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문학과지성 시인선 572
진은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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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보니 글이 길어짐. 맨 끝에 3줄 요약 있음.



1.

얼마 독서모임에서 진은영의 신간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를 읽음. 모임이 끝나고 독서모임 단톡방에 토론 시간에 다루지 못한 <조직생활자>에 궁금증이 올라옴. 이에 이 시에 대한 나의 개인적 감상을 적어보기로 함.

 

물론, 개인적인 감상이라고는 하나, 독서모임의 시 토론 시간에 영향받은 해석도 다분함. 그러나 결과적으론 철저히 본인의 개인적 의식의 흐름대로의 해석이 될 것임. 물론, 이 글을 읽는 분들을 위해 가급적 객관적인 논거를 제시하려는 스탠스를 취하겠지만 잘 될지는 모르겠음. 최소한 시의 해석에 있어서는 객관적이 못할 거라는 내 자신을 잘 알고 있음. (어떻게 시를 객관적, 논리적으로 읽을 수가 있겠음?)

 

우선, 이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음.

 

 

<조직생활자>

 

그대는 오르페우스와 정반대의 혀를 가지고 있구나

그자는 목소리로 모든 것을 기쁨으로 이끌었지만……

아이스킬로스, 아가멤논

 

  커튼이 아니다. 나는 드리워져 있지 않다. 해 드는 일 없는 작은 창문 위에. 추위와 고독에 맞서지 않는다.폐쇄적이지 않다 결코.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다 흔들이는 빌딩들 사이 외줄에. 균형을 잡으려고. 완강한 거부의 몸짓으로. 나는 열려 있다. 아무도 숨겨줄 수 없다 나 자신조차도.

   부정의 십자가. 완전한 항복이오. 찔린 옆구리에서, 막 생겨난 새하얀 두 다리를 따라 자의식의 검은 피가 흘러내렸소. 모두 빠져나갔다 회합의 골고다 언덕 사이로. 둥근 돌 모양의 회의 탁자 하나. 손가락과 입술이 빠르게 회전한다. 나는 늘 떠나가는 사람, 거기 남아 있는 것처럼 교묘하게

 

          어디로든 떠나지 못하고

          나는 존재한다 푸른 액자 속에

          상반신만 그려진 인물처럼

 

 

이상과 같은 시인데, <조직생활자>에 대한 나의 주관적인 감상을 적기 전에 이번 시집 전반에 대한 나의 이해 상황을 먼저 적을 필요가 있다는 느낌스러운 느낌이 듬.

   


2.

이번에 새로 나온 진은영의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한마디로 말해서, ‘세월호의, 세월호에 의한, 세월호를 위한 초혼이라고 단언하고 싶음.

 

더불어, 진은영 시에 대한 비평적 접근을 위해서는 약간의 성서 및 철학적 개념과 그리스 희곡작가 아이스퀼로스의 아가멤논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요하다고 생각됨. , 진은영의 이번 시집에는 성서, 철학, 고대 그리스 희곡에서 유래한 개념들이 다수 차용되었으므로 이 글에서는 이에 대한 단상도 적어볼 참임.

 

물론 모든 훌륭한 시가 그렇듯이(예를 들어 T.S.엘리엇이나 W.B.예이츠에 대한 시가 그렇듯이), 이러한 배경지식이 있으면 시의 다양한 미학적 층위를 맛볼 수 있지만, 없으면 없는대로 자기 마음 가는대로 독해해도 무방할 것임.

   


3.

따라서 먼저 아가멤논에 대한 얘기를 적을까 했는데, 아무래도 고정희 시인 얘기를 먼저 해야겠음.

 

나는 아까,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한마디로 말해서, ‘세월호의, 세월호에 의한, 세월호를 위한 초혼이라고 적었음. 내가 초혼이란 단어를 적은 것은, 진은영의 시집 전반에서, 오래 전 읽었던 고정희의 시집  초혼제가 떠올랐기 때문임. 이유는 다음과 같음.

 

a) 전반적으로 세월호에 대한 진혼곡으로 읽히는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의 테마가 광주민주화운동을 은유화한 <초혼제>와 유사하다는 점. (참고로 <초혼제>는 독재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1983년 출간된 장편시임. 1983년 당시에 광주민주화운동은 광주사태로 불온시되며 언급 자체가 금기시되었음.)

b) 두 시집 모두 여성시인이 화자이며, 시집에 종교적(더 좁게는 기독교적) 언어 문법, 철학적 개념이 도입된 점.

c) 실제로 벌어진 어떤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 외에도 두 시집에 담긴 어휘의 유사성이 보인다는 점. (진은영이 개인적으로 고정희의 작품을 탐독하고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음. 물론 이는 개인적인 추측임.)

 

우선, 장편시 <초혼제>의 도입부는 다음과 같음.

 

 

<초혼제>

 

어느 때보다도 제 눈빛은 맑았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천천히 속을 응시했습니다.

천고지붕 당했으니

하사말씀 가이없나이다.

직사각의 칠성판에 누워 있는 건

고인의 시체가 아니라

은빛으로 번쩍이는 거울이었습니다.

(중략)

거울 한 장의 형이상학 속에서

한 시대의 청년이 죽었습니다.

한 시대의 사람이 죽었습니다.

한 시대의 과거가 죽었습니다.

한 시대의 미래가 죽었습니다.

한 시대의 관계가 죽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속해 있던

믿음과 평화와 자유의 싸움터,

마을의 집단과 이 세계 내의

갈등이 허용된 개개인도 죽었습니.

깃발만이

두 줄기 길을 가리키는

무등산 중봉 허리에서 우리는

너나없이 칠성판에 누워버렸습니다.

 

슬픔이거나 이별이거나 한이거나

비분강개 명분 따윈 참으로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는

이 미증유의 송장사태를 아십니까?

그 소문 들어보셨습니까?

(‘1부 우리들의 순장중에서)

 

 

이 시의 화자는 어떤 이의 부고를 받고 문상을 온 참임. 그런데 화자가 관 속에서 본 것은 고인의 시신이 아니라 관 속의 거울, 즉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임. 물론 문상을 온 모든 이들은 관 속에서 제각기 자신의 죽음을 보게 됨.

 

이런 죽음은 생물학적인 죽음인 동시에 역사적이고 사회적 죽음이며, 믿음과 자유와 평화 같은 순전한 가치의 죽음이기도 함. 그리고 그 비극이 시작된 것은 의 깃발만이 두 줄기 길을 가리키는, 즉 어떤 몽환적인 상상의 장소가 아니라, 실제로 어느 순간 우리 삶과 이웃에게 벌어진 어떤 역사적 사건의 장소인 것임.

 

고정희의 <초혼제>, 시인인 화자가 때로는 관찰자로, 때로는 당사자로 등장하는데, 이런 화자가 목도하고 흡수하는 감성과 시어들이 진은영의 시들의 그것들과 유사하다고 봄. 따라서 시의 화자가 목격하는 사건은 한 시대의 과거와 미래를 죽이는참혹한 사건이며, 이로 인해 사건으로 직접적으로 죽지 않은 개인들도 결국은 집단과 세계 내의 갈등으로 인해 결국은 따라 죽고 마는 것임.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에 맨 처음 시로 등장하는 <청혼>, ‘請婚이 아니라, ‘請魂’(招魂’)으로 독해하는 것도 가능할 것임.

 

 

<청혼>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내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 이 시의 제목을 請婚으로 독해하면 아련하고 달달한 연애시로도 읽힐 수 있지만, ‘請魂으로 받아들이면 흡사 고정희의 <초혼제>에 담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실재했던 어떤 역사적 사건에 대한 초혼굿으로도 읽을 수 있는 것임.

 

사실, 개인적으론 請魂으로 읽을 때, 이 시의 마지막을 더 깊은 층위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함. (따라서 시 토론에서 나와 같은 관점을 가진 분들의 의견을 들을 때 기쁨이 느껴졌음. 그런데 이렇게 슬픈 시집을 읽으면서 내 해석이 그럴싸했다고 기쁨을 느끼는 내 자신을 제3의 눈으로 지켜보니 너무도 한심하고 모멸감이 느껴졌음.)

 

여하튼, 이 시의 청혼請魂으로 읽을 때 얻어지는 장점이 있음. 특히 이 마지막 연을 읽을 때 그러함.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 나는 물컵, 혹은 물컵에 담겨 있는 투명 유리 조각, <초혼제>에서 볼 수 있는, 의지를 가긴 자만이 볼 수 있는 관 속의 거울과도 같은 것이라고 보는 것임.

 

사실, 진은영의 시에는 유리 말고도 거울이 직접적으로 등장하기도 함. ‘죽음도 등장함. 물론 의 대립하는 상징적 색채과 같은 심상도 그렇고, 어떤 역사적 사건에 얽힌 개인()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믿음이나 슬픔과 같은 가치나 감정들이 죽고 스러지고 나약해지는 상태 역시 그러함.

 

예시를 적으려고 시집을 뒤적거렸는데, ‘거울을 발견하지 못함. 분명 어딘가 있었는데? 일단 다른 작품을 먼저 옮겨봄.

