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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어디에서 왔니 - 탄생 ㅣ 한국인 이야기
이어령 지음 / 파람북 / 2020년 2월
평점 :
품절
#독서후기 [선한리뷰 2020-014]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 탄생편』
로마에 ‘로마인 이야기’가 있다면 대한민국에는 ‘한국인 이야기’가 있다.
이어령 선생님만이 쓸 수 있는 지극히 한국적인 우리네 이야기.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의 굴렁쇠 소년을 기억하나요? 당시 총괄 기획자였던 이어령 선생님에 의해 상상되고 실천된 이 굴렁쇠 소년은 세상 모든 사람의 머릿속에 가장 한국적인 이미지로 강하게 인식되었습니다. 모든 시간이 멈추고 소리도 멈추고 오직 드넓은 평면만 가득한 세계. 초록의 스타디움을 가로질러 굴렁쇠를 몰고가는 어린 소년.

그는 당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창조 뒤에는 늘 외로움과 정적, 그리고 암흑이 온다. 한밤의 태양이 아니라 대낮의 어둠이 있다.” 그는 77세가 되던 2009년에 그동안 신문에 연재한 내용과 텔레비전에서 강연한 내용을 풀어, 로마에 로마인 이야기가 있다면 한국에는 “한국인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며 총 12권의 대규모 기획으로 77세에 첫 책 ‘탄생’ 편에 대한 집필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무리한 집필로 인해 뇌 수술을 받았고 10년의 긴 세월 동안 두 번의 암 수술과 투병을 거치며 2019년에서야 첫 책을 세상에 내놓게 되었습니다.
그는 병원에서도 집필을 이어갔는데 더 이상 컴퓨터에 있는 자료를 이용하지 못해 순전히 그의 기억에 저장된 내용만으로 이야기를 쓰고 고치고 다시 쓰기를 반복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탄생했다는 사실은 책 마지막 부분의 인터뷰 글을 읽고서야 알게 되었는데, 미리 그 부분을 읽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면 좀더 정성껏 한쪽 한쪽을 읽을 것인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이어령 선생님은 제가 참으로 존경하는 학자요 작가입니다. 그의 스토리텔링 기법은 탁월합니다. 이번 책에서도 그는 ‘꼬부랑’ ‘아리랑’ ‘쓰리랑’ ‘너랑 나랑’ 등 한국인이 즐겨 쓰는 –랑 첨미소에 대한 탁월한 분석을 합니다. 그 분석에 콩고물을 입히듯 그가 어린 시절 경험한 과거의 옷을 입히고 그가 학자로서 연구한 세계의 지식들을 인문학적으로 편집해 탈색합니다.
오래 전 그가 주장한 ‘보자기론’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은 과학적 논거가 없는 자기 주장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하기도 하고 그래서 그가 싫다는 사람들도 간혹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의 그런 상상력이 가미된 이야기가 좋습니다. 한국인이 무심코 써오던 오래된 것들은 연구한 학자가 없기 때문에 당연히 자료나 사료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어령 선생님은 이번 책에서 상당한 자료들을 첨언하여 자신의 주장에 대해 학문적 논거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어린이를 업는 ‘포대기’가 서양에서 유행하고 있는데, 포대기의 영어 이름은 ‘podaegi’입니다. 한국의 호미가 영어로 ‘ho-mi’인 것과도 맥을 같이 합니다. 서양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전통적으로 스와들링이라는 걸 하는데, 이는 부모의 작업과 효율성을 위해 아이를 부모로부터 떨어뜨리려 했고 이는 아이를 꽁꽁 묶어 세워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루소는 ‘에밀’ 5부 중 1부에서 이를 비판하는데 할애합니다. 서양에서 처음으로 자신들의 전통적인 육아 방식을 비판한 것입니다.

(인터넷 구글에서 ‘podaegi’로 검색한 화면)
이어령 선생님의 분석에 의하면 한국의 포대기는 아이와 접촉성과 밀착성을 최대한 높이는 매우 훌륭한 도구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오히려 한국 사람들이 서양식을 따라가 우리나라에서 포대기는 점점 사용이 줄어들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이 책은 우리가 어린 시절 할머니나 부모로부터 잠들 때 듣던 ‘꼬부랑 할머니’ 노래나 이야기로부터 시작합니다. ‘한국인 이야기’의 첫 책 탄생편은 바로 ‘꼬부랑 할머니’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바로 한국인의 시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국어에는 유난히 이응으로 끝을 맺는 말들이 많습니다. 구부러진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다리, 굴뚝, 건물은 모두 직선이지만, 처음부터 만들어져 있는 강, 산, 길은 모두 곡선입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의 말들도, 이야기도 모두 구부러져 있습니다.
