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문헌교독법 고전적정리이론총서 6
장순휘 지음, 오항녕 옮김 / 한국고전번역원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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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0.

2004년 화중사범대에서 출간한 张舜徽의 <中国古代史籍校读法>를 번역한 책이다.

이 책의 아이러니는 교수, 교감에 대해 말하면서, 번역된 글 속에 상당수의 오자와 오류가 보인다는 점이다. 사적, 고적을 읽을 때, 혹은 편집할 때 어떻게하면 오류를 줄이고 정확적확하게 전달할 것인가를 논하고 있는데, 정작 역서는 더 꼼꼼하게 교수하지 못했다. 하여 읽으면서도 몇몇 한자의 오기때문에 다시 원서를 확인하는 번거로움을 겪었다. 그럼에도 이 지난한 번역을 마친 역자의 수고를 감안하면, 동양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매우 감사하다. 


1. 

한자에서 왜 가차자가 발생했는가의 원인을 고찰함에 있어, 육덕명은 <경전석문> <서록>에서 정현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했다. "처음 글을 쓸 때 깝자기 해당 글자가 생각나지 않으면 음이 같은 부류의 글자를 가차하여 쓴 것이니, 유사성에 착안한 것이다." 장순휘는 이에 더하여 복잡한 글자의 단순화가 가차자를 발생시킨 주요한 원인 중 하나라고 지적하고 있다. (21-22)


이하 왕인지의 <경의술문>에서 언급한 <경의가차>의 예들을 보여주며, 가차자와 본래한자의 의미 사이의 괴리와 고인들의 오용,오독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가차자의 발생예에 대해서는 청말 오승지의 <손재문집> 권사<고서가차거례>에 자세히 나와있다. (33)


고대문적 중에 본래 글자를 쓰는 경우는 열에 두셋이고, 나머지는 모두 가차자를 쓰고 있다.(34)


朱駿聲《說文通訓定聲》、阮元《經籍纂詁》같은 책은 한자의 본래 뜻과 파생된 뜻을 살피는데 유용한 공구서들이다. 

 

왕념손, 왕인지 부자의 <광아소증>과 <경전석사>는 각각 한자의 실사와 허사를 분류하여 연구했고, 양수달의 <사전>은 다시 <경전석사>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여 고서 속 다양한 어조사의 용법을 정리했다. 


離經은 句讀를 끊어읽는 것을 말한다.(예기 학기편과 청나라 황이주의 <이경빈지설離經辨志說>참고)


한서 예문지 육예략에서 '<예기>131편이라는 말에 반고가 주를 달기를 공자 70제자 이후의 학자들이 기록한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예기는 공자 학단의 형성 이후 한대까지 학자들이 계속하여 보충하고 편집한 책으로 봄이 타당하다. 


공자가 아버지의 묘소를 몰랐다는 설에 대해 정현은 근거없는 견강부회를 더하여 일종의 '야합설'까지 만들어냈고, 사마천 또한 이러한 잘못된 구두끊어읽기를 그의 사기 편찬에 그대로 적용한 셈이다. 이는 사실 <예기><단궁>편의 글을 보면, “不知其墓殯於五父之衢”를 “不知其墓,殯於五父之衢”로 잘못 끊어읽은데서 생긴 오독이다. 이러한 오독은 청대 손호손의 <단궁논문>에 와서야 비로소 수정되고 지적되었다. (41-43)


소식은 역사서를 읽은 때, 팔면수적법을 강조했다. 이는 같은 책을 여러번 읽으면서 읽을 때마다 다른 주제와 각도에 초점을 맞추고 해당 주제와 관련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독해하는 방법이다.(54)


사기, 한서, 후한서, 삼국지를 합쳐 사서라고 칭하는 것은 청나라 건륭, 가경 연간의 학자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왕명성의 <십칠사상각>과 요내의 <석포척독>)


한대에는 권과 편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다. 


