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비엔나 - 300ml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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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산점에서 오늘 비엔나 먹고 너무 행복했어요. 비엔나 마셔본지가 십년은 더 넘은거 같은데 그땐 몹시도 달달한 커피였거든요. 근데 알라딘 비엔나는 쓰달쓰달했어요.ㅋㅋ 달기만한 커피보다 훨씬 좋더라구요. 쿠키도 맛있구...직원분들도 너무 친절하시고..^^ 비내리는 가을날에 어울리는 커피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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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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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독서를 시작했다.
'강제'라는 말이 주는 딱딱함과 부당함이 싫어서 강제로 무언가를 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독서''강제'로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 TV를 보다가 문득 무수히 꽂혀만 있는 내 책들이 안쓰러워졌다고 해두자. 책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기로 했다고. 강제로라도. )
스스로도 놀랍지만 어쨌든 성공했다.
며칠 안되는 시간 안에 기어코 책 한 권을 읽어냈다.
그것도 무려 난해하기 그지없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누군가는 이 책의 어느 부분이 난해한 것이냐고 비웃을지도 모르겠으나 나에겐 어렵고 난해한 책임에 분명하다.
철학은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 묻고 싶을 만큼 철학에 무지한 내게는 니체뿐 아니라 책 속에 종종 이름으로 등장하는 그 어떤 철학자도 귀동냥으로 이름 정도나 들어봤을 뿐 철저하게 낯설다.

연애소설인 줄 알았던 책 속에는 온통 철학과 사상과 정치와 역사, 공산주의, 심지어 신과 똥까지 ....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다 들어있는 것만 같다.
한 권의 책 속에 들어앉아 있기에는 너무 방대하고 너무나 무거운 것을 꾸깃꾸깃 구겨 넣어 놓은 것만 같아서 손대면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다.
그 많은 것들의 혼란 속에 내던져진 나는 홀로 길을 잃었다.
너무 다양한 시선과 생각들이 나를 혼란에 빠트렸다.
이 길인가 보다 하고 한참을 걷다 보면 다른 길로 가야 했고, 종종 갔던 길을 도로 되짚어 돌아와야 했다.

관계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돌아보면 사상에 대한 이야기였다가, 삶에 대한 이야기였다가, 철학적 사고로 끝맺음을 하기도 한다.
알아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과연 내가 알아들은 게 맞는지도 헷갈릴 지경.
전체를 보지 못하고 한 단면, 단면만을 바라보는 내 편협한 시선의 탓인 건지.
그 단면들이 모여서 결국 전체가 되는 것임을 믿는다면 .... 아주 비켜선 것 같지도 않고.

여하튼 나에게 많은 생각들을 던져 준 것은 사실이다.

나를 아는 누구라도
분명 내가 테레사를 가장 잘 이해하고 그 편에 서서 글을 읽었을 거라고 짐작할 것이다.
한데 놀랍게도 난 누구에게도 감정 이입을 하지 않은 채 한걸음 뒤로 물러서 내내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했다.
글을 읽는 동안 이러기가 몹시 쉽지 않은 경험인데, 감상적인 내가 인물들의 감정에 동요되지 않은 채 일정한 거리와 시선을 유지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경험이었다.
그 경험을 이끌어 준 것은, 아마도 독특한 글의 화자 때문이 아닐까 싶다.
보통 글은 어떤 시점을 중심으로 씌이는게 보편적인데 이 글은 놀랍게도 작가가 아주 직접적으로 개입해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고 중간중간 인물에 대한 평가와 설명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괴이한 방식의 서술은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가 (주입식 교육의 폐해랄까... 나도 모르게 글을 읽을 때마다 알고 있는 시점을 찾게 되고 그것에서 어긋났을 때 그 낯섦을 힘들어한다.) 속독의 방해물로 작용했다가, 결국에는 나 또한 그처럼 일정한 거리 밖에서 그들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 거리라는 것,
일정한 틈이 주는 자유로움은 놀랍다.
편파적이거나 심각하게 주관적인 시선으로 해석되던 어떤 관계들이 이 '거리'라는 것을 가운데 두고 봤을 때 전혀 다른 색을 띄는 것이다.
평상시의 나라면 절대 토마스와 사비나를 이해하지 못 했을 것이다.
아마도 분노했을거다.
왜 그런 삶을 사느냐고 따져 물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과 내가 분리되고 내 감정이 이입되지 않은 채 타인의 삶을 바라보자, 그 누구의 삶도 손가락질할 것이 없었다.

