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속의 자본주의자 - 자본주의의 변두리에서 발견한 단순하고 완전한 삶
박혜윤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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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후기

 

(선한리뷰 2021-050) 부럽다 부러워! 한국인의 미국 자연인이다’ - 숲속의 자본주의자

 

한줄평 : 헨리 데이빗 소로의 월든을 하나도 부러워하지 않는다.

 

책을 읽으며, 솔직히, 이렇게 살 수도 있나? 싶었다.

책을 덮으며, , 이들이라면, 이렇게 살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한국 텔레비전 채널을 장악하는 나는 자연인이다의 미국판 버전이라고나 할까.

한국인이 미국 숲에서, 100년 넘은 집에서 온 가족이 자연과 함께 사는 삶.

부러웠다.

부러웠지만 내가, 우리 가족이 박혜윤 김선우 가족을 따라할 수 없는 이유는 백 가지도 넘었다.

 

기자로 만나 결혼한 김선우 박혜윤 부부.

이 책의 저자 박혜윤은 미국에서 박사 학위까지 따고 교수를 눈앞에 둔 바로 그때,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시골로 향했다. 책을 읽어보니, 저자는 월든에서 자연인 생활을 한 소로를 1도 부러워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책 곳곳에는 소로의 글을 배치하고 있다.

 

소로가 월든에 간 이유는 어떤 삶에도 적용할 수 있다. 그는 인생을 남김없이 맛보고 싶었다. 그 어떤 경험도, 감정도 철저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 모든 것이 삶이기에 성공이냐 실패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이 삶의 골수를 빼먹는 그만의 방식이었고, 그의 삶에 의미를 만들어 주었다.

 

나도 내 삶의 골수를 맛보고 싶었다. 나만의 의미와 이야기를 발견하고 싶었다. (프롤로그, 6)

 

소로는 철저한 계산과 시민불복종이라는 거시적 가치관을 가지고 월든으로 향했지만, 우리의 용감한 한국인 가족은 충동적이었다. 영화 기생충의 명언, 무계획의 계획성을 그대로 실천했다. 그들이 계산한 건, 자신의 재산으로 어느 수준까지 땅과 집을 장만할 수 있을까였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110년 된 시골집이었다.

 

그래서 나도 오래 버티려면 얼마가 필요한지 계산기를 두드려 보았다. 우리가 가진 돈에 맞추다 보니 지은 지 110년 된 시골집이었다. (17)

 

인터넷으로 두 부부를 검색해보니, 그들이 살고 있는 집 앞 전경 사진이 나온다. . 탄성이 절로 나온다. 110년 된 집이라 다 허물어가는 집일까 생각했지만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사진. 신동아 20216월호. 김선우 박혜윤 제공)

 

게다가 그들은 이미 상당한 인지도를 가진 유명인사였다. 이 책을 내기 전 이미 다양한 분야에서 책을 내고 있었다. 부부싸움 책도 내고, 자녀 교육 책도 내고, 회사 그만둔 책도 내고 자유를 선택하고나서 살아남기 위해 마치 글을 쓰는 전략을 택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올해 출간된, 비슷한 성질로 보이는 책이 또 있었다. 그리고 이번 책도 마찬가지다. 이미 베스트셀러 반열에 들어섰으니 그들은 먹고 살 걱정에서 조금은 더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다. 그들 가족은 숲속에 살지만 결코 자본주의를 버리지 않았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 하지만 그들에게 경제, , 자본은 결코 따분한 노동이 아니었다. 창조의 행위였고,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빵도 만들어 파는데, 즉석 호밀빵을 딱 이틀간만 만들어 이웃에게 판다. 딱 먹고 살만큼이라 한다. 하지만 요즘엔 코로나도 이마저도 중단되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동물적인 생존을 해결한 후에는 무엇을 하고 싶을까? 생산과정에서 부품이 되거나 소모되는 게 아니라, 생산 과정을 놀이로 만들 수 있을까? 돈을 버는 과정이 나를 나답게 하는 창조의 행위가 될 수 있을까? (21)

 

나는 일주일 중 이틀은 집에서 빵집을 연다. (15, 첫문장)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돈을 버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현실에선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여기 이들은 그것을 완벽히 실천하고 있다. 하고 싶을 때 하고, 즐길 수준까지만 한다. 하루종일 멍 때릴 때도 많지만, 암것도 안 하다 보면 무언가 하고 있다고 말한다.

 

(무계획의 계획) 아무것도 안 하다 보면 무언가 하게 된다. 그냥 누워 있으려고 했는데 빵도 굽고 콩만 넣은 된장도 만들고, 글도 쓰고 책도 읽고, 애들이랑 시시한 장난도 치고 농담을 하고, 식물 공부도 한다. 봄에는 땅에 나가 쐐기풀도 따고, 블래베리의 새순도 따먹으며 너무나도 풀답고 새순다운 그 맛에 감탄한다. 여름에는 대충 심어둔 호박이나 깻잎, 방울토마토도 먹고, 가을이 되면 라벤더, 로즈메리 같은 허브를 따서 말리거나 얼려 둔다.

 

대신 계획도 없고, 목적도 없고, 잘하려는 생각은 더더욱 없다. 하다가 싫증나면 대번에 그만둔다. 그러니 어떤 날은 침대에 꼼짝 않고 누워서 천장만 쳐다보기도 한다. 대신 깨어 있는 시간에는 멀쩡한 정신으로 산다. (57)

 

이런 정신. 아무나 소유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정신을 온 가족이 공유했기에,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아내고 있는 건 아닐까?

 

멋진 명언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가령, 그들이 처음 농부가 되려고 마음을 먹었을 땐, 그래도 두려움이 컸던지라, 농사법도 배우고, 유기농 농장에서 일도 하고, 다양한 체험을 했단다. 하지만 그들이 계획에 넣지 못한 한 가지. 바로 자신의 변화. 이런 통찰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마지막 부분에 슬쩍 끼워둔 문장 하나가 내 심장을 두드린다.

 

온갖 가축을 기르고 작물을 생산하는 농부들을 직접 만나 농사부터 판매 방법까지 배웠고, 남편은 그런 유기농 농장에서 인턴으로 일하기도 했다. 나는 혹시 몰라 옷 만들기, 비누 만들기, 집 짓고 고치기까지 배웠다. 하지만 우리가 미처 계획에 넣지 못한 것은 우리 자신의 변화였다. (25)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었고, 감동적인 이야기가 하나 있다. 내가 늘 인생 책으로 강추하는 <닥터 노먼 베쑨>에서 의사였던 노먼 베쑨이 자신이 직접 환자가 되어보고서야 환자를 보는 입장을 완전히 바꾸는 인생 변화를 실천했던 것처럼, 저자는 친환경 농사를 지어보고자 아등바등하다, “증오심이라는 무시무시한 감정과 조우하게 된다. 한낱 민달팽이, 귀여운 사슴에게로. 그리고 그녀는 친환경 농사를 포기하고 자연농법으로 바꾸게 된다.

 

친환경적인 농사를 지어보자고 뜻을 모으고, 그다음 가축 도살까지는 못해도 달걀이나 우유 정도는 직접 생산하자고 다짐했는데 농사 단계에서 깨달았다. 친환경적인 농사는 없다. 농사는 원래 환경 파괴를 기본으로 한다. 이런 깨달음을 얻게 된 건, 사슴과 토끼와 두더지와 민달팽이 덕분이었다. 나눠 먹을 수 있을 만큼 많이 심어도 소용없었다. 귀신같이 새순만 뜯어 먹었기 때문에 어떤 작물도 충분히 자랄 기회를 얻지 못했다.

 

담을 치고, 약을 뿌리고, 철사로 망을 두르는 방법도 있었다. 이 방법을 포기한 건 환경오염 때문도, 돈 때문도 아니었다. 증오심 때문이었다. 이 동물들에 대한 증오심은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무시무시한 감정이었다. (26)

 

농약을 치면서, 철사로 망을 두르면서 자신의 마음속에 솟아오르는 동물에 대한 증오심을 발견하는 저자의 그때를 상상해본다. 아찔하면서도 감동적이다. 그걸 발견하고 꺼내고 펼쳐보았다니. 자기의 가슴속에 있는 거울을 들여다볼 줄 아는 위대한 사람이었다. 누가 그럴 수 있을까. 증오심을 증오해서 그녀는 자본주의를 포기한다.

 

어제 <농부의 인문학> 서평을 쓰면서 참 행복했었다. 오늘 <숲속의 자본주의자> 서평을 쓰려고 스티커 붙여 놓은 부분을 다시 읽어보니, 어제 <농부의 인문학>과 많은 면에서 닮아 있었다. 가령 음식에 대한 가치관, 흙에 대한 가치관 같은 것들이 그렇다.

