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문헌교독법 고전적정리이론총서 6
장순휘 지음, 오항녕 옮김 / 한국고전번역원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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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2004년 화중사범대에서 출간한 张舜徽의 <中国古代史籍校读法>를 번역한 책이다.

이 책의 아이러니는 교수, 교감에 대해 말하면서, 번역된 글 속에 상당수의 오자와 오류가 보인다는 점이다. 사적, 고적을 읽을 때, 혹은 편집할 때 어떻게하면 오류를 줄이고 정확적확하게 전달할 것인가를 논하고 있는데, 정작 역서는 더 꼼꼼하게 교수하지 못했다. 하여 읽으면서도 몇몇 한자의 오기때문에 다시 원서를 확인하는 번거로움을 겪었다. 그럼에도 이 지난한 번역을 마친 역자의 수고를 감안하면, 동양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매우 감사하다. 


1. 

한자에서 왜 가차자가 발생했는가의 원인을 고찰함에 있어, 육덕명은 <경전석문> <서록>에서 정현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했다. "처음 글을 쓸 때 깝자기 해당 글자가 생각나지 않으면 음이 같은 부류의 글자를 가차하여 쓴 것이니, 유사성에 착안한 것이다." 장순휘는 이에 더하여 복잡한 글자의 단순화가 가차자를 발생시킨 주요한 원인 중 하나라고 지적하고 있다. (21-22)


이하 왕인지의 <경의술문>에서 언급한 <경의가차>의 예들을 보여주며, 가차자와 본래한자의 의미 사이의 괴리와 고인들의 오용,오독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가차자의 발생예에 대해서는 청말 오승지의 <손재문집> 권사<고서가차거례>에 자세히 나와있다. (33)


고대문적 중에 본래 글자를 쓰는 경우는 열에 두셋이고, 나머지는 모두 가차자를 쓰고 있다.(34)


朱駿聲《說文通訓定聲》、阮元《經籍纂詁》같은 책은 한자의 본래 뜻과 파생된 뜻을 살피는데 유용한 공구서들이다. 

 

왕념손, 왕인지 부자의 <광아소증>과 <경전석사>는 각각 한자의 실사와 허사를 분류하여 연구했고, 양수달의 <사전>은 다시 <경전석사>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여 고서 속 다양한 어조사의 용법을 정리했다. 


離經은 句讀를 끊어읽는 것을 말한다.(예기 학기편과 청나라 황이주의 <이경빈지설離經辨志說>참고)


한서 예문지 육예략에서 '<예기>131편이라는 말에 반고가 주를 달기를 공자 70제자 이후의 학자들이 기록한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예기는 공자 학단의 형성 이후 한대까지 학자들이 계속하여 보충하고 편집한 책으로 봄이 타당하다. 


공자가 아버지의 묘소를 몰랐다는 설에 대해 정현은 근거없는 견강부회를 더하여 일종의 '야합설'까지 만들어냈고, 사마천 또한 이러한 잘못된 구두끊어읽기를 그의 사기 편찬에 그대로 적용한 셈이다. 이는 사실 <예기><단궁>편의 글을 보면, “不知其墓殯於五父之衢”를 “不知其墓,殯於五父之衢”로 잘못 끊어읽은데서 생긴 오독이다. 이러한 오독은 청대 손호손의 <단궁논문>에 와서야 비로소 수정되고 지적되었다. (41-43)


소식은 역사서를 읽은 때, 팔면수적법을 강조했다. 이는 같은 책을 여러번 읽으면서 읽을 때마다 다른 주제와 각도에 초점을 맞추고 해당 주제와 관련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독해하는 방법이다.(54)


사기, 한서, 후한서, 삼국지를 합쳐 사서라고 칭하는 것은 청나라 건륭, 가경 연간의 학자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왕명성의 <십칠사상각>과 요내의 <석포척독>)


한대에는 권과 편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다. 


진수는 사마씨 밑에서 사서를 편찬했기에 위를 정통으로 보았지만 송대의 주희는 다시 촉한정통론을 주장. 


題上事(위의 일을 제하다)와 舉下事(아래 일을 거론한 것이다)같은 고서의 편장 서미의 표제들은 고인들이 해당 편장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표시한 한 예들이다. (73-74)


고서를 효과적으로 읽기 위해서는 傳注에 대한 이해와 활용을 요한다. 84-92쪽까지는 傳、說、故(詁)、訓、記、注、解、箋、章句、集解등의 10가지 체례에 대해 소개했다. 남북조시대에는 의소(義疏의 학문이 크게 흥하여 경전에 대한 여러가지 해석이 난무하게 되었고, 당 초에는 경전 해석의 통일 위해 정의(正義)가 출현했다. 이에따라 관에서 편찬한 것을 정의라고 부르고, 개인이 저술한 것은 疎라고 불렀다. 


