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 이곳과 저곳, 이때와 저때, 인간과 인외...... 현실과 꿈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어지는 ‘인연‘. 향기롭고 자욱한 물안개 속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운 청년들의 연애기담집.

나가노 마유미의 2004년작이다. 제목이 희한하다. ‘よろず春夏冬中’라고 쓰고 ‘요로즈 아키나이츄‘라고 읽는다. ‘요로즈‘는 만물, 만사를 의미한다. ‘春夏冬‘는 춘하추동에서 가을(아키)이 없으니 ‘아키나이‘다. ‘중‘을 뜻으로 해석하면 ‘만물 끊임없는 가운데‘ 정도가 되겠지만, ‘츄‘라고 음차로 읽으면 ‘Chu,‘ 키스 소리가 된다. 그러니까 다시 풀어서 읽자면 ‘만사 끊임없는 키스‘ 정도가 된다. 고풍스런 한자어의 사용과 뭔가 오그라드는 의미가 묘하게 맞물린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그대로 이 책의 감상과 이어진다.


나가노 마유미는 일본 환상문학의 대표적인 작가 중 하나다. 이즈미 교카상, 미시마 유키오상, 노마 문예상 등을 수상했다.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여름 모자> 등의 작품이 게재되기도 했으니 일본 안에서는 상당한 지명도와 인정을 받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국내에는 데뷔작 <소년 앨리스>(1988)가 소개되었을 뿐이다.

‘상당한 지명도와 인정‘이라고 썼지만, 이 작가에 대해 알아보면 독보적인 존재이긴 하되 뭐랄까, ‘규격 외‘취급받는 것 같기도 하다. 본인에게도 자신이 문단과 맞지 않는다는 자각이 있다는 내용이 위키피디아에 실려 있고, <아메후라시> 의 권말 해설에서 치노 보시는 ˝1인 1장르의 작가˝라고 칭하여 그 특이성을 언급하는 정도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한마디로 하면 폐쇄적인 자기 세계를 주 무대로 하는 작가이기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바꿔 말하면 표준적인 소설문법이나 문예적 규칙에서 벗어나 있다. 나가노 마유미의 세계는 특히 현실원칙의 압력이 희박한 인공적이고도 향기로운 소우주다. 이야기들은 미야자와 겐지와 이나가키 타루호, <바람과 나무의 시>의 타케미야 케이코나 <포의 일족>의 하기오 모토 같은 취향으로 잘 다듬어져 있고, 이 취향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매우 닫혀 있다. 그 취향을 요약하자면 ‘환상, 미소년, 소년애‘정도일까.

현실원칙이 헐거운 탓에, 작중 사건의 전개가 갑작스러워 보이는 부분이 많다. 다 읽어도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감상이 남기도 한다. 상비약 방문 판매원(이라는 직업이 몇십 년 전 일본에서 있었다고 한다)이 놓고 간 멀미약을 마시고 여행 도중 잠드는데, 눈 떠 보니 판매원과 몸이 바뀌어 있다. 또는 분명히 죽었을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등장하여 서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눈다. 그러나 이것은 이야기가 엉터리라는 의미가 아니다.

정확하게 읽었는지 자신은 없지만, <요로즈 아키나이츄> 그리고 후속작인 <아메후라시>의 이야기를 작동시키는 원리는 ‘꿈‘과 ‘교환‘ 두 가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꿈의 원리는 ‘꿈에서라면 이럴 수 있어‘라는 규칙이고 ‘교환‘의 원리는 교환 행위를 통해 대립되는 두 세계의 경계를 허무는 규칙인 듯하다. 주인공들은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은 무엇가와의 교환 혹은 매매를 통해서 저쪽 세계로 불쑥 끌려들어간다. 그리고 자신도 몰랐던 소원의 성취 혹은 자각을 통해 다시 이쪽 세계로 복귀한다.