 

 

사랑의 흰색에 대해 쓰면서

네가 얼마나 내 뺨을 창백하게 했는지

(중략)

정확히 말해야 해, 정확히 말하기 싫어

무언가 검정 얼음 속에서 녹고 있어! (<단조로운 시> 중에서)

 

진보라니, 언제나 그 말은 아득하게 들립니다.

(중략)

그런 걸, 믿으라는 말인가

나는 오랫동안 묻곤 했습니다.

(중략)

믿음으로

믿음을 지우면서

당신은 스스로 답했습니다. (<아뉴스데이, 새뮤얼 바버 한 노동운동가에게> 중에서)

 

진흙 반죽처럼 부드러워지고 싶다

무엇이든 되고 싶다

지금 내 곁의 빈 나무 속을 떠돌며

(중략)

너를 위한 기억의 데스마스크로

망각 법원의 길고 어두운 복도마다 걸리고 싶다

무겁게 쌓인 먼지를 털면

가장 오래된 슬픔의 죄수들이

쇠창살 사이에서 기웃거리는 표정처럼 (<죽은 엄마가 아이에게> 끝부분)

   


 

4.

다음으로 이 시에 등장하는 기독교적 표현과 시어들을 적다가 지움. 특별히 난해한 게 없으므로 생략함.

   


5.

다음으로 이 시에 등장하는, 아이스퀼로스의 아가멤논은 약간 상세하게 적어볼 필요가 있음. 일단 아가멤논에 대한 소개부터 적어 보겠음.

 

아가멤논, 읽으신 분은 아시다시피, 나름대로의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출전한 아르고스의 왕 아가멤논과 그런 남편에게 원한을 품은 왕비 클뤼타이메스트라, 그리고 그녀의 정부이자 아가멤논를 원수로 생각하는 아이기스토스가 등장함.

 

아가멤논의 아들 이름을 따서 <오레스테이아 3부작>으로 불리는 아이스퀼로스의 첫 작품이 아가멤논인데, 아버지가 딸을, 아내가 남편을, 급기야 아들이 어머니를 살해하는 스토리를 가지고 있음. 아가멤논은 이런 비극적 사건의 첫부분으로 아내가 남편을 살해하는 줄거리까지를 다루고 있음. 그리고 나머지 2부작에서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가 자신의 어머니를 처단하는 복수가 나옴.

 

여하튼 천병희의 번역서 맨 처음의 <작품 소개>는 다음과 같음. 약간 길지만 옮겨보겠음.

 

 

<작품 소개>

 

현존하는 유일한 비극 3부작인 이른바 오레스테이아(‘오레스테스 이야기란 뜻)로 아이스퀼로스는 기원전 458년 비극경연대회에서 13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우승을 차지한다.

 

3부작의 첫 번째 작품 아가멤논에서는 트로이아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이 트로이아에서 10년 만에 귀향하던 날 아내 클뤼타이메스트라와 그녀의 정부(情夫) 아이기스토스에 의해 욕조에서 무참하게 살해된다.

 

아가멤논은 왜 그런 고통과 불행을 겪어야 하는가. 이것이 아이스퀼로스가 이 작품에서 풀어내고 싶은 이야기다. 아내는 남편이 10년 전에 일천 척의 그리스 함대를 이끌고 트로이아로 떠날 때 폭풍을 달래기 위해 둘 사이에서 태어난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친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고 주장하고, 그녀의 정부는 아가멤논의 아버지 아트레우스가 자기 아버지를 추방하고 형들을 살해한 데 대한 정당한 복수하고 주장한다.

 

인간은 고통을 통해 깨달음에 이른다’(pathei mathos)는 아이스퀼로스의 주요 주제가 제일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아이스퀼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 , 26

 

 

그런데 아가멤논에 담긴 문제는 이들의 정의가 각자의 처지와 이해 관계를 대변하는 제한된 정의라는 점임. 예를 들어 정의를 실현한답시고 전쟁을 일으킨 아가멤논은 전쟁을 위해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치고, 그런 아가멤논을 증오한 클뤼타이메스트라는 남편을 죽이기 위해 아이기스토스와 짜고 모략을 꾸밈. 아아기스토스가 아가멤논에게 원한을 품은 것은 집안 내력상 나름 이유가 있긴 한데 어쨌거나 복수를 위해 클뤼타이메스트라의 불륜남이 됨. 그리고 복수의 방법이 뭔가 통쾌하지 못하고 매우 치졸함.

 

어쨌거나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에는 아가멤논을 원천으로 하는 표현들이 여럿 등장함. 서두에 적은 시 <조직생활자>의 부제가 그렇고, 이 밖에도 다음과 같은 시가 있음.

 

 

폴란드에 사는 카산드라

결코 틀리지 않는 미래를 예언한다

너는 죽을 거야

사랑이든 이별이든 모두 끝나지

 

남는 것은

모래밭의 낙서처럼

지워지는

시 몇 줄 (<한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위트 앤 시니컬에서> 중에서)

 

 

아이스퀼로스의 희곡의 설정에 의하면, 천병희 번역본의 표기에 의하면, ‘캇산드라’는 전쟁에서 승리한 아가멤논이 데려온 여자이자 예언자임. 그러나 미래를 예언하는 능력에도 불구하고, 신에게 사람들로 하여금 그 예언을 믿게 하는 신뢰성을 박탈당함. 따라서 ‘캇산드라’ 역시 시를 통해 한 사회와 당대의 진실을 내보이는 시를 쓰지만, 그 시는 하찮게 되고 조롱당하고 의심받는 시인 자신이 되는 것임.


이런 시들 외에도 아가멤논에서 유래됐다고 추측되는 표현과 시어들이 있음. 예를 들어 아가멤논의 첫 구절은 다음과 같음. (천병희 번역판)

 

 

신들이시여, 제발 이 고역에서 벗어나게 해주소서!

긴긴 한 해 동안 나는 망을 본답시고 개처럼 (중략) 누워

(중략)

지금 이 순간도 나는 횃불의 신호가,

트로이아의 함락을 알리는 찬란한 불빛이 오르기를 지켜보고

있나이다. (중략)

그래서 노래는 약으로 잠을 쫓아버릴 양으로

노래를 부르거나 콧노래를 흥얼거릴라치면,

이전처럼 훌륭하게 다스려지지 않는 이 집안의 불행이

떠올라 노래는 어느새 눈물과 탄식으로 변해요.

제발 이젠 반가운 소식을 전하는 불빛이 어둠 속에

나타나 내 고역에 행운의 종말을 가져다주었으면! (1~21)

 

 

이 구절은 아르고스의 궁전 지붕 위의 파수병의 독백임. 아가멤논의 연극을 보면 항상 등장하는, “개처럼 누워~”하고 외치는 그 유명한 구절임. 여기서 의 이미지는, 어떤 역사적 사건의 종결을 목도하는 동시에 정의의 실현이라고 생각되는 그것을 선포하는 파수병의 분신임. 그런데 이 파수병=는 그 역사적 사건의 종결을 너무도 오래, 그리고 감질나게 기다려왔기에, 오래 전부터 고역스러워서 죽을 지경임. 그렇기에 내 고역에 행운의 종말을 가져다주었으면이라고 외치는 것임.

 

그렇기에, ‘파수병=는 역사적 정의를 맨 처음으로 발견하고 그것을 궁전 안의 사람들이나 시민들에게 전언할 목도자이긴 하나, 이렇게만 본다면 시인은 곧 기자이며, 시는 저널리즘이 되는 것임. 그러나 시는 그렇지 않음. 시인이 시를 쓰는 것은 저널리즘과는 다른 외연을 품고 있음.


어쨌거나 진은영의 시집에는 개의 이미지가 꽤 나옴. 그리고 진은영 시집에 개가 등장할 때마다, “(정의의 실현이라고 생각되는, 어떤 역사적 사건의 종결을 지루하게 혹은 고통스럽게 기다리는) 파수병==시인이라고 해석할 수 있음. , 개는 시인의 페르소나가 되는 것임.

 


나는 조용한 과 잠든 깃털,

새벽의 술집에서 잃어버린 시구를 찾고 있다 너에게 어울리는 (<어울린다> 중에서)

 

다행이지, 어른에게 하루는 배고픈

온종일 나쁜 기억을 입에 물고 어디론가 사라져벼리는

그러니 장수 하느님께 네가 좀 졸라다오

오늘 이 봄날

슬픔의 커다란 뼈를 던져 줄 개

빨리 아빠에게 보내달라고

(중략)

오늘은 나도 그런 노래를 부르련다 (<봄에 죽은 아이> 중에서)

 

 

진은영 시에 등장하는 개들은, 아니, 개들이 등장하면, 뒤이어 시구노래가 뒤따라 나옴. 이때의 시와 노래는 마치 아르고스의 궁전 지붕에 엎드려, 자신의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의무를 종결시켜줄 어떤 사건의 실현의 목도이자 전언이라고 해석할 수 있음.

 

다음으로, 아가멤논의 첫부분에 등장하는 기름의 의미에 대해 적어보겠음.

 

위에서 적은 파수병이 독백을 하고 퇴장하면 바로 이어 문제의 클뤼타이메스트라 왕비가 등장하여 제물을 바치고 그것을 태우며 제사를 지내기 시작함. 제물을 바치고 그것을 태워 연기를 내어 신이 그것을 냄새 맡게 하는 것을 번제라고 함. 성서에도 자주 등장하는 제사법임.


