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 사랑한다는 거짓말 세트 - 전2권
남궁현 지음 / 파란(파란미디어) / 2016년 1월
평점 :
품절


 

 

어리석은 나의 첫사랑.
엇갈린 우리의 20대.
누군가에게 한 번도 일등이 되어보지 못한 당신에게.

작가의 말, 첫 세 문장이다.
이 세 문장만으로도 나는 이 책을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어리석은 첫사랑을 했던 우리들, 엇갈린 20대를 보냈던 우리들, 누군가에게 그 일등이 되어보고 싶어서 죽을 만큼 노력했던 우리들.
우리는 다들 그런 시간들을 걸어서 이곳에 서 있다.
무참히 밟고 선 시간의 두께가 어른의 얼굴을 만들어 줬다.
우리는 다들 한 번쯤 사랑을 잃어본 사람들.
사랑 때문에 아파보고, 사랑 때문에 울어보고, 사랑 때문에 무너져 본 사람들.
건너온 시간들은 굳은살이 배겨 단단해졌지만, 굳은살 깊이 숨어있는 여린 살들에겐 아직도 위로가 필요하다.
'사랑을 노력한다는 게 말이 되니...' 박원의 노래 가사처럼, 노력으로 될 수 없는 그 첫 번째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의 우리들에게 이 책은 다정한 다독임 정도는 되어 주지 않을까.

 

 

 

", 다른 건 다 참겠는데 다시 못 본다고 생각하면 …… 견딜 수가 없어."
" …… 차라리 남자를 사랑하지 그랬냐."
2p.132

 

 

사랑은 반듯한 사람도 휘어지게 만든다.
치근덕대는 남자들이 귀찮아서 유부녀라고 말하고 다니는 자온.
그런 자온에게 자꾸만 끌리는 운.
진실을 말하지 못한 채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감춰야 했던 둘.
같은 집에 살면서, 같은 밥을 먹고, 같은 시간을 공유하면서도
서로에게 다른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 사랑에 넘어지지 않으려고 끝까지 버텨내야 했던 두 사람.

자온이 만약 진짜 유부녀였다면, 운은 결국 가장 질척이고 비난받을 사랑 위로 끝끝내 넘어지고 말았으리라.
반듯하게 걷던 그가 어쩌다 하필 그런 사랑 위로 넘어지고 말았는지, 왜 진창 속을 휘적휘적 걸어가야만 했는지, 사랑은 왜 그토록 고약하고 지독한지... 한탄하고 서글퍼하며 그들을 비난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들은 끝까지 꿋꿋하게 스스로를, 그리고 서로를 지켰다.
이 사랑에 넘어지지 않으려고, 상대방 곁에 선 누군가에게 상처 주지 않으려고 기어코 버텨냈다.
하지만 이미 마음은 걷잡을 수 없게 섞여들어 버렸는데, 단지 그 선을 넘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이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 테니 그 비난의 눈초리에서 온전히 벗어나기 또한 어려웠을 것이다.
다행히 자온이 혼자라서, 다행히 운의 사랑은 누군가의 손가락질과 함께 시작되지 않을 수 있었다.
감사하게도.

올바른 사람도 늘 올바를 수 없고
착한 사람도 끝없이 착하기만 할 수는 없다.
더욱이 사랑 앞에 우리는 대부분 방향을 잃고 헤매인다.
지독히도 나쁜 사람이 되기도 하고, 이기적이고 옹졸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사랑 앞에 강하기가 참 어렵다.
이 책 속에 등장하는 많은 사랑의 모습들.
우리 속에도 자온과 운과 건영과 태준, 자온의 언니 그리고 자온과 운의 부모님들의 사랑의 모습들이 다들 조금씩 숨어있는 건 아닐까.
어떤 시기에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그 사랑의 발화 모습이 조금씩 다를 뿐.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의 사랑을 함부로 비난할 수가 없나 보다.
세상에 나쁜 사랑은... 있을까? 없을까?