 

사슴을 미워하기 싫어 시작한 야생 채집은 내 삶을 의외의 방향으로 바꿔놓았다. 먼저 돈을 주고 음식을 사 먹을 때 비싸다는 생각이 안 든다. 뭐든 먹으면 내가 살겠다는 생각에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고마운 마음만 든다. (33)

 

간은 생물학적으로도 땅을 파면서 행복감을 느끼게 되어 있나 보다. 자연 상태의 땅에는 음식물 쓰레기를 묻어도 한두 달만 지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보드랍고 향긋한 흙만 남는다. 살아 있는 흙은 그야말로 청정하다. (27)

 

이렇게 이따금 흙을 만지며 놀고, 또 때가 오면 사슴처럼 블랙베리를 딴다. 그렇게 7년째 해온 일이지만 블랙베리를 따는 일은 정말 어리석은 짓이다. 가시에 찔려 상처가 많이 나기도 하고, 따고 씻고 얼리는 작업에 들이는 시간을 따지면 경제적 가치로는 최저시급에도 한참 미치지 못한다. 그렇지만 블랙베리를 따는 순간이야말로 내가 이 지구와 얼마나 강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내가 지구상 모든 생명체와 얼마나 가까이 맞닿아 있는 관계인지를 오감으로 느끼는 시간이기도 하다. 반드시 내 손으로 내가 먹을 것을 채취해야 한다. 그래야만 자연이 아름답고 거대하다는 단순한 깨달음을 넘어, 내가 먹고 생존하는 터전이 바로 이곳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28)

 

오늘 음식을 먹고, 그것이 내가 아닌 무언가와 연결되는 일임을 가장 열심히 인식할 때, 나는 비로소 살아 있다. (35)

 

그들 4인 가족은 두 대의 골동품 폴더폰으로 생활한다. 인터넷도 끊어 내고, 커피도 끊었단다. 물론 소로처럼 의도적인 차단은 아니었고, 어쩌다보니, 충동적으로, 그렇게 되더란다. 커피를 끊을 때는, 일주일 동안 사경을 헤매고, 일주일째 되는 날에는 죽은 사람처럼 10시간을 잤단다. 카페인이 그렇게 무서운지 처음 알았다고 했다.

 

(사진. 4인 가족이 쓰는 2대의 폴더폰)

 

하지만 그녀는 말한다. 커피며 술, 인터넷을 끊는 것이 꼭 필요한 일은 아니라고, 그렇게 해야만 자연인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그녀가 정작 자신의 변화는 미처 계획하지 못했다고 한 것처럼. 뭔가 시도를 함으로써, 변화를 주고, 변화를 겪고, 변화를 이겨내면서 이런 삶에 조금씩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고. 그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어떤 것이 좋거나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커피, , 인터넷으로 삶을 얼마든지 더 풍성히 만들 수도 있다. 다만 이런 변화의 과정을 겪고 나면 다른 변화도 불러올 자신감이 조금씩 생긴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57)

 

 

(선한리뷰)

 

산에서 사는 것,

세상과 단절하는 것.

커피를 끊고, 인터넷을 끊는 것.

그런 것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디까지 변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나도 그렇다.

지금은 할 수 없어라고 말하며 고개를 흔들지만,

조금씩 발을 담그다 보면,

언젠가는 숲 속에서 살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지원받았습니다. 개인적인 가치관을 바탕으로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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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 종말론적 환경주의는 어떻게 지구를 망치는가
마이클 셸런버거 지음, 노정태 옮김 / 부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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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후기

 

<환경보호, 이의 있습니다!! -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도서명 :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글쓴이 : 마이클 셸런버거

펴낸곳 : 부키

펴낸날 : 2021427

 

한줄평 : 종말론 환경보호론자에 대한 저자의 반격 - 이해는 되지만 공감은 어렵다.

 

(완독 후 전체적인 느낌)

 

저자의 주장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는 있지만,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려웠다. 어떤 부분에서는 저자가 책을 쓰기 위해 또는 자신의 의견을 강조하기 위해 빈약한 이야기로 지나치게 많이 끌고 나갔다는 생각도 든다. 다만, 최근까지 수많은 환경론자와 과학자들이 지구 온난화 등 기후변화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는 데 반해, 그것이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다는 색다른 의견을 제시한 것에 대해, 한번쯤 생각할 거리를 주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저작 목적)

 

이 책이 그 동안의 환경보호가 착각이었다는 우려할 만한 제목부터, 과감하게 <침묵의 봄>을 전면에 내세워 맞장을 뜨는 부분까지 극적효과를 높일 수 있었던 자신감은 저자가 바로 30년 동안 실제 환경 운동가로 활동을 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마도, 그동안 몸 담았던 자신의 환경 운동에서 뭔가 다른 정보, 다른 느낌, 다른 지식을 통찰하고 그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생각한다. 그의 동기는 순수했고 또 용감했다.

 

나는 지난 30여 년을 환경 운동가로서 살아왔다. 그중 20여 년은 기후 변화를 비롯한 환경 문제에 관해 조사하고 글을 쓰는 데 바쳤다. 내 목표는 자연환경을 보호하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보편적 풍요를 누리게끔 하는 것이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나는 이 책을 썼다. (28)

 

저자는 자연환경 보호도 물론이고 보편적 풍요도 누리게하고 싶었다고 말하지만, 책을 읽어보면 자연환경 보호보다는 명백하게 보편적 풍요에 더 저울이 가 있다. 이 책의 목적은 보호가 아니라 풍요의 필요성을 널리 퍼뜨리기 위해서 집필되었다.

 

마지막으로 이야기해야 할 것이 있다. 이 책은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윤리관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한다. 혹자는 그것은 주류 윤리관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세속적 형태건 종교적 형태건 휴머니즘을 옹호한다. 종말론적 환경주의자들이 곧잘 취하는 반인간주의에 반대하는 것이다.

 

기후 변화를 비롯한 환경 문제에 대한 논의는 흔히 혼란스럽고 혼돈에 빠지기 일쑤다. 대중은 과학의 탈을 쓴 공상이 아니라 진정한 과학적 사실을 구분해 알고 싶어 한다고, 또한 인류가 가진 긍정적인 잠재력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고 나는 믿는다. 이 책이 그러한 지적 허기를 달래 줄 수 있기를 희망한다.” (29)

 

또 이 책의 분명한 목적과 방향이 하나 있다. 저자는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윤리관을 옹호한다고 하였지만, 비판 대상으로는 종말론적 환경주의자로 한정하였다. 따라서 이 책은 대부분 종말론적 환경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과격한 내용과 과격한 행동을 비판하고 있다. 나는 독자로서 첫 출발점인 이 부분에서부터 이 책이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고 생각한다. ‘극단론자를 데려와 비판하는 것은 쉽다. 저자의 의견이 돋보일 수 있다. 그러나 종말론적 환경주의자들의 행동과 의견이 보편적인 환경주의자들의 의견은 아니다. 따라서 폭넓은 지지를 얻기는 힘들다.

 

(시간을 벌 수 있다?)

 

1901년부터 2010년까지 해수면은 19센티미터 상승했다. 기후변화정부간협의체는 2100년까지 해수면은 중간 수준 시나리오를 적용하면 66센티미터, 심각한 시나리오를 적용하면 83센티미터 높아질 것이라 경고했다. 설령 이런 예측들마저 기후 변화의 영향을 상당히 과소평가한 수치라 할지라도, 해수면 상승은 느린 속도로 이루이지기에 각 사회는 적응할 시간을 벌 수 있다. (39)

 

저자는 이 말을 하면서 네덜란드는 국토 3분의 1이 해수면보다 낮지만 부유한 국가를 이루었다고 예를 든다. 얼마나 빈약한 예시인지 모르겠다. 해수면 상승은 일어난다. 하지만 느리게 일어나니까 우리의 기술발전 속도가 빠를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충분한 대비를 할 수 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저자의 이 주장이, 설령 급진론자, 종말론적 환경주의자들의 주장이라 하더라도, 빨리 준비해야 한다,는 주장과 실제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준비해야 하는 것은 똑같다.

 

균형을 잡기 위해 동시에 읽고 있는 다른 책 <북극곰은 걷고 싶다>에서는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지구에 변화가 찾아오고 있다. 시간의 엑스축과 공간의 와이축이 뒤틀리고 접힌다. 시간의 주관자이던 자연은 통제력을 잃고 있는 것 같다. 지구의 온도는 지난 100년 동안 0.74도 올랐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

 

이 모든 변화가 인간에 의해 일어난 것임이 거의 확실하다고 기후변화 정부간위원회는 말한다. ... 균열 지점에서 이를 가장 혼란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이들은 북극과 적도, 남극의 사람들과 동식물들이다. (북극곰은 걷고 싶다. 7)

 

(식량 증산은 기후 변화가 아니라 기계화가 좌우한다)

 

유엔식량농업기구는 식량 생산량 증가는 기후 변화보다는 트랙터, 관개 시설 개선, 비료 등의 요소에 더 크게 좌우된다고 밝혔다. 가령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처럼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에 사는 농부라도 기술 발전이라는 단 한 가지 요인으로 40퍼센트의 식량 생산 증가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유엔식량농업기구는 전망했다. (41)

 

당연히 기계화는 생산량을 증가시킨다. 그것은 땅이든 바다든 하늘이든 마찬가지다. 저자는 바다 생물의 멸종이 기후 변화보다도 인간의 남획에 의한 것이라는 걸 주장한다. 맞는 말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동식물의 멸종은 인간의 의해 일어났다. 그리고 인간의 무분별한 남획을 이끈 것은 기계화다. 한꺼번에 더 많이 잡아들이려는 욕심. 그 기계화가 결국 멸종으로 가는 지름길을 만들고 있다. 그가 주장하는 것처럼 기계화가 농업 생산을 증가시키는 것도 맞는 말이지만, 그 기계화가 동식물을 빨리 멸종시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둘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지 한쪽편만 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종말론적 환경주의자들이 사실보다 감정에 치우쳐 있다고 비판하지만, 그도 진짜 지옥은 이런 곳이다같은 글로 마찬가지의 서술 방식을 취하고 있다. 저자는 세계 종말의 모습을 직접 보고 싶다면 중앙아프리카의 콩고민주공화국을 가보라고 말한다. 독자인 나는 저자가 도입부에 가져온 종말론적 환경주의자들의 주장과 의견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저자가 그런 단체를 자극적으로 가져와 글을 쓰는 행태에 대해서는 역시 마찬가지 마음이다. 저자도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그가 정말 자신의 의지를 잘 나타내려 했다면, 감정적이고 자극적인 단체보다는 보다 온건한 자료와 전체적인 과학과 통계 자료를 중심으로 서술을 했어야 했다. 그의 의견 상당 부분이 맞는 말일지라도, 그가 가져오는 단체들의 면면과 그가 그들의 자료와 비교하는 서술 방식은 자신의 독립성과 정통성 및 과학성을 오히려 훼손해 버린다. 저자의 자료 역시 신뢰를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이 책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많은 글은 과학적 통계와 보편적인 논문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 않았다. 종말론적 환경주의자가 말하는 내용에 반대하는 의견을 밝힌 사람들을 찾고 만나 그들과 인터뷰하고 그들의 말을 옮겨 적고 있다. 그 의견에 대한 정확한 데이터와 통계 그리고 그 말을 신뢰할 수 있는 내용은 소개되어 있지 않았다.