14개의 단편소설들은 모두 사랑 이야기다. 그것도 아름다운 청년(소년)끼리의 사랑이다. BL스럽다고 해야 하나, 그냥 <순문학 BL>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비엘물 중에서도 특히 얌전하고 문학적인 종류를 좋아한다면 이 이야기도 그렇게까지 희한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읽으면서 야마시타 토모코나 이마 이치코가 떠올랐다. 특히 중간에 잠깐 이마 이치코의 <환월루기담>을 봤을 정도다. 환상기담에 어딘가 뜬금없는 전개라는 점에서 닮았을지도. 그리고 나카무라 아스미코의 분위기도 어울리는 것 같다.

이 이야기에는 여러 가지로 ‘경계‘를 넘는 전개가 많은데, 지난번에 메모를 남길 때 그런 것치고는 ‘성별의 경계‘와 ‘공수관계의 경계‘를 넘지는 않는 것 같다고 적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성별의 경계를 넘는 전개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건이 두 개는 있고 - 꿈속에서 ‘참외‘를 임신하는 청년과 벌칙 게임으로 지하철 안에서 화장을 했다가 ‘여자 같다‘며 폭행당하는 소년-, 공수관계의 경계를 넘지 않는 이유는 사실 당연한 것 같기도 하다. 한쪽이 공, 한쪽이 수로 고정된 관계야말로 나가노 마유미의 ‘꿈의 세계‘를 지탱하는 철칙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욕망이 요구하는 제약으로, 어기면 세상이 무너지는 금기에 해당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공수의 제약이 이야기의 핵심이자 주인공들이 품은 소원인 ‘사랑‘의 기본 요소다. 현실에서 ‘남자와 여자‘가 사랑의 기본 단위인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치면 이 이야기는 비엘로서도 상당히 클래식하다.

문고판으로 194페이지밖에 안 되는 얇은 책인데 14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각각의 이야기는 무척 농밀하고 완성도가 높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받아들여지기 힘든 소수의 취향에게만 열리는, ‘닫힌 책‘이라는 점이 아쉽다. 지난번 읽은 <아메후라시>보다 이쪽이 더 좋았다. 다 읽었다는 데 약간 허탈함을 느낀다. 이제 번역판 <소년 앨리스>를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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엌ㅋㅋㅋㅋㅋㅋ 이게 언제적 사이토 미나콘데 지금 나왘ㅋㅋㅋㅋㅋ
한번 읽어 보고 싶은 책이긴 했으니 고맙긴 하닼ㅋㅋㅋㅋ
지금 보니까 초간 2002년ㅋㅋㅋㅋㅋ
번역판 책 표지 예쁘게 잘 뽑힌 것 같다. 서점 가면 확인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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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란한 성숙 - 미성숙한 사회에서 성숙한 어른 되기
우치다 타츠루 지음, 김경원 옮김 / 바다출판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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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dible에 곤란한 성숙 있다. 일곱 시간짜리!
일단 책을 먼저 읽고 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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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번째 밀실 작가 아리스 시리즈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최고은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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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번째 밀실> 아리스가와 아리스


[밀실 트릭의 거장, 밀실에서 살해당하다!

눈 덮인 고원 별장 성화장.
밀실 추리소설계의 거장, 마카베 세이치는 매년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자신의 별장으로 사람들을 초대한다.
올해 역시 크리스마스 파티를 위해 삼삼오오 모여든 사람들.
그는 그렇게 모인 사람들 앞에서 ˝계속 같은 이야기만 쓰는 데 질렸다˝며 46번째 밀실 작품을 마지막으로 밀실을 졸업하겠다고 선언, 자리를 뜬다.
그리고 크리스마스인 다음 날 아침. 밀실 트릭의 대가는 밀실 상태인 지하 서고 벽난로에서 상반신을 들이박고 죽은 처참한 모습으로 발견되는데.......
그는 자신의 마지막 밀실 작품으로 쓴 46번째 밀실 트릭에 의해 살해당한 것인가?