 

 

"워워. 특정 여자 생기면 나도 음란하게 살 거야. 물론 상대방 동의하에, 그 사람하고만."
1권 p.116

달려가 꼭 안고 싶지만 이자온을 생각해 참는다.
집에 가기만 해.
두부처럼 으깨 버릴 테니까.
2권 p.251

 

 

 

반듯한 남자를 매력적이게 하는 것은 '반듯함'이 아니라 그 속에 숨어있는 '비뚤어짐'이 아닐까.
차가운 남자의 열정이랄지, 도도한 남자의 귀여움이랄지, 무뚝뚝한 남자의 다정함 같은 것들.
그러니까 겉모습과 다른 그 안에 숨겨진 반전 매력이 그 사람의 반듯함을, 차가움을, 도도함을, 무뚝뚝함을 더 빛나게 해주는 게 아닐까 싶다.
단정한 운 속에 꿈틀대는 욕망 같은 것들이 그를 한층 더 아름답게 해준다.
반듯한 남자도 밤엔 좀 비뚤어질 필요가 있지.
그 흐트러진 모습이 오직 한사람 한정이라는 게 그에게 더 빠지게 되는 지점이긴 하지만.

어쨌든 반듯한 남자의 욕망은 읽을 때마다 즐겁다.
온아, 너 좀더 탈선해야겠다.
노력하자.ㅋ

 

 

 

처음엔 내 애인의 절친이었고, 그다음엔 내 동창의 애인이었고, 마지막엔 내가 사랑하게 된 여자야. 벌써 6년째.
1p.85

 

 

 

지건영이라는 캐릭터가 생각보다 보편적인 남자의 캐릭터일 수도 있다는 점이 슬프다.
여자를 유희의 대상으로 밖에 보지 않는 남자.
연애만 할 여자, 결혼할 여자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 걸까.
아름답고 매력 있지만 데리고 자기만 좋은 여자와 단아하고 똑똑하고 음식도 잘하고 부지런한, 데리고 살고 싶은 여자.
여자라는 존재를 소비와 소유의 존재로 나눠서 생각하는 남자의 이중성이 소름 끼치게 싫었다.
몇 번 자보니 지겨워진 여자와 한 번도 못 자 봐서 더 갈증 나는 여자.
유인을 소모품 취급하는 건영이 말하는 '사랑'을 과연 믿을 수 있을까.


과거 속, 네 사람은 모두 어딘가 한 곳이 망가진 사람들처럼 보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들러붙어 기생하며,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데 급급하면서,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했다.
그 넷이 공유했던 시간들은 과연 사랑이었을까.
나는 누구에게도 섞여들지 못했고, 누구에게도 빠져들지 못한 채 내내 관찰자 역할을 해야만 했다.
같이 호흡하지 못한 채, 감정을 배제하고 바라본 그들은 그냥 막장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여겨질 뿐이었다.
그 불편한 질척임을 견디며 함께 했던 시간들이 진짜 사랑이었을까.

 

 

 

 

현재의 이자온과 지건영은
말 그대로 너무 불편한 사이.
입안에 자꾸만 씹히는 사그락거리는 모래알 같은 사이.
뱉어도 뱉어도 입안 어딘가를 맴도는, 신경을 거스르는 눈에 보이지 않는 모래알 같은.
절대 삼킬 수 없는 사이.
미숙함과 치기 어린 시절의 밑바닥을 낱낱이 알고 있는 사이.
미숙함은 상처로, 어린 치기는 부끄러움으로 남겨진 사이.
그들 사이엔 물과 기름처럼 섞이고 싶어도 절대 섞일 수 없는 시간의 기억들이 존재했다.

그들을 보는 내내 얹힌 것처럼 불편했다.
단지 감정의 시간이 어긋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엔 너무도 불편한 시간들을 공유해버린 그들이 여전히 섞이고 싶어 부딪히는 모습이 거북했다.
놓쳐버린 인연이라고, 그저 미련 정도로만 비쳤으면 좋았을 사이들인데... 모르겠다, 나는 미련을 빙자한 다른 감정들을 그들에게서 엿본 기분이었다.

딱 그맘때의 치기 어리고 보이는 것에만 미혹당했던 지건영의 모습이 차라리 나았다.
그 모든 지저분한 시간들을 기어코 다 지켜본 자온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토록 갈망하는 지건영은 싫었다.
지건영을 지저분하게 만든 건 거짓말을 한 유인이 아니라 욕망에 사로잡혔던 스스로였음을 왜 인정하지 않는 걸까.
사랑이라는 것은 늘 그토록 잔인해서, 기어코 친구의 연인이었던 건영을 사랑하게 된 자온은 안쓰럽게 여겨져야 했건만, 나는 왜 불편했을까.
사랑을 버리려고 내내 어긋난 선택만을 했던 자온.
그래서 내내 불행했던 자온.
그런데 그랬던 둘을 이기적으로 느꼈던 건 나뿐일까.

