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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평점 :
강제 독서를 시작했다.
'강제'라는 말이 주는 딱딱함과 부당함이 싫어서 강제로 무언가를 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독서'를 '강제'로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 TV를 보다가 문득 무수히 꽂혀만 있는 내 책들이 안쓰러워졌다고 해두자. 책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기로 했다고. 강제로라도. )
스스로도 놀랍지만 어쨌든 성공했다.
며칠 안되는 시간 안에 기어코 책 한 권을 읽어냈다.
그것도 무려 난해하기 그지없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누군가는 이 책의 어느 부분이 난해한 것이냐고 비웃을지도 모르겠으나 나에겐 어렵고 난해한 책임에 분명하다.
철학은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 묻고 싶을 만큼 철학에 무지한 내게는 니체뿐 아니라 책 속에 종종 이름으로 등장하는 그 어떤 철학자도 귀동냥으로 이름 정도나 들어봤을 뿐 철저하게 낯설다.
연애소설인 줄 알았던 책 속에는 온통 철학과 사상과 정치와 역사, 공산주의, 심지어 신과 똥까지 ....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다 들어있는 것만 같다.
한 권의 책 속에 들어앉아 있기에는 너무 방대하고 너무나 무거운 것을 꾸깃꾸깃 구겨 넣어 놓은 것만 같아서 손대면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다.
그 많은 것들의 혼란 속에 내던져진 나는 홀로 길을 잃었다.
너무 다양한 시선과 생각들이 나를 혼란에 빠트렸다.
이 길인가 보다 하고 한참을 걷다 보면 다른 길로 가야 했고, 종종 갔던 길을 도로 되짚어 돌아와야 했다.
관계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돌아보면 사상에 대한 이야기였다가, 삶에 대한 이야기였다가, 철학적 사고로 끝맺음을 하기도 한다.
알아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과연 내가 알아들은 게 맞는지도 헷갈릴 지경.
전체를 보지 못하고 한 단면, 단면만을 바라보는 내 편협한 시선의 탓인 건지.
그 단면들이 모여서 결국 전체가 되는 것임을 믿는다면 .... 아주 비켜선 것 같지도 않고.
여하튼 나에게 많은 생각들을 던져 준 것은 사실이다.
나를 아는 누구라도
분명 내가 테레사를 가장 잘 이해하고 그 편에 서서 글을 읽었을 거라고 짐작할 것이다.
한데 놀랍게도 난 누구에게도 감정 이입을 하지 않은 채 한걸음 뒤로 물러서 내내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했다.
글을 읽는 동안 이러기가 몹시 쉽지 않은 경험인데, 감상적인 내가 인물들의 감정에 동요되지 않은 채 일정한 거리와 시선을 유지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경험이었다.
그 경험을 이끌어 준 것은, 아마도 독특한 글의 화자 때문이 아닐까 싶다.
보통 글은 어떤 시점을 중심으로 씌이는게 보편적인데 이 글은 놀랍게도 작가가 아주 직접적으로 개입해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고 중간중간 인물에 대한 평가와 설명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괴이한 방식의 서술은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가 (주입식 교육의 폐해랄까... 나도 모르게 글을 읽을 때마다 알고 있는 시점을 찾게 되고 그것에서 어긋났을 때 그 낯섦을 힘들어한다.) 속독의 방해물로 작용했다가, 결국에는 나 또한 그처럼 일정한 거리 밖에서 그들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 거리라는 것,
일정한 틈이 주는 자유로움은 놀랍다.
편파적이거나 심각하게 주관적인 시선으로 해석되던 어떤 관계들이 이 '거리'라는 것을 가운데 두고 봤을 때 전혀 다른 색을 띄는 것이다.
평상시의 나라면 절대 토마스와 사비나를 이해하지 못 했을 것이다.
아마도 분노했을거다.
왜 그런 삶을 사느냐고 따져 물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과 내가 분리되고 내 감정이 이입되지 않은 채 타인의 삶을 바라보자, 그 누구의 삶도 손가락질할 것이 없었다.
육체에 대한 집착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섹스 중독에 가까운 토마스.
정신쇠약에 시달리면서도 기어코 움켜쥐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믿고 사는 테레사.
너무도 불행해 보여 도저히 함께 있는 게 옳은 것인지 조차 의심스럽던, 그래서 사랑이 아니라고 내내 생각했던 두 사람의 마지막을 보면서... 어쩌면 이건 사랑이었던가 싶어졌다.
정말 책을 읽는 내내 사랑이 아니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던 두 사람이었는데 마지막을 장을 덮는 순간 문득, 사랑이었던가 싶어졌다.
다 나름의 삶의 방식과 이상향을 추구했던 네 사람.
닮은 듯 닮지 않았던 네 사람.
그들을 파헤쳐 낱낱이 해부하고 찢어발기면서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혹은 무거움.
이상과 현실의 극렬한 조우, 삶과 죽음이 부딪히는 순간의 접점.
타인의 삶에 대해 우리는 누구도 함부로 재단하고 옳고 그름을 평할 수 없다.