추리소설가 아리스가와 아리스와 임상범죄학자 히무라 히데오가 괴사건의 수수께끼에 도전한다!
히무라&아리스 콤비의 신본격 추리소설!]

내용 요약하고 그러기 귀찮으니 책 뒤표지의 소개문으로 대체.

1992년 일본의 고단샤에서 ‘노벨즈‘ 라인으로 출간. 이후 판을 거듭하여 발간되었고, 우리나라에는 2008년 북홀릭을 통해 소개되었다.

최근 일본 드라마 <임상범죄학자 히무라 히데오의 추리>를 재미있게 보았다. 그 계기로 히무라 히데오라는 캐릭터가 처음 등장하는 이 책을 읽었다. 이것도 사둔 지는 엄청나게 오래되었는데 지금에서야 소화하게 되었다(초판이 막 발간되었을 때 샀다. 어? 거의 9년 묵혀뒀잖아...?).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읽은 감상이 약간 심심했다. 트릭이 어떻고 품평을 할 주제는 되지 않는다. 다만 서프라이즈감이 조금 약했다는 정도.

다만 몇 가지 흥미로운 구석이 있어서 적어둔다.

1) 이야기의 맥거핀으로 사용된 ‘천상의 추리소설‘론이 무척 매력적이다. 이건 분명 나카이 히데오의 영향이다.

작중 58~61페이지. 밀실 추리소설의 거장이지만, 이제 그런 것은 쓰지 않겠다고 선언한 마카베 세이치와 좌중의 대화다.

[˝날카로운 사회성, 동시대성, 다듬어진 문장, 주제의 문학성, 그런 것을 추구하시려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만일 그런 거라면 선생님에게 버림받은 독자들은 무척 실망하게 되겠군요. 물론 저를 포함해서요.˝

˝그것도 아닐세. 그런 시대착오적인 문학 콤플렉스 같은 건 전혀 없어. 나는 본격 추리소설의 존재를 부정하는 게 아닐세.

추리소설의 시조인 포가 일찍 세상을 뜨지 않았다면 어떤 추리소설을 썼을지 생각해 본 적 있나? 우리는 <모르그 거리의 살인>이나 <마리 로제의 비밀>, <도둑맞은 편지>같은 단편으로부터 트릭이라는 것을 추출하여 그것을 계승, 발전시켜 즐겨 왔지만, 그것은 필연적인 흐름이었을까? 내게는 그런 의문이 있었네. 충분히 존재했을 법한 다른 풍요로운 길로부터 이탈해 버린 것은 아닐까?

그 풍요로움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은 어렵네. 하지만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그것은 게임성이나 퍼즐성과 문학성의 행복한 결혼 같은, 기분 나쁠 정도로 온건한 것이 아니라는 거네. 더구나 범죄의 소용돌이 속으로 던져진 등신대의 인산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를 추출하는 이야기, 그런 보편적인 것에 왜 ‘추리소설‘이라는 특별한 호칭이 필요한가ー라는 것도 아닐세.

무엇이든 매사를 범주화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네만, 추리소설은 그외의 소설과 구별할 수밖에 없는 성질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하네. 보통 포의 <모르그 거리의 살인>이 추리소설의 효시로 일컬어지는 것이 정설이지만, 생각해 보면 이것은 무척 기묘한 일 아닌가? 왜 최초의 한 작품을 특정 짓는 정설 같은 것이 존재하는 거지? 그것은 추리소설이 문학 세계의 특이점이라는 증거가 아닐까? 과학자들이 빛조차 똑바로 나아가기를 거부하는 ‘일그러진 공간‘을 우주에서 발견한 것처럼, 아마도 ‘추리소설‘ 역시 그렇게 발견된 특이점인 것일세.˝

˝그 특이점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요?˝

갑작스럽게 질문한 사람은 히무라였다.