유인은 거짓말을 했고, 멍청했으며, 교활한 여자로 등장했지만, 굳이 따지고 들자면 그런 유인을 가운데 두고, 고고한 사랑을 했던 둘은... 유인과 얼마나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그 사이에 끼어 어부지리로 자온을 차지했던 태윤 또한 나쁘다 말할 수 있을까.
도대체 저들 중에 나쁜 사람은 누굴까.


책 속 인물 중 어느 누구 하나 매끄럽게 꿀꺽, 삼켜지지가 않았다.
어쩌면 우리들의 삶이, 우리들의 인생이 모래알을 삼키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거슬리고 삼켜지지 않는 모래알을 모른 척 꿀꺽, 삼켜넘기는 일.
그것이 우리들의 삶인 건지도.
완전하지 않은, 그래서 누구나 가지는 불안과 어둠과 미숙함과 위선들.
하필 인물들은 모두들 그 단면 하나쯤은 짊어지고 있었다.
편하고 쉬운 인물이 하나도 없었다.

마음속에서도 까슬한 모래알이 구른다.
불편했다.
그들을 지켜보는 내 마음이.
지난 시간의 그들도, 현재의 그들도, 이제 사랑을 시작한 둘마저, 어딘가 불편하게 들러붙은 모래알을 찾지 못한 채 심장을 뒤척이게 만들었다.
기름칠을 한 듯 매끄럽고 완벽한 인물들에 익숙했던 내게, 지나치게 현실적인 그들의 모습은 되려 낯설었던가 보다.
사실은 그게 인간적인 모습인 건데.
로설을 너무 읽었나.
어느 사이에 매끄럽게 포장된 인물들에 익숙해져 버렸나 보다.
껄끄러운 현실에 건배를.

 

 

 

 

 

물론 후반부로 갈수록 그 껄끄러움은 운과 자온의 소소한 하루들에 묻혀 잊혀져 갔다.
둘 사이에도 어쩔 수 없이 해결되지 않은 거짓말이 존재했지만, 그래서 그들의 마음이 더 애틋해지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하루가 예뻤다.
지난 시간들로부터 걸어 나오기 시작한 자온의 지금이, 올곧게 누군가를 사랑할 줄 아는 운의 아낌이 너무도 어여뻤다.
기꺼운 그들의 다정함이 글 초반에 까칠해졌던 내 마음을 뭉툭하게 깎아내렸다.
옥탑방의 하늘이, 텃밭의 채소들이, 옆집에 사는 지석이 반짝반짝 빛났다.
집 앞 골목에서도 애정이 묻어나는 작가님의 문장이 너무 좋았다.

 

 

아버지의 어깨는 가족과 함께 웃고 떠들 때도 무겁다.
2권 p.11

흔히들 사람을 꽃보다 아름답다고 하는데 전 그 말에 늘 동의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타인의 고통을 보면서 위안을 얻는 존재니까요. 아닐 것 같나요? 그래도 내가 저 사람보단 덜 불행하구나, 덜 아프구나, 그런 것에 위안을 받고 살아 갈 힘을 얻기도 하죠.
2권 p.73

 

 

위트 있는 문장도 잘 쓰시지만, 역시 묵직한 문장 또한 잘 쓰시는 것 같다.
굳이 어렵게 꾸며쓴 문장이 아닌데도 가슴에 톡톡, 꽃망울이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문장들이 여럿이다.
아주 사소한 일상의 모습들을 담담히 그려낸 문장들,
계절을 표현하고, 하루를 여는 시간들을 담아낸 흔한 문장 한 줄도 마음을 잡아채곤 했다.
오랜만에 가득 찬 석류알처럼 속이 꽉 들어찬 보석 같은 글을 만났다.

다들 내 취향일 거라고 그렇게 권했던 이유가 이것이었구나 싶어서, 나의 그대들에게 감사를.
그대들 덕분에 이 작가 책은 이미 집에 다 있으니, 이젠 나머지 책들도 배부르게 읽기만 하면 될 테다.

좋은 글은 마음을 배부르게 한다.
마음에 토실토실 살이 오른다.
가을도 아닌데.

 


 

 

이도우 작가님의 사서함....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이 책 또한 취향 저격일거라고 강추해 본다.
읽으면서 사서함 같은 분위기를 많이 느꼈으니까.
이를테면, 그 현실적인 껄끄러움 같은 것들.ㅋ
사서함에선 남주에게, 이 책에선 여주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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