결국 가벼움은 무거움이고, 고귀한 것은 천한 것과 같으며, 오늘의 옳음이 내일의 옳음이 될 수는 없다.
우리 행위의 목격자가 있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좋건 싫건 간에 우리를 관찰하는 눈에 자신을 맞추게 되며, 우리가 하는 것의 그 무엇도 더 이상 진실이 아니다. 군중이 있다는 것, 군중을 염두에 둔다는 것은 거짓 속에 사는 것이다.
사비나는 작가가 자신의 모든 은밀한 삶, 또한 친구들의 그것까지 까발리는 문학을 경멸했다. 자신의 내밀성을 상실한 자는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라고 사비나는 생각했다. 또한 그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자도 괴물인 것이다.
P.133
테레사는 파괴된 시청을 바라보았고, 이 광경은 불현듯 그녀의 어머니를 떠오르게 했다: 자신의 폐허를 과시하고, 자신의 추함에 자부심을 갖고 소매를 걷어 흉하게 잘려나간 손을 보이며 모든 사람에게 상처를 보아달라고 강요하는 그 변태적 욕구.
p.159
어둡고 음습한 내장 속에 상처를 숨겨두면 결국엔 내 몸 전체가 썩어 들어갈 것만 같아서 차라리 햇볕 위로 상처를 내보이는 것을 선호하는 나는 그저 나의 추함을 봐달라고 강요하는 변태적 인간이었단 말인가.
숨겨두는 것보다 내 보이는 것이 더 강한 것이고 더 건강한 일이라고 배웠던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인가.
은밀함조차 한 톨 남기지 않고 탈탈 털어내버린 나 자신은 그저 껍데기만 존재하는 허깨비가 되어 버린 것 같은 이 허망함.
나는 내 은밀한 삶을 기꺼이 포기하는 괴물이자 스스로의 폐허를 과시하는 변태로 정의 되어져 버렸다.
그러면 내 속에 담긴 이 은밀하고 추악하고 더러운 감정들은 다 어디로 내보내야 한단 말인가.
내 몸에 기생한 채 나를 괴롭히고 야금야금 먹어치우더라도 참아내야 한단 말인가.
...그런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란 게 이렇다.
죽도록 열심히 소화시켜 내장을 통해 아무도 보지 못하는 변기 속에 토해내고 나면
물내림 버튼 한 번으로 누구도 보지 못하는 은밀한 어떤 곳으로 영원히 사라져버리게 하는 것.
한데 책 속에 이와 유사한 장면이 등장해서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책에서는 좀 더 근본적인 추함이나 신성한 것과 상반되는 천함, 가장 더러운 것 위에서 고귀한 척 살아가는 우리 모습을 비꼬는 것이겠지만...
변기 끈을 잡아당겨 물이 꾸르륵 소리를 내며 휩쓸고 내려가면, 육체는 자신의 추한 꼴을 잊게 되며, 인간은 자신의 내장이 배설한 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게 된다. 하수관은 아파트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있지만 우리의 시선으로부터 세심하게 감춰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배설물로 가득 찬 베니스 속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살아간다. 그 위에 우리 화장실, 침실, 댄스홀, 그리고 우리의 국회가 세워진 것이다.
p.181
그녀는 변기 위에 앉았고 갑자기 창자를 비우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치욕의 극단까지 가보자는 욕망, 그저 육체, 오로지 육체 그 자체가 되고자 하는 욕망, 어머니가 항상 말했듯 그저 먹고 싸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육체가 되고 싶은 욕망이었다. 테레사는 그녀의 창자를 비웠고 그 순간 무한한 우수와 고독을 느꼈다. 하수관 끝의 터진 입구 위에 벗은 채로 앉아 있는 그녀 육체보다 더 비참한 것은 이 세상에 없다.
p.181
두번째 글은 그녀가 처음으로 자신의 정절을 이데올로기 삼아 세워진 토마스와의 사랑을 그녀만의 방식으로 배신하는 장면이다. 자신이 그 정조를 잃는 순간 그들의 사랑은 산산이 부서질 것이라 예상하면서도 기어코 그 바닥으로 추락하고 싶어 하는 추락의 욕구.
섹스와 사랑은 다르다고 이젠 테레사에게까지 주입하려는 토마스의 그 사랑관에 반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목이지 싶다.
나는 정말이지 저 장면을 이해하고 싶지 않은데 생각할 겨를조차 없이 자동 이해가 되어 버리는 상황에 헛웃음이 났다.
극단으로 치닫고 싶은 저 마음.
사랑이 사람을 어떻게 황폐하게 만드는지, 어떤 식으로 그 극단의 끝까지 몰고 가는지, 결국 어떻게 깨어져버리는지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당혹스럽다.
심지어 테레사는 기어코(그 남자가 다정하게 그녀를 불렀다면 전혀 달라졌을지도 모를) 토마스와 관계를 유지해내고야 말지만.
그녀는 모든 육체가 평등했던 어머니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와 함께 살러 온 것이다. 자신의 육체를 유일하고 대체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녀는 그와 함께 산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 역시 그녀와 다른 여자들 사이에 평등의 선을 그었다: 그는 같은 방식으로 모든 여자에게 키스를 했고 같은 식으로 애무를 했으며 테레사의 육체와 어떤 구별도, 정말 추호의 구별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녀가 벗어났다고 믿었던 세계로 그녀를 되돌려보낸 셈이다.