˝수수께끼와 분석, 혹은 신비와 현실, 즉 감성과 이성이 영구운동을 이룬다. 서로 상대에게 압력을 가하며 괴롭지만 아름다운 운동을 계속하는 겁니다. 기하학의 판타지, 어두운 꿈이 이 세상 밖을 향해 실낱같은 빛을 발하는 겁니다.˝

˝무척 추상적이군요. 그 정도까지 추상적이라는 건, 그런 추리소설은 지금까지 한 편도 쓰인 적이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아마도 저는 추리소설이란 일찍이 쓰였던 적 없는 이야기다, 라고 극단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일 겁니다. 동서고금의 명작이라는 작품명의 목록을 볼 때, 저는 언제부터인가 고개를 젓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늘어선 것들은 저를 포함한 수많은 인간을 푹 빠지게 한 반짝반짝 빛나는 별과 같은 작품임에는 틀림없습니다만, 저는 편안하게 얼굴 한가득 미소를 지으려 하다 도중에 멈춰 버립니다. 추리소설은 어딘가 다른 곳, 저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죠.˝

˝그럼 그 리스트에 올라 있는 것은 뭘까요? 추리소설 이전의 존재입니까?˝

˝불손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지상의 추리소설‘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것은 그 나름대로 기쁨으로 가득 찬 낙원입니다. 하지만......˝

˝아직 보지 못한 ‘천상의 추리소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점점 구체적이지 못한 대답이 되어 가는군요.˝

마카베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말에 동의하듯 히무라는 어깨를 으쓱했다.]

뭔지 사실 잘 모르겠는데 어쨌거나 매력적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하필이면 ‘추리소설‘에 이 정도까지 순수한 이상을 추구하고, 지금 여기가 아닌 좀더 아름답고 좀더 높은 세계를 꿈꾼다. 그 자체가 태도로서 아름답기 때문이다.

추리소설의 삼위일체는 ‘사건, 추리, 해결‘이 아니라 ‘밀실, 탐정, 왓슨‘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밀실은 뭐랄까 미스터리 그 자체의 상징 같은 거. 밀실 밖의 상식이나 규칙이나 법칙 같은 게 전혀 통할 것 같지 않은 작고 폐쇄되고 완벽해 보이는 별세계가 밀실이고, 탐정은 거기에 매료되면서도 결국에는 부수는 역할. 왓슨은 밀실과 탐정 사이에 일어난 일을 세상(독자)에 전달하는 매개자. 뭐 이런 거 아닐까 생각한다.

소설 속에서 마카베 세이치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최후의 밀실 트릭을 만들어 내고, 그 이후로 ‘밀실‘을 졸업하여 ‘천상의 추리소설‘로 진화하려 했다. 이 천상의 추리소설이란 아마도 밀실, 탐정, 왓슨의 삼위일체와는 다른 구조를 사용하면서도 뭐랄까, 누가 봐도 ˝본질적으로 추리소설이다!˝라고 인정할 만한 거겠지? 소설의 맥거핀에 불과한 논의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무엇일지 상당히 신경쓰인다.

2) 이야기 속에서 캐릭터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방식

이 책을 읽은 계기가 드라마 <히무라 히데오의 추리>였다. 히무라 히데오가 처음으로 등장하니 여기서 이 인물은 이런 애입니다, 라고 충분히 소개되지 않을까 했다.

예감이 맞았는지 초반부에 그런 장면이 있다. 87페이지 정도부터. 히무라가 좌중에게 범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경위라든지 이런저런 질문을 받고, 그에 대한 대답에서 이 캐릭터가 어떤 놈인지 드러난다.

히무라 멋있어! 좀 더 활약을 보고 싶어!

이렇게 히무라 하악하악하고 있는데, 문득 이야기 속에서 캐릭터를 보여주는 방식은 여러 가지 있겠지만, 그 캐릭터의 자기주장이라는 면에서 파악하면 대략 다음과 같은 수법이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1. 매니페스토: 그야말로 선언이다. 나는 이렇다! 꽝꽝! 하고 플레인하게 주장하는 거.

