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그 후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37
나쓰메 소세키 지음, 서석연 옮김 / 범우사 / 199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겉으로 보기에는 평탄한 삶을 살아온 것 같은 나의 내면에는 항상 그토록 괴로운 갈등이 있었다는 점을 이해해주십시오. 
─ 나쓰메 소세키, ≪마음≫(1914년작), 범우사(서석연역, 1990년역), 230쪽



 

△ 나쓰메 소세키식의 사랑의 불가해성에 대해 얘기하기엔 너무나 빛나는
가마쿠라의 바다. 하지만 인생의 모든 면이 그렇다.
빛나는 햇살 뒤에는 항상 어둡고 우울한 그림자의 여운이 있는 법.
(사진출처 : 블록그(dddxbbb)님의 블로그)


1.

내가 나쓰메 소세키를 읽은 것은 언제였던가. 아니, 그것은 읽은 것이 아니었다. 내가 처음 접한 나쓰메 소세키는 ‘들은 것’이었다. 그건 중학교 시절의 일이었고, 그건 여자 동급생의 집에서 그 애의 언니가 읽어주던 것이었다.
그리고 나보다 십여 살 많았던 그 애의 언니가 읽어준 나쓰메 소세키는 바로 ≪마음≫이었다. 그리고 만난 가마쿠라 ──나는 그때 처음으로 바다 건너 먼 섬에 가마쿠라라는 해안이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그건 소설의 이러한 첫문장.


내가 선생과 알게 된 것은 가마쿠라에서였다. (12쪽)


그리고 나는 그 반짝거리는 해안과 더불어 더 많은 이국의 사물을 알게 되었다. 이를테면, 유카타. 

 
언젠가 선생이 여느때와 같이 곧장 바다에서 올라와서 항시 같은 장소에 벗어둔 유카타를 입으려고 했을 때, 어찌된 일인지 그 옷은 모래투성이였다. 선생은 그것을 털기 위해서 등을 돌려 유카타를 두세 번 털었다. 그러자 옷 밑에 두었던 안경이 판자 틈새로 떨어졌다. (16쪽)


아늑한 중학생 시절을, 안녕히... 하고 손 흔들고 흘려보내고서도, 지금도 나는 가끔 그 시절을 생각하면 항상 어떤 슬픔이
장마철의 저녁공기처럼 습하고 다정하게 내 손목을 감싸오는 것을 느낀다. 그건 어쩌면 소멸의 냄새였다.

 

 



2.

사실 나쓰메 소세키가 1914년 ≪아사히신문≫에 연재한 이 소설의 주제는 사랑의 불가해성이었다. 비교적 산뜻하고 경쾌하게
시작되는 이 소설은, 진행될수록 어떤 슬픔의 냄새가 묻어나고 있는 것이다. 범우사판 번역본에 부록으로 실린 평론에서, 와세다 대학의 에토 아쓰이 교수는 이를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점점 더 진행될수록 그 의혹은 깊어지고 의혹이 깊어짐에 따라 이상하게도 슬픈 감정이 싹트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는 이로 하여금 초겨울 공기와 같은 맑게 갠 분위기 속에 휩싸이게 한다. 이때 독자들은 비극의 차원으로 발을 내딛게 되고 사물의 핵심, 즉 ‘마음’에 다가가게 된다. …이 작품의 아이러니는, 부족한 것이라곤 없어 보이는 선생이 실은 에고이즘, 고독, 사랑의 불가능성이라는 비참한 숙명의 희생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있다. …소설의 서두에서 그는 가마쿠라의 해안에서 선생을 만난다. 이때 ‘나’는 햇볕이 누부시게 쏟아지는 한가운데 서 있으면서 자신이 머지 않아 주위의 아름다운 자연에서 결정적으로 소외될 운명에 있다는 것을 아직 알지 못한다. 그는 아직 인간성에 잠재해 있는 추악한 진실에 직면한 적 없어 그저 청춘의 환희에 젖어 있다. (범우사판, 470쪽)


그 옛날 중학생 시절, 나는 ‘에고이즘’이나 ‘사물의 핵심’이라든가, 혹은 ‘사랑의 불가능성’이나 ‘비참한 숙명’과 같은
어려운 개념들을 몰랐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평생 이런 단어의 진정한 의미를 모른 채로 평온하게 천수를 다하고 머리 위로 묵직한 묘비명을 얹고 영원히 잠들지도 모른다. 

 

 

 


3.

사실, 이 소설 ≪마음≫은, 한 남자가 왜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느냐 하는, 자살을 목적지로 한 마음의 행로를 그리고 있다.