 

 

“2020년 영국에서 수행된 대규모 설문 조사에 따르면 영국 어린이 5명 가운데 1명은 기후 변화와 관련된 악몽을 꾼 적이 있다.” (71)

 

도대체 이런 통계를 왜 가져와 글을 쓰는지 모르겠다. 이 역시 감정을 팔아치우는 자극적인 종말론적 환경주의자와 뭐가 다른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해보자. 5명 가운데 1명이라면 나머지 4명은 왜 그런 악몽을 꾸지 않는지. 나머지 4명은 왜 같은 상황에서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는지, 임파워먼트 분석을 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훨씬 숫적으로 많은 데 말이다.

 

저자는 지금의 모든 종말과 재난의 원인이 가난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국가가 부유해지면 모든 게 더 나아질 것이며, 그래서 지금 당장 가난한 나라에게는, 환경보호보다 화석연료가 들어가더라도 공장을 세우고 불을 지펴 경제를 먼저 살리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맞는 말일 수 있다. 당장 굶어 죽을 빈곤한 국가에게 가서 굶어 죽더라도 환경 먼저 보호하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게 전체의 정답은 아니다. 저자는 철저히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판단하는 선진 국가의 입장에서 아직 개발이 덜 되었다고 생각하는 후진국을 대상으로 이 책을 집필하고 있다. 그가 보는 시선 자체에 문제가 있다. 전 지구적인 환경문제를 보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나라들에 초점을 맞춘 부분적이고 편협된 시각으로 그것이 전체 지구의 환경 문제를 대변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부유한 국가일수록 재난 앞에서 회복탄력성이 더 뛰어납니다. 그러니 사람들을 더 잘살게 만들어서 회복탄력성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해요.” (77)

 

저자는 선진국들이 탄소배출량을 훨씬 더 많이 줄였다고 자랑한다. 그러니 어서 모두 선진국이 되는 게 답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제대로 말하자. 지금 선진국이라고 하는 서구 국가들이 아프리카, 아시아 국가들을 식민지 삼고 화석에너지를 집중적으로 사용하여 지구를 대기오염 덩어리로 만들며 선진국이 되었고, 지금의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그는 브라질의 열대우림이 지구의 산소를 책임지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의 이 주장은 나도 동의하는 바이다.) 오늘날 브라질에서 농경을 위해 숲을 개간하는 일이 그렇게 충격적이냐고 되묻는다. 삼림을 개간하는 것은 수백 년 전부터 유럽에서 벌어져 왔던 일인데, 왜 브라질만 그렇게 민감하게 보냐고 따진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유럽에서, 아시아에서 수백 년 동안 그렇게 숲을 파괴해왔기 때문에 이제 홍수가 잦아지고 동물이 사라지고 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고, 이제는 그러지 말자고, 좀더 보존하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여전히 생존을 위해 숲을 개간하는 건 그다지 우려할 만한 일이 아니라고 얘기한다. 게다가, 빨리 선진국이 되어 스웨덴처럼 발전된 기술력으로 숲을 만들어내면, 100년 동안 2배 가량 조림된 숲이 늘어날 수 있다고 얘기한다. 저자는 기술만 발전하고 경제만 발전하면 그게 숲이든 바다든 모든 걸 다 회복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는 참으로 초긍정적인 사고의 소유자로 볼 수 있다.

 

브라질은 세계은행이 삭감한 농업 연구 예산을 자체 재원으로 조달했다. 그랬더니 그린피스가 끼어들어 유럽 식품 회사들에 압력을 넣었다. 브라질산 콩을 구매하지 말라고 말이다.” (105)

 

농부 처지는 생각지도 않고 규제 위에 규제를 또 가하고 있는 그린피스에 대하여 저자는 매우 부정적이다. 그가 철저히 브라질 농부의 입장에서 쓴 글은 공감이 간다. 먹고 살기 위해 삼림을 개간하고 나무를 베어내고 콩을 심는데 그걸 막으면 농부들은 어떻게 하라는 말인지, 계속 가난하게 되면 그 피해는 도리어 전세계에 미치게 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브라질 숲이 사라지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리고 설령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지구적 환경 영향은 매우 미비하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저자는 바다 해양 쓰레기인 플라스틱, 미세 플라스틱에 대해서도 매우 온건하다. 플라스틱에 대해 과학자들은 2015년에서 2025년 사이에 플라스틱 쓰레기가 10배로 늘어날 것이라고 추산했다고 전한다. (120) 그러면서 2007년에서 2013년 사이에 9명의 과학자가 24회 탐사를 실시하고, 미세 플라스틱이 애초 예상했던 것보다 100분의 1 수준으로 적었다고 밝혔다. 애초 예상을 얼마나 했는지 모르겠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적으니 문제가 없다는 주장이 얼마나 과학적인지 모르겠다. 그러면서 저자는 햇빛이 플라스틱을 소멸시킨다는 하나의 연구자료를 제시했다. 이런 연구자료가 얼마나 과학적으로 입증되었고 보편화되었고 신빙성 있는지는 모르겠다. 나도 업무상 여러 국가 연구과제를 진행하면서 바다 플라스틱 및 미세 플라스틱 관련 자료를 많이 조사했었다. 하지만 나는 긍정적인 연구자료보다 부정적이고 위험한 상황에 처한 자료를 더 많이 발견했다.

 

게다가 저자는 놀랍게도 플라스틱이 기적의 물질이라고 말한다. 플라스틱이 오히려 수많은 동물의 목숨을 구원했다는 것이다. 그 논리는 이렇다. 코끼리는 상아를 얻기 위한 인간들의 욕심에 의해 무참히 죽어갔는데, 상아는 피아노 건반 재료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고기능성 플라스틱이 개발되면서 피아노에서는 점점 상아 대신 플라스틱을 사용하게 되었고 그래서 상아를 위한 사냥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러니 코끼리를 구한 일등공신은 다름 아닌 플라스틱이다. 그러므로 플라스틱이 바다로 조금 흘러간다고 너무 호들갑 떨지 마라. 어떤 연구 논문에서는 다 분해된다고도 하지 않냐. 바다에 버려지는 비닐봉지는 플라스틱 쓰레기 중 0.8퍼센트밖에 안 된다. 그러니 좀 더 버려도 문제될 건 없다. ..... 솔직히 저자의 이런 주장에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최근에 벽돌책 모디빅을 읽고 있다. 거대한 향유고래를 잡기 위해 모험을 펼치는 포경선 얘기다. 책을 읽어보면 당시에는 오직 고래로부터 기름을 얻기 위해 고래 사냥을 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가 고래로부터 기름을 얻지 않는다. 그래서 고래 남획은 많이 줄었다. 그런데 여전히 일본은 고래잡이를 실시하고 국가적으로 적극 옹호하고 있다. 최근 읽고 있는 책 <북극곰은 걷고 싶다>를 보면, 캐나다에서도 아직 고래잡이를 허용하고 있으며 북극에서는 생계를 위한 목적에 한해 이누이트(에스키모족)에게 고래잡이가 허용되고 있다. 저자가 좋아하는 기계화로 인해, 이제 에스키모인들은 고래를 작살총으로 잡고, 굴삭기를 이용해 해체 작업을 한다.

 

저자는 기술발전이 이루어지고 양식 산업이 활발해지는 것은 오히려 바다생물에게는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만약 자연산 물고기만으로 지구 사람들의 양식이 되게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하게 될 거라고. 그건 맞는 말이다. 사람들은 계속 늘어나고 바다 생물은 계속 줄어들고 있다. 그 결정적인 요인으로 기후 변화가 있다. 하지만 저자의 생각은 달랐다. 그의 주장은 이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자연을 지키기 위해서는 인공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145)

 

그리고 말한다. 여러 나라에서는 쓰레기보다 더 중요하고 긴급한 일들이 많다. 어떻게 쓰레기에, 환경보호에 신경을 쓰겠나. 물론 나도 그런 사실은 잘 알고 있다. 실제 오래 전에 읽었던 <왜 지구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보면 가난의 문제가 단지 경제만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온갖 복잡한 정치적 상황, 국가적 이해관계, 유럽 국가들의 아프리카 식민지 후유증 등이 얽혀 있다. 맞다. 알고 있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환경보호, 온난화 문제를 계속 미루어둘 수는 없다. 곧 닥칠 일이고, 우리 자녀들이 그 시간을 온전히 살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공교롭게도 경제발전을 이루어 환경보호를 잘 한 국가로 우리나라, 한국을 예로 들었다. 나무를 연료로 사용하던 가난한 나라가 농업을 버리고 화석 연료로 공장을 가동하여 공장과 도시화로 연료의 에너지 밀도를 높였다고 말한다. 저자가 보기에 우리나라는 과밀해진 도시화 상태가 매우 만족스럽게 보이나 보다. 저자는 브라질이든 콩고든 농촌 인력을 공장 노동자를 탈바꿈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원자력에 대한 그의 주장은 또 어떠한가. 저자는 원자력에 대한 공포가 과도하며 원자력은 매우 안전한 물질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나 역시 과제를 위해 원자력 관련 자료를 조사했었다. 하지만 나는 어디에서도 원자력의 안전함에 대하여 확인할 수 없었다. 지구상에 완전히 안전하게 구축된 원자로는 없다. 하지만 그는 어떤 사고든 사람은 죽기 마련인데 원자력이라고 해서 크게 더 죽은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전혀 사망한 사람이 없다는 건 아니지만 자동차 사망 사고 등을 대비하며, 우리나라 질병본부청이 백신 사망자를 자동차 사망자와 비교하는 것과 비슷한 말을 하며 분통을 터뜨리게 한다. 자동차, 발전소 등에서 화석 연료를 사용하면서 2016800만 명이 죽었지만 원자력 발전소는 아직 그런 사망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원자로는 미래에 대한 가정이다, 현재의 사망자 수를 가지고 비교해서는 안 된다.

