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의 약혼자
송명순 지음 / 청어람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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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의 약혼자.

 

이 무슨 쌍팔년도 제목인가 싶긴 하지만, 이 여섯 글자만큼 이 책의 정체성을 뚜렷이 드러내는 제목도 없지 싶다.
죽은 쌍둥이 언니의 약혼자, 한상우.
그리고 오랫동안 남처럼 살았던 쌍둥이 동생, 하다영.
쌍둥이 언니 아영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재회하게 되는 둘.
언뜻 보면 그저 지지부진한 신파의 느낌이 강하게 드는 이야기 같지만, 놀랍게도 책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가족'이었다.
가장 가깝지만, 가장 상처가 되어지기도 하는 가족.
아영의 죽음으로 인해 드러나게 되는 과거의 상처들과 여전히 그 상처들을 껴안고 살아가는 남은 사람들.
소통의 부재가 얼마나 큰 오해를 불러오고 상처로 내려앉게 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글이었다.


처음 몇 장을 읽고는 솔직히 폭탄인가 싶었다.
과잉 감정의 난투극을 보고 있자니 공감은커녕 피곤만 쌓이고, 덕분에 인물들은 하나같이 이상한 사람들로 여겨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인물들의 비명을 듣고 있는 순간이 나는 항상 어렵다. 조금 더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해주면 좋을 것만 같은 상황에서도 이미 임계점에 이른 터질듯한 감정들의 호소는 공감이 아닌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감정전이가 빠른 나 같은 사람에겐 더더욱.)
책이든 사람이든, 이해하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할 때 우리는 피곤해지고 피하고 싶어진다.
결국 책장을 덮고 말았다.
며칠이 지나 다시 읽기 시작한 책은 여전히 내게 피곤을 먼저 선물해줬고, 결국 극악 처방을 내렸다.
뒤에서부터 읽기 시작하는 것.
(이 책이 추리소설이 아닌 것을 격렬하게 감사하게 생각했던 순간이었다.)
대강의 스토리를 파악한 후,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읽기 시작한 책은 나에게 훨씬 많은 이해와 공감을 선물해 주었다.
간혹, 인물들을 너무 이해할 수 없을 때 이런 식의 책 읽기를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가 되어지지 않은 경우도 허다한데, 다행스럽게도 이 책은 숨겨진 이야기를 읽고 나자 인물들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해가 되어지는 순간 이방인같이 여겨지던 내가 좀 더 친밀하게 그들의 곁으로 다가설 수 있었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부모로서의 나와, 자식으로서의 나와, 아내로서의 나에 대해 생각했다.
특히나 아이들의 지금 모습이 내가 원하는 대로 이끌어 만들어낸 모습은 아닌지,
좋은 거라고 권했던 모든 것들이 오로지 부모 욕심의 부산물들인 건 아닌지,
아이들의 상처를 들여다보지 못한 채 살고 있는 건 아닌지,
내 아이들은 과연 지금 행복한지.


대화의 단절과 소통의 부재가 한 가족을 조각내고, 등돌려 타인으로 만드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된다.
결국 그 부모는 둘 다 자기 방식대로의 사랑을 했을 뿐인데, 남은 건 자식들의 상처뿐이었다.
엄마도 아빠도 딸들을 사랑하지 않았던 게 아니다.
스스로의 방식으로 내내 열심히 사랑했지만, 아무것도 전해지지 않았다는 게 문제다.
진짜 상대방이 원하는 것, 그것을 알아야 우리는 올바른 사랑을 할 수 있는 건가 보다.
내 방식이 아닌 상대가 원하는 모습으로 사랑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모른 채 내내 나의 방식으로만 상대를 대하고, 사랑하고, 이해하려는 이기적인 모순이 우리의 소통을 막아선다.