“임어당은 서양과 중국의 예술을 비교한 아포리즘을 남겼다. ‘이 세상 살아 있는 모든 것은 곡선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죽어 있는 것은 모두가 경직된 직선이다. 자연은 항상 곡선을 탐한다. 보아라. 초승달이 그러하지 않은가. 솜 같은 구름. 꼬부랑 언덕, 굽이굽이 흐르는 냇물이 그렇지 않는가. 한편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 – 마천루, 철도선로, 공장굴뚝, 모든 게 그렇듯이 언제나 직선적이고 꼿꼿이 솟아 있다.’ … 꼬부랑 고갯길은 인간이 만든 게 아니라 ‘자연=신’이 만든 길이다.” (372, 373)
1880년 서주당 이씨가 작성한 ‘태교신기’라는 세계 최초의 태교지침서라는 책을 통해 전 세계에서 대한민국이 유일하게 태교를 시작했다는 그의 이야기는 어머니 양수로, 기저귀로, 포대기로, 옹알이로, 우리의 숨어 있는 먹거리 나물에 이어 콩잎에 이르기까지 그의 시선을 피해갈 한국적인 것은 없습니다.
어머니 자궁의 양수를 이루는 원소 순위가 바닷물의 원소 순위와 거의 똑같다는 그의 이야기 앞에서는 그만 넋을 놓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저의 상상력도 날개를 펼쳐 또 다른 저만의 이야기가 만들어졌습니다.
그의 지성은 우리나라에서 유럽으로 중국으로 일본으로 거침없이 세계를 넘나듭니다. 서양에서는 아직도 태교라는 개념이 정확하게 없다고 합니다. 태명 또한 유일하게 한국식 문화이며 그 기원을 찾아 나선 그의 노력들이 자세하게 소개됩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왜군에서 조선의 최고 장수가 된 김충선 ‘사야가’는 3권짜리 소설로도 읽은 바 있는데, 그가 왜 조선인이 되었는지에 대한 뒷이야기는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새삼 다시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그는 임진왜란 때, 선봉장이 되어 남원으로 쳐들어온다. 그런데 왜군의 칼을 피해 쫓겨가는 와중에도 조선인들은 등에 하나씩 뭔가를 업고 뛰는 게다. 먹을 쌀, 보리 자루가 아니라 늙으신 어머니, 아버지였다. 이것을 본 사야가 장군은 ‘야만한 국가가 문화의 나라를 쳤구나’ 했단다. (231)
그는 우리나라의 어부바 문화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김충선까지 끄집어냅니다. 포대기의 어부바. 어린 동생이 더 어린 동생을 업는 어부바. 나이 들어 자녀들이 부모를 업는 어부바. 결혼식 모든 행사는 서양식으로 바뀌었지만 폐백에서 신랑이 신부 업어주기는 빠지지 않습니다. 칠순 잔치, 팔순 잔치에서도 자녀들의 부모님 어부바는 이어집니다.
그가 만들어 놓은 이야기를 들으며 꼬부랑 열두 고개를 넘다 보면 그 두꺼운 책이 어느새 끝납니다.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어 뭐를 하나 꼭 집어 얘기하기 어렵습니다. 그만큼 방대한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사실 ‘한국 사람’이라는 이름은 1962년 조선일보에 처음 나온다고 합니다. 그만큼 ‘한국인’의 역사는 짧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도 조선이나 고려, 꼬레아로 외부에 더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인의 역사는 짧지만 꼬부랑 할머니 이야기로 들어가면 우리의 이야기는 몇 천 년 저 아래 깊숙한 근원에 가 닿습니다.
세계의 석학들이 한국의 나물문화, 채집 역사를 알았다면 그들의 저술은 바뀌었을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아직도 우리나라는 유일하게 채집해서 먹는 음식 문화가 있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미역을 그저 sea weed 바다 풀이라고만 부릅니다. 미역, 김, 자반, 톳 등 온갖 바닷나물을 채집해서 먹는 유일한 한국인입니다. 달래를 캐고, 쑥을 캐서 반찬으로 먹는 나라입니다. 유럽에서는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채집하면 불법행위가 되어 경찰에 잡혀갑니다. 실제로 외국에서 자녀를 따라 이민 간 한국인 할머니가 공원에 마구 자라고 있던 쑥을 캐다 경찰에 잡혀간 뉴스도 있습니다. 제 사설도 길어졌네요.
아무쪼록 존경하는 선생님이 건강하여 그가 뜻한 바 열두 고개, 열두 권 『한국인 이야기』 책을 모두 완성하여 소중한 대작으로 후손에게 남겨놓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선한리뷰]
이어져 내려오는 것들은 소중하다.
너랑 나랑 계속 사랑하자.
가슴이 아리어 아리랑, 가슴이 쓰리어 쓰리랑.
코로나로 우리 가슴이 아리고 쓰립니다.
그렇지만 봄이면 함께 쑥이랑 달래 캐먹고 자라난 우리 한국인.
쑥처럼 일어나고 또 일어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