내가 그러한 굴레 속에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을 때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자살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신은 왜 그런 생각이 들었냐고 하며 소스라치게 놀랄지도 모르지만 언제나 내 마음을 꽉 죄고 있는 정체불명의 그 무서운 힘은 나를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게 하면서 죽음의 길로는 자유로이 나아갈 수 있게 했습니다. (230쪽)


그리고 이 남자의 발언의 주요한 시초에는 가마쿠라가 있었다. 빛나는 그 바다.

하여, 온화한 그 바다 가마쿠라는 나의 마음에 기묘하고도 불가사의한 장소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사람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도 죄책감 때문에 죽을 수가 있구나 ──이게 내가 열네살에 깨달은 삶의 잠언이었다.


기억해주십시오. 나는 그런 식으로 살아왔습니다. 가마쿠라에서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도, 당신과 함께 교외로 산책을 나갔을 때도 나는 언제나 우울한 기분에 젖어 있었습니다. …9월이 되면 또 만나자고 한 말은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되어 그 겨울이 다 지나더라도 반드시 만날 생각이었습니다.  (231쪽)


하여간, 이 남자는 죽음을 일순 유예하고 자신의 죽음을 글로 남긴다. 어쩌면 사람이 죽기 위해 필요한 것은 짧거나 긴 글일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2,3일 후 나는 드디어 자살할 결심을 했습니다. 노기 대장이 죽은 이유를 내가 잘 모르듯이 당신도 내가 자살하는 이유를 납득할 수 없겠지만, 그것은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생각의 차이이니 어쩔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아니, 각 개인의 성격 차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당신에게 나라는 존재를 이해시키기 위해 지금까지의 글을 통해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죽으려고 결심한 것도 이미 열흘이나 되었습니다. 그동안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자서전과 같은 이렇게 긴 글을 써서 당신에게 남겨두기 위해 보냈습니다. 처음에는 당신을 만나 직접 이야기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쓰다보니 오히려 글로 이야기하는 것이 나라는 존재에 대해 좀더 분명히 묘사할 수 있는 것 같아서 기쁩니다. 이렇게 글로 이야기하는 나는 색다른 분위기에 무조건 젖어들어 쓴 것은 아닙니다. 내 지난날은 나만이 경험한 것으로서 나 외에는 그 누구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을 거짓없이 서서 남겨두는 것은 나라는 인간을 알아두는 데 있어서 당신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좋은 자료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와다나베 가잔은 한단이라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죽을 날을 1주일이나 미루었다는 이야기를 바로 얼마 전에 들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것이 쓸데없는 짓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본인에게는 그것이 죽는 일만큼이나 중요한 일이었을 겁니다. 내가 당신에게 이런 글을 남기게 된 것도 다만 당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나 자신의 뜻이 더 강하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 목적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습니다. 당신이 이 편지를 받아볼 때쯤이면 나는 이미 이 세상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232-234쪽)

 

 

 

4.

옛날, 내가 들은 나쓰메 소세키가 어떤 번역본인지 모른다. 그건 1980년대의 일이었으므로. 아마 어쩌면 만화가이기도 했던,
동급생의 언니가 읽어준 ≪마음≫은, 일본어 원서를 바로바로 직역해서 일러준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읽어준 게 아니었고 군데군데 마음내키는 대로 몇 문장만을 일러주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높은 작업대 책상에서 그 소설을 읽어주었고, 나는 아랫목 앉은뱅이 책상에서 턱을 괴고 생경한 문장들의 음색과 더불어 가끔은 사전을 찾아보는지 얇은 종이가 팔랑거리는 그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마치 천상에서 하강하는 그레트헨의 목소리를, 이미 연옥에 한 발을 들여놓은 파우스트가 듣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토록 낭랑한 목소리를 가졌던 그 여자도 결국은 죽어버렸다.
나쓰메 소세키와 다른 점은, 그녀는 아무런 글 따위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죽은 사람은 무슨 심정으로 자신의 뼈가 강물에
뿌려지는 것을 보는지 모르겠지만, 산 사람에게 그것은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막 사춘기를 통과하는 한 소년에겐 말이다. 

 

 



5. 

그 후로, 가마쿠라는 나에게 어떤 미지의 불가해한 장소가 되어 버렸다.
어쩌면 그 바다에 서면 삶의 모든 의문들이 풀릴 것도 같았다. 아마, 그 바다에 석류빛 노을이 지면 죽은 사람과 재회할 것만 같았고, 모든 의문은 당사자에게 직접 물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래서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운 날은 그 바다에 서고 싶었어. 죽은 다음에는 그리도 마음이 평안하냐고
따져물을 수 있을 것만 같거든.
(출처 : http://homepage2.nifty.com/gokurakudan/index.htm 의 어딘가)

 

  