약간 딴 얘기이긴 한데, 아가멤논을 언급하는 여러 번역서를 보면, 클뤼타이메스트라를 어떤 번역에선 왕비로, 또다른 책에서는 여왕으로 번역하기도 함. 왕비라고 하면, 왕에 종속적인 의미가 있고, 독립적인 권력을 갖고 통치하면 여왕이 되는 것임. 유럽사를 보면 특이하게 왕과 여왕 부부가 있는 경우도 있긴 함. 이런 경우는 보통 서로 다른 지역의 통치자(혹은 후계자)끼리 결혼하여 이후에도 독립적인 통치권을 행사는 케이스임. 그런데, 클뤼타이메스트라는 원래 아가멤논의 왕비였으나, 아가멤논의 장기간 부재로 인해 실질적으로 도시국가 아르고스를 통치하게 됨. 따라서 왕비였으나 여왕으로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지위가 된 것임.

 

여하튼 왕비의 이를 보고 코로스가 노래함. (코로스는 고대 그리스 연극의 특수한 장치인데, 배우과 관객을 연결하는 일종의 해설자라고 보면 됨. 일단 무성영화의 변사를 생각하면 됨.)

 

 

클뤼타이메스트라 왕비시여,

어인 일이시오? 새로운 소식이라도 들으셨나요?

무슨 소문을 듣고, 누구의 말을 믿고,

이렇게 사방에 사람을 시켜 제물을 차리게 하시오?

(중략)

이 도시를 지켜주시는 모든 신들의 제단이

선물들로 불타고 있소이다.

(중략)

신께 제물로 바친 신성한 기름

부드럽고 거짓 없는 설득에 힘입어

불길이 여기저기서

하늘로 치솟고 있소이다.

이 일에 관하여 그대가 말씀하실 수 있는 것과

말씀하셔도 좋은 것은 부디 말씀해주시어

내 이 불안의 치유자가 되어주시오.

이 불안으로 나는 마음에 불길한 생각이 들다가도

그대가 바치는 제물을 보니

거기서 희망이 솟아나 마음을 좀먹는

탐욕스런 근심걱정을 쫓아주기 때문이오. (84~103)

 

 

위 코로스에는 제물=불타는 선물=제물로 바쳐진 신성한 기름이 등장하는데, 이런 제물=불타는 기름은 신에게 바쳐서 신을 부드럽고 거짓 없는 설득하는 기능을 함. 그런데, 진은영의 시에도 몇 군데 기름이라는 시어가 등장함.

 

 

<사랑의 전문가>

 

  나는 엉망이야 그렇지만 너는 사랑의 마법을 사랑했지. 나는 돌멩이의 일종이었는데 네가 건드리자 가장 연한 싹이 돋아났어. 너는 마법을 부리길 좋아해. 나는 식물의 일종이었는데 네가 부러뜨리자 새빨간 피가 땅 위로 하염없이 흘러갔어. 너의 마법을 확신한다. 나는 바다의 일종. 네가 흰 발가락을 담그자 기름처럼 타올랐어. 너는 사랑의 마법사. 그 방면의 전문가. 나는 기름의 일종이었는데, 오 나의 불타오를 준비. 너는 나를 사랑했었다. 폐유로 가득 찬 유조선이 부서지며 침몰할 때, 나는 슬픔과 망각을 섞지 못한다. 푸른 물과 기름처럼. 물 위를 떠돌며 영원히

 

 

시 토론에서 <사랑의 전문가>, ‘(세월호로)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심정을 쓴 것을 본다는 해석을 들었는데, 이런 관점은 내가 이 시를 처음 읽을 때 미쳐 생각하지 못했던 해석이었음. 이 해석의 논리는, 시에서 화자는 돌멩이의 일종에서 식물의 일종으로, 거기서 다시 를 가진 존재로 성장하는데 이는 성장함에 따라 부모에게 사랑의 마법을 부리는 사랑의 전문가=아이때문인 것임.

 

그런데 모종의 사건으로 폐유로 가득 찬 유조선이 부서지며 침몰하여, 화자는 슬픔과 망각을 섞지 못하는 상태가 됨. 하여, 화자는 새빨간 피으로 흘려보내고 바다의 일종이 되어 버림. 그리고 다시 기름의 일종이 되어 불타오를 준비를 함. 이는 자신을 제물로 태워 신에게 뭔가를 요청하는, 혹은 신을 부드럽고 거짓 없이 설득하고자 함.

 

그러나 위에서 적은 대로 화자는 슬픔과 망각을 섞지 못하고 푸른 물과 기름처럼 영원히 물 위를 떠돌게 됨. 이건, 세월호 참사 이후 팽목항에서 하염없이 바다를 지키는, 망부석이 된 가족들의 눈빛을 연상하면 바로 이해가 됨.

 

다른 한편으론, 이 시의 시간대에서 시간적으로 폐유로 가득 찬 유조선이 부서지며 침몰하는 사건이 맨 처음 발생했고, 이로 인해 나는 엉망이야라는 존재론적 변화가 시작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음.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런 참혹한 사건을 겪은 직후에 엉망인 나=돌멩이였는데, 죽은 아이가 사랑의 마법을 부려, 돌에서 다시 생기를 얻어 연한 싹을 돋아내게 됨. 죽은 아이는 다시 마법을 부려 온전한 식물로까지 만들지만, 어떤 이유로 상처가 다시 생기고(=‘네가 부러뜨리자’), 하여 다시 피가 도는 인간이 되긴 했지만, 새빨간 피를 땅으로 흘려보내고 바다에 묶인 채로 바다가 됨. 그리고 아이의 무언가가 화자를 터치하는 순간(=‘네가 흰 발가락을 담그자’) 기름처럼 타오르게 됨.

 

어떻게 해석하든, 어떤 시간 순서를 택하든, 혹은 화자인 내가 어머니가 아니라, 이 사건을 목도하는 목격자로의 시인 자신이라고 하더라도, 이 시가 다루고 있는 것이 세월호의 아픔으로 보는 것은 타당할 듯싶음. 한편 기름의 이미지는 더 있음. 예를 들어 :

 

 

시는 충분하다

오색 기름 웅덩이 위 모기 떼와 함께

(<한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위트 앤 시니컬에서> 중에서)

 

 

위 구절 역시 ‘(자신을 태워) 뭔가를 희구하는 존재로서의 기름을 보여주지만, 결국은 물과 유리되는 모습을 보여줌. 따라서 윗 부분의 시는 충분하다는 명제는 역설적으로 시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역설을 보여주는 듯싶음.

 

이밖에도 아가멤논에서 유래된 듯한 표현법이나 시어들이 더 있음. 예를 들어 :

 

 

하나 인간의 검은 피

한번 죽어 대지를 적시면,

어느 누가 마술로

이를 되돌릴 수 있으랴? (1028~1021)

 

죽은 사람을 말로써 다시

일으켜 세울 방도를 나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오. (1360~1361)



죽은 이를 일깨우는 이러한 관념은 진은영의 시들에서도 발견됨.

 

 

나는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

(중략)

나는 산 사람의 입술을 영원히 살릴 수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중에서)



한편, 아가멤논』에는 세월호 사건과 관련하여 연상될 만한 구절들이 있음. (과거 및 미래에서 무고한 많은 이들이 희생되는 부분임. 즉, 아가멤논 왕의 출정 당시 희생되는 이들과, 승전 후 아가멤논 왕이 데려온 캇산드라의 미래 예언임.)

   


헬라스 땅을 떠나 함께 싸움터로 간

백성들의 집집마다 꿋꿋한 마음으로

슬픔을 참고 견디는 모습 역력했다네.

실로 가슴 아린 일 많았으니,

그들이 떠나보낸 이들이

누군지 알건만

집집마다 돌아오는 것은

사람 대신 단지와 유골뿐이었다네. (429~436행)


저기 바다가 있어요. 누가 그것을 말릴 수 있겠어요?

저 바다에서는 옷을 물들이는 은처럼 귀한

자줏빛 염료가 쉴 새 없이 솟아오르고 있어요. (958~960행)


과중한 풍요로 말미암아

집 전체가 침몰하는 일은 없을 것이며,

선장도 배를 바닷속에

가라앉히는 일은 없으리라. (1011~1014행)


여기 믿을 만한 증거가 있어요. 여기 자신들이

도살되었다고 슬피 우는 어린아이들이 있고,

아비들이 먹어치운, 불에 구운 살코기도 있네요. (1095~1097행)


저기 어린아이들이 꿈속의 환영과 흡사한 모습을 하고

집 바로 옆에 앉아 있는 것이 보이지 않으세요?

친족들에게 살해된 어린아이들이네요. 손에는

식탁에 올랐던 자신들의 살점을 잔뜩 들었어요. (1217~1220행)


물론 내 말을 안 믿어도 괜찮아요. 올 것은 오고야 마니까.

이제 그대는 곧 현장 목격자가 되어 연민의 눈물을 흘리며

나를 너무나 진실한 예언자라 부르겠지요. (1239~1241행)

 

 

이밖에도 아가멤논에서 영감을 얻은 표현으로 생각되는 것들이 더 있지만 생략하도록 하고(쓰다 보니 약간 억지인 듯도 싶음), 원래 얘기하고자 했던 <조직생활자>에 대한 얘기를 하겠음.