진수는 사마씨 밑에서 사서를 편찬했기에 위를 정통으로 보았지만 송대의 주희는 다시 촉한정통론을 주장. 


題上事(위의 일을 제하다)와 舉下事(아래 일을 거론한 것이다)같은 고서의 편장 서미의 표제들은 고인들이 해당 편장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표시한 한 예들이다. (73-74)


고서를 효과적으로 읽기 위해서는 傳注에 대한 이해와 활용을 요한다. 84-92쪽까지는 傳、說、故(詁)、訓、記、注、解、箋、章句、集解등의 10가지 체례에 대해 소개했다. 남북조시대에는 의소(義疏의 학문이 크게 흥하여 경전에 대한 여러가지 해석이 난무하게 되었고, 당 초에는 경전 해석의 통일 위해 정의(正義)가 출현했다. 이에따라 관에서 편찬한 것을 정의라고 부르고, 개인이 저술한 것은 疎라고 불렀다. 


배송지의 <삼국지주>나 유효표의 <세설신어주>는 일서를 많이 인용했다는 면에서 사료적, 문헌적 가치가 있다. (100-101)


2. 

장학성은 목록학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책의 교수(校讎)를 위해 생겨났다고 이해했다. 유향, 유흠의 <별록>과 <칠략>부터 순욱의 <중경신부>, 왕검의 <칠지>, 완효서의 <칠록>과 청개 <사고전서총목제요>까지 이들은 모두 관에서 수장한 책을 교정하고 바로잡기 위해 편집된 목적을 지닌다. (104)


송대 필기류소설인 <소위공담훈>권4에서 이미 목록학이라는 용어를 발견할 수 있다. 


육예략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기의 유림전

한서의 유림전

후한서의 유림전

경전석문의 서록


제자략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장자의 천하

순자의 비십이자

여씨춘추의 불이

회남자의 요략

사마담의 논육가요지

사기의 공자세가 중니제자열전 관안열전, 노장신한열전 맹순열전


육예락을 종적으로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서 경적지

문헌통고 경적고

사고전서총목제요


금고문 논쟁에 대해서는 청말의 요평이 지은 《古今學考》가 가장 자세하다. 

근본 문제에 대해 고찰하려면, 진립의 <백호통의소증>, 진수기의 <오경이의소증>을 보면 고금문의 분기점을 파악할 수 있다. 그 후 예기 왕제편과 <주례주소>를 읽는 것도 도움이 된다. (109)


辨章學術,考鏡源流할 때, 금고문의 다른 점을 논하기는 쉬워도 그들이 상통하는 점을 소홀히하기 쉽다. 학자들은 이를 주의해야 할 것이다. (110)


반고는 유향, 유흠 부자의 칠략에 근거하여 한서 예문지를 편찬하였다. 

위 원제 때, 비서랑 정묵이 <중경>이라는 도서목록을 폈고, 진무제 때 비서감 순욱이 <중경>을 바탕으로 <신부>를 편찬했는데, 이 때 갑을병정 네 부로 책을 분류, 이것이 경사자집 초기의 형태이다. 이후 동진의 이충이 갑을병정을 경사자집의 순서로 편집했고, 수서 경적지나 당나라 이후부터의 史志는 이 틀을 따랐다. 


*자세한 도서분류법에 대해서는 118-119쪽의 칠략분류법과 사부분류법 저작 대조표 참고.


-남북조 시기 이후에 역사서 서술의 증가로 인해 도서 목록 분류, 특히 사부(史部)의 세분화 발생. 

-수서경적지에 나오는 지리서, 지기등은 원시적 의미에서의 총서였다. 

-경서에 관련한 총서로는 <경원>, <고경해휘함>,<황청경해> 등 여러 종이다.

-총서의 기원은 유정손이 편집한 <유학경오>라고 볼 수 있으나, 총서라는 표제는 이미 당나라 육구몽의 <입택총서>에서 보인다. 다만 육씨의 총서는 개인적 필기에 불과할 뿐이다. 