Post Script


그래서 오늘도 가마쿠라로 가는 여정을 확인해 봤어. 도쿄까지 두시간 반.
그리고 도쿄역에서 JR 요코스카센을 타고 가마쿠라 역까지 약 1시간. 언제나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운 순간에 단지 반나절을 소비하면 나는 그 바다에 설 수 있겠지. 그리고 따지듯이 물어볼 거야. 그렇게 대책없이 스스로 생의 붉은 실을 끊어버리면 마음이 편안하냐고. 그리고 그리운 이가 어떤 대답을 하든 간에 나는 그 품에 안겨 엉엉 울어버릴 거야.
아마 그렇게 마음의 슬픔을 그 바다에 덧대고 나면 아마 죽고 싶은 마음이 커피 한 캔만큼은 덜어질지도 모르는 거지.
서울에서부터 출발해 단 반나절만 생의 아늑한 슬픔을 더 견딘다면 말이지.

(원문출처 : http://blog.naver.com/xenoblast/12005693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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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가지만 알면 나도 스토리텔링 전문가
리처드 맥스웰.로버트 딕먼 지음, 전행선 옮김 / 지식노마드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이 글의 블로그 원문 : http://blog.naver.com/xenoblast/120053364392

 


                              우리를 가슴 뛰게 만드는 스토리란 무엇인가?

 

  

지난 6월 11일 오후 1시 30분경, H화재로부터 매우 인상적인 자동차보험 세일즈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제 자동차 보험 만기일이 매해 6월 30일인데요, 경험해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보험만기일 한 달 전부터 여러 보험회사들로부터 이런저런 세일즈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합니다. 사실 바쁠 때 걸려오면 정말 귀찮아요. 그래도 성격상 모질지가 못한 저는 쉽게 전화를 끊지 못하고 대개 1분 정도는 들어줍니다. 

 

근데 문제의 이 전화는 처음부터 약간 그 어조가 좀 달랐습니다. 그리고 매우 감성적이고 설득력 있는 음색으로 자기네 보험상품의 장점을 세일즈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하마터면 이 분의 언변에 휘둘려 이 분의 회사로 보험을 옮길 뻔 했습니다. 제가 보험을 옮기지 못한 것은 오로지 이 전화를 받기 전에, 현재 가입하고 있는 보험회사에서 그냥 보험을 자동연장하겠다는 이미 약속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약속은 어디까지나 약속이니까 상황의 변화에 따라서 번복이 가능하긴 하겠지만, 이미 제게 보험연장에 대한 약속을 받은 현재 보험회사 세일즈 담당자의 실망을 생각하니 제 성격상 보험연장건을 취소하기는 난감한 상황이었죠. 아마 그래서 그날 전화를 주신 이 분께 이런 사정까지 말씀 드리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이 분의 언변이 훌륭했으면 세일즈 당하는 제가 오히려 비굴하게 제가 보험회사를 지금 옮기는 것은 곤란하다고 사정(?)까지 하게 되었을까요! ^^;;

 

어쨌거나 그렇게 사정했더니 이 분께서는 견적안내문자를 보내드릴 테니 꼭 문자보관함에 저장해 주시고 자기 이름을 기억해 주셨다가 내년에 다시 전화하면 그때는 꼭 긍정적으로 고려해 달라고 하시더군요. 그리고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 드리고”로 시작하는 문자를 보내주셨습니다. 저는 이 문자를 저장해 두었기에 그 일이 지난 6월 11일 오후 1시 38분경에 있었던 일임을 지금도 확인할 수 있는 거지요. 그렇다면 저는 말만 그렇게 한 후 무시해도 좋은 그 문자를 왜 지금까지 저장하고 있을까요? 요 얘길 마저 드리기 전에 잠깐 ≪5가지만 알면 나도 스토리텔링 전문가≫란 책에 대해 먼저 몇 자 적어보도록 하죠.

 

우선 ≪5가지만 알면 나도 스토리텔링 전문가≫라는 책 제목을 보면 흔한 글쓰기 작법책이라고 여기기 쉽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사실 글쓰기에 관련책인 줄 알고 관심을 가지게 된 거죠. 결과적으로 후회는 없지만 말이죠. ^^;;) 제게 배달된 책의 경우, 책 중간에 광고지 한 장이 끼워져 있었는데요, 이 책을 출간한 지식노마드라는 출판사의 기존단행본에 대한 안내광고죠. 안내광고를 살펴보면 <행복도 연습이 필요하다>라는 의미심장한 부제가 붙은 ≪How to be happy≫, <자기와 상대 모두의 이해관계를 충족시키는 협상의 지혜>란 광고카피의 ≪돌부처의 심장을 뛰게 하라≫ 등 이 지식노마드라는 출판사는 자기계발, 비지니스 협상, 컨설팅, 세일즈 등 주로 비지니스 서적을 내는 곳임을 알 수 있죠. 따라서 ≪5가지만 알면 나도 스토리텔링 전문가≫란 책 역시 단순한 글쓰기에 관한 책이 아니라 인간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서사의 핵심>을 주로 비지니스의 관점에서 정리한 책이라 할 수 있죠. 