   


6.

<조직생활자>의 부제로 인용된 아가멤논의 구절은 다음과 같음.

 

 

그대는 오르페우스와 정반대의 혀를 가지고 있구나

그자는 목소리로 모든 것을 기쁨으로 이끌었지만……

아이스킬로스, 아가멤논

 

 

위 부제를 서가의 천병희 번역판 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에서 찾아봄.

 

 

코로스장 :

이 비겁자여, 전장에서 막 돌아온 분에게 이런 짓을 하다니!

집 안에만 틀어박혀 그분의 침상까지 더럽힌 주제에

전장에 나가 있는 장군에게 이따위 죽음을 모의하다니!

 

아이기스토스 :

그 말 역시 그대에게 회오에 찬 눈물의 씨앗이 되리라.

그대(=코로스장)의 혓바닥은 오르페우스의 그것과는 영 딴판이로구나.

(=오르페우스)는 자기 음성으로 만물을 즐거움으로 이끌었는데,

그대는 주책없는 소리로 사람을 노엽게 하니 그대 자신이

끌려가게 되리라. 한번 혼이 나면 좀 고분고분해지겠지.

 

코로스장 :

그리고 그대는 아르고스인들의 통치자가 되고 싶겠지.

이분에게 죽음을 모의해놓고 막상 실행 단계에 이르자

제 손으로 이분을 살해할 용기도 없었던 주제에.

 

아이기스토스 :

속이는 것은 자고이래로 분명 여자들 몫이고,

나로 말하면 이자의 숙적으로 의심받아 왔으니까.

하지만 이제 나는 이자의 재산을 밑천 삼아 시민들을

다스릴 작정이다. 그리고 복종하지 않는 자에게는

무거운 멍에를 씌울 참이야. (1625~1641)

 

 

일단 인용문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진은영이 <조직생활자>의 부제로 인용한 번역은 천병희의 것이 아니라는 것임. 그런데 만약 그 번역서를 찾아, 인용된 번역어를 살펴보면 아가멤논이 진은영 시에 영향을 미친 수준을 더 잘 파악할 수 있을 것임.

 

여하튼, 먼저, 진은영의 <조직생활자>의 부제로 인용된 오르페우스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아야 할 것임. 한국문학에서 아가멤논혹은 오르페우스의 의미를 애도와 연관시켜 살펴보는 대표적인 글을 찾아보았음.

 

우선 신형철 평론가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 실린 <당신의 지겨운 슬픔>을 살펴보기로 함. (글이 길지만,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으므로 옮겨 둠.)



아래 이미지가 깨진 부분은 네이버 블로그의 원문을 참고해주세요.

https://blog.naver.com/jazzlands/222872421881













 


―  출처 : http://preview.kyobobook.co.kr/epubPreviewPopup.jsp?type=web&barcode=4801160401968&search=Y&orderClick=LAT



신형철은 아가멤논에서 아가멤논의 딜레마을 포착함. , 아이스퀼로스의 고통을 통한 배움(pathei mathos)’이란 고통 뒤에는 깨달음이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고통 없이는 무엇도 진정으로 배울 수 없다뜻도 되는 것임. 즉 같은 경험과 같은 고통만이 같은 슬픔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임. 그러나 타인의 슬픔을 배우는 것만큼 어려운 것이 없기도 함.

 

다음으로, 이광호 평론가의 <문학은 왜 애도하는가>라는 글을 살펴보겠음.











 

이광호는 오르페우스시인의 원형으로 보며, 시인은 노래를 통해 죽음을 애도하는 자로 봄. , 오르페우스는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를 부활시키기 위해 살아 있는 몸으로 저승까지 내려감. (마치 살아 있는 시인이 망자의 세계로 애도의 여행을 떠나는 것과 같음.) 그리고 오르페우스는 음악으로 저승의 신들을 감동시켜 다시 지상으로 데려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지만 실패하고 아내를 부활시키지 못한 슬픔에 잠김. (이는 시인이, 혹은 문학과 예술이 어떤 역사적인 죽음을 재현하고자 하나, 실패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음.)


그리고 오르페우스는 죽은 아내에 대한 추모로 세속의 쾌락과 축제에 참여하지 않음. 그 결과, 오르페우스는 몸이 찢기고 강물에 던져짐. (이는 시인이, 혹은 문학과 예술이 그 시대의 세속과 긴장하는 관계에 있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음.) 그러나 강물에 던져진 오르페우스의 잘린 머리는 여전히 노랬다고 전해짐. (, 시인은 애도하는 자이자, 재현에 실패하는 자인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한히 재현을 시도하는 자임.)

 

이광호는 오르페우스에 대한 논거를 통해 글의 후반부에서 진은영의 시 <훔쳐가는 노래>에 담긴, 하나의 주체에 속하지 않고, 떨어져 나와 다른 존재들의 가능성과 만나는, 애도로서의 시 쓰기를 살피고 있기도 함.

 

이상과 같은 배경지식을 통해, <조직생활자> 부제의 의미를 살펴봄.

 

 

그대(=코로스장)는 오르페우스와 정반대의 혀를 가지고 있구나

그자(=오르페우스)는 목소리로 모든 것을 기쁨으로 이끌었지만……

아이스킬로스, 아가멤논

 

 

위의 부제에서 그대는 코로스장을 말함. 코로스란, 위에서 적은 것처럼 고대 그리스 극에서, 마치 성가대처럼 한쪽에 도열해 극의 흐름을 이끌어주는 해설자들을 말함. 그리고 코로스장이란, 성가대의 성가대장처럼, 코로스의 우두머리를 말함. 그런데 사실 코로스 혹은 코로스단의 역할은, 무성영화 시절의 변사처럼 극의 해설을 맡기도 하지만, 때로는 극중 인물과 서로 대화하며, 희곡작가 혹은 관객들의 의사를 대변하기도 함. 그리고 아가멤논의 코로스는 아르고스 시의 노인들로 구성된다고 아이스퀼로스는 자신의 희곡의 <등장인물 소개>에서 밝히고 있음.

 

, 위 부제 부분은, 정당한 복수라는 이름 아래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실현하려는 아이기스토스와, 이에 반발하여 정의의 진정한 정당성을 추구하는 아르고스 시민들의 입장을 보여주고 있는 장면임. 그런데 아이기스토스는, 아르고스의 노인네들의 질책이 오르페우스의 우아하고 설득력 있는 음악과 달리, 비루하고 오히려 사람들을 노엽게 만든다고 비웃음. 그리고 이딴 식으로 계속 딴지를 걸면 혼을 내주겠다고 하며 자신의 권력 의지를 천명함.

 

한 가지 주목할 부분은, 진은영이 부제로 인용한 구절은 ……이끌었지만부분까지인데, 진은영이 인용한 번역서를 확인하지 못해 단언하지는 못하겠지만, ‘……이끌었지만이라는 구절의 뉘앙스는 다음과 같다고 해석해 봄.

 

a) 그대(=코로스장=아르로스의 노인=시인 진은영의 자기 투영)의 혓바닥은 오르페우스보다 못함. , 미학적으로 우수하지 못하고 거칠고 비루하다는 자책감이 엿보임. 이를 약간 과장하여 해석하면 세월호에 대한 자신의 시가 미학적으로 우수하지 못하다는 시인 자신의 자책이 엿보임.

b)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끌었지만=이끌었다+그렇지만이라는 구절의 뉘앙스는 오르페우스의 잘린 머리가 노래하듯, 자신의 시가 비록 거칠고 비루하더라도 마땅히 질책해야 할 것을 질책하겠다는 다짐이 엿보임.

   


7.

다음으로 <조직생활자> 본문에 대해 살펴보겠음. 이와 관련하여, 배경지식으로 알아둬야 할 것이 있음. 즉, 세월호 사건 이후 이를 규명하기 위한 여러 활동이 있었고, 진은영이 여기에 적극 참여하였다고 스스로 밝힌 사실이 그러함.

 

 

그날 이후, 사람을 생각할 때 내 모든 기준은 세월호가 되었다. 정치가이든, 친구이든, 가족이든, 세월호는 지금까지의 내 삶에서 가장 명확한 기준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 글을 읽으며 지난 3년간 나 역시 비슷한 심정이었음을 깨달았다.

 

몇년 전, 내가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치적 사안에 대해 조금 더 차가워지고 싶다고 말했던 동료의 미지근함에 서운함을 느낀 적이 있다. 그런데 세월호 참사에 대해 그는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고 열심히 움직였다.


출처 : 세월호 기고, ‘무능력의 정치학을 넘어서’, 진은영, 한겨레신문 2017.3.27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788189.html)

 

 

위 글은, 시인이 한겨레 신문에 기고한 글임. 그리고 세월호를 둘러싼 규명 활동이 여럿 있었는데, 이를테면 201510월의 ‘416 인권선언 원탁회의및 도심에서의 촛불시위 등이 있었음.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쫓겨난 적 있는 사람들, 쫓겨날 위기에 놓인 사람들이 모여 존엄과 안전의 권리에 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난 14, 인권재단 사람 대회의실에서 작은 토론이 열렸다. 좀처럼 발언권을 갖지 못했던 사람들이 1017 빈곤철폐의 날 조직위원회 주최의 가난한 이들의 존엄과 안전을 위한 416 인권선언 원탁회의를 연 것이다.