육체에 대한 집착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섹스 중독에 가까운 토마스.
정신쇠약에 시달리면서도 기어코 움켜쥐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믿고 사는 테레사.
너무도 불행해 보여 도저히 함께 있는 게 옳은 것인지 조차 의심스럽던, 그래서 사랑이 아니라고 내내 생각했던 두 사람의 마지막을 보면서... 어쩌면 이건 사랑이었던가 싶어졌다.
정말 책을 읽는 내내 사랑이 아니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던 두 사람이었는데 마지막을 장을 덮는 순간 문득, 사랑이었던가 싶어졌다.

다 나름의 삶의 방식과 이상향을 추구했던 네 사람.
닮은 듯 닮지 않았던 네 사람.
그들을 파헤쳐 낱낱이 해부하고 찢어발기면서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혹은 무거움.
이상과 현실의 극렬한 조우, 삶과 죽음이 부딪히는 순간의 접점.

타인의 삶에 대해 우리는 누구도 함부로 재단하고 옳고 그름을 평할 수 없다.
결국 가벼움은 무거움이고, 고귀한 것은 천한 것과 같으며, 오늘의 옳음이 내일의 옳음이 될 수는 없다.




우리 행위의 목격자가 있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좋건 싫건 간에 우리를 관찰하는 눈에 자신을 맞추게 되며, 우리가 하는 것의 그 무엇도 더 이상 진실이 아니다. 군중이 있다는 것, 군중을 염두에 둔다는 것은 거짓 속에 사는 것이다.
사비나는 작가가 자신의 모든 은밀한 삶, 또한 친구들의 그것까지 까발리는 문학을 경멸했다. 자신의 내밀성을 상실한 자는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라고 사비나는 생각했다. 또한 그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자도 괴물인 것이다.
P.133
테레사는 파괴된 시청을 바라보았고, 이 광경은 불현듯 그녀의 어머니를 떠오르게 했다: 자신의 폐허를 과시하고, 자신의 추함에 자부심을 갖고 소매를 걷어 흉하게 잘려나간 손을 보이며 모든 사람에게 상처를 보아달라고 강요하는 그 변태적 욕구.
p.159


어둡고 음습한 내장 속에 상처를 숨겨두면 결국엔 내 몸 전체가 썩어 들어갈 것만 같아서 차라리 햇볕 위로 상처를 내보이는 것을 선호하는 나는 그저 나의 추함을 봐달라고 강요하는 변태적 인간이었단 말인가.
숨겨두는 것보다 내 보이는 것이 더 강한 것이고 더 건강한 일이라고 배웠던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인가.
은밀함조차 한 톨 남기지 않고 탈탈 털어내버린 나 자신은 그저 껍데기만 존재하는 허깨비가 되어 버린 것 같은 이 허망함.
나는 내 은밀한 삶을 기꺼이 포기하는 괴물이자 스스로의 폐허를 과시하는 변태로 정의 되어져 버렸다.

그러면 내 속에 담긴 이 은밀하고 추악하고 더러운 감정들은 다 어디로 내보내야 한단 말인가.
내 몸에 기생한 채 나를 괴롭히고 야금야금 먹어치우더라도 참아내야 한단 말인가.
...그런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란 게 이렇다.
죽도록 열심히 소화시켜 내장을 통해 아무도 보지 못하는 변기 속에 토해내고 나면
물내림 버튼 한 번으로 누구도 보지 못하는 은밀한 어떤 곳으로 영원히 사라져버리게 하는 것.

한데 책 속에 이와 유사한 장면이 등장해서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책에서는 좀 더 근본적인 추함이나 신성한 것과 상반되는 천함, 가장 더러운 것 위에서 고귀한 척 살아가는 우리 모습을 비꼬는 것이겠지만...