 

내가 업무상 조사했던 우리나라 원자력 안전연감 자료에 따르면 원자력 시설에서의 중대 사고는 발생빈도는 매우 낮지만 한번 발생할 경우 그 피해나 결과가 매우 크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원전이 항공기보다, 자동차 안전보다 안전하다고 단순 비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서술하고 있다.

 

설령 사용 후 핵연료가 대기 중에 다소 노출된다 한들 세상이 멸망하거나 하지 않는다. 그런 일에 대응할 수 있는 인원들이 늘 대기 중이다. (314)

 

저자의 이 글을 읽고는 정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한참을 생각했다. 정말 너무 무책임한 발언이 아닌가. 이런 글로 어떻게 원자력이 안전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지, 참 실망스러웠다. 저자는 나아가 종말론적 환경주의자들이 콩고와 같은 가난한 나라의 경제 발전을 막고 있다고 보고 있다. 콩고가 가난한 게 환경주의자들 때문이라는 것이다.

 

부유한 나라의 환경주의자들이 콩고 같은 나라의 가난을 초래하는 근본 원인은 아니지만 최소한 책임은 있다. 가난하고 낙후된 지역 사람들이 산업화와 개발의 혜택을 받지 못하도록 그 길에 들어서는 것을 어렵게 막고 있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449)

 

 

북극곰은 어떤가.

 

1963년부터 2016년까지 사냥 당한 북극곰이 약 5만여 마리인데, 현재 남아있는 북극곰이 25천여 마리이므로 그 두 배다. 그러니까 사냥이 문제였지 기후 변화에 따른 감소는 아니다. 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동물은 인간에 의해 파괴되고 멸종되어 온 것은 사실이다. 단순 숫자로 사냥에 의한 피해가 더 많을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앞으로 기후 변화에 따른 환경 변화는 더 심각해질 수 있다, 그는 이 부분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기후 변화에 따른 곰 숫자 감소가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았다고 해서 영향이 없다고 단정짓는 건 매우 위험하다. 저자는 기후 변화가 북극곰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북극에서 생활하고 기후 변화를 체감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다르다. <북극곰은 걷고 싶다>에 따르면 빙하가 빨리 녹고 북극에 찾아오는 북극곰의 주기가 달라지면서 모든 생태계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실제 단단해진 얼음을 딛고 이동하던 동물 수백 마리가 빨리 찾아온 해빙기에 바다에 빠져 몰살당했다고 한다. 식물의 개화 시기가 달라지고, 식물을 먹고 사는 초식 동물의 이동이 흐트러지고, 초식 동물을 잡아먹는 북극곰의 생계가 위협받고 있다고 말을 한다.

 

이건 정말 중요한 이야기다. 환경 종말론자들이 퍼뜨리는 논의는 부정확할 뿐 아니라 비인간적이다. 인간이 생각 없이 자연을 파괴하고 있다는 말은 옳지 않다. 기후 변화, 삼림 파괴, 플라스틱 쓰레기, 멸종 등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탐욕과 오만이 초래한 결과가 아니다. 우리 인류가 더 나은 삶을 추구하기 위해 경제를 발전시키는 가운데 발생하는 부작용일 따름이다. (541)

 

저자의 이 글로 인해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환호성을 지를 것이다. 우리를 옭죄고 있던 환경에 대한 책임론에서 완전히 벗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책에서 지속적으로 동물의 감소, 생태계 파괴에 인간의 욕심이 큰 역할을 했다고 말해왔다. 저자는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하고 있다. 스스로 면죄부를 주는 글로 독자들을, 환경을 생각하지 않고 개발에만 힘써 왔던 많은 기업인들을, 국가 지도자들을 해방시켜 주었다. 하지만 저자의 글 때문에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고 본다. 지금의 환경은 우리의 탐욕과 오만이 초래한 결과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생존하기 위해 환경을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그건 맞는 말이 아닌가. 우리나라도 그러했다. 그래서 독재가 용인된 것이다. 그땐 그랬지만 이젠 그러지 말아야 한다. 모르고 저질렀다고 죄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 인류가 마운틴고릴라 같은 멸종 위기종에 신경을 왜 써야 하느냐고 묻는다. 저자는 말한다. 마운틴고릴라가 멸종한다 해도 인류에게 물질적 손해는 없다고. 우리는 다만 영적으로 빈곤한 존재가 될 뿐이라고. 이 글을 읽고는 또 멍해졌다.

 

 

실제로 우리는 기온이 매우 변덕스럽게 우리를 괴롭히고 있음을 피부로 체감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뚜렷한 4계절과 삼한사온이라는 기후 공식이 거의 사라지는 중이다. 우리나라는 봄과 가을이 점점 짧아지고, 여름과 겨울이 그 자리를 대신해 점점 길어지고 있다. 옷을 살 때마다 봄옷, 가을옷은 고민하게 된다. 너무 짧게 지나가버리기 때문이다. 온난화가 큰 문제 없을 거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기존 환경종말론자의 주장과 대비할 것이 아니라, 실제 어떠한가를 보다 면밀하게 분석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나 역시 그린피스든 어떤 환경주의자들이든, 괴상한 분장을 하고, 언론의 주목을 받기 위해 대기업을 공격하고, 제왕처럼 군림하는 것은 저자와 마찬가지로 옹호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구의 환경은 그린피스 혼자 구하는 것이 아니다. 일부 환경주의자와 과학자들 때문에 보호되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실질적이고 본질적인 환경 상황과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야 했다.

 

 

또 논점이 조금 어긋났다. 가난한 나라들에게 기후 문제가 빈곤 문제보다 더 크냐며 기후 문제를 축소시켰다. 어떤 나라든 빈곤 문제는 당연히 당장 해결해야 할 우선순위의 문제다. 하지만 기후 문제를 외면해서도 안 된다. 저자는 선진국이 후진국의 기술개발과 경제발전을 빨리 도와주어서 가난에서 벗어나게 한 다음에, 환경을 생각해보자고 말하지만. (지금 우려하고 있는 환경 문제는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므로) 그렇지 않다. 선진국은 자신들이 저지른 과오를 책임지기 위해서라도 경제발전과 함께 환경 문제도 함께 보호하는 일이 앞장 서야 한다.

 

저자의 주장은 신선하고 새로웠다. 하지만 저자의 주장으로 인해 지구의 환경 문제가 더 후퇴될까 걱정되는 것은 사실이다. 독자는 양쪽 의견을 다 들어볼 필요가 있다. 기존의 환경문제에 대해 다른 관점의 주장을 듣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역사는 그렇게 발전하는 것이니까.

 

 

(이 글은 출판사의 지원으로 책을 무상으로 받아 작성한 글임을 밝힙니다. 책 리뷰는 지원과 무관하게 평소 리뷰 습관대로 개인적인 취향과 개인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자유롭게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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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 - 아킬레스건 완파 이후 4,300㎞의 PCT 횡단기
정성호 지음 / 지식과감성#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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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후기

 

(선한리뷰 2021-038) 멕시코에서 캐나다까지 4,300킬로미터 6개월 걷기. 한국인의 워킹

 

한줄평 : 걷기는 아름답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일지라도.

 

한국 젊은이가 멕시코 국경에서 캐나다 국경까지 그 험난한 4,300킬로미터 PCT 트레일을 완주한 책이 나왔다는 글을 읽었다. 나는 주저없이 책을 찾아 카트에 담았다. 지금 읽고 있는 걷는 자의 꿈, 존뮤어 트레일”(이 책도 걷기의 주인공은 한국인이다.)을 다 읽으면 다음 걷기 관련 책으로 구매할 생각이었다. 나는 우리나라 둘레길도 제대로 걸어보지 못했으면서 고작 하루 1만보 걷기에 대한 동기부여를 한다는 핑계로 걷기 관련 책만 줄창 읽어 댔다. 그러다보니 충격을 받았던 와일드독서 이후 미국의 3대 장거리 트레일 PCT, AT, CDT를 책으로 섭렵했고, 일 년 중 3개월만 길이 열린다는 숨겨진 트레일, 358킬로미터의 존뮤어 트레일도 알게 되어 지금 두 번째 존뮤어 트레일 관련 책을 읽고 있고, 영국을 가로지르는 CTC 트레일까지 책으로 독파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아킬레스 건을 다치고도 6개월에 걸쳐 미국 PCT 트레일을 완주한 한국 청년의 책이 나왔다 해서 기대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서평단 모집 공고가 올라왔다. 그렇게 계획보다 빨리 이 책은 내게 왔고, 먼저 읽고 있던 존뮤어 트레일책을 제치고 먼저 완독하게 되었다.