옳다고 믿었던 모든 것들이 그른 것이 되고, 그르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때론 진실이 아닌 것임을 알게 되는 순간
다영의 벽이 허물어졌다.
내내 돌처럼 단단히 굳어 가슴속을 데굴데굴 구르며 멍을 들이던 오래된 상처들이 진실의 문 앞에 통곡으로 녹아내렸다.
살아남기 위해 철저히 혼자여야 했던 시간들.
그 추웠던 시간들이 사실은 평온이 아니라 사랑에 목마름의 시간이었음을 다영은 진실 앞에서 깨닫는다.
그들이 먼저 나를 외면했으니 내가 그들을 외면하는 것은 옳다고 믿었던 시간들이 배신 당했다.
내가 가장 큰 피해자라고, 나만 상처받은 거라고 믿었던 순간들이 부서지고, 사실은 나도 상처를 주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되는 순간이 얼마나 처참했을지.
그동안의 삶이 모두 다 어긋나버리는 그 시간 앞에 초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만 같다.

누군가가 죽은 뒤 찾아온 뒤늦은 이해는 항상 상처로 남는다.
진실이 때로는 더 큰 상처가 되어지기도 한다.
판도라의 상자는 열렸어야 했을까, 열리지 말았어야 했을까?

어쨌든 다영은 상처로부터 성장했고, 또 한걸음 앞으로 나아갔으니 다행이다 싶다.
닫혀있던 문들을 하나둘 열고 세상과 소통하기 시작했고, 누군가에게 기대고 의지하는 것을 더는 두려워하지 않을 테니
그녀는 더 행복해 질 것이다.

 

 


오로지 여주를 위한 글이지 않았나 싶다.
안타깝게도 나에겐 그만큼 남주가 매력이 없기도 했고.
능글맞고 말 잘하는 남주가 늘 재밌었는데 왜 이 책 속 남주는 내내 때려주고 싶었을까?
현실 속에서 이런 남자를 만난다면 진심으로 화가 날것 같다.
자기 페이스대로만 끌고 가려고 하는 남자도, 싫다는데 계속하는 남자도, 말발로 이겨먹으려는 남자도 질색이다. 아주 질색.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주인 다영에게는 이런 남자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단단하게 닫힌 문 앞에서도 끈기 있게 죽어라고 문이 열릴 때까지 두드리고 또 두드릴 남자일 테니까.
진심을 내보이는 순간에는 간절함이 묻어나서 정말 멋져 보이긴 했다.ㅎ
아무것도 아닌 순간에 건네는 심쿵 고백의 일인자 인듯!!

 


글을 다 읽고 나서 안타까운 점은
인물의 이미지가 뒤로 갈수록 너무 코믹스러워지는 느낌이랄까?
여주는 처음엔 분명 '신데렐라 언니'(KBS드라마)에 나오는 문근영의 시니컬하고 차갑고 건조한 이미지였었는데,
남주가 밀어붙이면 붙이는 대로 움직이고 (귀찮다는 이유로 그렇게 쉽게 모든 것을 허락하는 게 이해하기 힘들었다.), 엔딩에 가까워지자 코믹의 정석에 가까운 여주로 변신해버린다.
처음의 이미지를 간직한 채로 상처가 치유된 여주의 모습을 그리기가 어려웠던 걸까?
상처로 날서있는 여주가 안정되어 부드러워지는 모습을 굳이 코믹의 모습으로 그릴 필요는 없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지우기가 어렵다.

남주는 여주 앞에서만 이미지가 변하는 아주아주 완벽한 남자로 등장하는데, 여주가 내내 미친 거 아니냐고 약 먹었냐고 물을만큼 그냥 칠렐레 팔렐레 하는 모습을 너무 많이 보여줘서 납득이 어려웠다.
특히나 여동생으로 생각했던 아영을 돕기 위해 한 행동들이나 이모라 부르는 여주의 엄마를 위해 다영을 찾아오는 모습들은 오지랖을 넘어 오버인듯 싶었다. 물론 애초에 다영에게 감정이 있었기 때문인 걸로 나오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인물들의 감정선을 조금만 더 깊이 있게 표현해 줬다면 어땠을까 싶다.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갔다면 굉장한 수작으로 기억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
남주와 여주의 퐁당퐁당 만담 같은 대화들 대신 내면의 소리가 더 이 글을 빛내게 해줬을 것만 같다.

나에게 많은 생각들을 하게 해줬던 만큼 아쉬움이 남는다.



아직 읽지 않은 사람들이
제목만 보고 섣불리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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