-1922년 <사부총간>의 영인. 이후 상무인쇄소의 <사부총간초편>, 중화서국의 <사부비요>

-항주ㅡ절강지역은 송대 조판 인쇄술의 중심지로 여기서 나는 절본의 상태가 가장 좋고, 그 다음으로 촉본, 그 다음으로 복건 등지에서 찍은 민본이 있다. (139-140)

-주이존의 말대로, 옛사람들은 간책을 유통할 때 모든 간의 글자수까지 염두에 두며 기록했다. 예컨대 한서 예문지 육예략 중 상서 부분에서 유향은 책을 교정할 때 간에 새겨진 글자 수를 바탕으로 일실된 본문을 고증했다. (144)

-백납본은 선택된 각종 판본들의 내용이 끊어지거나 온전치 못해서 여러 판본을 바탕으로 보충한 것이 마치 여러 피륙을 덧대 꿰맨 승려의 백납의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148)


3.

오대징의 <각재집고록서>

왕념손의 <독서잡지여편>-노자 31장의 "부가병자 불상지기"에서 佳는 隹의 오자이며, 이는 唯로 교정되어야 한다는 설.(192)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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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에 대하여 동문선 현대신서 177
자크 데리다 지음, 남수인 옮김 / 동문선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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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환대에서 우선 문제되는 것은 언어의 문제다. 그것은 비단 실제적 언어의 문제만을 다룰 뿐 아니라, 언어가 간섭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문화나 제도를 포괄한다. 예컨대 우리가 법에 대해 무지하다면 법정에서 쓰이는 법률용어들은 우리를 낯설게하는 따위다. 주인은 객에게 있어 자기 자신의 언어로의 번역을 강요한다. 주인은 외국인에게 우리의 주인 자신의 언어를 이해할 것을 강요한다. (64-65)


이방인과 절대적 타자 사이의 차이는 이름의 유무다. 절대적 환대는 주인이 자신을 개방하고 성과 이름을 가진 이방인 뿐 아니라 이름 없는 절대적 타자에게도 장소를 제공하려 한다. 이런 절대적 환대의 법은 권리의 환대(조건적 환대)와 결별할 것을 명령한다. (70-71)


<이방인의 문제>에서 절대적 환대와 권리적 환대는 다시 <환대의 발길>에서 환대의 법과 환대의 법들로 이해할 수 있다. 환대의 법은 환대의 법들 위에 있다. 그러나 환대의 무조건적인 법은 환대의 법들을 필요로하고, 법들을 요청한다. 이 둘은 상반되면서도 동시에 서로를 요한다. (103-105)


언어가, 모국어가 한 인간의 마지막 고향이고 보루라는 한나 아렌트의 주장을 논박하면서, 데리다는 모국어라는 것이 일종의 소유물, 아니 우리가 소유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판타즘이라고 지적한다. 우리는 언어에 뿌리내리며 사고하고 살아가지만, 동시에 언어 자체는 나로부터 출발해서만 발생한다. 언어는 내가 출발하는 지점이면서 또 내가 떨어져 나오는 지점이기도 하다. (111-113)


오이디푸스(이방인)가 테세우스에게 한 부탁 때문에, 오이디푸스의 딸들은 아버지의 장지를 찾지 못하고 또 장사지낼 수도 없게 된다. 그녀들은 적절하게 애도할 공간을 빼앗겨버린 것이다. 그러나 애도할 공간과 (특정한) 시간의 상실로 말미암아 오이디푸스는 딸들에게 애도의 무한한 집행유예를 선고한다. 말하자면 그는 한 번도 애도받지 못했으면서도 영원히 애도해야 할 대상이 된 것이다. (113-114)