 

방금 저는 <서사>라는 개념을 사용했습니다. 서사... 정말 어려운 단어죠. 이미 이천하고도 몇백 년에, 평생 서사라는 개념을 가지고 씨름한 아리스토텔레스 할아버지에서부터, 역시 같은 개념으로 한평생을 헌신한 에리히 아우어바흐 아저씨에게 이르기까지 서사의 본질은 많은 사상가들의 관심영역이 되었죠. 그런 의미에서 이 책 ≪5가지만 알면 나도 스토리텔링 전문가≫는 서사의 본질을 <스토리텔링>이란 관점에서 파고든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나 ≪수사학≫ 혹은 에리히 아우허바흐의 ≪미메시스≫와 같은 아카데믹한 깊이는 없지만, 부담없이 읽으면서─그렇습니다. 이 <부담없이>라는 말이 중요해요. 이를테면 보험세일즈에 걸맞는 화법을 터득할 요량으로 읽기에 에리히 아우허바흐는 좀 난해하단 말이죠.ㅋ─ 우리 인간에게 서사 혹은 스토리란 무엇인가에 대해 편안하게 묵상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장점이 있죠. 

 

음... 이 책의 핵심은 사실 19쪽 하단에서 20쪽 상단의 여덟 줄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이래저래 생업에 쫓겨 <1박2일>이나 <개그콘서트>조차 볼 여유도 없이 바쁘신 분들은 이 여덟 줄만 읽어도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연예산업에서부터 기업 컨설팅에 이르기까지, 이야기를 만들어 시장에 내놓는 직업인으로 살아오면서 우리는 성공적인 이야기라면 모두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기본 구성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야기에 담긴 열정Passion, 청중을 이끌어 자신의 관점으로 이야기를 볼 수 있게 해주는 영웅Hero, 영웅이 반드시 맞서 싸워야 하는 악당Antagonist, 영웅을 성장하게 만드는 깨달음의 순간Awareness, 앞의 모든 과정을 거친 후 반드시 뒤따르는 영웅과 세상의 변화Transformation, 이것이 바로 모든 이야기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기본 요소이다. ─ 리처드 맥스웰 · 로버트 딕먼 지음, ≪5가지만 알면 나도 스토리텔링 전문가≫, 지식노마드(2008), 19-20쪽.



사실 이 책의 나머지 부분은 이 다섯 가지 기본 구성요소에 대한 생생한 사례이자 각주입니다. 그리고 친절하게 핵심적인 소결론들은 고동색 타이프체의 글씨로 중간중간 요약까지 하여 주십니다. (여담이지만, 저는 이런 강조문구를 볼 때마다 항상 궁금해요. 원서에도 이렇게 표기되어 있어서 이렇게 강조체로 옮긴 걸까, 아니면, 오로지 편집자의 창의력의 결과일까요? 음... 말이 길어졌네요. 저도 이제 해야 할 일이 있어 대략 이쯤해서 이 글을 수습해야겠네요. ^^;;)

 

음... 아까 보험세일즈 전화 얘길 했었죠. 지금 생각해보니 그 전화에도 ≪5가지만 알면 나도 스토리텔링 전문가≫에서 지적한 다섯 가지의 요소가 있었던 것 같아요. 우선 세일즈 하시는 그분의 목소리는 첫 음색부터 뭔가 열정Passion에 차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비스나 비용면에서 상대적으로 나의 이익을 증진/저해하는 보험회사들은 영웅Hero/악당Antagonist으로 간주할 수 있겠구요, 깨달음의 순간Awareness과 세상의 변화Transformation은 자기 이익의 중요성에 대한 자각과 그에 대한 실현이라고도 볼 수 있겠네요. 

 

하지만, 그분의 문자메시지를 지금까지 저장해 둔 것은 다섯 가지 기본요소에 대한 표피적인 이해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메세지에는 이러한 표피성을 뛰어넘는 어떤 <메타서사/메타스토리텔링>적인 요소가 있었던 거지요. 