변기 끈을 잡아당겨 물이 꾸르륵 소리를 내며 휩쓸고 내려가면, 육체는 자신의 추한 꼴을 잊게 되며, 인간은 자신의 내장이 배설한 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게 된다. 하수관은 아파트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있지만 우리의 시선으로부터 세심하게 감춰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배설물로 가득 찬 베니스 속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살아간다. 그 위에 우리 화장실, 침실, 댄스홀, 그리고 우리의 국회가 세워진 것이다.
p.181
그녀는 변기 위에 앉았고 갑자기 창자를 비우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치욕의 극단까지 가보자는 욕망, 그저 육체, 오로지 육체 그 자체가 되고자 하는 욕망, 어머니가 항상 말했듯 그저 먹고 싸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육체가 되고 싶은 욕망이었다. 테레사는 그녀의 창자를 비웠고 그 순간 무한한 우수와 고독을 느꼈다. 하수관 끝의 터진 입구 위에 벗은 채로 앉아 있는 그녀 육체보다 더 비참한 것은 이 세상에 없다.
p.181

두번째 글은 그녀가 처음으로 자신의 정절을 이데올로기 삼아 세워진 토마스와의 사랑을 그녀만의 방식으로 배신하는 장면이다. 자신이 그 정조를 잃는 순간 그들의 사랑은 산산이 부서질 것이라 예상하면서도 기어코 그 바닥으로 추락하고 싶어 하는 추락의 욕구.
섹스와 사랑은 다르다고 이젠 테레사에게까지 주입하려는 토마스의 그 사랑관에 반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목이지 싶다.
나는 정말이지 저 장면을 이해하고 싶지 않은데 생각할 겨를조차 없이 자동 이해가 되어 버리는 상황에 헛웃음이 났다.
극단으로 치닫고 싶은 저 마음.
사랑이 사람을 어떻게 황폐하게 만드는지, 어떤 식으로 그 극단의 끝까지 몰고 가는지, 결국 어떻게 깨어져버리는지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당혹스럽다.
심지어 테레사는 기어코(그 남자가 다정하게 그녀를 불렀다면 전혀 달라졌을지도 모를) 토마스와 관계를 유지해내고야 말지만.

그녀는 모든 육체가 평등했던 어머니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와 함께 살러 온 것이다. 자신의 육체를 유일하고 대체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녀는 그와 함께 산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 역시 그녀와 다른 여자들 사이에 평등의 선을 그었다: 그는 같은 방식으로 모든 여자에게 키스를 했고 같은 식으로 애무를 했으며 테레사의 육체와 어떤 구별도, 정말 추호의 구별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녀가 벗어났다고 믿었던 세계로 그녀를 되돌려보낸 셈이다.
그리고 세 번째 범주가 있는데,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 속에서 사는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이 범주에 속한다. 이들의 조건은 첫 번째 그룹에 속한 사람들의 그것만큼이나 위험천만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이 감기면 무대는 칠흑 속에 빠질 것이다. 테레사와 토마스를 이런 사람들 속에 분류해야만 한다.
p.308

 

글을 읽는 동안 불편했던 부분들이 있었다.
갑자기 누군가 내 뒤통수를 거울로 보여주는 것 같은 그런 기분.
내가 볼 수 없는, 그래서 없다고 착각했던 내 뒷모습 같은 것들.
테레사가 취리히에서 사진을 찍지 않겠다고 한순간, 상대방 기자가 퍼부었던 말 같은 것들이 그렇다.
꼭 내가 나로 무엇을 이루어야만 하는 건가, 독립적인 개체로서의 나 자신으로 존재해야만 옳은 것인가.
맹목적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의지하고 곁을 지킨다는 게 왠지 거머리같이 여겨지는 순간이었다.
그것을 아름답고 숭고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그저 시대착오적인 올드 한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테레사를 통해서 나를 바라보곤 한다.
한때의 내 사랑과 현재의 내 사랑.
그리고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나 자신.