2. 교리문답: 임의로 붙인 명칭이다. 답이 이미 정해져 있는 문답의 형식. 이 책에서 마카베 세이치의 천상의 추리소설론이나 히무라 히데오가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방식이 여기에 해당한다. 다른 인물들의 질문에 대응하여 나는 이렇다, 그건 아니다, 그건 저렇다라고 이야기한다.

3. 디베이트: 말 그대로 디베이트다. 교리문답과 다른 점은 싸운다는 점이다. 교리문답은 질문을 받는 인물의 가치관을 드러내기 위해 질문과 응답의 형식을 사용하는 거지만, 이건 논쟁을 통해 복수의 인물이 복수의 가치관을 드러낸다. <페이트 제로>의 성배문답 장면도 사실 디베이트에 가깝지 않을까. 교리문답과는 달리 결론이 나지 않는 경우도 많다.

4. 스피치: 어떤 사안에 대한 성토, 규탄, 고발, 호소를 포함한 자기주장이다. 위엣것들과 달리 자의식이 덜어져서 좀 더 공적인 느낌.

5. 고백: 일반적으로 주변에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사실 혹은 특정 인물간의 관계에서 큰 변동을 일으킬 수 있는 감정에 관한 진술(밝히는 데 심적, 물질적으로 리스크가 따르는 주관적 진실에 대한 진술). 어떤 의미에서는 베팅의 일종이다.

6. 베팅: 이것은 비언어적으로 나올 수도 있다. 캐릭터의 1~5를 다 무너뜨리거나 배반할 수도 있다. 캐릭터 자신이 생각하는 그의 가치관, 신념, 사상, 태도와 전혀 다른 진실이 드러날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초반부에 1~5를 쓰고 이야기의 위기에서 베팅하고 클라이막스에서 결과가 나오는 구조를 좋아한다. 이거 우로부치 겐도 가끔 쓰는 거 같은데...?

어...? 쓰고 보니 점점 내가 무슨 소릴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여하튼간에 히무라와 아리스 콤비의 활약이 보고 싶다면 이 책 추천합니다. 드라마에 안 나온 트릭이라 더 좋아요. 큰 기대는 하지 마시되 논리적으로 음미하면 제대로 즐길 수 있을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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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 기담 강화기간, 나카무라 후미의 <요미시(夜見師)>를 읽었다.

나카무라 후미의 작품은 <염마 이야기(裏閻魔)>가 번역되어 있다. 귀신을 봉인한 문신을 받고 뜻하지 않게 영원한 삶을 살게 된 청년 ‘염마‘와 스스로 원해서 사람의 피를 마시는 악귀가 된 오니즈키의 이야기가 백 년 시간을 걸쳐 펼쳐진다. 변하지 않는 삶에 대한 갈망과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낼 수밖에 없는 불사자의 고독. 절제된 템포로 전개되면서 묘한 윤기와 요염함이 배어 나오는 데에 ‘정말 잘 만든 이야기구나‘하고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요미시>는 카도카와 호러 문고에서 나왔다. 정확하진 않지만, 일본에서는 2000년대 중반부터 호러 소설 표지에서 독살스럽고 강렬한 이미지보다는 뭐랄까 가볍고 감성적인 이미지, 특히 순정만화적인 일러스트의 기용이 눈에 띄게 늘기 시작했다. 카도카와 호러 문고는 그러한 흐름의 선두에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면서 책의 내용도 ‘광의의 공포소설‘ - 판타지, 기담, 일부 호러 아이콘을 사용한 일반소설 - 등이 속속 나왔다. <요미시>도 그러한 맥락에서 ‘무섭지 않은 호러‘에 속하는 작품이다.