 

이를테면 전화세일즈를 하면 분명 무례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해서는 안 되는 태도가 있는데 이 경계를 살짝 혹은 심하게 벗어나는 그러한 행위들 말이죠. 물론 자기의 바쁜 시간을 빼어간다는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그렇다고 나의 이익을 침해한다고 무조건 타인의 전언을 거부한다면 그것도 같이 사는 공동체적인 삶은 아닌 것이죠. 나에게 “이야기를 건내는” 그 당사자로서는 생계가 달린 문제으므로, 내가 잠깐 시간을 할애해서 그 사람의 생계를 약간 돕는다는 것은, 그건 분명 삶의 미덕이라고 저는 생각하는 편이지요. 그래서 저는 이를테면 용산전자상가 횡단보도에서 여름이면 아주머니들이 선캡 쓰고 나눠주는 이런저런 전단지를 잘 받아주는 편입니다. 그리고 가끔은 환경미화원들을 위하여 길거리에다 그렇게 받은 전단지를 꾸겨서 버려 주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길거리가 깨끗하면 환경미화원들의 일부는 실직하기 때문이죠. 따라서 우리 시민들은 환경미화원이나 경찰관이나 소방관들의 생계를 위해, 가끔 길거리에 휴지도 버려주고 사소한 범죄도 저질러 주고, 때로는 불장난도 해줘야 하는 겁니다. (음... 노파심에서 말씀 드립니다만, 환경미화원부터 쓴 내용은 농담이라는 거 다들 아시죠? ㅋ)

 

어쨌거나 자동차보험 세일즈에 담긴 스토리텔링에서는 우리 자본주의 체제가 구가하고 있는 노동의 의미랄까 삶의 본질이라고나 할까 뭐 그런 메타스토리텔링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메타서사를 통해 자신의 삶의 목적이나 일의 의미에 대해 잠시 반성Reflection의 시간을 갖게 되는 거죠. (참, 여기서 말하는 반성이란, http://100.naver.com/100.nhn?docid=70511이란 의미의 반성인 거죠.)

 

그러므로 이야기를 하거나 혹은 이야기를 듣고 잠시 자기 자신과 타인의 삶의 의미에 대해 반성적 성찰의 계기를 갖게 되는 것, 그런 서사야말로 인간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그런 스토리텔링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이 책 ≪5가지만 알면 나도 스토리텔링 전문가≫은 비록 주로 비지니스의 관점에서만 스토리텔링의 재치를 탐구하고 있지만, 이러한 다섯 가지 요소에서 보다 심원한 인생의 통찰력을 찾아내는 것은 여러분 자신들의 과제로 남게 되는 것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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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한길그레이트북스 40
윌리엄 제임스 지음, 김재영 옮김 / 한길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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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 이왕 블로그 들어온 것, 저만의 신비체험에 대한 것에나 몇 자 적어보고자 합니다. 우선, 윌리엄 제임스가 수집한 신비체험 사례를

먼저 인용해 보도록 하지요.

 

 

나는 20분 정도 책을 읽는 데 몰입해 있었다. 내 마음은 완벽하게 고요했고 그 순간 친구들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단 한순간의 경고도 없이 나의 전 존재가 최고의 긴장상태와 생생함으로 붕 뜨는 것 같았다. 그것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강렬함으로 다른 존재 또는 유령이 방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 나와 아주 가까이 있다는 것을 의식했다. (121-122쪽)

 

나는 나의 영혼이 무한자에게로 열려 있던 그날 밤, 언덕 꼭대기의 바로 그 지점을 기억한다. 그때 나의 내적 세계와 외적 세계가 서로

충돌하고 있었다. 그것은 심연이 심연을 향해 소리지르는, 즉 별 너머 밖의 깊이를 잴 수 없는 심연에 응답되어 나의 내적 심연을 열게

하는 나의 투쟁이었다. 나는 나를 창조하고, 세계의 모든 아름다움, 사랑, 슬픔 그리고 심지어 유혹까지 창조한 그와 단둘이 서 있었다.

(중략) 그 경험을 충분히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서로 다른 모든 음계들이 감정을 벅차오르게 하는 하나의 하모니로

용해되었을 때, 그 소리를 듣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영혼이 위로 떠오르고 그것의 감정으로 충만해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의식하지 못하게 하는, 거대한 오케스트라가 주는 효과와 같은 어떤 것이었다. 그 밤의 고요는 보다 숭고한 침묵으로 오싹해졌다. (127-128쪽)

 

 

2.

제가 체험한 신비체험은 위 사례와 유사한 점도 있고 틀린 점도 있답니다.

얼마전 포스트에서는 딱 두번 체험이라고 한 것 같은데, 곰곰히 따져보니 몇 번의 체험이 더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맨 처음 것은 제 블로그 검색해보니 적어 둔 게 있더군요. (
http://blog.naver.com/xenoblast/120025025783)

 

 

3.

정작 적어보고 싶은 것은 그 후의 체험들인데요, 요건 다음에, 왜냐면 밤이 너무 늦었고,

낼 전 아침 다시 출근해야 하는 샐러리맨이므로.

 

 

 

 

 

 

 

 

 

 

 

4.

아침입니다. 잠깐 여유가 돼서, 한밤에 이어서 적어봅니다.