왜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나 언어의 문제를 논하고 있는가? 먼저 안티고네의 애통과 눈물을 통해 데리다는 이방인 되기의 극치, 이방에서 완전히 이방인 되기의 한 문제를 건드린다. 오이디푸스 자신이 맹인이 되어 세계로부터 자신을 단절하고 이방인이 되었다면, 그의 죽음과 장지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은 그의 딸 안티고네를 실명(失明)케 한다. 그것은 눈으로 보면서도 결국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어떤 눈멈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여하간 보이는 장지가 이방인을 조국으로 귀한하게할 가능성의 여지를 남겨두는 반면, 오이디푸스의 보이지 않는 장지, 토포스 없는 장지의 상실은 그를 애도하거나 이장할 가능성을 원천 봉쇄함으로써 그를 완전한 이방인으로 남게 한다. 아울러 데리다는 이러한 장치들을 통해 주인과 이방인 사이의 확연한 선들을 모호하게 하고, 주인이 이방인에게 있어 온전히 주인되지 못하고 도리어 주인 자신이 낯선 이방인이 되는 역설을 보여주기도 한다. 


데리다가 레비나스의 말을 인용하며 말한대로, 주체는 주인이면서 동시에 인질이다. 주체는 그 자신의 주인이 되면서 동시에 그 자신에게 종속되어 기꺼이 인질로 남는다. 오이디푸스와 테세우스의 관계를 보더라고 오이디푸스는 분명 이방인으로 테세우스에게 장지의 비밀을 지켜줄 것을 부탁함으로써 그를 인질 삼는다. 


데리다가 알제리인들에게 프랑스 시민권을 부여하는 문제에 관해 잠깐 언급하는 대목을 보면, 이 책의 주제인 환대가 데리다 자신이 바라보는 실제적 문제와 환경들을 염두에 두고서 고찰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환대에 대해 논하고 있지만, 정작 어떤 환대를 베풀 것인지, 또는 어떤 환대가 진정한 환대인지에 대해 데리다는 확정을 유보한다. 말미에서 데리다는 칸트의 절대적 정언명령을 절대적 환대에 비하면서 과연 절대적 환대라는 것이 윤리적, 도덕적 가치 또는 인간의 실제적 상황과는 무관하게 행해질 수 있는지 묻는다. 데리다는 창세기의 롯과 소돔성 비류들의 대화를 통해 절대적 환대가 때로는 파괴적이고 무참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데리다가 정한 주제처럼, 우리에게 아직 절대적 환대는 요원하다. 환대는 없다. 나를 열고 너를 열어 우리 안팎의 이방인을 완전히 제거한 그런 환대는 아직까지 있어본 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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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레바논 감정>이라는 영화가 개봉했을 때, 뒤늦게 최정례 시인의 <레바논 감정>을 알게 됐고, 읽어봤지만 당시의 내게 퍽 어려웠다는 인상을 남겼다. 어쩌면 교과서적 시 해석과 쉬운 교훈시에만 익숙해져 있는 이라면 그런 낯섦과 모호함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시인의 말대로 '말하지 않고, 말 할 수 없는' 어떤 감정들을 레바논 감정이라고 부를까. 현실이 꿈만 같고, 또 꿈이 현실처럼 생생한 이런 장자적(莊子的) 경계를 레바논 감정이라 할까. 하루종일 비가 오는 우중충한 하늘을 레바논 감정이라 할까. 그런 모호함이 더는 '완전한 모호함'으로 다가오지 않고  모종의 '친숙한 모호함', '동거동락하는 모호함'으로 다가올 때, 레바논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거의 모든 시를 관류하는 법칙(?), 혹은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세계와 내가 독립적이고 분절된 각각의 개별자가 아니라 서로 이어지며 뒤엉키는 상호존재 또는 동시존재임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시는 분명 나로부터 촉발되고 나와 가장 가까운 것에서 발생하지만 어느새 내가 알지 못하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장소에 가닿고,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이나 사물과 혼효되어 내가 그를 위해 애도하고 있고, 또 그가 나를 위해 웃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한다. 