 

살면서 겪은 존엄 박탈과 인권 침해 경험에 관해 묻고, 세월호 참사와 내 삶의 연관에 관해 물었다. 마지막으로 나의 존엄과 안전이 지켜지는 데 필요한 권리를 물었다.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자신들에게 사정없이 가해진 차가운 시선과 폭력의 경험들이 공통으로 있었고, 겨우 일어서려 했을 때 한계와 허점투성이인 사회복지 제도와 일자리 정책 속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불안한 삶을 이어가는 현실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세월호 참사를 '사람들을 불안 속에서 떨게 하는 사회 구조의 문제' 속에서 이해했다.

 

존엄·안전·인권. 빼앗기는 것이 일상인 이들에게는 너무나도 낯선 단어들이다. '그 누가 노점상을 하고 싶어 하느냐'는 가사처럼, 노점상, 철거민, 홈리스 모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수이되 존재해서는 안 될 사람으로 여겨져 왔다.

 

법과 제도는 한 번도 내 편인 적이 없었기에 무작정 싸우는 수밖에 없었고 누군가는 이들을 '떼잡이'라 불렀다. 몇 해 전 한 유명인사가 '노숙인은 수치심이 마비된 존재'라 말한 적이 있다. 그의 수치심이란 어떤 수준 이상의 인간 생존 조건 위에서 갖춰질 수 있는 것이란 착각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가. 생존을 위해 악다구니를 쓰고 싸워야만 하는 사람들, 바닥에 내던져져 아무런 가림막 없이 밥을 먹고 잠을 청하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는 수치심이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라는 무조건적인 것이다.

 

세월호 참사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 진은영 시인은 "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 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고 말했다. 그 수치심을 다른 말로 인간으로서 품위를 잃지 않기 위한 노력이라 표현해볼 수 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그 품위의 범주는 이 사회가 보장하는 법과 제도의 테두리에 한정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법과 제도에 의해 도저히 보호받을 수 없는 처지에 놓인 사람이 행하는 저항에 눈살을 찌푸리거나 견제하기도 한다.

 

'가난한 이들의 존엄과 안전을 위한 416 인권선언 원탁회의'에 모인 사람들은 가라앉은 세월호를 끌어올리기 위한 과제와 나의 삶을 끌어올리기 위한 요구를 함께 고민했다. 바닷속에 가라앉은 세월호에서 사람들은 목숨을 잃었다. 우리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졌어도 발 딛고 일어설 땅이 있다. 이렇게 함께 모이는 사람들이 있기에, 진도앞바다에 가라앉은 세월호를 끌어올리고 세월호의 진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끌어올리기 위한 싸움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 출처 : 가라앉은 세월호와 우리 삶 오마이뉴스 2015.10.28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54954)

 

 

세월호 이후 여러 활동이 있었고 시인은 여기에 적극 참여한 것으로 보임. 따라서 <조직생활자>란 시의 제목은 세월호에 대한 진상규명 혹은 이를 확대한 여러 조직에서, 마치 1970~80년대 노동운동의 운동가들이 조직생활을 한 것처럼 시인 역시 지속적으로 조직적 규명 활동을 한 것에서 붙여졌다고 짐작할 수 있음. 그리고 조직생활의 흔적은 시의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발견됨.

 

 

  커튼이 아니다. 나는 드리워져 있지 않다. 해 드는 일 없는 작은 창문 위에. 추위와 고독에 맞서지 않는다. 폐쇄적이지 않다 결코.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다 흔들리는 빌딩들 사이 외줄에. 균형을 잡으려고. 완강한 거부의 몸짓으로. 나는 열려 있다. 아무도 숨겨줄 수 없다 나 자신조차도.

   부정의 십자가. 완전한 항복이오. 찔린 옆구리에서, 막 생겨난 새하얀 두 다리를 따라 자의식의 검은 피가 흘러내렸소. 모두 빠져나갔다 회합의 골고다 언덕 사이로. 둥근 돌 모양의 회의 탁자 하나. 손가락과 입술이 빠르게 회전한다. 나는 늘 떠나가는 사람, 거기 남아 있는 것처럼 교묘하게

 

        어디로든 떠나지 못하고

        나는 존재한다 푸른 액자 속에

        상반신만 그려진 인물처럼

 

 

시인은 세월호 규명을 위한 여러 조직에서 회의에 참여했을 것임. 그 조직은 회의뿐만 아니라 각종 시위도 했음. 그러나 사건 초기의 추모 열기와 달리, 진상 규명을 방해하는 보수언론과 보수세력의 공세가 슬슬 시작되었음. 세월호 사건 자체와 유족들을 둘러싼, 차마 입에 담지 못한 악의적 소문이 들리기 시작했고, 이후 세월호 얘기가 지겹다는 말이 공개적으로 확산되었음.

 

이 글을 쓰기 위해 당시 시위를 기록한 유튜브 영상을 몇 개 찾아봤는데, 시위 장소와 건물들에는 커튼처럼 드리워진 걸개 그림과 프랜카드, 깃발과 만장이 있었음. 모두들 알다시피 커튼은 뭔가를 감추고 숨기고 분리하는 기능을 가짐. 그러나 시인에게서 세월호에 대한 진실 규명을 호소하는 걸개 그림, 프랜카드, 깃발, 만장들은 커튼이 아님. 그래서 시인은 커튼이 아니다. 나는 드리워져 있지 않다라고 했을 것임.


다른 한편으로 시인은, 시인으로써 세월호 사건을 관찰하고 이를 작품화하려는 예술가로서의 자신과, 이러한 이해 관계 없이 온전히 고통받는 자들 속에 녹아들고자 하는 자아 사이에 커튼이라는 분리막을 치지 않으려는 의지도 가지고 있었을 것임. 따라서 시에서 커튼’은 다양한 복합 심상으로 읽힐 수 있음.  


한편 당대의 정치 권력에 맞서 진실을 규명하는 것은 지난한 일임. ‘해 드는 일 없는 작은 창문이나 추위과 고독에 맞서지 않고 (그것을 온전히 감내하는 것)’, ‘결코 폐쇄적이지 않으려고 하는 것회합의 골고다 언덕이나 둥근 돌 모양의 회의 탁자와 같은 조직 생활과 호응하며, 시인의 진상 규명을 위한 조직생활의 어려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줌.

 

특히 둥근 돌 모양의 회의 탁자라는 표현은 의미 심장함. 진은영 시의 다른 기독교적 상징 장치처럼, ‘이라는 비유는, 신약성서에서 유래된 심상으로 보여짐.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9:39~40

 

 

예수가 구원자로써 제자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올 때 민중들은 기뻐 소리치며 환호함. 그러자 당시의 기득권층이었던 바리새인들은 너무 시끄럽다며 예수에게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조용히 시키라고 비난함. 사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올수록 벌벌 떨고 있었기에 여러 가지로 훼방을 놓고 있었음. 그러자 예수는 이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라고 맞받아침. 돌은 입이 없음. 혀도 없음. 성대도 없음. 그런데 침묵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침묵하면, 혹은 소리쳐야 할 사람들은 강제로 침묵하게 하면, 이런 무생물인 돌들이 나서서 소리칠 거라고 당대의 권력계급을 비판한 것임.

 

세월호 진상 규명을 위한 여러 단체들의 활동과 관련하여, 사건의 본질을 축소하거나 왜곡하고 때로는 침묵을 강요받았음. ‘세월호는 본질적으로 해상 교통사고일 뿐’, ‘세월호 구조를 위해 정부를 할만큼 했다. 단지 운이 나빴을 뿐’, ‘이렇게 나라를 시끄럽게 하는 것은 북한에게나 유리한 종북 좌파 행위같은 소리들은 그런 것인데, 이런 게 바로 예수의 복음을 두려워 하고 비난했던 바리새인들의 심리상태임. 그리고 결국 예수는 이들에 의해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올려지게 됨.


다음으로 이 시에 담긴 시인의 시적 정신(의지)의 긴장에 대해 살펴보겠음.

 

우선 시인의 시적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인식단계에 대한 표현을 먼저 살펴보겠음.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에는 몸통에서 뻗어나가는 손가락이나 발가락’, 혹은 다리’, ‘무릎과 같이, 몸통과 연결된 신체 부위들이 등장함. 난 개인적으로 진은영의 시에서 이런 신체 기관은 시적 착상을 얻게 되는 1차적 감각 행위를 상징한다고 보고 있음. 예를 들어 첫 번째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있음.

 

 

<긴 손가락의 >

 

시를 쓰는 건

내 손가락을 쓰는 일이 머리를 쓰는 쓰는 일보다 중요하기 때문. 내 손가락, 내 몸에서 가장 멀리 뻗어나와 있다. 나무를 봐. 몸통에서 가장 멀리 있는 가지처럼, 나는 건드린다, 고요한 밤의 숨결, 흘러가는 물소리를, 불타는 다른 나무의 뜨거움을.

