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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경 12 - 제3부 떠도는 자들의 노래
이문열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10년 전 4권까지 읽고 이런저런 이유로 읽기를 미뤄 오다가 마침내 오늘에서야 12권까지의 읽기를 마쳤다. 간혹 책방에서 이 책과 마주설 때면 꼭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숙제처럼 여겨졌던 <변경>읽기였는데 마치고 나니 참 잘했다는 생각과 함께 후련함마저 든다.
소설은 과거를 뒤집어 현재화 한다는 말처럼 명훈과 영희, 인철과 지낸 지난 한 달은 참으로 즐거웠다. 반공 이데올로기가 판을 치던 60년대에 월북한 골수 빨갱이 아버지를 둔 인철 일가의 사회적 죄의식은 원죄라고 표현될 만큼의 강도로 그들의 삶을 억누르고 가둔다. 태어나 얼굴 한 번 제대로 본 적이 없는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 처음부터 많은 것들을 스스로 접어야 했고 포기해야 했으며 생각조차 해 볼 엄두를 내지 않아야 했던 그들의 삶이 얼마나 가슴 답답한 것이었는지를 소설을 읽는 내내 그들의 생각에 동의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 원죄로부터 자유로와지기를 그들이 얼마나 갈망했는지를 세 남매의 각기 다른 선택과 삶의 행로에서 우린 작가의 글을 빌려 짐작할 수 있다. 경찰이 오면 떠난다라는 공식처럼 그 어디에도 적을 두지 못하는 명훈의 의식은 건달의 세계에서도 또 그 반대편의 지성들의 세계에서도 항상 겉도는 자신의 현실과 직면하게 되고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간다. 이런 자신의 삶이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아버지로부터인지 그 자신으로부터인지를 이해하지 못하며 그것이 한낱 개인적인 불행으로 명훈에겐 치부된다.
하지만 최소한 생존권마저 위협당하는 지경에 이르른 명훈은 이제껏 자신을 짓눌러 왔던 원죄의식을 벗어버리고 이 사회를 향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려고 하지만 결국 어렵게 어렵게 시작한 새로운 삶은 시작하자마자 안타까운 종지부를 찍고만다. 인철의 이야기를 읽을 때면 그 생각의 살아있음에 빨려들어가게 된다. 그것이 작가 본인의 이야기임에 더욱 그러하겠지만 그 시절 작가가 가졌을 모든 감정의 고리들이 충분한 연관관계를 가지기 때문인 것 같다. 명훈과 도회적인 삶을 꿈꾸는 영희의 이야기는 그 감정의 고리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약간의 들쭉날쭉하는 부분들이 있는데 비해 인철의 이야기에선 모든 것들이 한 선으로 이어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나에게 커다란 즐거움은 어떤 사건 하나하나가 이문열씨가 썼던 많은 단편이나 장편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철의 성장 과정이 또래들로부터 떨어져 혼자만의 시간이 많아 사람이든 사물이든 직접 대면하기 전에 관념화시키고 추상화시키는 버릇으로 굳어져 실제로 그것들을 만났을 때는 자신의 생각 속의 이미지와의 괴리감때문에 가까이할 수 없었다는 그래서 더욱 그를 사람들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마음을 닫아 걸게 했고 또 다시 잡다한 책읽기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이문열씨의 글들이 왜 그리 특별나게 와닿았는지를 알게 하는 이야기였다.
흑백논리가 모든 가치를 판단하던 시대에 월북한 아버지로 인해 연좌제의 그늘에 가려 두세 달에 한 번 경찰의 감시를 받아와야 했던 젊은 그들의 선택에 나는 명훈은 명훈대로 영희는 영희대로 인철은 인철대로 그들의 손을 들어 주고싶다. 무자비한 좌우논리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고 지금도 그 논리들에게서 한쪽을 선택하기를 강요하는 많은 사람들로 인해 그래서 그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와질 수 없는 한 인간의 삶에 대해 우린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너무도 많은 것들이 변하고 부서지고 새로이 섰지만 우리가 지금 무엇이 옳았고 무엇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은 것 같다. 나 혼자만의 생각으로 분명한 것은 그것이 진정 사람을 위한 것이었나 아니었나 하는 문제가 아닐까 한다. 그 출발점이 비판의 시각이 아닌 애정에서 시작한다면, 그래서 그들을 바라볼 수 있다면 명훈 영희 인철의 삶과 그들의 결정에 대해 우린 더 많은 것을 포용하고 어루만져 줄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변경을 통한 이문열씨의 존재증명은 성공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