유아기시절의 기억─거의 두세살까지 그 기억을 소급해 올라가는, 즉, 제 인생의 거의 최초의 기억─에 대해서는 위에서 언급한 다른

포스트에서 잠깐 밝힌 바 있고,

그 뒤로 겪은 몇 가지 경험 중의 하나.

 

그것은 제가 군복무 중일 때의 일이었습니다.

때는 늦은 봄.

저는 막 상병 계급을 달고 부대내 어떤 정원에서 삽질을 할 때였습니다. 아, 맞습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삽질을 하는 야외작업이었습니다.

당시 부대안에 수목원 비슷한, 꽤 넓은 정원이 있었는데 이곳은 이런 저런 나무를 심어두고 사단에서 필요한 나무가 있을 때

파내서 보내주는, 이를테면 나무들의 임시정거장 같은 곳이었던 게지요.

 

어쨌건 그날도 사단 모연대에서 나무 몇 그루가 필요하다고 해서, 아침부터 그거 뽑아주는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요,

다녀온 분들은 아시다시피 차라리 이렇게 야외에서 간단한 작업을 하는 게 더 속편할 때가 많습니다.

변태같은 고참이나, 걸려서 좋을 게 없는 장교들의 시야에서 벗어나 아침에 부여된 하루치의 작업량만 해치우면 나름대로 맘 편히

지낼 수 있는 하루가 되는 셈이지요. (그래서 다들 카운팅하는 제대 날짜에서 하루 마이너스^^)

 

음... 제게 그 일이 일어난 것은

점심식사 시간이 되어 다들 영내식당으로 밥을 먹으러 갔을 때였습니다. 야외에 작업도구가 있어서 누군가는 지켜야 했는데,

그냥 혼자 쉬고 싶어 제가 남기로 자청을 한 거지요.

 

 

 

 

 

어쨌건 아무도 없는 나무들의 정원에 저 혼자 남겨져 있었습니다.

(누군들 근본적으로 우주에는 오직 나 혼자만 남겨져 있다고 깨닫는 때가 닥쳐오는 것처럼.)

 

전 정말 멋대가리 없이 들쑥날쑥 심어진 온갖 종류의 나무들을 보며,

따뜻한 오월의 태양을 쬐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불현듯 사회에 두고온 책들과 음반들과 미처 하지 못하고 남겨둔 대화들이 생각났고,

앞으로 남겨진 군복무의 날들이 조금은 괴로웠습니다. 어서 지나갔으면─하구요.

그런 막연한 그리움과 괴로움이 근사한 햇살에 적당한 온도로 구워지고...

 

전, 막, 숀 필립스의 어떤 LP를 생각하고 있었던 참이었지요...

날씨도 따뜻한데, 이 순간 그 남자의, <"L" Ballade>를 들었으면 정말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했던 게지요.

그리고 그 곡을 떠올리며 아무 생각이 늦은 봄햇살에 반짝이는 정원수들을 쳐다보았습니다.

막 잎손바닥을 펴는 은행나무, 누군가 저건 굴팝나무야 하고 잘못 가르쳐 준 하얗게 눈 내린 이팝나무, 낮은 향나무, 막 꽃몽우리가

맺히는 구상나무, 지난 초봄 비 많이 내리던 날 한없이 한없이 노란 색 눈물들을 왕창 쏟아내던 개나리며...

그리고 그 가운데 공주처럼 아리땁게 뿌리를 편 산개벚나무는 자줏빛 드레스에 하얀 면사포를 쓰고...

 

전 숀 필립스의 나직한 음성에 맞추어, 그 많은 나무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보면서 조금씩 나른함에 젖어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졸리움과 함께 막연한 그리움과 괴로움은 점차 잊혀져갔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갑자기 아득한 현기증이 몰려온 것은.

이하 생략,

원문을 보시려면 : http://blog.naver.com/xenoblast/120045136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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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해석과 정신
W. 파울리 외 지음, 이승일 외 옮김 / 청계(휴먼필드)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동시성은 물리학의 불연속성보다 더 당황스럽거나 신비하지 않다. 그것은 지적인 어려움을 만들어내는 무인과적 사건이 존재한다든지,

언제나 발생할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게 만드는 인과율의 전횡적인 힘을 믿는 단지 뿌리 깊은 신념일 뿐이다.

하지만 무인과적 사건들이 존재하거나 언제나 발생할 수 있었다면, 우리는 그 사건들을 창조적 행위들(creative acts) 곧 영원으로

부터 존재하고, 그 자체 우연적으로 반복되며, 기존의 선행하는 것들로부터도 도출될 수 없는 어떤 패턴의 끊임없는 창조로 생각해야

한다. ─ 칼 구스타프 융, "동시성 : 무인과적 연결 원리", <자연의 해석과 정신>, 청계(2002역), 192-193쪽.

