의 눈으로 우리 역사를 보는 사람들이 역사학계의 주류다. 이들이 과거에는 일제 식민 사관만 추종하더니 이제는 중국 동북공정까지 추종하는 것으로 악화되고 있다. … 그렇기에 “세상의 많은 이치를 어찌 주자 혼자 알고 나는 모른단 말이냐?”고 항변하던, 백호 윤휴의 목소리가 다시 절실한 시점이다. (9~10쪽, 개정증보판 서문에서)
책을 덮자마자 인터넷으로 ‘북벌론’을 검색했다. 아, 주류 역사가 된 지식백과에서 밝혀주는 북벌론에 대한 이야기는 이번에 읽은 책 “금기어가 된 조선유학자, 윤휴”에 나오는 내용과 달랐다. 인터넷에서는 ‘북벌론을 주장했던 사람은 송시열, 이완, 김집, 송준길 등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었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 마지막 쪽을 펼쳤다.
이후에도 노론은 자신들과 다른 정견을 가진 국왕 경종을 독살하고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등 정치공작을 자행했다. 그러면서 윤휴의 북벌론을 송시열이 주장한 것으로 역사 바꿔치기를 시도했다. 그렇게 노론은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집권하고, 조선이 멸망할 때는 일제에 가담했다. 그렇게 지금도 국사 교과서는 북벌의 자리에 윤휴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송시열의 이름을 올려놓았다. (396쪽)
어쩌면 많은 역사학자들은 숙종실록에 기록된 내용을 근거로 자신들의 주장이 맞는다고 얘기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가 책에 옮겨 놓은 많은 실록 글을 읽고 맥락을 이해한다면, 실록의 글들은 같은 편에 있던 기록자들이 자기들만의 역사관으로 편향적이고 악의적으로 윤휴를 깎아내렸음을 알 수 있다. 송시열과 그 문하생들은 조선이라는 나라는 중국의 사대부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어린 윤휴가 서울에서 공부하던 광해군 15년(1623년) 3월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조선 후기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최대의 사건이었다. 율곡 이이의 제자들인 서인들이 선조의 서자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과 손잡고 광해군과 북인들을 내쫓은 쿠데타였다. 왕조 국가에서 군부(君父)라 불리는 임금을 쫓아내기로 결심한 서인들은 자신들의 임금은 조선 국왕이 아니라 명나라 황제라는 논리를 만들어냈다. (63쪽)
그러니 조선을 중국과 동일한 국가로 인식하고, 민생을 최우선으로 여겨 양반들에게만 유리하게 되어 있고 서민들의 등골을 휘게 만드는 많은 악법을 철폐하고, 잘 정비된 군사를 이끌고 청나라를 오히려 치러 가자는 진짜 북벌론자인 윤휴는, 최대한 신분의 권력을 누리려는 그들에게 눈엣가시로 여겨졌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숙종에 의해 갑작스럽게 다시 궁궐로 들어와 권력을 쥐자 백호 윤휴를 없애는 길만이 자신들이 오래 권력을 유지할 수 있음을 알고 윤휴 저격 프로젝트에 돌입한다. 그들은 어떤 죄목을 뒤집어 씌우더라도 윤휴를 죽여야 했다. 윤휴가 궐내에 같이 있는 한 절대로 두 발 뻗고 잠을 편하게 잘 수 없다는 걸 알았다.
한때 그의 정적들은 이렇게 마지막 말 한 마디까지 거부당한 (윤휴는 사약 받기 직전에 마지막 유언을 글로 남기길 청했으나 이마저 거절당했다.) 윤휴를 당대 최고의 선비로 추앙했었다. 이 선비의 죄목은 놀랍게도 역(逆)이 아니었다. 역은 커녕 임금과 백성을 너무도 사랑했고, 평생 일관되게 도(道)를 추구했다. 그의 길에 주자는 상대적 가치를 지닐 뿐이었다. 그 순간 그는 사문난적이 되었다. (12쪽, 서문에서)
책 서두에는 왜 윤휴가 그렇게 북벌을 주장했는지 당시 중국의 상황을 잘 설명해준다. 청나라 강희제는 중국의 남방 지역을 점령했지만 삼번의 난이 일어나 완전한 중국 통일을 하지 못한다. 명나라의 마지막 장군인 오삼계가 10만 이상의 군으로 남부 지역에 저항선을 구축했다. 강희제의 군들은 오삼계가 차지한 지역을 정복하지 못했다. 사실상 오삼계를 위시한 삼번은 청 제국 남방의 독립된 왕국으로 유지되었다. 윤휴는 이때 조선의 정예화된 군으로 청을 공격하면 청은 양쪽에서 공격 받게 되어 분명히 몰락할 것이라고 했다.