 

모두 다른 것을 가리킨다. 방향을 틀어 제 몸에 대는 것은 가지가 아니다. 가장 멀리 있는 가지는 가장 여리다. 잘 부러진다. 가지는 물을 빨아들이지도 못하고 나무를 지탱하지도 않는다. 빗방울 떨어진다. 그래도 나는 쓴다. 내게서 제일 멀리 나와 있다. 손가락 끝에 시간의 잎들이 피어난다.

 

 

즉, 시인에게서 손가락 혹은 발가락, 다리, 무릎과 같은 몸통의 부속 기관은 이성으로 이해하기 이전의(=머리를 쓰는 일 이전의), 원초적 감각에 의해 외부의 정보가 감각적으로 수용되는 것을 뜻함. 이에 따라 시의 본문에서 막 생겨난 새하얀 두 다리를 따라라는 표현은 시인의 시적 착상을 얻게 되는 감각의 프로세스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함. 그런데 이러한 시인의 의지는 자의식의 검은 피가 흘러내렸소로 이어짐. , 시인의 시적 착상에 따른 창작 행위는 어떤 한계 내지 실패로 이어진 것으로 보여짐.


이밖에 시의 본문에는 자신의 확실한 시적 주관을 갖지 못한 시인 자신의 아노미가 관찰됨. 예를 들어 :

 

 

아무도 숨겨줄 수 없다 나 자신조차도.’,

부정의 십자가. 완전한 항복이오. 찔린 옆구리에서,’

막 생겨난 새하얀 두 다리를 따라 자의식의 검은 피가 흘러내렸소.’

모두 빠져나갔다’,

나는 늘 떠나가는 사람, 거기 남아 있는 것처럼 교묘하게

 

 

그리고 특히 일정한 여백을 앞에 품고 쓰인 마지막 연이 그러함. 마지막 연 각 행의 앞부분의 여백은 시인 자신의, 자의식에 대한 메타인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됨.

 

   

            어디로든 떠나지 못하고

            나는 존재한다 푸른 액자 속에

            상반신만 그려진 인물처럼

 

 

이 점을 좀더 살펴보겠음. 진은영은 2014년 문학동네 가을호의 세월호 추모 특집에 <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 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는 글을 실음.

 

이 글에서 시인이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감정은 수치심.

 

 

고통받는 이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대신 그 고통 앞에서 수치심을 느껴라. 연민이란 참으로 게으르고 뻔뻔한 감정이다.’ 상식적 관점에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주장이다. 그러나 수전 손택 역시 비슷한 생각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어떤 이미지들을 통해서 타인이 겪고 있는 고통에 상상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텔레비전 화면에서 클로즈업되어 보여지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특권을 부당하게 향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일련의 연결고리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준다.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진은영, <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 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 2014년 문학동네 가을호의 세월호 추모 특집 중에서

   


시인은 이 글에서 연민이란 정서 상태를 매우 부정적으로 보고 있음. 즉, 글 전체의 맥락을 살펴보면, 고통받은 이를 불쌍하게 여기는 것은 이들에게 대한 시혜(이를테면 보상금, 취업지원, 대학진학혜택 등이 되겠다.)로 연결되고, 막상 시혜가 베풀어지면 이는 사회 구성원의 죄책감 희석 혹은 해소로 이어지기 때문이라고 봄. 반면 수치심을 느끼는 것만이 고통받는 이들과 동조할 수 있는 가능성의 길이라고 봄.

 

언젠가 진은영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함.

 

 

Q. 프락시스를 강조하는 것도 예술에 대한 하나의 입장에 불과한 것 아닌가.

 

A. “철학자 칸트는 무인도에 버려진 사람은 자신의 움막을 아름답게 꾸미지 않는다고 했다. 미적인 것은 사회에서만 관심거리, 미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사교성에 근거한다는 얘기다. 자발적인 미적 활동의 결과는 그래서 타인과의 소통, 공감으로 이어진다. 내 경우 어느 순간 스스로 예술의 노예가 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좋은 작품을 쓰는 게 너무 중요한 일이라서 아무 데도 안 나가고 쓰는 데 집중하는 시간을 늘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며 살았다. 내 삶이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이 예술 때문에 오히려 차단당한다는 느낌? 그런 식의 예속이 한 개인의 삶에서 과연 의미 있는 일인가, 그런 회의가 있었다.


누구나 시 쓸 수 있다. 세월호 상처도 글 쓰기로 치유 가능중앙일보 2019.6.15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497290#home)

 

 

사실 시 <조직생활자> 전반에는, 시인의 시적 의지의 발동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벽에 의해 시적 성취가 한계에 봉착한다는 시인 스스로의 자의식을 보여주고 있음. 이는 위에서 인용한 진은영의 글과 인터뷰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시인 자신의 수치심예술 때문에 오히려 차단당한다는 느낌에 기인한 것이라고 보여짐.

 

, 고통받는 이에 대한 섣부른 연민과 동정은 시혜로 연결되어 구조적으로 실패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데, 이에 따라 시인은 수치심전략을 취할 수밖에 없음. 그런데수치심역시도 시 작품의 창작과 관련해서는, 정말 잠깐이라도 균형을 잃게 되면 쉽게 도구화될 우려가 있기 때문임. , 한 마디로 고통받는 이를 위한 시적 접근이 자칫하면 스스로 예술의 노예가 되고 마는 현상을 초래할 수 있는 것임.

 

그러므로 시인은 두 팔을 벌리고’ ‘흔들리는 빌딩들 사이 외줄에. 균형을 잡으려고노력하고, ‘(나는 커튼이 아니라고, 드리워져 있지 않다고) 완강한 거부의 몸짓으로’ ‘열려 있고자 하지만 도대체 숨겨줄 수가 없는 것임. 왜냐하면 고통받는 자 그 자체인 희생자 혹은 유가족과 달리, 시인 진은영은 아무리 조직생활을 성실히 한다고 해도 결국 돌아갈 가족이 있고, 돌아갈 집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임. , 진은영은 본질적으로 조직에 있어 거기 남아 있는 것처럼 교묘하게’ ‘늘 떠나가는 사람이 되는 것임.

 

그리고 각각의 여백(침묵) 다음에 쓰여지는 마지막 연은, 돌아갈 가족과 집이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 그렇게 돌아간 가족과 집조차도 완전히 돌아가는 곳이 아님을 인식하는 시인의 존재 상태 보여줌. 즉, 시인은 늘 떠나가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즉 어디로든 떠나지 못하고/ 나는 존재한다는 것임.

 

이렇게 하여 시인의 상태는 푸른 액자 속에박제되는, 상반신만 그려져 인물이 되는 것임. 참고로, 여기서 푸른 색은 시집의 전반에서 어떤 역사적 사건이 펼쳐지는 현장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음.

   


너는 책상에 기대어

여기는 바다처럼 푸른 바다이며

푸른색으로 뛰어들어 나는 고통의 잠수부가 되었다

쓰는 대신 (<방을 위한 엘레지> 중에서)

   


한편 상반신만 그려진다는 의미는, ‘막 생겨난 새하얀 두 다리를 잃는 몸통을 뜻하며, 이는 시의 창작을 위한 시인의 감각의 소멸 혹은 ‘현상학적 판단 중지’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됨.

 

따라서 마지막 연의 의미는, 성실한 조직생활에도 불구하고 시인 자신은 결코 희생자나 유족이 될 수 없고, 그렇다고 일상인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시인의 자의식이 세월호 사건이 발생한 역사적 사건의 푸른 액자 속에시 창작의 감각도 잃고 박제되는 어떤 실존적 상황을 보여준다고 생각됨. 이게 세월호와 관련된, 혹은 세월호에 대한 시를 쓰는 시인의 딜레마라고 보여짐.


평론가 김형중은 세월호 3주기 특별강연에서 아가멤논, 오르페우스 등을 논거로 활용해 <문학과 애도>라는 강연을 했다고 함.

 


―  출처 : http://www.paideia.re.kr/boards/media/270/page/3

 

 

신형철 혹은 이광호와 다르게 김형중은 또 어떤 의미로 아가멤논과 오르페우스를 해석했는지 궁금한데, 해당 글이 문서화되지 않아 확인할 길이 없었음. 대신 김형중이 쓴 다른 글의 일부를 인용해 봄.

 

 

세월호 참사는 그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온 국가와 법 같은 근거’(ground) 들을 모두 의심에 부치도록 만든 사건이었다. 문학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참사 이후 한국문학은 일종의 다변적 실어증을 앓고 있다. 사건은 재현 불가능한 형태로 발생하고 그래서 항상 문학의 재현능력을 무력화시킨다.

 

그러나 유럽의 수용소 문학논의에서 자주 언급되었던 것처럼, 문학은 언어적 재현이 불가능한 대상을 어떻게든 언어화해야 한다는 모순적인 압박 속에서 활로를 모색할 수밖에 없다. 이를 본고에서는 문학의 기억술이라 명명했다.

김형중, <문학과 증언 : 세월호 이후의 한국문학>, 감성연구12, 31~32

 

 

김형중의 지적처럼, 진은영은 이번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전반에서 세월호에 대한 기억술을 보여주고 있음. 그리고 여러 평론가들이 지적한 것처럼 시인은 세월호의, 세월호에 의한, 세월호를 위한다변에도 불구하고 어떤 의미로는 실어증을 앓고 있다고 봄. 이는 언어적 재현이 불가능한 대상을 어떻게든 언어화해야 한다는 모순적 압박때문일 것임.

