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진 말들에 꽃이 핀다 창비시선 415
박신규 지음 / 창비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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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속에 간간이 보이는 제주와 관련된 시편들과 제주사투리가 눈에 띈다.

예컨대 <늙은 무사>에서 시인은 무사(왜라는 제주 사투리)와 武士의 경계를 허물며

제주도 인심의 츤데레(?)한 면을 재치있게 풀어내고 있기도하고, 또 다른 시편들에서

보이는 식게(제사祭祀의 제주사투리)나 숨비소리(해녀들이 물질을 마치고 물 밖으로 올라와 

가쁘게 내쉬는 숨소리)같은 단어들은 처음듣는 방언이기도 하다.


아울러 시집 사이사이 놓여진 인명을 부제로 달고 있는 시편들은 

시인의 사생활과 내밀한 감정을 엿보게 하는 어떤 조각들이다.


제1부에서는 사랑, 그리움, 가족들에 대한 기억들이 좀 많이 담겨 있는 듯 하다.

제2부는 시인의 삶 배후에 보일듯 말듯 놓여있는 존재들을 조명한다. 

제3부는 삶과 죽음 더러움과 숭고함을 향토적 언어로 덧칠한다.  


시집 속에 숨어있는 꽃과 관련된 시들을 하나의 실마리로 읽어나가도 좋을 듯하다.

제목이 가리키고 있듯이 말이다.


대표시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어렵지 않은 시 하나 옮겨 적는다.



버스가 떠난 뒤 한 남자가 운다,
이번 생애 주어진 슬픔을
모조리 쏟아부을 것처럼 맹렬하게
맞은편 정류장에는 그 남자의 울음을
뭉텅 덜어와 품고 싶은,
덜어온 슬픔만큼 더 서럽고 싶은
또 한 여자가 흐느낀다

몸에서 마음속으로 
마음에서 몸속으로 들어갈수록
무구(無垢)해지다가 불식간,
섞이는 것이 눈물의 속성
눈물이 나기 시작하면 계속 눈물이 나고
눈물이 나서 더 눈물이 나는 것

생의 정오엔 우는 일만 남았다는 듯
광화문 한여름 땡볕 아래
버림받은 어깨들이 운다
울다가 버림받은 사실도 잊은 채 집중하면서
열렬하게 전력을 다해
어린애처럼 운다, 종내는
어린아이들이 운다


-<슬픔의 질량>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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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유적존재, 포이에르바흐와 맑스의 이해

포이에르바하는  이 이념을 종교에 적용시켜 "신이란 실로 한 개별자로서 생각되는 종(種)의 완성된 이념이며, 신은 종이 행할 수 있는 모든 완전함을 함축하고 있다."

참고: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530658&cid=41799&categoryId=41800


노동력과 다른 일반상품 사이의 차이를 인식하는 것이 맑스 경제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상품의 가치하락이 노동자의 노동력 가치도 하락하게 만들고 이는 노동자 임금의 하락 가능성을 내포한다.

토스타인 베블렌은 <유한계급론>에서 경쟁을 competition이 아닌 emulation(모방, 따라하기식의 경쟁)으로 정의.


맑스가 새로운 사회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는 것은 <자본론>에서보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맑스는 현실의 상태를 지양해 나가는 현실적 운동을 공산주의라고 불렀다. 


더 휴머니즘적이고 철학적인 맑스의 사상은 <경제학 철학 초고>등에 보이는데 소련의 혁명 성공 이후 이런 젊은 맑스의 저작들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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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담없이 여말선초의 상황을 개괄하여 이해할 수 있다. 허나 굵직한 사건 중심의 나열일 뿐, 타당한 시대적 상황과 정치 배경에 대한 이해를 담기에 만화로는 버거운 듯.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는 식의 가치판단도 다소 모호하다. 단지 빠르게 당시상황을 스케치해볼 수 있다는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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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20세기 90년대 전반에 걸쳐 중국 지식인의 역사적 처지를 개괄하자면, 첫째, 민주화 운동의 실패 이후 정치적 민주화 담론의 중단과 이로 인한 지식인들의 좌절과 방황, 변혁의 방향을 시장개혁과 경제 개발로 전환했다는 점. 둘째, 시장화의 진전에 따라 지식인들이 느끼는 모순과 곤혹감. 셋째, 국내개혁이 전지구화 과정으로 전이되었지만, 동시에 주변국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위기와 전쟁을 마주하며 느끼는 이질감, 사상적 위기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자유주의와 신좌파의 구도와 대립으로 중국 지식계를 묘사하는 방식은 바람직하지 않다. 자유주의는 하나의 이론일 뿐 아니라 특정한 사회 사조를 지칭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난 세기말 중국에 뿌리내린 자유주의는 추상적인 시장개념 위에 사회적 불평틍과 경제와 정치의 내적 관계들을 은폐하며 맹목적 시장주의로 전락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자유주의는 민주주의와는 무관하고, 또 실질적 시장 개념과도 상반된다.

 

지난세기 중국의 동요와 혼란은 평등이라는 가치의 왜곡 혹은 실천불가능으로부터 유발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회주의 운동은 평등의 차원에서 이룬 성취가 아니라 그 과정 속에서 야기된 새로운 신분제다. 그것은 문혁 당시 우나극(遇羅克)의 혈통론 사건으로 불거지기도 했다. 따라서 중국사회의 곤경과 문제를 평등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단순한 생각이다. 중국의 이익분화와 불평등한 과분과정의 기저에는 국가 독점과 공유제의 명목하게 기능하는 시장 관계가 숨어있다.