 

이 책은 지금까지 읽었던 트레일 관련 책 중에서 가장 IT 기기의 활용도가 높았다. 스마트폰 Guthook 앱에는 PCT 트레일 정보가 상세히 나와 있어 길 찾기, 물 포인트 찾기, 다른 마을로의 연결 등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고 한다. 처음 시도하는 초보 하이커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정보가 될 것이다.

 

처음에는 저자인 정성호 혼자 트레킹을 하는 줄 알았는데 책을 읽다보니 그의 여자친구 은진(실명일까)이와 동반 트레일을 하는 것이었다. 책에는 저자와 여자친구와의 긴장과 갈등 그리고 사랑의 이야기들이 계속 이어졌다. 어쩌면 그런 시시콜콜한 감정의 노출이 건조하고 습한 걷기의 이야기를 오히려 부드럽게 만들어주었다. (물론 당사자들은 심각한 관계의 부딪침이었겠지만)

 

오빠, 이제 나 PCT 그만 하고 싶다.” 멕시코 국경을 떠나온 지 2주가 조금 지났을 때였다. (34)

 

오빠라 불리는 저자를 따라 원치 않는 트레일을 따라 나선 여친. 이 둘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스포를 하지 않기 위해 말을 아낀다. 은진은 수시로 트레일을 그만 두고 싶어 하는데, 저자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가는지 참으로 흥미진진했다. 그리고 박수를 쳐주고 싶다. (지금은 결혼을 했을까? 이렇게 온 사방에 책으로 여친 광고를 다 했는데, 궁금하기도 하다.)

 

은진이가 언제 싸웠냐는 듯이 환하게 웃으며 기쁜 소식을 전했다.

진짜가? 진아 아까 화내서 미안해.”

아니다. 나도 기분 좋게 찍어줄 수 있는 건데 짜증스럽게 이야기해서 미안.” (41)

 

내가 부산에서 자라서인지 저자와 여친과의 갱상도 사투리가 리얼 그대로 팍팍 적혀 있는 이런 대화도 책 읽는 재미를 구수하게 더해준다.

 

외국인이 쓴 걷기 관련 책을 많이 읽었는데, 어쩌다 한국인이 쓴 책을 읽으면 비교가 많이 된다. 외국인 저자들은 장거리 여행을 하면서도 책 내용은 사람과의 만남이 주를 이룬다. 그래서 책이 건조하지 않고 재미가 있었다. 그런데 내가 읽었던 한국인 저자의 책은 지나치게 걷기에만 몰두해 있거나 해외 지역의 정보 나열식이어서 책으로서의 재미가 작은 것이 사실이었다.

 

이미 다른 PCT 트레일 책 와일드와 독일인으로서 미국 3대 트레일 13,000킬로미터를 완주한 이야기 생이 보일 때까지 걷기를 읽었던 터여서, 그 책에 나왔을 물 포인트며, 비오는 날 걷기, 곰과의 조우, 산길 곳곳에 아이스박스에 물과 음식을 가득 채워주고 자신들의 집에서 잠까지 재워주는 트레일 엔젤들과의 만남 등이 이 책에서는 어떻게 소개될지 매우 기대되었다. (놀랍게도 두 책의 주인공들은 모두 여자이고 혼자 완주에 성공한다.)

 

사막에서의 물은 금만큼이나 귀했다. 금 한 덩이와 물 한 통 중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여지없이 물통을 선택할 만큼 물은 귀했다. 물 포인트는 없을 때는 20~30km에 하나 정도 나타났다. 보통 물은 10km1.5L 정도 마셔, 물 포인트에 맞춰 한 번에 3~5L의 물을 지고 다녀야 했다.” (26)

 

그랬다. PCT 트레일은 사막도 지나야 한다. 요즘 유행하는 강철군대의 산악행군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통의 길이다. 게다가 물 포인트에 가도 물이 없을 때가 많다. 앞선 하이커들이 다 먹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출발 전 지도를 확인해 보니 멀지 않은 곳에 물 포인트가 있어 여유 있게 물을 마셨는데 막상 도착하니 고인 물에 벌레와 녹조가 가득했다. 비위가 좋은 편이라 생각했는데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아 정수하지 못하고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27)

 

이런 글은 상상하며 읽어야 한다. 영화처럼 필름을 전개시키며 읽는다. 주인공은 물이 있을 거라 생각하며 마지막 안간힘을 내어 물 포인트로 다가간다. 그런데 주저 앉고 만다. 물은 고여 있고 벌레가 가득하다. 정수 알약도 챙겨오지 않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걷기 책 읽기에 불을 지펴준 책은 26세의 나이에 이혼까지 하고, 아버지의 학대와 어머니의 죽음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빈털터리가 된, 여자 홀로 4285킬로미터 PCT를 완주한 이야기 와일드였다. 와일드에서는 초반에 주인공이 트레킹화 신발 한짝을 잃어버리면서 시작된다. 아찔했다. 어떻게 했을까? 충격과 궁금함을 동시에 안은 채 책을 읽어나갔고 PCT 트레일이 어떤 것인지 책으로만 그 재미를 알아버렸었다.

 

그런데 이 책 워킹에서는 저자가 PCT 트레일을 위해 회사까지 퇴사했는데 그만 아킬레스건이 끊어져 버리는 사고가 발생한다. , 우째 이런 일이. 보통 사람이라면 여러 가지 이유를 붙여 PCT 완주를 다음 기회로 미룰 것이다. 그러다 인생이 송두리째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을 것이고.

 

“PCT에서 가장 절망적인 상황이라면 당연히 어떤 이유가 되든 걷지 못하는 것이었다. PCT는 짧게는 4개월, 길게는 6개월이 걸리는 장거리 여행이기에 학생이 아니라면 보통은 회사를 그만두고서 와야 하는, 각자 안정된 삶이라는 큰 부분과 맞바꿔야 하는 일이었다.

 

매일 30km 이상을 걸어 하루 종일 몸을 쓰다 보니 몸이 아프면 나을 때까지 마냥 기다리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었다.” (52)

 

그런데 저자는 6개월간 열심히 치료를 받고 PCT를 포기하지 않는다. 사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저렇게 하지 못했을 거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포기했을 거라고, 그가 PCT를 도전했다는 사실만으로 그는 이미 성공한 것이라고 본다. 저자는 트레일을 시작하고 몇 번의 신체적인 위기가 찾아오지만 다 이겨내고 끝내 성공의 기쁨을 맞이한다.

 

거지처럼 먹다 남은 음식을 구걸하기도 하고, 곰을 만나 두려움에 떨기도 하고, 하루종일 비를 맞으며 걷기도 하고, 비내리는 밤 축축하고 차가운 매트리스 위에서 잠을 자야 하고, 일주일 내내 라면만 먹기도 하고, 물 걱정이 없어진 시에라 구간에서는 강을 건너다 사람이 죽었다는 얘기도 듣고 그랬다.

 

오빠, 앞에 곰이 있어.”

나지막이 속삭였다.

장난치는 거제?”

진짜라니까!”

 

얼마 되지 않아 은진이의 말대로 정말 곰이 있었다. PCT 길에서 3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어미곰 한 마리와 새끼 곰 두 마리가 나무를 타며 놀고 있었다. 배고픈 곰을 만난다면 달리 방법이 없다고 했다. 무엇보다 사람을 잡아먹을 때는 죽이고 나서 먹는 게 아니라 산 채로 먹기 때문에 자신이 죽는 걸 지켜보며 죽기 직전까지 고통을 느끼며 죽는다고 했다. (176)

 

그들은 와일드처럼 트레일로 돌아가는 차를 얻어 타고 가다가 신발 한짝을 놓고 내렸는데, 운전자가 40km를 다시 돌아와 신발을 전해주는 천사도 만나고. 걷는 일은 힘들고, 끝이 보이지 않아 보이고, 엉망진창처럼 보이지만 군데군데, 신이 예비해놓은 천사들이 많이 있었다.

 

프랭크는 수잔빌에 산다고 했는데 왕복 40km를 낡아 빠진 신발 하나 가져다주려고 일부러 들른 것이었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프랭크처럼 해 줄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자 그의 마음이 더욱 고맙게 느껴졌다.

하하, 어서 타.”

프랭크를 처음에 만났을 때는 스쳐 지나가는 별 의미 없는 사람이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아주 아주 오래도록 기억이 남은 사람이 되었다. (175)

 

그렇게 재미있게 책을 읽다가 중요한 포인트를 만난다. 사람들은 왜 그 험한 길을 걷는 걸까? 무엇을 얻으려는 걸까? 너무 힘들어 중간에 그만 두는 사람은 실패한 사람일까? 실패감으로 가득 차서 나머지 인생도 망쳐 버리는 걸까? 여러 생각이 들었다.

 

나도 위기가 많이 왔고 지금도 위기라고 생각해. 근데 사람마다 크건 작건 선택의 순간들은 항상 찾아오기 마련이잖아. 한 사람의 정체성은 그 사람이 하는 선택에 있다고 생각하거든. 힘든 순간에 포기를 선택하기보다는 이겨내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 그걸 선택하고 싶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내는 사람. 너는 어떤데?” (217)

 

나는 너무 힘들면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먼저 떠올린다. 겁도 많고 의지가 약하다. 끝까지 해내는 억척스러움이 없다. 그 생각이 의식 밑바닥에 늘 자리하고 있다. 나는 경쟁하는 걸 싫어한다. 이기는 걸 싫어한다. 내가 이긴다는 건, 누구를 패배자로 만드는 것인데, 그런 경쟁사회가 싫었다. 어쩌면 그런 것들이 나를 조금 나약한 근육으로 만든 것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저 부분을 읽으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내는 사람.”