이 시집의 제목은 분명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라는' 부정할 수 없는 명징한 인식론에서 출발하는 듯 하지만, 시집의 여러 시편을 관통하는 생각들은 그럼에도 불고하고, 캥거루와 나 사이의 어떤 통점을, 어떤 레바논 감정을 건드린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단순히 사물과 나 사이의 공통점을 찾자는 유치한 발상이나 놀이라기보다는, '나'가 '나'라고 여기는 어떤 경계의 허물어짐, '너'가 '너'라고 확신하는 부인할 수 없는 벽에 생기는 어떤 균열을 말하고 있다. 분명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말이다. 분명 <너는 내가 아니다>(101) '너는 나를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내가 너라도 되듯이' 머뭇거리는 이유. 이런 감정은 어디서부터 오는가.


각설하고, 시집에 대해 분석하고픈 생각은 없다. 다만 <로데오 구경>이라는 시와 연이은  <있었다>라는 시를 보고 허락없이 옮겨적는다. 




로데오 구경


  



지나가는 빛을 향해 손을 뻗으면서

저게 희망이야, 라고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었다

희망은 혼자 몰래 키우는 무지한 짐승

무지한 짐승 잡기 놀이



로데오 선수가 소의 잔등에서 30초도 못 버티고

내동댕이쳐지고 만다

진흙 밭에서 돼지 등에 올라타려고 기를 쓴다



미국 국가가 울려 퍼지고

카메라의 셔터가 터지는 것이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걸 안다

너에게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안다



북극의 얼음이 녹아내린다고 한다

남극의 빙하도

내 속에 너도 언젠가는 녹아내릴 것이다

언젠가는 이 땅이 몽땅

 


희망 나라의 부동산에 투자라도 한 것처럼

진흙 밭에 나뒹구는 선수에게 잠깐의 내기를 건다

나팔 불고 북을 친다

사실 난 희망 나라와 체결한 계약서 따위는 없었다


 

조용히 돌아와

기다리며 차려놓았던 식탁보를 벗기고

손도 대지 않은 접시를 하나하나 깨버려야 할

시간이 닥쳐온다





있었다


 

                           


지금껏 이것들

쓰려고 했지만 써지지 않았던 것

그에게 가닿기를 바랐지만 닿지 못했던 것

이것들 어떡하나

 


그는 시 따위를 읽으며

시간을 허비할 사람이 아니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는 나는 누구란 말인가?

내 육체 속에 숙박하고 있는 이 말들은

터무니없이 귀찮게 구는 이것들은


 

그는 물결 따라 흐르다 발목에 와 걸리적거리는

지푸라기 같은 것을 걷어내듯이

혀를 차겠지

다시 한 번

나를 수치의 화염에 휩싸이게 하겠지

 


엎치락뒤치락 둔갑하는 그림자처럼

터벅터벅 뒤쫓아 걷는 사람들도 있겠지

황하의 뱃사공, 라스베이거스의 곡예사,

늙은 피카소의 젊은 애인들처럼

 


그래 그래

이것은 있었다

빚보증 섰다가 파산한 삼촌의 울화병처럼

숨어다니며 구시렁대는 금치산자의 한숨처럼

 


대책 없이 무거워져서

떨어져 내릴 비구름의 형상으로

 


뭐라고 시작해야 할까

그에게 그에게 너에게

 


무수한 별들이 높은 데서 폭발하고 있는 동안에

오늘은 이렇게 초라했었다 전전긍긍했었다

속수무책으로 있었다

 


네가 있기 때문에 있었다

그러나 끝내 이 말은

가닿기도 전에 얼굴을 붉히리라

 