 

같은 논리로, 중국의 문제를 민족주의나 인민주의로 환원하여 결론짓는 것도 역사의 실상을 너무 단순화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구체적 사건에 대한 논의 없이 단순한 '주의"에의 분석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자민족 중심주의와 글러벌리즘의 미명을 빌린 국제적 헤게모니에 대한 반항은 구별되어야 한다.

 

*춘추번로 심찰명호편

*이지 분서 제3권 거우처사, 비향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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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21세기에 다석의 글이나 함석헌의 사상이 더 이상 주목받지 못하고 구시대적 사고나 유물 정도로 취급될까. 개인적 단견으로 두 가지 걸림돌이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우선, 다석이 사용한 용어의 문제를 꼽지 않을 수 없다. 다석의 용어쓰임에는 현재 우리가 더는 사용하지 않는 순우리말이랄지 독특한 조어들이 눈에 띈다. 물론 이런 독특한 조어나 용어방식은 다석 사상의 깊이를 더하고 또 그 나름대로 하나의 철학과 의미를 내포하기도 하거니와 현대인에게 있어 이런 용어의 낯섦이 독해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본다. 21세기에도 공자와 노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이 읽혀지고 써지는 이유는 끊임없는 사상 전달 언어의 쇄신에 있지 않겠는가.  언어의 쇄신은 단순히 용어의 문법이나 어휘 선택에만 한정되지 않고 문체, 즉 스타일의 문제를 내포하며 이는 당대의 문제를 다루고 독자를 설정하고 전달방식과 테두리를 변혁시킨다. 나는 다석이 쓰는 제나랄지 얼나라는 말이 좋지도 싫지도 않지만, 이제 제나나 얼나는 그저 제나와 얼나로만 멈춰버리면 안된다. 그러면 정말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이 될지 모른다.   

 

다음으로 사상의 융합과정과 그 시도들이 다소 거칠다. 요즘처럼 전문화돠고 개별학문이 독립적으로 자기 위치를 점하는 시대가 있을까. 학제간 연구라는 것도 당연히 개별학문의 뚜렷한 독립과 구분 위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다석의 글을 일별하면 드는 처음 생각은 성급하고 어설픈 동서양 사상의 화해 시도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사상의 짬봉이다. 나는 지난세기에 우리 한국에서도 이런 걸출한 사상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지만, 또 한편에선 그저 사상과 사상에게 말걸기를 시도하고 이를 비슷한 유형과 알레고리에 따라 성기게 잇는 정도에 머문 것이 못내 아쉽다. 아마 동서양의 철학서적을 두루 탐독해본 이라면 어설프게나마 사상의 짜깁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서양 사상의 보편성과 유사성을 부인하고자 함이 아니라, 다석식의 경전 이해는 때로 아전인수격의 오류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석의 <중용>강의를 되짚는 이유는 여전히 그 속에 번득이는 사상의 통찰과 예견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킴은 여전히 현대인들의 몫이다.

 

 

0.

회개하라는 말은 제나(자아, 이고)가 죽고 하느님 아들인 얼나(도, 덕, 명)로 솟나(솟아나다)라는 말이다. 儒와 孺를 같은 차원에서 논하면서 유교를 어린아이가 되자는 가르침으로 푸는 대목(21)과 도덕경 55장의 含德之厚者 比於赤子 (함덕지후자 비어적자), 탐진치의 수성(獸性)을 얿애자는 뜻을 모두 같은 선상에서 논의한다.

 

중용이 예기에서 독립하기 시작한 것은 북송의 정이천으로 알려져있다. 그 밖에 범중엄이 장횡거에게 중용의 일독을 권한 대목이 보이기도 한다. 중용이라는 말은 논어 옹야편에 보인다. 中庸之爲德也 其至矣乎 民鮮久矣. 다석은 이를 하느님의 얼이 뚫려 속알(얼나)가 됨이, 하느님께 이르는 씨알(人)이 적은지 오래되다라고 풀고 있다. 또 이를 예수님의 좁은 문 비유와 이어 생각한다. (36-37) 다석은 더 나아가 中을 하느님(성령)으로 보고, 그 생명인 얼(성령)을 받아서 쓰는 것이 중용이라고 말했다.

 

주희는 중용을 <니코마코스 운리학>의 中처럼 이해했다. 그것은 정도의 치우치지 않음이지, 하느님에게로 通함이 아니다. 다석은 주희의 중용해석을 비판한다. 주희는 하나의 태극을 이분법적으로 나눠서 양의의 발생을 이해했다. 주희에게는 분명 통합적 사고보다는 모종의 편집(偏執)이 어떤 치우침이 뚜렷이 보인다.

 

 

1.

몸나를 참나로 알고 있다면 천명인 얼나(참나)를 알 수 없다. 天命之謂性은 하느님과 내가 얼생명으로 이어진 것을 말한다. 率性之謂道는 탐진치를 추구하는 몸나를 부인하고 진선미를 추구하는 얼나를 쫓는 것이다. 솔성과 수도를 이웃에게 보여주는 것이 敎다. 다석은 주희의 인심과 도심이 섞여있다는 말이나, 맹자의 도심을 잃거나 가지고 있다는 말 대신에, 도심을 찾을 것을, 몸나에서 얼나로 거듭날 것을 말한다.

 

33.

의금상경 [衣錦尙絅], 사람들은 짐승인 제나를 참나로 알고 교만하다.

 

†함께 읽으면 좋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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