 

저자는 잠깐 스쳐간 사람들에게서 많은 사랑을 받는다. 그러면서 또 하나씩 배워간다. 인생은 사람을 만나면서 성장하는 게 아닐까.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자기라는 편협된 우물 안에 갇혀, 플라톤의 동굴처럼, 그림자만 보고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가 만난 또 한 명의 사람은 그에게 친절과 호의를 베풀면서 인생명언을 하나 남기고 떠난다.

 

이상주의자보다 경험주의자가 되어라라는 말을 참 좋아해. 사람은 말이야 타인에게는 그의 성공으로부터 배우는 게 많지만 자신에게는 실패로부터 배우는 것이 더 많더라고. 부딪히고 깨지고 그러면서 삶을 조금씩 배워가는 게 아닌가 싶어.” (225)

 

와일드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는데 나는 아직 보질 못했다. 저자는 영화 와일드를 보고 PCT 트레일을 꿈꿨다고 한다. 저자가 트레킹할 당시인 2018년도에 한국인은 약 50명 정도가 도전했다고 한다. 생각보다 많아 놀랐다. , 정말 많이 도전하는구나.

 

참 재미있게 읽었고, 내 걷기에 대한 동기부여도 훨씬 크고 길게 확장되었다.

올 한 해 걷기 도전, 이 책으로 충전되었다.

 

(선한리뷰)

이상주의자보다 경험주의자가 되어라.

타인에게서는 성공으로부터 배우고, 자신에게서는 실패로부터 배운다.

그러니 내게 실패의 흔적이 많다고 자책하지 말자.

나는 더 많이 배운 사람이니까.

올해 걷기 도전이 사실 조금 주춤해졌다.

회사도 옮기고, 퇴근길에 걷는 코스를 찾는 게 쉽지는 않았다.

양제천이 있기는 한데, 집으로 가는 길이 아니다.

위로 양재역까지, 강남역까지 걸어보니 한 시간 가량 걸린다.

아래로 청계천역까지는 조금 더 멀다.

퇴근하고 집에 가서 저녁을 먹고 작심하고 걸어야겠다.

 

내일은 마침 쉬는 날이다.

아는 분과 함께 과천 둘레길. 6.2킬로미터를 걷기로 했다.

나에게는 모처럼 장거리 트레킹이다.

시작이 반이다.

이상주의자처럼 꿈만 꾸지 말고, 경험주의자, 실천하는 자가 되자.

 

도전하는 삶은 아름답다.

 

@원가가 좀 더 들더라고 사진을 컬러로 실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사진을 많이 찍은 걸로 보이는데, 흑백으로 나와 조금 아쉬웠습니다.

 

 

(이 글은 출판사의 지원으로 책을 무상으로 받아 작성한 글임을 밝힙니다. 책 리뷰는 지원과 무관하게 평소 리뷰 습관대로 개인적인 취향과 개인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자유롭게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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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구둣방 - 소리 없이 세상을 바꾸는 구두 한 켤레의 기적
아지오 지음 / 다산북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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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후기

 

(선한리뷰 2021-036) 구두에도 생명이 있다면, 구둣방은 꿈을 꾼다

 

도서명 : 꿈꾸는 구둣방

글쓴이 : 아지오

출판사 : 다산북스

발행일 : 202141

표지질감 : 마치 가죽으로 만든 듯 보드랍다

 

한줄평 : 읽는 즉시 아지오 팬이 되고 마는, 가슴 따뜻해지는 구두 공방 이야기.

 


공장은 대량생산하는 곳이다. 물론 요즘 공장들은 다품종 소량 생산을 하지만 똑같은 물건을 부품별로 조립해 만들어내는 건 똑같다. 그래서 나는 아지오 구두를 만들어내는 곳을 공장이 아니라 공방이라고 이름을 붙여본다. 모든 구두를 한땀한땀 손으로 직접 만들어내는 곳이니 공장이라 부를 수 없다. 그곳은 예술가의 혼이 담긴, 모든 작품이 하나의 독립된 완전체로 완성되는 예술품이다.

 

아지오를 상상해본다. 청각장애인들이 구두를 만든다고 했으니 손으로 서로에게 말을 할 것이다. 그래서 조금 조용할까. 망치로 가죽을 두드리는 소리만 까앙까앙 공방에 가득할까.

 

아지오 창립자인 시각장애인 유석영은 앞을 보지 못하니 뭘 하고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늘 고립되어 혼자 지내기 일쑤인 그에게 역시 동네에서 고독하고 떠돌던 한 아저씨가 말을 붙였다. ‘너는 앞을 보지 못해도 목소리가 좋고 말을 잘하니까 방송국에 가서 아나운서나 돼봐라.’

무엇이 될 수 있을지 가능성이 1도 없던 그에게 이 말은 커다란 희망이 되었고 꿈이 되었다. 나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 뒤 유석영은 라디오를 끼고 살며 꿈을 키워나갔다. 얼마나 설레고 미래가 기대되었을까. 하지만 어느 날 끼고살던 라디오에서 아나운서가 늦잠을 자서 안경을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원고를 읽지 못해 힘들었다는 얘기를 했다. , 그 절망감. 유석영의 그 절망감은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리라.

 

아나운서도 원고를 읽는 거구나. 그냥 말하는 게 아니었어.’

시골에 살며 라디오가 거의 유일한 대중매체이자 꿈이었던 소년에게 그 이야기는 청천벽력의 충격이자 공포로 다가왔다. 아나운서도 누군가 써준 원고를 읽고 말하는 직업일 뿐임을 깨닫고 그는 절망에 빠졌다. 원고를 읽을 수 없으니 아나운서가 되기란 불가능한 게 아닌가. (22)

 

그랬던 그가 하늘의 도움으로 CBS방송국에 들어가게 된다. 우연히 라디오에 엽서를 보내게 되고 그게 인연이 되어 잠깐 게스트로 출연하게 되고, 그 뒤 12년 동안 방송국은 그의 안전하고 안락한 울타리가 되어 준다. 그는 장애인의 삶과 현실을 취재하면서 장애인 방송인의 삶을 살았다.

 

그러다 복지관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재활 프로그램을 열다가 왜 장애인들이 오지 않는지 고민하다 돈이 되지 않는 프로그램보다는 직접 돈을 벌 수 있는 사업체를 만들게 된다. 그렇게 아지오 장애인 구두 공방이 시작되었다. 청각장애인을 아버지로 두었던 구두 장인 안승문을 초빙해오면서 구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장애인을 종업원으로 두고 아지오는 돛을 올리고 거친 바다로 나아갔다. 기존 직장보다 월급이 형편없이 작고, 작업장도 멀고 먼 파주까지. 그 모든 걸 감내하고 아지오로 둥지를 바꾼 안승문의 결심이 없었다면 아지오는 시작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안승문은 결심을 굳혔다. 이 무슨 얄궃은 운명인지 몰라도 내 앞에 놓인 게 이 길이라면 한번 걸어가보자고. 나중에 가서 후회할지언정 한번 해보고 후회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먹고살기 위해 구두를 만드는 거라면 지금까지 원 없이 해왔으니, 앞으로도 구두를 만들어야 한다면 다른 이유를 찾아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그래, 청각장애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내가 아니면 어떤 구두 기술자가 일부러 나서서 이 일을 하겠는가. 그 사람들의 설움도 고통도 아는 내가 가야 할 자리다.’ (44)

 

수녀원의 신발 300켤레 주문을 받아 수십 번을 오가며 구두를 만들어 내고, 유시민을 만나고, 국회 이벤트를 하면서 문재인 대선후보도 신발을 맞춰가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이지만 장애인이 만든다는 사실은 그동안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던 나쁜 편견을 깨지 못했고, 온갖 오해로 진정성 있게 나아가지 못했다. 그의 식당 일화는 읽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미어지게 한다.

 

끼니는 때워야겠는데 당시 유석영에게는 밥 먹는 시간도 아까울 때라 나오는 음식에는 관심이 없었다. 옆에 앉은 손님한테 구두 한번 보시겠어요?” 하며 슬쩍 말을 걸고 아지오 구두를 설명하려던 참이었다.

저희는 청각장애인 직원들과 구두를 만들고 있습니다. 천연 가죽이라 가죽이 숨을

그때 유석영의 손에 종이가 한 장 쥐어졌다. 이게 갑자기 무엇인가 하고 만져보니 천 원짜리 지폐였다.

그냥 이거 들고 가세요.”

천 원짜리를 쥐여준 사람은 식당 주인이었다. 유석영과 직원이 구걸을 하러 온 줄로 알았던 것이다. (90)

 

고급 소재를 쓰고 솜씨 좋은 장인을 동원해 최고의 제품을 만들었다고 생각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자선용 물건으로 보았다. 편견을 뚫으려면 경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서슴없이 영업했지만 그럴수록 사람들의 편견을 자극하는 셈이었다. (95)

 

갖은 애를 썼는데도 빚은 쌓여만 갔다고 한다. 장애인이 만든 구두라는 것은 측은지심을 불러 일으키고 지인들의 선의로 한두 번 구매 이상의 발전은 어려웠다.... 그는 절망했다. 이슈만으로는 지속적인 판매를 끌어낼 수 없었고, 사명만으로는 기업을 이어갈 수 없었다. 결국 3년 만에 직원들에게 폐업 소식을 전해야만 했다.

 

그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동안 안주머니에 품고 다니며 수없이 망설이던 말을.