이 생각의 불, 불, 불은

흘러가던 붉은 구름 한 점처럼

저녁 빌딩 유리창에 걸려서

있었다 덧없이



시인에게 희망은 짐승을 잡는 놀이와도 같다. 그러나 이 희망이라는 짐승은 무지하다. 그것은 30초도 제대로 버티기 버거운 위험한 놀이다. 시의 중간에서 희망은 '너'와 겹치기도 한다. 그러나 너는 곧 녹아버릴 북극의 얼음같다. 제아무리 견고한 남극의 빙하라하더라고 그것은 끝내 녹아버릴 것이다. 마치 녹기 위해 얼어붙은 것처럼. 너는 결국 내 안에서 녹아 사라질까. 그러나 시인은 이런 아직 다 흘러내리지 않은 얼음, 그 얼음에 대한 희망, 소의 잔등에서 누리는 몇 초의 희망을 이제 과감하게 잘라버리기로 한다. 너를 기다리며 차렸던 식탁의 식탁보와 접시를 하나하나 깨려한다. 그렇다면 희망은 과연 무가치한 것인가. 들뜨고 기다렸던 모든 일들은 끝내 깨버리고 치워버려할 무지일까. 


연이은 시 <있었다>는 그런 가치판단을 중지하고 다만 '있었다'는 존재론적 의미를 다시 되짚게 한다. 너에게 다 쓰지 못했던 부치지 못했던 그런 감정이 있었다. 여기. 울화병처럼, 한숨처럼. 허나 동시에 나는 "네가 있기 때문에 있었다". 치솟는 불같은 내가, 아무 의미 없이 유리창에 걸려있는 붉은 구름일지라도 그것은 홀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또 덧없지만 아주 덧없지는 않지 않던가. 


최정례 시인의 시와는 직접 상관없지만, 최근 이창동 감독의 <버닝>을 보고 페이퍼와 엮어 몇자 적어 본다면, 영화 속 종수(유아인)의 집에서 종수와 (스티븐 연)이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종수의 상황과 배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밴과 마찬가지로, 종수는 벤의 생각과 생활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의 대화는 철저하게 평행선을 달리며 자신들의 말만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은 동시존재라는 개념을 들먹이며 타인과 자신의 경계 허물기에 대해 말하지만, 바로 곁에 있는 종수를 이해하지도 또 이해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에게 종수나 해미(전종서)는 흥미롭거나 신기한 낯선 놀잇감이고, 종수에게 벤은 재수없으면서도 부러운 존재이다. 


영화 속 하우스라는 메타포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겠지만, 나는 세 주인공 모두가 서로가 서로에게 있어 찢어지기 쉽고 불타기 쉬우면서도 불투명한 비닐하우스라고 생각한다. 상대를 잘 알지못하고 그저 모호하게만 아는 한에서 그들은 모두 유약하고 상처받기 쉽다. 밴은 해미를 단순히 버려져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하우스 정도로 여기고, 불태우거나 찢어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밴 또한 종수에게는 하나의 찢어지기 쉬운 하우스가 아니었을까, 포르쉐를 타고 견고한 펜트하우스에 살고 있을지라도 말이다. 


영화를 보고, 또 최정례 시인의 시를 보면서 시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에 치닫는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때 불이 되는 것이 아닐까. 당신이 나를 잘 알지 못할 때 나는 쉽게 찢어지거나 타버릴 그러나 여전히 모호한 비닐하우스이고 당신은 불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당신이 아닐 때, 나는 당신이라는 하우스에 당기는 불이 된다. 시 또한 분명한 불이다. "이 생각의 불, 불, 불"! 그러나 시는 상대를 버닝하는가? 상대를 처참하게 전소시키는가? 그렇지 않음에, 어쩌면 태워도 태워도 타버리지 못한 하우스로 있는 것, 그것을 시는 말하고 있는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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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다 개가 짖지 않는다 앞집 개가 짖지를 않는다