 

 

 

 

 

 

음... 위에서 인용한 칼 구스타프 융의 <동시성 : 무인과적 연결 원리>는 이전에 한 포스트에서 거론한 바 있습니다.

(관련포스트 : http://blog.naver.com/xenoblast/120043191250, 특히 제1장 제4절을 참조)

 

음... 갑자기 이 얘기를 들먹이는 것은 오늘 밤 약간 유사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죠.

즉, 밤에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전철을 타고 오면서 논술수업이 계기가 되었는지, 잠시, 얼마전 쓴 어떤 포스트의 <첫눈 내린 밤>의

신비체험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었죠. (참조 : http://blog.naver.com/xenoblast/120044771267)

 

그리고 아침에 서가에서 무작위로 집어온 책을 펼쳐 들었죠. 음... 오에 겐자부로 전집이 꽂혀 있던 서가에서 생각 없이 뺀,

<그리운 시절로 띄우는 편지>(제16권)였습니다. 

처음부터 읽기 싫어서 손이 가는 대로 아무 대목이나 펼쳤는데요, 바로 아래 대목입니다.

 

 

수술 전에 프레체로의 논문을 읽고 나서부터 줄곧 생각나는 문장이 있거든. 《신곡》 3부의 문장들에 보이는 표현 차이를 분석한

글이었는데 지옥의 순례자는 말야, 여행을 하는 자기 주위에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 것과는 다른 자율적인 세계로서

자신의 오관으로 인물이니 사물을 발견해 가지. 그런데 연옥에선 말야, 새로운 무언가가 그에게 나타나는 것은 <마음의 드라마>를

통해서야..... 순례자의 주관에 펼쳐지는 극(劇)으로서 그것은 이루어지는 거지. <정화(淨火) 제15곡>에 있듯이 주관과 연관될 때만 모든

것이 나타나는 거야. 순례자가 꾸는 꿈의 비전이지. 여기서 나 홀연히 나의 관능을 벗어나 하나의 환상 속으로 이끌리니 수많은

사람들을 한 신전 안에서 본 듯하더라, 하는 문장 말야. 내가 국회 의사당 옆에서 나동그라졌을 때 기억해 보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던...... (중략) 내가 이 시구에 끌렸던 것은 말하자면 순례자의 주관이 보이는 환상, 그 꿈의 비전이 마음에 들어서였어.

중세 심리학에서는 꿈의 비전을 보는 능력과 조그만 세부로 전체를 구축하는 상상력, 말하자면 K, 작가의 상상력을 말야, 같은 것으로

간주했던 모양이야. ─ 오에 겐자부로, <그리운 시절로 띄우는 편지>, 고려원(1996역), 545쪽

 

 

아, 저는 다소 놀랐습니다. 책 읽기 바로 전 제가 생각했던 그런 관념들이 거의 유사하게 묘사되어 있었거든요.

어쨌거나 이 책은 오래 전에 사놓고 이제야 비로소 손을 댄 것인데요, 이 외에도 최근 제가 생각했던 몇 가지 개념들이 군데군데 그대로

묘사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마스터베이션>과 관련해서도. 이 점은 다음 기회에.)

 

음... 그럴 수도 있겠다 하고, 집에 도착해서 세수하고, 집에서 읽는 다른 책을 펼쳤습니다. 오면서 지하철에서의 독서가 생각나서였는지,

손이 종교학의 대가인 윌리엄 제임스로 향하더군요. 그리고 역시 무작위로 펼쳐든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의 한 대목 :

 
그러나 이 모든 예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마치 이것은 인간의 의식 속에 실재에 대한 감각, 객관적 존재에

대한 느낌, 그리고 현대심리학이 존재하는 실재들은 원래 계시된 것이라고 가정함으로써, 특수하고 독특한 <오감>보다도 더 깊고

일반적인 <그것에 있는 어떤 것>에 대한 인식이 있는 것과 같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우선 실재에 대한 이런 감각을 불러냄으로써

너무나 습관적이었던 우리의 태도와 행실을 각성시킬 수 있는 감각을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이와 같은 실재에 대한 미분화된

감각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가장 색다른 증거들은 환각의 체험에서 찾아볼 수 있다. ─ 윌리엄 제임스,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ㅏㄴ길사, 118쪽.

 

 

음... 이쯤 되니 전 우연한 일치에 더욱 놀랐고, 아무래도 칼 구스타프 융의 <동시성의 원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더군요.