배송지의 <삼국지주>나 유효표의 <세설신어주>는 일서를 많이 인용했다는 면에서 사료적, 문헌적 가치가 있다. (100-101)


2. 

장학성은 목록학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책의 교수(校讎)를 위해 생겨났다고 이해했다. 유향, 유흠의 <별록>과 <칠략>부터 순욱의 <중경신부>, 왕검의 <칠지>, 완효서의 <칠록>과 청개 <사고전서총목제요>까지 이들은 모두 관에서 수장한 책을 교정하고 바로잡기 위해 편집된 목적을 지닌다. (104)


송대 필기류소설인 <소위공담훈>권4에서 이미 목록학이라는 용어를 발견할 수 있다. 


육예략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기의 유림전

한서의 유림전

후한서의 유림전

경전석문의 서록


제자략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장자의 천하

순자의 비십이자

여씨춘추의 불이

회남자의 요략

사마담의 논육가요지

사기의 공자세가 중니제자열전 관안열전, 노장신한열전 맹순열전


육예락을 종적으로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서 경적지

문헌통고 경적고

사고전서총목제요


금고문 논쟁에 대해서는 청말의 요평이 지은 《古今學考》가 가장 자세하다. 

근본 문제에 대해 고찰하려면, 진립의 <백호통의소증>, 진수기의 <오경이의소증>을 보면 고금문의 분기점을 파악할 수 있다. 그 후 예기 왕제편과 <주례주소>를 읽는 것도 도움이 된다. (109)


辨章學術,考鏡源流할 때, 금고문의 다른 점을 논하기는 쉬워도 그들이 상통하는 점을 소홀히하기 쉽다. 학자들은 이를 주의해야 할 것이다. (110)


반고는 유향, 유흠 부자의 칠략에 근거하여 한서 예문지를 편찬하였다. 

위 원제 때, 비서랑 정묵이 <중경>이라는 도서목록을 폈고, 진무제 때 비서감 순욱이 <중경>을 바탕으로 <신부>를 편찬했는데, 이 때 갑을병정 네 부로 책을 분류, 이것이 경사자집 초기의 형태이다. 이후 동진의 이충이 갑을병정을 경사자집의 순서로 편집했고, 수서 경적지나 당나라 이후부터의 史志는 이 틀을 따랐다. 


*자세한 도서분류법에 대해서는 118-119쪽의 칠략분류법과 사부분류법 저작 대조표 참고.


-남북조 시기 이후에 역사서 서술의 증가로 인해 도서 목록 분류, 특히 사부(史部)의 세분화 발생. 

-수서경적지에 나오는 지리서, 지기등은 원시적 의미에서의 총서였다. 

-경서에 관련한 총서로는 <경원>, <고경해휘함>,<황청경해> 등 여러 종이다.

-총서의 기원은 유정손이 편집한 <유학경오>라고 볼 수 있으나, 총서라는 표제는 이미 당나라 육구몽의 <입택총서>에서 보인다. 다만 육씨의 총서는 개인적 필기에 불과할 뿐이다. 

-1922년 <사부총간>의 영인. 이후 상무인쇄소의 <사부총간초편>, 중화서국의 <사부비요>

-항주ㅡ절강지역은 송대 조판 인쇄술의 중심지로 여기서 나는 절본의 상태가 가장 좋고, 그 다음으로 촉본, 그 다음으로 복건 등지에서 찍은 민본이 있다. (139-140)

-주이존의 말대로, 옛사람들은 간책을 유통할 때 모든 간의 글자수까지 염두에 두며 기록했다. 예컨대 한서 예문지 육예략 중 상서 부분에서 유향은 책을 교정할 때 간에 새겨진 글자 수를 바탕으로 일실된 본문을 고증했다. (144)

-백납본은 선택된 각종 판본들의 내용이 끊어지거나 온전치 못해서 여러 판본을 바탕으로 보충한 것이 마치 여러 피륙을 덧대 꿰맨 승려의 백납의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148)


3.

오대징의 <각재집고록서>

왕념손의 <독서잡지여편>-노자 31장의 "부가병자 불상지기"에서 佳는 隹의 오자이며, 이는 唯로 교정되어야 한다는 설.(192)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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