책을 읽는 내내 테레사의 사랑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던 나는 결국 나 자신의 사랑이 잘못되었다고 떠드는 꼴이었던가 싶기도 하다.
지금의 내 모습이 결국 테레사의 마지막처럼 끝나 버릴까 두렵다.
사랑하는 사람을 한없이 끌어내려 밑으로 밑으로 가장 바닥으로 끌어내려 놓을까 봐 겁이 난다.
내 곁에 그 사람을 잡아두기 위해, 그 사람 곁에 오로지 나만 남을 수 있게 자꾸만 그 사람의 삶에서 모든 것을 배제시켜 버리도록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
토마스가 늙기를 바라던 테레사의 마음.
그리고 어느 농촌의 트럭 운전사가 되어버린 촉망받던 외과 의사.
그 끝에서의 테레사의 마음은 어땠을지.
지금 내 사랑은 어떤 모습인 건지.

 

 

배신. 어린 시절부터 아빠와 학교 선생님들은, 배신이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추악한 것이라고 누차 우리에게 말하곤 했다. 그러나 배신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배신한다는 것은 줄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다. 배신이란 줄 바깥으로 나가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것이다.
p.107
인간의 삶은 마치 악보처럼 구성된다. 미적 감각에 의해 인도된 인간은 우연한 사건(베토벤의 음악, 역에서의 죽음)을 인생의 악보에 각인될 하나의 테마로 변형시킨다. 그리고 작곡가가 소나타의 테마를 다루듯 그것을 반복하고,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것이다. 안나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삶을 마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과 죽음의 테마, 사랑의 탄생과 결부되어 잊을 수 없게 된 이 테마가 그 음울한 아름다움의 힘으로 절망의 순간에 그녀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서조차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작곡한다.
p.63

생각지 못 했던 어떤 시선들이 좋다.
같은 것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고 다른 방식으로 해석해서 정의 내리는 이런 것들이 좋다.
내가 좀 더 어린 나이에 이 책을 읽었다면 (역시나 그때도 이해하기 어렵기는 매한가지였겠지만) 삶을 대하는 태도가 좀 달라졌을까 싶은 의문이 든다.

눈앞에 문제에 너무 매달려 살아왔다.
이렇게 범우주적인 문제도 넘치는데,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이토록 다양한데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았다.
토마스를 비난하며, 테레사를 안쓰러워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거리'를 두고 그들을 지켜보며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토마스가 나쁜 게 아니고 테레사가 나쁜 게 아니다.
프란츠가 나쁜 게 아니고 사비나가 나쁜 게 아니다.
그들은 그저 그들의 삶의 방식에 맞춰 최선을 다해 살았을 뿐이다.

그것을 내가 좀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삶이 좀 더 가벼워졌을까.
고민을 주렁주렁 열매처럼 매달고 살지 않아도 되었을까.
아무리 내가 고민하고 상처받아도 타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그만 아는 세상이 있다.
남들은 도저히 어쩌지 못하는 오롯한 자기만의 세상.
옳고 그름의 경계가 흐려진다.
가벼움과 무거움의 경계도 사라진다.
그저 나와 다른 너만이 존재할 뿐.




저주와 특권이 더도 덜도 아닌 같은 것이라면 고상한 것과 천한 것 사이에 차이점은 없어질 테고, 신의 아들이 똥 때문에 심판받는다면 인간 존재는 그 부피를 잃고 참을 수 없는 가벼움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스탈린의 아들이 고압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에 몸을 던진 것은 부피가 사라진 세계의 무한한 가벼움 때문에 한심하게 치솟은 천칭 접시 위에 자기 몸을 올려놓기 위해서였다.
p.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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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의 약혼자
송명순 지음 / 청어람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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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의 약혼자.

 

이 무슨 쌍팔년도 제목인가 싶긴 하지만, 이 여섯 글자만큼 이 책의 정체성을 뚜렷이 드러내는 제목도 없지 싶다.
죽은 쌍둥이 언니의 약혼자, 한상우.
그리고 오랫동안 남처럼 살았던 쌍둥이 동생, 하다영.
쌍둥이 언니 아영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재회하게 되는 둘.
언뜻 보면 그저 지지부진한 신파의 느낌이 강하게 드는 이야기 같지만, 놀랍게도 책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가족'이었다.
가장 가깝지만, 가장 상처가 되어지기도 하는 가족.
아영의 죽음으로 인해 드러나게 되는 과거의 상처들과 여전히 그 상처들을 껴안고 살아가는 남은 사람들.
소통의 부재가 얼마나 큰 오해를 불러오고 상처로 내려앉게 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글이었다.