 

이런 재현불가능성과 재현에 대한 욕구(필요성)의 팽팽한 긴장감 사이에서 시인은 어디로든 떠나지 못하고 푸른 액자 속에 상반신만 그려진 인물처럼 존재하는 것임. 혹은 흰 무릎으로 기어서 도달할 수 있는, 커튼처럼 드리워져 너울거리는 은유의 옷이 아니라, 은유의 살갗을 벗기면 영혼이 찢어지는 그런 것이 되는 것임.


즉, 재현불가능한 어떤 참혹한 역사적 사건을 다룰 때 시인의 언어는 은유의 액자로 박제되거나 혹은 (은유의 액자가 벗겨지는 순간) 영혼이 찢기게 되는 것임.

   


무릎, 넌 기어서 어디로 가는 거니

진실이 어서 세상으로 나오기를

(중략)

얘야, 그런 순간이 오겠지?

(중략)

그때까지

우리는 의심의 회색사과를 나눠 먹을 거야

(중략)

진실이여, 너에게 주고 싶다

너울거리는 은유의 옷이 아니라

은유의 살갗을

 

벗기면 영혼이 찢어지는 그런 거 (<아빠> 중에서)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은영은 아르고스 궁전 지붕 위에 엎드린 개와 파수병으로서, 목이 잘린 채로 노래하는 오르페우스로서, 언제고 분명히 닥쳐올 미래를 예언하고 있으나 아무도 그 말을 믿어주지 않는 캇산드라로서, 2022년의 한국에서 살아 숨쉬는 시인으로서, 노래를 멈추지 않을 것임. 왜냐하면 언어적 재현이 불가능한 어떤 참혹한 역사적 사건을 문학적으로 온전히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부단한 시도를 통해 죽음에서 소생하는 시적 진실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임. 바로 이것이 시가 가지고 있는 가장 의미 있는 장점 중의 하나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기 때문일 것임.





3줄 요약


1.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는 세월호의, 세월호에 의한, 세월호를 위한 초혼이다.

2. 시 <조직생활자>에는 세월호 진상규명에 대한 시인의 의지와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에 대한 시인 자신의 자의식이 담겨 있다.

3. 언어적 재현이 불가능한 대상을 어떻게든 언어화해야 한다는 모순적 압박을 통해 우리는 부단히 죽음에서 소생하는 시적 진실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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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도의 멸종 - 기온이 1도씩 오를 때마다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
마크 라이너스 지음, 이한중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이 책이 대만을 모두 타이완으로 바꿔 유명해진 책인가요?

https://theqoo.net/1683609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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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 평범한 나날을 깨워줄 64가지 천재들의 몽상
김옥 글.그림 / arte(아르테)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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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야 뜸하지만 어렸을 땐 헌책방 쏘다니는 게 큰 기쁨이었다. 막 독서를 시작하는 입장에서 신간으로 구입하지 못하는 책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내게 헌책방은 이전 세대에 나온 책과 만나는 설레이는 데이트 공간이었던 셈. 그런데 책을 고르다보면 자주 밑줄이 그어져 있는 책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단상을 책의 여백에 정성껏 기록해둔 글귀들도. 그러면 난 깨끗한 새책보다는 기꺼이 그렇게 밑줄이 그어져 있거나 메모가 된 책을 고른다. 깨끗한 새책이라면 느끼지 못할 연대감이랄까, 어떤 종류의 동류의식을 메모에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언젠가 청하에서 나온 니체의 <선악의 피안>을 중고로 구한 적이 있었는데 그 책에는 자를 대고 그은 밑줄과 단정한 글씨로 적은 단상이 있었다. 난 그 책을 읽으면서 혼자라면 무심코 그냥 치나쳤을 대목을, 밑줄이 그어져 있다는 이유로 되풀이 읽곤 하였다. 그리고 내가 놓칠 뻔한 중요한 착상을 그 단정한 밑줄에서 발견하곤 했다. 즉, 내게는 책의 이전 소유자가 꽤나 까탈스러운 선배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아니면 멋진 소개팅 상대이거나.

약간 맥락이 다르지만, 위와 같은 이유에서 책이나 영화에 대한 감상을 담은 에세이집을 좋아하는 편이다. <내가 읽은 책(혹은 영화)을 다른 사람은 어떻게 읽었을까(보았을까)>라는 호기심 때문이랄까. (그리고 새로운 정보도 얻고.) 그러나 가장 중요한 미덕은 타인의 감상에서 따뜻한 연대감과 함께 배움을 얻는 것이리라. 어제 읽은 김옥 작가의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도 그러한 발견의 기쁨을 주는 에세이였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으면 ‘아, 나도 이런 생각을 한 적 있어’ 하고 동질감을 느낀다.

‘그녀’ 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그, 그녀, 그남, 그녀. ‘그 여자’를 가리키고 싶은 나는 갑자기 무슨 단어를 사용해야 할지 머뭇거려진다. 나의 머릿속은 ‘그녀’를 먼저 떠올리지만, 문득 불편한 무엇과 마주치게 된다. 나는 ‘그 남자’를 ‘그남’이라고 사용하지는 않는다.(p.90) 이건 영화 <어톤먼트>에서 세실리아가 담배 피우는 모습을 얘기하면서 인칭대명사에 있어 성차를 얘기하는 대목인데 나 역시 같은 생각을 했기에 어떤 종류의 부드러운 안도감을 느꼈다. 그렇다면 이런 대목은 어떨까?

갑자기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왜 여자 어린이는 비키니 수영복을 입을까? 사춘기 이전의 여자 어린이는 젖가슴이 발달하지 않아 굳이 가슴을 가릴 필요가 없는데도 말이지. 만약 남자도 평소 브래지어를 입거나 비키니 수영복을 입어왔다면 어떨까? 남자의 상반신 누드는 아주 야해 보이지 않을까? (p.204) 이건 모델 프레야 베하의 사진에 대한 글에서 등장한다. 나 역시 왜 여자 어린이가 비키니 수영복을 입는지 궁금해한 적 있다. 나는, 이를 성차의 문제로까지 확장시켜 생각하지 않았는데 작가의 단상에서 새로운 문제의식을 배우게 되었다.

이처럼 작가는 자주 여성의 시각에서 예술의 프리즘을 통해 사회에 내재된 성의식을 들여다본다. 말했다시피 남성인 나는 그런 시각에서 배움을 얻는다. 한 가지 더 사례를 들자면 이런 거다. 작가는 ‘여성의 게이 사랑이 문화계에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이렇게 여성이 남성들 간의 동성애에 매료되는 이유는 뭘까?’(p.225)라 고 스스로 질문하고 있는데 사실 이건 곧 나의 질문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에 대한 답을 메튜 본의 발레 <백조의 호수> 대한 단상을 통해 찾는다. (메튜 본은 동성애 코드를 활용한 현대극으로 <백조의 호수>를 재해석 했다고 한다. 기회가 되면 보고 싶다.)

‘만약 그들이 모두 남성이 된다면? 감정이입한 여성들은 어느새 왕자가 되고, 백조가 되고, 흑조가 된다. 잘생긴 왕자를 사랑하고, 고결한 남자 백조를 사랑하고, 나쁜 남자 흑조를 사랑할 수 있다. 발레 무대에서는 세 남성 간의 사랑이지만 그들을 어떤 여자에게도 빼앗기지 않음으로, 나의 남자들로 간직할 수 있는 것이다.’(p.229) 이게 작가의 잠정적인 답인데 나름대로 여성들이 BL에 빠지는 이유로 진단하고 있다. 나로서는 꽤나 수긍이 가는 결론이었다.

이처럼 이 책은 영화, 소설, 미술, 사진, 발레, 그리고 인형과 같은 오브제 등에 걸쳐 여성이 예술과 사회를 대하는 시선을 일러스트와 더불어 보여준다. 몇 군데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부분을 옮겨둔다.






 
Post Script


1.
영화나 책에 대한 에세이집을 읽다보면 항상 부딪치는 문제인데, 작품의 반전을 드러내는 스포일러는 미리 주의를 주거나 살짝 비껴갔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예를 들어 이 책에는 SF영화 <로건의 탈출>이 등장하는데(내가 무척 좋아하는 작품이 소개되어서 반가웠다) 이 작품의 중요한 반전이 에세이 속에 그대로 등장한 것이다. 사실 영화의 이 반전은 마치 <식스 센스>처럼 노출되지 않아야 의미가 있는데 만약 이 책을 읽고 영화를 찾아보는 사람이라면 좀 실망할 수 있을 터다. (음, 이렇게 적고 보니, 반전을 얘기하지 않고서는 호소력 있는 에세이를 쓰기 어렵겠단 생각이 들기도 한다. 반전을 숨기자니 글이 추상적이 될 테고 그렇다고 그대로 노출해버리면 나중에 작품을 찾아 보는 재미가 덜어진다. 글의 서두쯤에서 <나중에 작품을 찾아볼 의향이 있는 분은 읽지 말고 일단 참으시오>라고 경고문이라도 적어두는 게 최선일까? 딜레마다.)

