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21세기에 다석의 글이나 함석헌의 사상이 더 이상 주목받지 못하고 구시대적 사고나 유물 정도로 취급될까. 개인적 단견으로 두 가지 걸림돌이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우선, 다석이 사용한 용어의 문제를 꼽지 않을 수 없다. 다석의 용어쓰임에는 현재 우리가 더는 사용하지 않는 순우리말이랄지 독특한 조어들이 눈에 띈다. 물론 이런 독특한 조어나 용어방식은 다석 사상의 깊이를 더하고 또 그 나름대로 하나의 철학과 의미를 내포하기도 하거니와 현대인에게 있어 이런 용어의 낯섦이 독해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본다. 21세기에도 공자와 노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이 읽혀지고 써지는 이유는 끊임없는 사상 전달 언어의 쇄신에 있지 않겠는가. 언어의 쇄신은 단순히 용어의 문법이나 어휘 선택에만 한정되지 않고 문체, 즉 스타일의 문제를 내포하며 이는 당대의 문제를 다루고 독자를 설정하고 전달방식과 테두리를 변혁시킨다. 나는 다석이 쓰는 제나랄지 얼나라는 말이 좋지도 싫지도 않지만, 이제 제나나 얼나는 그저 제나와 얼나로만 멈춰버리면 안된다. 그러면 정말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이 될지 모른다.
다음으로 사상의 융합과정과 그 시도들이 다소 거칠다. 요즘처럼 전문화돠고 개별학문이 독립적으로 자기 위치를 점하는 시대가 있을까. 학제간 연구라는 것도 당연히 개별학문의 뚜렷한 독립과 구분 위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다석의 글을 일별하면 드는 처음 생각은 성급하고 어설픈 동서양 사상의 화해 시도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사상의 짬봉이다. 나는 지난세기에 우리 한국에서도 이런 걸출한 사상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지만, 또 한편에선 그저 사상과 사상에게 말걸기를 시도하고 이를 비슷한 유형과 알레고리에 따라 성기게 잇는 정도에 머문 것이 못내 아쉽다. 아마 동서양의 철학서적을 두루 탐독해본 이라면 어설프게나마 사상의 짜깁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서양 사상의 보편성과 유사성을 부인하고자 함이 아니라, 다석식의 경전 이해는 때로 아전인수격의 오류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석의 <중용>강의를 되짚는 이유는 여전히 그 속에 번득이는 사상의 통찰과 예견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킴은 여전히 현대인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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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하라는 말은 제나(자아, 이고)가 죽고 하느님 아들인 얼나(도, 덕, 명)로 솟나(솟아나다)라는 말이다. 儒와 孺를 같은 차원에서 논하면서 유교를 어린아이가 되자는 가르침으로 푸는 대목(21)과 도덕경 55장의 含德之厚者 比於赤子 (함덕지후자 비어적자), 탐진치의 수성(獸性)을 얿애자는 뜻을 모두 같은 선상에서 논의한다.
중용이 예기에서 독립하기 시작한 것은 북송의 정이천으로 알려져있다. 그 밖에 범중엄이 장횡거에게 중용의 일독을 권한 대목이 보이기도 한다. 중용이라는 말은 논어 옹야편에 보인다. 中庸之爲德也 其至矣乎 民鮮久矣. 다석은 이를 하느님의 얼이 뚫려 속알(얼나)가 됨이, 하느님께 이르는 씨알(人)이 적은지 오래되다라고 풀고 있다. 또 이를 예수님의 좁은 문 비유와 이어 생각한다. (36-37) 다석은 더 나아가 中을 하느님(성령)으로 보고, 그 생명인 얼(성령)을 받아서 쓰는 것이 중용이라고 말했다.
주희는 중용을 <니코마코스 운리학>의 中처럼 이해했다. 그것은 정도의 치우치지 않음이지, 하느님에게로 通함이 아니다. 다석은 주희의 중용해석을 비판한다. 주희는 하나의 태극을 이분법적으로 나눠서 양의의 발생을 이해했다. 주희에게는 분명 통합적 사고보다는 모종의 편집(偏執)이 어떤 치우침이 뚜렷이 보인다.
1.
몸나를 참나로 알고 있다면 천명인 얼나(참나)를 알 수 없다. 天命之謂性은 하느님과 내가 얼생명으로 이어진 것을 말한다. 率性之謂道는 탐진치를 추구하는 몸나를 부인하고 진선미를 추구하는 얼나를 쫓는 것이다. 솔성과 수도를 이웃에게 보여주는 것이 敎다. 다석은 주희의 인심과 도심이 섞여있다는 말이나, 맹자의 도심을 잃거나 가지고 있다는 말 대신에, 도심을 찾을 것을, 몸나에서 얼나로 거듭날 것을 말한다.
33.
의금상경 [衣錦尙絅], 사람들은 짐승인 제나를 참나로 알고 교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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