한번 짖기 시작하면 일 분 간격을 두고 두세 시간을

내리 짖던 녀석이 짖지를 않는다 손님 온 것도 아니고

도둑놈 온 것도 아닌데 무슨 외상(外傷)이 있어서가 아니면

그렇게 짖을 이유가 없는 놈이 설 쇠고 며칠 사무실을

나오지 않다가 나와보니 딱 짖지를 않는다 며칠 전

들른 내 친구가 저 녀석은 아무래도 동물병원 가서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될 것 같다고 했었는데 정말

정신과 치료를 받았는지 짖지를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간혹 짖기도 한다 짖기는 짖지만 한두 번

컹컹거리다가 딱 그치고 만다 아무래도 저 녀석이

달라진 게 틀림없다 그렇다면 제 주인이 정신병원에

데리고 갔거나 아니면 제가 그토록 못 잊어하거나

아파하던 문제가 해결되었거나, 해결은 안 되었어도

제 스스로 마음을 고쳐먹었거나 어떻든 달라졌다

달라진 건 좋으나 나는 왠지 마음이 불편하다 조금

편하기도 하지만 어딘가 불편하다 제가 한참 짖어

댈 때 내가 저를 많이 미워했기 때문이다 저렇게

짖자면 저는 얼마나 괴로울까,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아휴, 저놈의 개 어디 나가 죽었으면,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건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남들 괴로워하는 모습 보면 당연히

같이 힘들어야 할 텐데, 자꾸 미운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미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어졌으면, 아니

당장 없애버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문제는

그런 마음이 들고 나면 그런 마음을 가졌다는 것

때문에 또 괴로워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미워하는

것은 미워한 것에 대한 죄책감도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저 개가 짖기 시작한다면 나는 녀석을

사정없이 미워하리라 혼신의 힘을 다해 미워하리라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미워하리라 젖 먹던 힘을 다해

미워하리라 그리고 후회의 구렁텅이에서 주님, 나의

주님을 부르리라 그분은 나를 미워하지 않으리라

                         

                        -<문학과 사회(27)>,2014.



*

"그러니까 미워하는 것은 미워한 것에 대한 죄책감도 포함하는 것이다"

어쩜 이렇게 평이한 문체로 인간의 문제를 적확하게 꼬집을 수 있을까.

모순된 감정들, 인간과 사물, 인간과 인간 사이사이에 놓인 그 모든 애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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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 뒤푸르망텔의 <초대>

첫 장에서는 뒤푸르망텔이 데리다의 환대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한다. 

광기와 언어/어머니, 모국어와 광기의 관계에 대하여(34-37)

모성적 광기가 광기 본질의 어떤 것을 엿보게 해준다. 폭력의 확대는 근접한 것에 대체될 때, 폭력은 광기를 모성적인 것으로부터 이어받는다. 다시 말해, 가장 환대받아야할 장소에서 오히려 가작 적대적 행위가 벌어지는 따위.

데리다의 환대는 동식물과 신에게까지 그 대상이 확대되고, 또 죽음에 대한 환대에 대해서도 다룬다. 


적의와 환대, 주인과 이방인

경계짓기, 획정 가능성의 모호함, 또는 침해받음

자기-집에 대한 자기의 지상권이 없으면 고전적 의미에서의 환대란 있을 수 없다.(89)

지상권은 배제하고 선별하고 선택함으로써만, 즉 폭력을 행사면서 발동된다. 국가의 사찰이가 감시도 같은 의미에서 고전적 국가의 기능을 유지하기 위한 요구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칸트의 진실만을 말하기는, 자기만을 위해 은폐하고 자기만을 위해 간직할 모든 권리를 근본적으로 인정하지 않음으로쏘, 자기-집에의 권리를 이차적이고 부수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순수한 도덕성의 이름으로 그는 국가의 사찰과 경찰의 폭력적 무제한적 감시를 묵인하게 된다. 


이방인은 외국인이 아니며, 또 타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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