공장을 더 이상 운영하기 어렵게 됐습니다. 이렇게 책임도 못 지고 가게 되어 미안합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잘해 봅시다.”

죽기보다 하기 싫었던 말을 결국 뱉어버렸다.

다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앞을 보지 못하는 유석영은 직원들의 표정을 살필 수 없었다. (15)

 

망했다는 말을 하고도 직원들의 얼굴을 볼 수 없는 회사 대표. 통역사를 통해 그 사실을 전해듣지만 서로 말을 하지 못하는 청각장애인. . 아무리 좋은 구두를 만들어도 세상의 벽은 높았다. 추천사를 써준 유시민 작가는 말한다.

 

우리가 사는 시장경제 또는 자본주의는 냉정합니다. 상품은 가성비가 좋아야 하고 노동자는 생산성을 올려야 하며 기업은 수익성을 높여야 합니다. 그래야 상품도 노동자도 기업도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아지오는 모든 게 거꾸로입니다.

 

구두를 일일이 손으로 만들기 때문에 가격을 낮추지 못합니다. 그래서 품질이 좋아도 가성비는 낮을 수 있습니다. 청각장애인도 수어로 얼마든지 소통할 수 있지만 비장애인 사업장보다 생산성을 높이는 데 유리할 리는 없죠. (6)

 

그렇게 망하고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파주 공장은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갔고, 안승문 공장장도 다른 곳에 직장을 잡았다. 다시 아지오는 세상에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고 2017년 유석영에게 청와대에서 전화가 온 것이다.

 

대통령님이 신발을 다시 사고 싶어하시는데 발을 재러 청와대에 들어와 주시겠어요?”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에 유석영은 얼어붙은 듯 멈췄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이 두 번째 도전 끝에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분도 우리 구두를 사주었지라며 기억을 떠올렸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 구두를 신고 있다거나 다시 찾으리라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취임한 지 일주일이 채 안 된 514일에 그런 전화가 온 것이다. 그는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몰랐다.

저희가 지금은 문을 닫았습니다.” (112)

 

청와대에서 전화 한 통 왔다고 사업을 새로 시작할 수도 없다. 당연하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시작하면 똑같이 망할 것이다. 그때 같이 일했던 장애인들은 어디로 갔는지 행방을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아지오는 다시 일어섰다. 이번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조합 형태로 태어났다. 외부 조합원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조합을 만들고 조합장, 이사 같은 조직이 만들어졌다. 아지오 때 큰 도움을 줬던 유시민도 조합원으로 많은 힘을 보탰다. 아지오의 뜻에 공감하는 많은 사람들이 협찬에 참여했다. 광고를 찍어도 광고비는 구두 한 켤레였다. 그때 공장장이었던 안승문 씨도 다시 합류했다.

 

모든 공정을 수작업으로 진행하는 아지오는 가격이 비쌀 수밖에 없다. 게다가 아지오는 직원들이 일일이 주문자에게 가서 발을 측정하고 구두를 만든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구두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발이 맞지 않으면 몇 번이고 다시 측정하고 문제점을 파악해 편안한 구두로 제공한다.

 

아지오의 구두는 주문이 들어오면 제작하는 수제화다. 이곳의 특별함은 고객의 발을 직접 재고 어루만져서 맞춤 구두를 제공한다는 데 있다. 그러니 디자인은 같아도 각양각색의 형태와 크기의 구두가 존재한다. 아지오의 맞춤화가 더욱 특별한 것은 누가 뭐래도 정직하게 구두를 만들기 때문이다. 아지오는 철저하게 처음부터 망치질을 하고 손으로 다듬어서 구두를 만들고 있다. 최상급의 가죽을 사용하고, 대면해서 실측하고, 가끔은 완성된 신발을 가지고 직접 소비자를 찾아가기도 한다.” (193)

 

책장을 덮으니, 마치 따뜻한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다.

마음이 따뜻해지고 힐링이 된다.

아지오를 무한 응원하고 싶어진다.

아지오, 이제는 무너지지 말고 꼭 자리를 지키고 있길 기도해본다.

 

(선한리뷰)

 

홈페이지도 찾아 들어가보았다.

구두를 꼭 사보고 싶지만, 가격이 비싸다.

나도 신발을 인터넷으로 함부로 주문해 신지 못한다.

은근히 내 발이 까다롭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또 오래 신고 다녀야 하기 때문에, 정말 편한한 신발을 찾을 수밖에 없다.

 

이번 선한 리뷰는 단 하나다.

꼭 아지오 신발을 주문하리라.

 

유시민 조합원의 이런 사심 가득한 청이 오히려 따뜻하게 다가온다.

 

독자들께 사심 가득한 청을 하나 드립니다. 코로나19 사태로 지독한 판매 부진을 겪은 구두만드는풍경 조합원으로서 드리는 부탁입니다. 꿈꾸는 구둣방을 재미있게 읽으셨다면 친구처럼 편안한 수제화 아지오홈페이지(agio.kr)에 접속해 구두 한 켤레 주문해주시길! (7, 추천의 글, 조합원 유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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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병 인류 - 균은 어떻게 인류를 변화시켜왔나
박한선.구형찬 지음 / 창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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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후기

 

(선한리뷰 2021-033) 코로나 시대, 감염병을 인문학적으로 이해하기

 

글 쓴 이 : 박한선, 구형찬

펴낸 곳 : 창비

펴낸 날 : 202145

다 읽은 날 : 2021417

 

한줄평 : 감염병 대응에 관한 인류의 원시성을 지적한 책.

 

인류를 괴롭히는 1400여 종의 병원체 대부분은 인류 스스로 불러들인 녀석입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인류의 진화사는 곧 감염병의 진화사입니다. 인류 스스로 끊임없이 감염병을 만들고, 그로고는 만들어낸 감염병을 두려워하고, 그 원인을 애꿎은 곳에 전가하면서 증오와 혐오, 공포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면서 효과가 미심쩍은 규율과 규칙, 교리와 의례를 만들어, 그걸 지키지 않는 사람을 배제하고 추방하고 죽였습니다. 이러한 증오는 집단 수준에서 거대하게 증폭됩니다. (8, 프롤로그 중에서)

 

(알베르 까뮈의 페스트마지막)

인간들은 늘 똑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힘이고 순진함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리유는 모든 슬픔을 넘어서 자신이 그들과 통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의사 리유는, 입 다물고 침묵하는 사람들의 무리에 속하지 않기 위하여, 페스트에 희생된 그 사람들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기 위하여, 아니 적어도 그들에게 가해진 불의와 폭력에 대해 추억만이라도 남겨놓기 위하여, 그리고 재앙의 소용돌이 속에서 배운 것만이라도, 즉 인간에게는 경멸해야 할 것보다는 찬양해야 할 것이 더 많다는 사실만이라도 말해두기 위하여, 지금 여기서 끝맺으려고 하는 이야기를 글로 쓸 결심을 했다. (프롤로그 마지막 문장. 23)

 

<감염병 인류>의 두 저자는 이 책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 저자는 말한다.

 

이 책에서는 감염병에 관한 다양한 진화의학적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핵심은 병원체의 진화가 아닙니다. 그에 대한 우리의 적응 혹은 부적응입니다. 바로 기나긴 감염병과의 전쟁을 통해 빚어진 인간의 신체 그리고 정신에 관한 진화병리학적 설명입니다. (47)

 

저자는 오랜 시간 동안 인류가 감염병과의 전쟁을 통해 어떻게 악인화되고 파멸해가는지, 우리의 신체적 현상과 정신에 대한 진화적 병리학적 관점으로 바라본다. 전체적으로 약간 어둡고 우울하다. 저자는 우리의 마음이 신을 닮지 않고 동물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아 실망스러우면서도 다행스럽다고 말한다. 저자 중 한 명은 인지종교학을 전공했는데, 이 전공이 어떤 학문을 다루는지는 몰라도, 종교를 바라보는 입장에 있어서 매우 편협하고 왜곡된 시선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부분이 글을 읽는 내내 불편했음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아직 우리는 우리를 스스로 나쁘게 보는 시선에 단련되어 있지 않다.

 

인간은 신의 창조물로서 존귀하고 특별한 존재인가, 아니면 우연히 오랜 시간 행운이 겹쳐진 만들어진 산물로 동물과 다를 바 없는 존재인가. 저자는 인간에게 종교적 본성이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의문을 표한다. 아니, 그는 아니라고 단정을 짓고 책을 서술해 나간다. 그러기에 이 책은 좋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한쪽 방향으로만 흘러간다. 결국 저자의 한방향 시선이 독자들을 그런 시선으로 인도하는 셈이다. 감염병을 바라보는 관점을 조금 더 넓히고 다양한 의견을 수용하고 부정과 긍정의 개념을 다 포괄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저자는 애초에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게 이 책을 쓴 목적 같아 보이기도 했다.

