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담 기담 강화기간, 나카무라 후미의 <요미시(夜見師)>를 읽었다.

나카무라 후미의 작품은 <염마 이야기(裏閻魔)>가 번역되어 있다. 귀신을 봉인한 문신을 받고 뜻하지 않게 영원한 삶을 살게 된 청년 ‘염마‘와 스스로 원해서 사람의 피를 마시는 악귀가 된 오니즈키의 이야기가 백 년 시간을 걸쳐 펼쳐진다. 변하지 않는 삶에 대한 갈망과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낼 수밖에 없는 불사자의 고독. 절제된 템포로 전개되면서 묘한 윤기와 요염함이 배어 나오는 데에 ‘정말 잘 만든 이야기구나‘하고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요미시>는 카도카와 호러 문고에서 나왔다. 정확하진 않지만, 일본에서는 2000년대 중반부터 호러 소설 표지에서 독살스럽고 강렬한 이미지보다는 뭐랄까 가볍고 감성적인 이미지, 특히 순정만화적인 일러스트의 기용이 눈에 띄게 늘기 시작했다. 카도카와 호러 문고는 그러한 흐름의 선두에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면서 책의 내용도 ‘광의의 공포소설‘ - 판타지, 기담, 일부 호러 아이콘을 사용한 일반소설 - 등이 속속 나왔다. <요미시>도 그러한 맥락에서 ‘무섭지 않은 호러‘에 속하는 작품이다.

표지에 등장하는 검은 옷의 미남이 ‘요미시‘ 타타라 카츠히코. 타타라 가문은 대대로 원귀를 ‘상자‘에 봉인하여 신으로 모시는 ‘후지테(封じ手、봉인자)‘, 봉인된 상자를 열고 악신을 베어 정화하는 ‘요미시‘를 배출하는 가계다. 카츠히코는 요미시로서 사명을 수행하지만, 그에게는 요미시의 일뿐 아니라 일상생활을 수행해줄 조력자가 필요했다. 한쪽 다리를 잃어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카츠히코의 파트너 겸 만능 가정부로 채용된 청년 고묘 아키라의 시점에서 시작한다. 아키라 또한 심상치 않은 가계 출신이다. 그의 증조부부터 시작된 저주 때문에 고묘 가문의 남자들은 25세를 넘기지 못하고 급사할 운명이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아키라는 자신이 죽으면 혼자 남게 될 여동생 사키를 위해 필사적으로 돈을 번다. 그런 그에게 급료가 높은 ‘유령저택‘ 타타라 가문의 일은 굴러 들어온 행운이었다.

카츠히코는 얼음처럼 쌀쌀맞은 성격. 만담 라디오 방송조차 미간을 찌푸리며 듣는 그에게 아키라는 조심스럽게나마 다가가려 하지만, 돌아오는 건 독설이다. 그와 대조적으로 아키라는 언제 급사할지 모른다는 불안을 안고 있으면서도 어디까지나 밝고 건강하며 인정이 깊다. 상자 속에 봉인된 재앙신들에게도 인정을 베풀려 하는 아키라에게 카츠히코도 조금씩 마음을 연다.

그러던 중, 타타라 저택의 사당에 안치된 수백 개의 상자들 중 하나에 고묘 가문에 저주를 내린 원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심증을 얻는다. 그러나 일은 원만하게 풀리지 않고, 초조해진 아키라는 치명적인 금기를 범하고 만다.

특히 아키라 시점의 문장이 가벼워서 첫인상은 ˝라이트노벨이네˝였다. 정말 읽기 쉬운 문장이다. 이전에 읽은 나가노 마유미의 <아메후라시>가 안개로 가득한 이경을 헤매는 감촉이었다면 이쪽은 잘 정비된 약간 으스스한 정원을 산책하는 데 비할까?

그러나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타타라 카츠히코의 사연과 속마음이 밝혀지면서 라이트노벨 같은 감촉은 희미해져 갔다. 재앙신들이 그렇게 된 사연도 비극적이고 애처롭지만, 담담하게 드러나는 카츠히코의 처지는 장절 그 자체다. 초반부의 카츠히코는 뭐랄까 틀에 박힌, 휠체어를 탄 냉미남+약간 독설계+사연있음이라는 느낌으로 간단히 ‘정리‘되는 캐릭터로 느껴졌다. 중반부 이후에서 비로소 섹시해진다.

비참한 처지, 원하지 않았던 숙명과 책임, 고독 속에서 깨닫는 인간의 온기에 대한 그리움. <염마 이야기>에서 그려졌던 테마가 <요미시>에서 변주된다. 이야기로서의 밀도가 아주 높다고 할 수는 없다. 큰 기대를 하고 접하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을 품은 인간의 사연을 절제되고 가벼운 문장으로 능숙하게 펼쳐 보이는 솜씨가 아름답다. 만족스러운 독서였다.

덧붙여서 카츠히코와 아키라의 관계에 약간 호게모잇한 요소가 있다는 점도 나에게는 플러스 포인트다. 후반부에 그야말로 절제된 언어를 이용한 요염한 장면들이 있다. 단순히 BL스러울 뿐 아니라, 그 장면으로 인해 타타라 카츠히코라는 캐릭터의 깊이가 아무렇지 않게 연출된다.

책이 올해 1월 25일에 나왔으므로 아직은 따끈따끈한 신간이다. 속편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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