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 이곳과 저곳, 이때와 저때, 인간과 인외...... 현실과 꿈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어지는 ‘인연‘. 향기롭고 자욱한 물안개 속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운 청년들의 연애기담집.

나가노 마유미의 2004년작이다. 제목이 희한하다. ‘よろず春夏冬中’라고 쓰고 ‘요로즈 아키나이츄‘라고 읽는다. ‘요로즈‘는 만물, 만사를 의미한다. ‘春夏冬‘는 춘하추동에서 가을(아키)이 없으니 ‘아키나이‘다. ‘중‘을 뜻으로 해석하면 ‘만물 끊임없는 가운데‘ 정도가 되겠지만, ‘츄‘라고 음차로 읽으면 ‘Chu,‘ 키스 소리가 된다. 그러니까 다시 풀어서 읽자면 ‘만사 끊임없는 키스‘ 정도가 된다. 고풍스런 한자어의 사용과 뭔가 오그라드는 의미가 묘하게 맞물린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그대로 이 책의 감상과 이어진다.


나가노 마유미는 일본 환상문학의 대표적인 작가 중 하나다. 이즈미 교카상, 미시마 유키오상, 노마 문예상 등을 수상했다.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여름 모자> 등의 작품이 게재되기도 했으니 일본 안에서는 상당한 지명도와 인정을 받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국내에는 데뷔작 <소년 앨리스>(1988)가 소개되었을 뿐이다.

‘상당한 지명도와 인정‘이라고 썼지만, 이 작가에 대해 알아보면 독보적인 존재이긴 하되 뭐랄까, ‘규격 외‘취급받는 것 같기도 하다. 본인에게도 자신이 문단과 맞지 않는다는 자각이 있다는 내용이 위키피디아에 실려 있고, <아메후라시> 의 권말 해설에서 치노 보시는 ˝1인 1장르의 작가˝라고 칭하여 그 특이성을 언급하는 정도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한마디로 하면 폐쇄적인 자기 세계를 주 무대로 하는 작가이기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바꿔 말하면 표준적인 소설문법이나 문예적 규칙에서 벗어나 있다. 나가노 마유미의 세계는 특히 현실원칙의 압력이 희박한 인공적이고도 향기로운 소우주다. 이야기들은 미야자와 겐지와 이나가키 타루호, <바람과 나무의 시>의 타케미야 케이코나 <포의 일족>의 하기오 모토 같은 취향으로 잘 다듬어져 있고, 이 취향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매우 닫혀 있다. 그 취향을 요약하자면 ‘환상, 미소년, 소년애‘정도일까.

현실원칙이 헐거운 탓에, 작중 사건의 전개가 갑작스러워 보이는 부분이 많다. 다 읽어도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감상이 남기도 한다. 상비약 방문 판매원(이라는 직업이 몇십 년 전 일본에서 있었다고 한다)이 놓고 간 멀미약을 마시고 여행 도중 잠드는데, 눈 떠 보니 판매원과 몸이 바뀌어 있다. 또는 분명히 죽었을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등장하여 서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눈다. 그러나 이것은 이야기가 엉터리라는 의미가 아니다.

정확하게 읽었는지 자신은 없지만, <요로즈 아키나이츄> 그리고 후속작인 <아메후라시>의 이야기를 작동시키는 원리는 ‘꿈‘과 ‘교환‘ 두 가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꿈의 원리는 ‘꿈에서라면 이럴 수 있어‘라는 규칙이고 ‘교환‘의 원리는 교환 행위를 통해 대립되는 두 세계의 경계를 허무는 규칙인 듯하다. 주인공들은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은 무엇가와의 교환 혹은 매매를 통해서 저쪽 세계로 불쑥 끌려들어간다. 그리고 자신도 몰랐던 소원의 성취 혹은 자각을 통해 다시 이쪽 세계로 복귀한다.

14개의 단편소설들은 모두 사랑 이야기다. 그것도 아름다운 청년(소년)끼리의 사랑이다. BL스럽다고 해야 하나, 그냥 <순문학 BL>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비엘물 중에서도 특히 얌전하고 문학적인 종류를 좋아한다면 이 이야기도 그렇게까지 희한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읽으면서 야마시타 토모코나 이마 이치코가 떠올랐다. 특히 중간에 잠깐 이마 이치코의 <환월루기담>을 봤을 정도다. 환상기담에 어딘가 뜬금없는 전개라는 점에서 닮았을지도. 그리고 나카무라 아스미코의 분위기도 어울리는 것 같다.

이 이야기에는 여러 가지로 ‘경계‘를 넘는 전개가 많은데, 지난번에 메모를 남길 때 그런 것치고는 ‘성별의 경계‘와 ‘공수관계의 경계‘를 넘지는 않는 것 같다고 적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성별의 경계를 넘는 전개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건이 두 개는 있고 - 꿈속에서 ‘참외‘를 임신하는 청년과 벌칙 게임으로 지하철 안에서 화장을 했다가 ‘여자 같다‘며 폭행당하는 소년-, 공수관계의 경계를 넘지 않는 이유는 사실 당연한 것 같기도 하다. 한쪽이 공, 한쪽이 수로 고정된 관계야말로 나가노 마유미의 ‘꿈의 세계‘를 지탱하는 철칙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욕망이 요구하는 제약으로, 어기면 세상이 무너지는 금기에 해당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공수의 제약이 이야기의 핵심이자 주인공들이 품은 소원인 ‘사랑‘의 기본 요소다. 현실에서 ‘남자와 여자‘가 사랑의 기본 단위인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치면 이 이야기는 비엘로서도 상당히 클래식하다.

문고판으로 194페이지밖에 안 되는 얇은 책인데 14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각각의 이야기는 무척 농밀하고 완성도가 높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받아들여지기 힘든 소수의 취향에게만 열리는, ‘닫힌 책‘이라는 점이 아쉽다. 지난번 읽은 <아메후라시>보다 이쪽이 더 좋았다. 다 읽었다는 데 약간 허탈함을 느낀다. 이제 번역판 <소년 앨리스>를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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