처음 몇 장을 읽고는 솔직히 폭탄인가 싶었다.
과잉 감정의 난투극을 보고 있자니 공감은커녕 피곤만 쌓이고, 덕분에 인물들은 하나같이 이상한 사람들로 여겨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인물들의 비명을 듣고 있는 순간이 나는 항상 어렵다. 조금 더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해주면 좋을 것만 같은 상황에서도 이미 임계점에 이른 터질듯한 감정들의 호소는 공감이 아닌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감정전이가 빠른 나 같은 사람에겐 더더욱.)
책이든 사람이든, 이해하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할 때 우리는 피곤해지고 피하고 싶어진다.
결국 책장을 덮고 말았다.
며칠이 지나 다시 읽기 시작한 책은 여전히 내게 피곤을 먼저 선물해줬고, 결국 극악 처방을 내렸다.
뒤에서부터 읽기 시작하는 것.
(이 책이 추리소설이 아닌 것을 격렬하게 감사하게 생각했던 순간이었다.)
대강의 스토리를 파악한 후,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읽기 시작한 책은 나에게 훨씬 많은 이해와 공감을 선물해 주었다.
간혹, 인물들을 너무 이해할 수 없을 때 이런 식의 책 읽기를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가 되어지지 않은 경우도 허다한데, 다행스럽게도 이 책은 숨겨진 이야기를 읽고 나자 인물들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해가 되어지는 순간 이방인같이 여겨지던 내가 좀 더 친밀하게 그들의 곁으로 다가설 수 있었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부모로서의 나와, 자식으로서의 나와, 아내로서의 나에 대해 생각했다.
특히나 아이들의 지금 모습이 내가 원하는 대로 이끌어 만들어낸 모습은 아닌지,
좋은 거라고 권했던 모든 것들이 오로지 부모 욕심의 부산물들인 건 아닌지,
아이들의 상처를 들여다보지 못한 채 살고 있는 건 아닌지,
내 아이들은 과연 지금 행복한지.


대화의 단절과 소통의 부재가 한 가족을 조각내고, 등돌려 타인으로 만드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된다.
결국 그 부모는 둘 다 자기 방식대로의 사랑을 했을 뿐인데, 남은 건 자식들의 상처뿐이었다.
엄마도 아빠도 딸들을 사랑하지 않았던 게 아니다.
스스로의 방식으로 내내 열심히 사랑했지만, 아무것도 전해지지 않았다는 게 문제다.
진짜 상대방이 원하는 것, 그것을 알아야 우리는 올바른 사랑을 할 수 있는 건가 보다.
내 방식이 아닌 상대가 원하는 모습으로 사랑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모른 채 내내 나의 방식으로만 상대를 대하고, 사랑하고, 이해하려는 이기적인 모순이 우리의 소통을 막아선다.


옳다고 믿었던 모든 것들이 그른 것이 되고, 그르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때론 진실이 아닌 것임을 알게 되는 순간
다영의 벽이 허물어졌다.
내내 돌처럼 단단히 굳어 가슴속을 데굴데굴 구르며 멍을 들이던 오래된 상처들이 진실의 문 앞에 통곡으로 녹아내렸다.
살아남기 위해 철저히 혼자여야 했던 시간들.
그 추웠던 시간들이 사실은 평온이 아니라 사랑에 목마름의 시간이었음을 다영은 진실 앞에서 깨닫는다.
그들이 먼저 나를 외면했으니 내가 그들을 외면하는 것은 옳다고 믿었던 시간들이 배신 당했다.
내가 가장 큰 피해자라고, 나만 상처받은 거라고 믿었던 순간들이 부서지고, 사실은 나도 상처를 주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되는 순간이 얼마나 처참했을지.
그동안의 삶이 모두 다 어긋나버리는 그 시간 앞에 초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만 같다.