그리고 세 번째 범주가 있는데,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 속에서 사는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이 범주에 속한다. 이들의 조건은 첫 번째 그룹에 속한 사람들의 그것만큼이나 위험천만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이 감기면 무대는 칠흑 속에 빠질 것이다. 테레사와 토마스를 이런 사람들 속에 분류해야만 한다.
p.308
글을 읽는 동안 불편했던 부분들이 있었다.
갑자기 누군가 내 뒤통수를 거울로 보여주는 것 같은 그런 기분.
내가 볼 수 없는, 그래서 없다고 착각했던 내 뒷모습 같은 것들.
테레사가 취리히에서 사진을 찍지 않겠다고 한순간, 상대방 기자가 퍼부었던 말 같은 것들이 그렇다.
꼭 내가 나로 무엇을 이루어야만 하는 건가, 독립적인 개체로서의 나 자신으로 존재해야만 옳은 것인가.
맹목적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의지하고 곁을 지킨다는 게 왠지 거머리같이 여겨지는 순간이었다.
그것을 아름답고 숭고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그저 시대착오적인 올드 한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테레사를 통해서 나를 바라보곤 한다.
한때의 내 사랑과 현재의 내 사랑.
그리고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나 자신.
책을 읽는 내내 테레사의 사랑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던 나는 결국 나 자신의 사랑이 잘못되었다고 떠드는 꼴이었던가 싶기도 하다.
지금의 내 모습이 결국 테레사의 마지막처럼 끝나 버릴까 두렵다.
사랑하는 사람을 한없이 끌어내려 밑으로 밑으로 가장 바닥으로 끌어내려 놓을까 봐 겁이 난다.
내 곁에 그 사람을 잡아두기 위해, 그 사람 곁에 오로지 나만 남을 수 있게 자꾸만 그 사람의 삶에서 모든 것을 배제시켜 버리도록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
토마스가 늙기를 바라던 테레사의 마음.
그리고 어느 농촌의 트럭 운전사가 되어버린 촉망받던 외과 의사.
그 끝에서의 테레사의 마음은 어땠을지.
지금 내 사랑은 어떤 모습인 건지.
배신. 어린 시절부터 아빠와 학교 선생님들은, 배신이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추악한 것이라고 누차 우리에게 말하곤 했다. 그러나 배신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배신한다는 것은 줄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다. 배신이란 줄 바깥으로 나가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것이다.
p.107
인간의 삶은 마치 악보처럼 구성된다. 미적 감각에 의해 인도된 인간은 우연한 사건(베토벤의 음악, 역에서의 죽음)을 인생의 악보에 각인될 하나의 테마로 변형시킨다. 그리고 작곡가가 소나타의 테마를 다루듯 그것을 반복하고,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것이다. 안나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삶을 마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과 죽음의 테마, 사랑의 탄생과 결부되어 잊을 수 없게 된 이 테마가 그 음울한 아름다움의 힘으로 절망의 순간에 그녀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서조차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작곡한다.
p.63
생각지 못 했던 어떤 시선들이 좋다.
같은 것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고 다른 방식으로 해석해서 정의 내리는 이런 것들이 좋다.
내가 좀 더 어린 나이에 이 책을 읽었다면 (역시나 그때도 이해하기 어렵기는 매한가지였겠지만) 삶을 대하는 태도가 좀 달라졌을까 싶은 의문이 든다.
눈앞에 문제에 너무 매달려 살아왔다.
이렇게 범우주적인 문제도 넘치는데,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이토록 다양한데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았다.
토마스를 비난하며, 테레사를 안쓰러워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거리'를 두고 그들을 지켜보며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토마스가 나쁜 게 아니고 테레사가 나쁜 게 아니다.
프란츠가 나쁜 게 아니고 사비나가 나쁜 게 아니다.
그들은 그저 그들의 삶의 방식에 맞춰 최선을 다해 살았을 뿐이다.
그것을 내가 좀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삶이 좀 더 가벼워졌을까.
고민을 주렁주렁 열매처럼 매달고 살지 않아도 되었을까.
아무리 내가 고민하고 상처받아도 타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그만 아는 세상이 있다.
남들은 도저히 어쩌지 못하는 오롯한 자기만의 세상.
옳고 그름의 경계가 흐려진다.
가벼움과 무거움의 경계도 사라진다.
그저 나와 다른 너만이 존재할 뿐.
저주와 특권이 더도 덜도 아닌 같은 것이라면 고상한 것과 천한 것 사이에 차이점은 없어질 테고, 신의 아들이 똥 때문에 심판받는다면 인간 존재는 그 부피를 잃고 참을 수 없는 가벼움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스탈린의 아들이 고압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에 몸을 던진 것은 부피가 사라진 세계의 무한한 가벼움 때문에 한심하게 치솟은 천칭 접시 위에 자기 몸을 올려놓기 위해서였다.
p.2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