표지에 등장하는 검은 옷의 미남이 ‘요미시‘ 타타라 카츠히코. 타타라 가문은 대대로 원귀를 ‘상자‘에 봉인하여 신으로 모시는 ‘후지테(封じ手、봉인자)‘, 봉인된 상자를 열고 악신을 베어 정화하는 ‘요미시‘를 배출하는 가계다. 카츠히코는 요미시로서 사명을 수행하지만, 그에게는 요미시의 일뿐 아니라 일상생활을 수행해줄 조력자가 필요했다. 한쪽 다리를 잃어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카츠히코의 파트너 겸 만능 가정부로 채용된 청년 고묘 아키라의 시점에서 시작한다. 아키라 또한 심상치 않은 가계 출신이다. 그의 증조부부터 시작된 저주 때문에 고묘 가문의 남자들은 25세를 넘기지 못하고 급사할 운명이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아키라는 자신이 죽으면 혼자 남게 될 여동생 사키를 위해 필사적으로 돈을 번다. 그런 그에게 급료가 높은 ‘유령저택‘ 타타라 가문의 일은 굴러 들어온 행운이었다.

카츠히코는 얼음처럼 쌀쌀맞은 성격. 만담 라디오 방송조차 미간을 찌푸리며 듣는 그에게 아키라는 조심스럽게나마 다가가려 하지만, 돌아오는 건 독설이다. 그와 대조적으로 아키라는 언제 급사할지 모른다는 불안을 안고 있으면서도 어디까지나 밝고 건강하며 인정이 깊다. 상자 속에 봉인된 재앙신들에게도 인정을 베풀려 하는 아키라에게 카츠히코도 조금씩 마음을 연다.

그러던 중, 타타라 저택의 사당에 안치된 수백 개의 상자들 중 하나에 고묘 가문에 저주를 내린 원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심증을 얻는다. 그러나 일은 원만하게 풀리지 않고, 초조해진 아키라는 치명적인 금기를 범하고 만다.

특히 아키라 시점의 문장이 가벼워서 첫인상은 ˝라이트노벨이네˝였다. 정말 읽기 쉬운 문장이다. 이전에 읽은 나가노 마유미의 <아메후라시>가 안개로 가득한 이경을 헤매는 감촉이었다면 이쪽은 잘 정비된 약간 으스스한 정원을 산책하는 데 비할까?

그러나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타타라 카츠히코의 사연과 속마음이 밝혀지면서 라이트노벨 같은 감촉은 희미해져 갔다. 재앙신들이 그렇게 된 사연도 비극적이고 애처롭지만, 담담하게 드러나는 카츠히코의 처지는 장절 그 자체다. 초반부의 카츠히코는 뭐랄까 틀에 박힌, 휠체어를 탄 냉미남+약간 독설계+사연있음이라는 느낌으로 간단히 ‘정리‘되는 캐릭터로 느껴졌다. 중반부 이후에서 비로소 섹시해진다.

비참한 처지, 원하지 않았던 숙명과 책임, 고독 속에서 깨닫는 인간의 온기에 대한 그리움. <염마 이야기>에서 그려졌던 테마가 <요미시>에서 변주된다. 이야기로서의 밀도가 아주 높다고 할 수는 없다. 큰 기대를 하고 접하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을 품은 인간의 사연을 절제되고 가벼운 문장으로 능숙하게 펼쳐 보이는 솜씨가 아름답다. 만족스러운 독서였다.

덧붙여서 카츠히코와 아키라의 관계에 약간 호게모잇한 요소가 있다는 점도 나에게는 플러스 포인트다. 후반부에 그야말로 절제된 언어를 이용한 요염한 장면들이 있다. 단순히 BL스러울 뿐 아니라, 그 장면으로 인해 타타라 카츠히코라는 캐릭터의 깊이가 아무렇지 않게 연출된다.

책이 올해 1월 25일에 나왔으므로 아직은 따끈따끈한 신간이다. 속편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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