누군가가 죽은 뒤 찾아온 뒤늦은 이해는 항상 상처로 남는다.
진실이 때로는 더 큰 상처가 되어지기도 한다.
판도라의 상자는 열렸어야 했을까, 열리지 말았어야 했을까?

어쨌든 다영은 상처로부터 성장했고, 또 한걸음 앞으로 나아갔으니 다행이다 싶다.
닫혀있던 문들을 하나둘 열고 세상과 소통하기 시작했고, 누군가에게 기대고 의지하는 것을 더는 두려워하지 않을 테니
그녀는 더 행복해 질 것이다.

 

 


오로지 여주를 위한 글이지 않았나 싶다.
안타깝게도 나에겐 그만큼 남주가 매력이 없기도 했고.
능글맞고 말 잘하는 남주가 늘 재밌었는데 왜 이 책 속 남주는 내내 때려주고 싶었을까?
현실 속에서 이런 남자를 만난다면 진심으로 화가 날것 같다.
자기 페이스대로만 끌고 가려고 하는 남자도, 싫다는데 계속하는 남자도, 말발로 이겨먹으려는 남자도 질색이다. 아주 질색.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주인 다영에게는 이런 남자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단단하게 닫힌 문 앞에서도 끈기 있게 죽어라고 문이 열릴 때까지 두드리고 또 두드릴 남자일 테니까.
진심을 내보이는 순간에는 간절함이 묻어나서 정말 멋져 보이긴 했다.ㅎ
아무것도 아닌 순간에 건네는 심쿵 고백의 일인자 인듯!!

 


글을 다 읽고 나서 안타까운 점은
인물의 이미지가 뒤로 갈수록 너무 코믹스러워지는 느낌이랄까?
여주는 처음엔 분명 '신데렐라 언니'(KBS드라마)에 나오는 문근영의 시니컬하고 차갑고 건조한 이미지였었는데,
남주가 밀어붙이면 붙이는 대로 움직이고 (귀찮다는 이유로 그렇게 쉽게 모든 것을 허락하는 게 이해하기 힘들었다.), 엔딩에 가까워지자 코믹의 정석에 가까운 여주로 변신해버린다.
처음의 이미지를 간직한 채로 상처가 치유된 여주의 모습을 그리기가 어려웠던 걸까?
상처로 날서있는 여주가 안정되어 부드러워지는 모습을 굳이 코믹의 모습으로 그릴 필요는 없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지우기가 어렵다.

남주는 여주 앞에서만 이미지가 변하는 아주아주 완벽한 남자로 등장하는데, 여주가 내내 미친 거 아니냐고 약 먹었냐고 물을만큼 그냥 칠렐레 팔렐레 하는 모습을 너무 많이 보여줘서 납득이 어려웠다.
특히나 여동생으로 생각했던 아영을 돕기 위해 한 행동들이나 이모라 부르는 여주의 엄마를 위해 다영을 찾아오는 모습들은 오지랖을 넘어 오버인듯 싶었다. 물론 애초에 다영에게 감정이 있었기 때문인 걸로 나오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인물들의 감정선을 조금만 더 깊이 있게 표현해 줬다면 어땠을까 싶다.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갔다면 굉장한 수작으로 기억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
남주와 여주의 퐁당퐁당 만담 같은 대화들 대신 내면의 소리가 더 이 글을 빛내게 해줬을 것만 같다.

나에게 많은 생각들을 하게 해줬던 만큼 아쉬움이 남는다.



아직 읽지 않은 사람들이
제목만 보고 섣불리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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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없는 십오 초 문학과지성 시인선 346
심보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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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두고두고 읽고 또 읽을 시를 만났다. 곱씹을수록 더 아름답고 서글프다. 도저히 헤어나올수가 없다. 늪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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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데미안 (양장) - 1919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헤르만 헤세 지음, 이순학 옮김 / 더스토리 / 201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외국소설의 초판 디자인을 다시 볼수 있다는게 굉장히 기대되네요. 비독에서 나온 후로 다시 읽어보려고 하는데 맞춘듯이 출간이 되니 더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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