그래서 잠깐, 자정의 독서를 접고, 요 블로그에 책들의 해당대목을 옮겨두어야지 하고 생각했답니다.^^

 

 

 

 

이하 생략,

전체원문을 보시려면, http://blog.naver.com/xenoblast/120045136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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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공간론 - 건축환경선서 28
Van de Ven 지음, 정진원, 고성용 옮김 / 기문당 / 1998년 4월
평점 :
품절


 

 

이는 분명 뉴턴에 와서 집약된 근대 과학의 성과를 철학적으로 영유한 것인 동시에, 과학에서는 객관적 실재였던 시간과 공간을

현상과 더불어 주관 내부로 끌여들였다는 점에서 차이를 갖는다. 즉 그것은 근대 과학이 제안한 외재적인 시간 · 공간을 이제 주관의

내부에까지 끌어들임으로써, 현상은 물론 경험과 판단의 주체를 그 절대적 시간과 공간의 구조 속으로 끌어들인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러한 칸트의 시도는 근대에 나타난 다른 시도와 비슷하다. 즉 외부의 신을 인간 개개인의 내부로 끌여들인

루터의 종교개혁이나, 가치의 원천을 인간 내부로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엥겔스가 "정치경제학의 루터"라고 불렀던,

애덤 스미스처럼, 칸트는 외재적인 시간과 공간을 이제 인간의 내부로 끌어들인 것이다. ─ 이진경, <근대적 시 · 공간의 탄생>,

푸른숲(1997), 33쪽

 

 

 

 

 

 

 

Henri Stierlin이 쓴 <세계의 古건축>의 한국어 번역판 제2권 416쪽에는 약 기원전 5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크이클코의 원형

피라미드(Pyramide circulaire de Cuicuilco)의 입면도 및 평면도가 실려 있다. 이 피라미드는 직경 135m에 이르는데, 이 위대한

유적은 시트레 화산의 분화에 의한 용암으로 인해 묻히고 말았다고 한다.

 

지금이야 발굴로 그저 총 4개에 이르는 원형층단만이 찾아냈지만, 그 위에 건축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의 신전의 모습을

이제 영 살펴볼 수 없는 그런 일이 되고 말았다. 마치 솔로몬왕의 신전처럼 말이다.

 

위대한 문명의 이러한 소멸된 흔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나라의 경우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연전에 홍대 나갔다가 미술서점에 사서

가끔 탐독하는 <한국 고대 목탑의 구조와 의장 : 황룡사 구층탑>(미술문화)의 158쪽부터 164쪽에는 이 위대한 고탑(古塔)의

추정복원도가 실려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적층구조방식을 적용한 김동현의 추정복원도(164쪽)가 맘에 들긴 하지만, 또 어느날은

세련되면서도 단아한 미가 돋보이는 후지시마 가이지로의 추정복원도(158쪽)가 더 마음에 닿아올 때가 있다.

 

특별히 잠이 안 오는 밤, 고대의 신라로 마음의 여행을 떠나는 밤이면, 삼국유사와 함께 이 <황룡사 구층탑>에 실린 여러 도판들을

보며 건축을 통해 구현한 고대인들의 공간개념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 추정복원도 사이에서 내가 만약 정책결정자여서

임의적으로 하나의 복원도를 선택할 수 있다면 총 여섯 가지의 복원도 중에서 과연 어느 것을 초이스할 것인가 하는 무해무익한

공상에 빠지는 것이다.

 

뭐, 어느 경우나 좋다. 제발 연말이면 쓸 데 없이 보도블럭이나 뒤집지 말고 황룡사 구층탑이나 그럴 듯 하게 복원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제발, 제발, 제발 말이다.)

 

Van de Ven이 쓴 <건축공간론>(기문당) 193쪽을 보면 <인간은 자신의 신체를 통해 건축가나 화가가 공간이라고 부르는 것을 창조

한다>는 멋진 말이 쓰여 있다. 이 뜻 깊은 말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이 공간은 수학적 공간이나 인식론적 공간과는 전혀 다르다.

회화나 건축의 공간은 음악이며 리듬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느 정도 우리 개념의 한계에 대응되는 것으로 인간을

해방시키기도 하고 둘러싸기도 하기 때문이다. 건축공간으로서의 가로는 그 자체가 비극적 산물이다.>

 

하나의 건축적 공간이라는 것이 인간을 해방시키기도 하고 동시에 <인간을 둘러싸기도 한다>는, 즉 <인간을 규제 혹은 규정한다>는

견해는 매우 타당하다. 즉, 하나의 공간은 하나의 존재론적 세계인 것이다─흡사 언어와 마찬가지로.

 

따라서 나는 하나의 공간은 하나의 언어라고 추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간 역시 하나의 존재에게 어떤 때는 공포와 전율이다. (언어가 어느 순간 그러하듯이.)

이하, 생략,

원문을 보시려면 : http://blog.naver.com/xenoblast/120045344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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