사실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들이 북벌론을 먼저 주장했지만 그들은 말뿐인 주장이었고 실천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윤휴가 나타나 전차를 만들자고 하고, 계속해서 북벌에 대한 상소를 올리자 그들은 윤휴를 더 이상 존경하는 학자의 자리에 둘 수 없었다. 자신의 안위를 위협하는 적일 뿐이었다.
역사가 어찌 그리 야속한지. 북벌을 구상하고 곧 실천에 옮기려던 효종은 삼번의 난이 일어나기도 전에 그런 전망을 예측하고 오랑캐는 반드시 망하게 될 것이라며 군사를 길러야 한다고 했다. 포병 10만 양성. 효종은 10년을 잡았는데 그 전에 한족이 봉기한다. 그것은 천명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발생한 종기를 치료하지 못하고 급사하고 만다.
효종과 현종에 이어 13세의 어린 나이에 갑자기 왕이 된 숙종은 주변으로부터 윤휴만한 학자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간곡하게 계속해서 윤휴가 궁에 나와주기를 바랐다.
“지금 시대에 학문이 박식한 사람은 장령 윤휴만 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가 초야에 있더라도 예를 갖추어 불러야 하는데 더구나 그는 지금 직명을 지니고 서울에 있겠습니까. 경연에 나와 돕기를 구한다는 뜻을 유시하신다면 그가 어찌 나오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승지 이동로도 경연 때 윤휴를 패초하여 입시하게 할 것을 청하고, 강관 이하진도 윤휴를 불러야 한다고 청했다. 숙종도 윤휴가 송시열의 빈자리를 대신할 만한 역량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윤휴를 다시 불렀다. 그러나 아직도 윤휴는 사양하고 있었다. (145쪽)
숙종의 거듭된 요청에 윤휴는 마음을 굳혔다. 만 58세에 궁으로 들어간다. 윤휴는 오직 북벌을 하기 위해 궁궐로 입성했다. 그는 병법에 능했고 전략가였다.
“우리나라의 정예 군사와 강한 화살은 천하에 소문이 났는데 여기에 화포와 조총까지 곁들이면 진격하기 충분합니다. 병사 1만 개를 뽑아 북쪽의 수도 연산(북경)으로 나아가 그 등을 치고 목을 조이면서 바닷길을 터 정경과 약조를 맺고 함께 병립하면서 그 중심부를 어지럽히는 것입니다.” (54쪽)
윤휴는 북벌만을 위해 관에 나간 것이 아니었다. 그의 마음은 백성에게 가 있었다. 민생의 폐단을 제거하는 것이 그의 중요한 출사 목적 중 하나였다. 그가 유배를 가고, 사약을 받으러 다시 궁으로 잡혀 들어갈 때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길거리에 나와 울었는지를 본다면, 시대의 역사가는 그가 진정 백성을 위한 관료이며 위대한 학자였음을 알아차릴 것이다.
왜 숙종의 마음이 송시열에게로 다시 돌아섰을까. 숙종은 서인들의 농간에 마음을 합쳐 63세의 노구인 윤휴에게 30대를 치는 곤장을 두 번이나 명한다. 고문을 시키는 것이다. 그는 이미 피투성이가 되었다. 상상하기조차 끔찍하다. 윤휴는 결국 서인과 숙종의 배신으로 죽음의 길을 가게 된다. 300년이 지나고도 그들의 후손은 말을 아꼈다고 한다.
이제라도 편향된 관점의 역사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고, 그가 진정으로 임금과 백성을 사랑한 학자였음을 알게 되어 참으로 감사하다.
친일사관, 사대주의 사관으로 쓰여진 모든 역사는 바로 잡혔으면 한다. 윤휴는 실질적인 북벌주창자였고, 전략가였고, 실천자였고, 개혁가였다. 차별적인 조선 신분제를 없애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고위급 신분을 가진 사람들은 당연히 그를 미워했다.
(선한 리뷰)
이제는 잘못된 물줄기를 바로 잡아야 한다.
스스로를 딸랑이, 종, 노예로 전락시키는 역사관은 진짜가 아니다.
우리 자녀에게는 올곧은, 바른, 역사가 전달되길 소망해본다.
선하기만 하고 선한 동조자를 동역자로 모으지 못하면,
계획적인 악에 파멸을 당할 뿐이다.
선한 영향력도 조직이 있어야 한다.
(선한 실천)
함께 할 사람을 모으자.
잘못 전달된 왜곡된 지식을
진리로 바꾸는 데 힘쓰는 작가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