2.
이 책을 읽는 재미 중의 하나가 작품을 소개하는 소제목이다. 예를 들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 <롤리타>를 소개하면서 <어린 미국에 정착하고 싶었던 늙은 유럽>이란 소타이틀을 달았는데 작품의 핵심을 짚어내는 참 재치 있는 소개였다. 더불어 (당연하겠지만) 원작을 재해석하는 일러스트를 감상하는 기쁨도 크다. 예를 들어, 오토 딕스의 <성냥팔이>를 작가가 다시 그린 일러스트나(p.232) 사진을 다시 그린 일러스트는 이 책을 보는 기쁨을 배가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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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 평범한 나날을 깨워줄 64가지 천재들의 몽상
김옥 글.그림 / arte(아르테)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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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야 뜸하지만 어렸을 땐 헌책방 쏘다는 게 큰 기쁨이었다. 막 독서를 시작하는 입장에서 신간으로 구입하지 못하는 책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내게 헌책방은 이전 세대에 나온 책과 만나는 설레이는 데이트 공간이었다. 그리고 책을 고르다보면 자주 밑줄이 그어져 있는 책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단상을 책의 여백에 정성껏 기록해둔 글귀들도. 그러면 나는 깨끗한 새책보다는 기꺼이 그렇게 밑줄이 그어져 있거나 메모가 된 책을 고른다. 깨끗한 새책이라면 느끼지 못할 연대감이랄까, 어떤 종류의 동류의식을 메모에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언젠가 청하에서 나온 니체의 <선악의 피안>을 중고로 구한 적이 있었는데 그 책에는 자를 대고 그은 밑줄과 단정한 글씨로 적은 단상이 있었다. 난 그 책을 읽으면서 혼자라면 무심코 그냥 치나쳤을 대목을, 밑줄이 그어져 있다는 이유로 되풀이 읽곤 하였다. 그리고 내가 놓칠 뻔한 중요한 착상을 그 단정한 밑줄에서 발견하곤 했다. 즉, 내게는 책의 이전 소유자가 꽤나 까탈스러운 선배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아니면 멋진 소개팅 상대이거나.

약간 맥락이 다르지만, 위와 같은 이유에서 책이나 영화에 대한 감상을 담은 에세이집을 좋아하는 편이다. <내가 읽은 책(혹은 영화)을 다른 사람은 어떻게 읽었을까(보았을까)>라는 호기심 때문이랄까. (그리고 앞으로 보고 싶은 작품에 대한 정보도 얻고.) 그러나 가장 중요한 미덕은 타인의 감상에서 따뜻한 연대감과 함께 배움을 얻는 것이리라. 어제 읽은 김옥 작가의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도 그러한 발견의 기쁨을 주는 에세이였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으면 ‘아, 나도 이런 생각을 한 적 있어’ 하고 동질감을 느낀다.

‘그녀’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그, 그녀, 그남, 그녀. ‘그 여자’를 가리키고 싶은 나는 갑자기 무슨 단어를 사용해야 할지 머뭇거려진다. 나의 머릿속은 ‘그녀’를 먼저 떠올리지만, 문득 불편한 무엇과 마주치게 된다. 나는 ‘그 남자’를 ‘그남’이라고 사용하지는 않는다.(p.90) 이건 영화 <어톤먼트>에서 세실리아가 담배 피우는 모습을 얘기하면서 인칭대명사에 있어 성차를 얘기하는 대목인데 나 역시 같은 생각을 했기에 어떤 종류의 부드러운 안도감을 느꼈다. 그렇다면 이런 대목은 어떨까?

갑자기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왜 여자 어린이는 비키니 수영복을 입을까? 사춘기 이전의 여자 어린이는 젖가슴이 발달하지 않아 굳이 가슴을 가릴 필요가 없는데도 말이지. 만약 남자도 평소 브래지어를 입거나 비키니 수영복을 입어왔다면 어떨까? 남자의 상반신 누드는 아주 야해 보이지 않을까? (p.204) 이건 모델 프레야 베하의 사진에 대한 글에서 등장한다. 나 역시 왜 여자 어린이가 비키니 수영복을 입는지 궁금해한 적 있다. 나는, 이를 성차의 문제로까지 확장시켜 생각하지 않았는데 작가의 단상에서 새로운 문제의식을 배우게 되었다.

이처럼 작가는 자주 여성의 시각에서 예술의 프리즘을 통해 사회에 내재된 성의식을 들여다본다. 말했다시키 남성인 나는 그런 시각에서 배움을 얻는다. 한 가지 더 사례를 들자면 이런 거다. 작가는 ‘여성의 게이 사랑이 문화계에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이렇게 여성이 남성들 간의 동성애에 매료되는 이유는 뭘까?’(p.225)라고 스스로 질문하고 있는데 사실 이 질문은 곧 나의 질문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에 대한 답을 메튜 본의 발레 <백조의 호수> 대한 단상을 통해 찾는다. (메튜 본은 동성애 코드를 활용한 현대극으로 <백조의 호수>를 재해석 했다고 하는데 기회되면 보고 싶다.)

‘만약 그들이 모두 남성이 된다면? 감정이입한 여성들은 어느새 왕자가 되고, 백조가 되고, 흑조가 된다. 잘생긴 왕자를 사랑하고, 고결한 남자 백조를 사랑하고, 나쁜 남자 흑조를 사랑할 수 있다. 발레 무대에서는 세 남성 간의 사랑이지만 그들을 어떤 여자에게도 빼앗기지 않음으로, 나의 남자들로 간직할 수 있는 것이다.’(p.229) 이게 작가의 잠정적인 답인데 나름대로 여성들이 BL에 빠지는 이유를 진단하고 있다. 나로서는 꽤나 수긍이 가는 결론이었다.

이처럼 이 책은 영화, 소설, 미술, 사진, 발레, 그리고 인형과 같은 오브제 등에 걸쳐 여성이 예술과 사회를 대하는 시선을 일러스트와 더불어 보여준다. 그런 그렇고 몇 군데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부분을 옮겨둔다.






 
Post Script


1.
앞서 말했다시피 이 책에는 많은 예술작품이 등장한다. 특히 영화의 경우 영화를 좋아하는 나로서도 생소한 작품들이 등장하여 깜짝 놀랐다. 다만, 작품의 표기에 있어 오타가 난 부분이 있는데 재판을 찍게 되면 수정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영화 <귀여운 반항아>의 원제로 적힌 <L’dffrontee>는 <L’dffrontée> 오타이다. 좀 더 까탈스러운 지적을 하자면 독일권 작가인 오토 딕스의 <성냥팔이>는 <The Match Seller>라는 영문보다는 원어인 <Der Streichholzhändler>로 표기해주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 더불어 오토 딕스의 생몰연도(1981-1969→1891-1969)에도 오타가 있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불어판 번역제목인 <L'Insoutenable légèreté de l'être> 보다는 체코어<Nesnesitelná lehkost bytí>로 표기해야 할 것이다. 이 소설의 원제가 불어로 알려진 것은, 1984년 번역서가 원서보다도 먼저 프랑스에서 출판되었기 때문이다. (체코어 원서는 프랑스판보다 1년인가 후에 출판)

2.
영화나 책에 대한 에세이집을 읽다보면 항상 부딪치는 문제인데, 작품의 반전을 드러내는 스포일러는 미리 주의를 주거나 살짝 비틀었으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예를 들어 이 책에는 SF영화 <로건의 탈출>이 등장하는데(내가 무척 좋아하는 작품이 소개되어서 반가웠다) 이 작품의 중요한 반전이 책속에 그대로 등장한 것이다. 사실 영화의 이 반전은 마치 <식스 센스>처럼 노출되지 않아야 의미가 있는데 만약 이 책을 읽고 영화를 찾아보는 사람이라면 좀 실망할 수 있을 터다. (음, 이렇게 적고 보니, 반전을 얘기하지 않고서는 호소력 있는 에세이를 쓰기 어렵겠단 생각이 들기도 한다. 반전을 숨기자니 글이 추상적이 될 테고 그렇다고 그대로 노출해버리면 나중에 작품을 찾아 보는 재미가 덜어진다. 글의 서두쯤에서 <나중에 작품을 찾아볼 의향이 있는 분은 이 꼭지를 건너뛰시오>라고 경고문이라도 적어두는 게 최선일까? 딜레마다.)

3.
이 책을 읽는 재미 중의 하나가 작품을 소개하는 소제목이다. 예를 들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 <롤리타>를 소개하면서 <어린 미국에 정착하고 싶었던 늙은 유럽>이란 소타이틀을 달았는데 작품의 핵심을 짚어내는, 정말 재치 있는 소개였다. 더불어 (당연하겠지만) 원작을 재해석하는 일러스트를 감상하는 기쁨도 크다. 예를 들어, 오토 딕스의 <성냥팔이>를 작가가 다시 그린 일러스트나(p.232) 사진 작품의 일러스트는 이 책을 보는 기쁨을 배가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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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
전영애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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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애 선생님 고맙습니다. 당신과 같은 분이 있어 문학을 항상 곁에 둘 수 있었고 그래서 생을 바라보는 시선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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