 

코로나-19 상황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회적 갈등과 심리적 고통을 보면서, 역설적으로 우리 조상의 삶, 우리 조상의 마음이 어땠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원시의 인류가 역병에 접했을 때 보이던 행동입니다. 바로 지금 우리가 생생하게 목도하고 있는 우리 안의 원시인입니다. (69)

 

저자가 원시의 인류가 역병에 접했을 때 보이던 행동을 직접 관찰했는지, 다양한 증거로 확인했는지는 이 책에서 제시하지 않지만, 그는 단정했다. 뉴스에 나오는 어리석은 처방책에 대한 이야기를 든다. 인도에서는 소의 우줌이나 똥을 바르고, 이란에서는 공업용 알코올을 마시고 700명이 넘게 죽고, 한국은 마늘과 김치에 대한 신뢰도가 더 높아지고, 소주에 고춧가루를 타서 마시고. 게다가 우리가 지금 보여주는 차별과 혐오가 그와 같다고. 하지만 독자인 나는, 서양 일부 국가에서 아시아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더 심해졌다는 뉴스도 있지만, 그것만으로 일부 사람들이 잘못된 처방을 급한 마음에 따라했다고, 모든 사람이 다 원시인 상태로(원시인이 원시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오류라고 생각하지만) 변한다는, 내재된 원시인의 폭력성이 드러난다는 주장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렇지 않은 뉴스나 일상이 더 많기 때문이다. 차분하게 마스크를 쓰고, 5인 이상 모임을 하지 않고, 명절에 가족을 만나지도 않고 주변에는 더 훈훈하고 아름다운 헌신과 섬김과 봉사와 배려의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기 때문이다. 나 역시, 지난 해 설날, 추석 그리고 이번 설날까지 고향 어른을 만나러 가지 못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한 배려, 사랑으로 그것을 이겨내고 있을 뿐이다.

 

그러한 관점 차이에 의한 전체적인 편향적인 서술 부분을 빼고 나면, 이 책은 인지심리학과 인지종교학의 두 저자가 만나 만들어 낸 독특하면서도 훌륭한 책이다. 특히 감염병의 시작에 대해 우리가 수렵 활동에서 농업 활동으로 사람이 정착하고, 모이고, 거대 집단을 형성하고, 동물을 가두어 키우고 하는 생활로 옮겨오면서 시작되었다고 하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사실 신석기 초기에 일어난,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농업 관련 사건은 인류의 치명적 실수였습니다.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인류역사상 최악의 실수라는 글에서 그동안 우리를 보다 나은 삶으로 이끈 결정적 단계로 믿었던 농업의 도입이 사실은 여러 면에서 도무지 회복할 수 없는 수준의 재앙적 선택이었다라고 단언했습니다. (76)

 

집 주변에 가축과 곡물을 키우기 시작했고, 음식쓰레기도 쌓였습니다. 분변과 오물이 넘쳐났습니다. 자연스럽게 쥐와 모기, 파리가 찾아왔습니다. 물론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도 더부살이를 시작했죠.” (77)

 

바이러스는 숙주가 있어야 하고, 한번 앓고 나면 평생 면역이 지속되기 때문에 계속 감염이 일어나기 어려운 환경이 된다. 수천년 전부터 조상이 몸소 면역체계를 형성하며 고생해주었다면 우리 후손은 그저 가볍게 앓고 지나가면 되는데, 왜 이렇게 힘든 일이 계속 일어나는 것일까. 저자는 우리 인간이 면역체계를 만들고 그들에게 적응해가는 동안, 그들도 계속 변화하고 진화하고 성장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감염병에 대한 의학적인 지식 전달까지 꽤 깊은 정보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저는 업무 때문에 항원, 항체 관련 그림도 보았고 경체인, 중체인 구조 등 어느 정도 이해는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림을 보고 충격을 받지 않았지만, 생물이나 의학의 기초이지만 매우 생소하게 여겨지는 그림들을 처음 접하는 분들은 매우 어렵게 여겨지는 내용들이 꽤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이럴 때는 너무 깊게 들어가지 말고, 그냥 아 이런 내용도 있구나 하고 휘리릭 넘기는 것도 책을 잘 읽는 방법 중 하나이다.

 

이 책의 장점은 무엇보다 감염병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 역사적인 발전도, 인류의 다양한 적응 사례에 대한 문화적, 종교적, 진화적 고찰이다. 중세 유럽에서는 한센병에 걸린 사람들의 시민권을 박탈하고 사회에서 격리시키고 배제하였다. 우리나라도 세종대왕 때 나병으로 불린 이 병이 제주도에서 크게 유행하자 나환자를 격리시켰다. 현대에 와서 치료약이 개발된 뒤에도 우리나라는 한센병 격리를 계속했다. 1978년에는 어이없는 법이 만들어져 격리는 물론 강제 정관수술과 강제 임신중절수술이 진행되었다. 다행히 2017년에 와서 강제 불임수술과 낙태수술을 당했던 한센병 환자들이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했다고 한다.

 

인문학적 교양도서로서의 책임감 때문인지 지나치게 넓게 확장되어 나간 부분도 있다. 가령 인도의 소 이야기를 하면서 음식 이야기로, 종교 이야기로 연결된다. 이런 인문학적 사유의 확장을 좋아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저는 사변 이야기가 너무 많아 집중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주제인 감염병 자체가 지나치게 어둡고 부정적인 면이 있다 보니 살짝 벗어나 숨통을 트여주는 변주도 나쁘진 않아 보인다. 저자가 심리학자이다보니 오염강박에 대한 이야기도 깊이 있게 다루어졌다.

 

감염병이 크게 유행하는 상황이라면 오염강박이 심해집니다. 오염강박을 자극하는 단서와 정보가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감염병의 위험과 현황을 보도하는 각종 매체에서 온통 더러운 이야기가 쏟아집니다. 오염강박 환자에게는 불난 곳에 기름을 붓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256)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생기는 차별과 혐오는 우리가 반드시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우리가 저자의 의견과 같이 진짜 동물과 같은 마음을 가졌더라도 (사실 저는 동물들이 동료를 보살피고 챙겨주는 영상을 더 많이 본 듯합니다만) 그래선 안 되지 않은가.

 

모두가 모두를 혐오합니다. ‘말고는 다 더럽답니다. 점점 심각해지는 감염병 상황에 부닥치면 모두 불안합니다. 누가 감염자인지 아닌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약간의 부정적 단서만 있어도, 금세 역겨워집니다. 서로를 의심하기 쉽습니다. 감염병 유행에 원인 제공자라고 지목되면,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삿대질을 하고 눈을 흘깁니다. (261)

 

저자는 말한다. 인류는 미생물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애초에 전쟁을 시작한 쪽은 인간인데, 이건 전쟁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독자인 나는 의학이 사회과학이고 정치는 대규모의 의학에 불과하다는 아래의 인용글이 마음에 든다.

 

(피르호)는 이른바 공중보건을 창시한 사람입니다. 공공보건제도를 만들고 식품위생법, 상하수도 개선 등 거대한 사회개혁에 나섰습니다. 피르호 본인도 위대한 병리학자였습니다. 독일 국민의 건강은 좁은 의미의 의학이 아니라, 이렇게 거대한 규모의 의학을 통해서 보장될 수 있었습니다. 피로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의학은 사회과학이며 정치는 대규모의 의학에 불과하다. 사회과학으로서의 의학은 이론적 해결책을, 정치와 인류학은 실제적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297)

 

저자는 코로나-19 사태에 대해 허준이 와도, 히포크라테스가 환생해도 해결이 어렵다고 말한다. 대신 대규모의 의학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다만 마지막 부분에 가서까지, 종교가 없었으면 전염병 예방에 더 도움이 되었을 거라는 저자의 시선은 참으로 안타깝다. 설령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간단하게 적으면 될 이야기를 너무 많은 곳에 그리고 결론 부분에 이르러서까지 이 주장을 가지고 오니, 앞선 모든 내용들이 여기에 다 파묻히는 것만 같다. 펜데믹 상황에 도를 넘는 종교인들의 행태가 있긴 하지만 모든 종교인이 다 그렇지는 않다. 게다가 숨어서 헌신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봉사하고 섬기는 사람들이 참 많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저자가 많은 분량을 할애한 글들은 감염병이 퍼지는 데 종교인들이 매우 나쁜 역할을 했으며 자기밖에 모르고 무자비하고 감염병의 원흉이라는 강제적 강요되는 인식을 심어준다. 이 역시 저자가 우리가 동물과 같다고 우려하는 차별과 혐오의 시선과 다를 바 없다저자가 인지종교학을 전공했으니 기독교의 성경을 조금 더 깊이 있게 연구하고 이해했더라면 오히려 더 풍성한 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전염병을 이길 수 없다. 피르호가 공공보건제도를 만들고 거대 규모의 의학을 주창했지만, 21세기 미국에서도 코로나 사태를 이겨내지 못했다. 저자가 마지막 장에 마지막 글로 넣은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글이 결국 이 책의 결론이라는 생각이 든다.

 

군중이 모르는 사실, 즉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으며, 그 균은 수십년 간 가구나 옷가지들 속에서 잠자고 있을 수 있고, 방이나 지하실이나 트렁크나 손수건이나 낡은 서류 같은 것들 속에서 꾸준히 살아남아 있다가 아마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또다시 저 쥐를 흔들어 깨워서 어느 행복한 도시로 그것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음사 페스트2011, 401~402, 감염병 인류, 322, 책 마지막 문장)

 

 

(선한 리뷰)

빅터 프랭클이 참혹한 유대인 수용소에서 작은 의미 하나로 생존에 성공한 것처럼, 코로나 바이러스의 험악한 시대에, 내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작은 의미를 찾아야겠습니다.

 

바이러스와의 전쟁이 아니라, 이 상황을 견디고 이겨내기 위한 사랑과 헌신과 생존의 의미가 필요합니다.

 

(선한 실천)

저자가 기독교에 대하여 그렇게 큰 반감을 가지고 책을 서술함에 대하여 기독교인으로서 깊은 참회를 합니다.

그렇지 않은 부분이 많지만, 사회적으로 배제의 대상이 되는 안타까운 사실 앞에서 겸허하게 모든 것을 되돌아보고, 더 낮아지는 삶을 다짐해봅니다.

부족한 기독교인들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게 일컬어지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본 서평은 출판사의 도서 지원을 받아 개인적인 의견으로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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