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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나쁜 벌레는 없다 - 작은 것들 속에 깃든 신의 목소리
조안 엘리자베스 록 지음, 조응주 옮김 / 민들레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말하자면 그는 한 마리의 모기가 왱왱거리는 것도 견디지 못한다. 그러니 두 마리야 말해 무엇하리. ― 프리드리히 니체, 장희창 역,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민음사, 2004, 306쪽.


여름날 저녁, 바람은 부드럽게 살랑거린다. 경첩이 삐거덕거리고, 현관문이 흔들린다. 뜰에서는 귀뚜라미가 운다. 차츰 성가신 소리가 다가온다. 처음에는 높은 음정으로 윙윙거리는 소리가 드문드문 들렸다. 하지만 차츰 그 소리가 커지고 가까워진다. 갑자기 그 소리가 바로 귀 옆에서 들린다. 사람에게는 그 윙윙거리는 소리가 마치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것과 같이 소름 끼치는 소리로 들린다. 하지만 수컷 모기에게는 그 소리가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들린다. ― 스티븐 하트, <동물의 언어>, 김영사, 1996, 49쪽.


인간으로서의 나와 다른 인간, 우리 민족과 다른 민족의 관계는 인간으로서의 나와 내가 키우는 개나 내 밭을 갈아주는 소나 내 피를 빨아먹는 모기와의 관계보다 깊고 두텁고 짙다. 따라서 나의 윤리적 배려는 모기보다는 소나 개에게, 소나 개보다는 나 이외의 인간에게 상대적으로 더 많이 가야 한다. ― 박이문, <환경철학>, 미다스북스, 2002, 180쪽.


... 모기가 내 주위를 왱왱거리며 귀찮게 할 때 그 모기를 죽이려는 순간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느라고 모기를 놓쳤을 때... ― 달라이 라마, <달라이 라마 하버드대 강의>, 작가정신, 2006, 92쪽.


과연 어떤 종교가 모기를 사랑하라고 가르치겠는가? 딱정벌레를 사랑하는 신은 상상할 수 있겠지만, 도대체 자기보다 작은 존재의 습격을 당해 병이 들고 입이 막혀버리는 숙명을 지닌 모기를 사랑하는 신이 있을 것이라고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병들어 죽어가는 모기가 허기를 채우기 위해 피를 빨다가 입을 막고 있던 기생균을 쏟아내 새로운 숙주에게 옮기는 현상은 도대체 왜 일어나는 걸까? 우리의 피를 필요로 하는 모기를 제대로 보려면 바로 이런 질문들에 답해야 한다. ― 조안 엘리자베스 록, <세상에 나쁜 벌레는 없다>, 민들레, 2004, 238쪽


 

△ 무한한 우주에서 한 마리 모기의 생명은 내 목숨의 무게와 같다.


 


최근에 읽는 책 중에 <세상에 나쁜 벌레는 없다>가 있다. 의미심장한 책이다. 뭐 요새는 다들 제 살기 바빠 하찮은 벌레에게까지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다. 먼 별빛을 보며 우주의 우수와 신비에 대한 꿈을 환기하기보다는 당장의 학교성적이나 취업, 승진과 같은 인생문제들이 더 절실한 법이고,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알에서 막 깨어난 십자매 새끼를 보면서 눈물을 글썽거리는 유치원생의 예쁜 눈망울에서 생명의 기적과 인간의 운명에 대해 묵상하기보다는 당장의 월급 삭감이나 지하철 요금인상과 같은 생활의 문제가 더 가슴에 다가오는 게 현대인들의 일상적인 모습이다.


그렇다. 오늘날은 곁길에 눈을 돌이기 쉽지 않은 무한경쟁의 시대이자, 타인의 죽음보다 내 손톱 밑에 박힌 가시 하나가 더 아쉬운 이기주의의 시대인 것이다. <그래, 내가 먼저 살아야 다음에 남을 돌아볼 정신이 나지 않겠어? 그리고 이왕이면 내가 속한 조그만 공동체(예를 들어 가족이나 민족)를 먼저 챙겨고 그리고도 여유가 남는다면 내가 속한 공동체랑 관계가 없는 그밖의 존재들(우리는 이를 흔히 타자라고 부른다)도 배려해 줄 수 있는 게 아니겠어?>라고 합리화시키는 것이 현대인의 마땅한 가치관이 되어 버렸다. 심지어 윤리학자들도 이렇게 주장하는 판이다.


이런 입장에 따르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어떤 종교창시자의 말은 오늘날, <네 이웃 중 너와 가까운 사람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리고도 여유가 된다면 그밖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라>라고 해석된다.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사랑해야 할 대상에도 차등을 두고, 물론 내게 해가 되는 것은 곧 나의 원수이니 관심을 끊고 타자화해야 하고... 이러한 차등과 차별의 원칙이 곧 현대인의 새로운 계명이 된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은 자연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먼저 인간이 우선이다. 그리고 인간이 잡아 먹거나 이용할 수 있는 소나 돼지, 그리고 꿀벌이 중요하다. 그리고 인간에게 도움이 안 되는 모든 것들은 모두 “타자”이다.


모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모기를 미워한다. 같은 곤충이라도 꿀벌이나 나비는 인간에 대한 경제적인 기여나 혹은 심미적인 아름다움 때문에 환영받는 반면, 모기는 말 그대로 인간에게 백해무익한 해충으로 치부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관점에서 정립된 이러한 평가가 이 우주에서 어떻게 윤리적인 보편성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책을 읽는 내내 떠오르는 의문이었다.


뭐, 이렇게 얘기하곤 있지만, 이 포스트에서 모기를 싸고 돌려는 것은 아니다. 다가 오는 여름밤, 모기가 내 장단지를 문다면 방 안이 이 책에서 얻은 교훈이 안개처럼 뿌옇게 모호해지도록 에프킬라를 뿌려댈지도 모른다. (사실 작년 여름에는 앵앵거리면서 내 콧등을 깨문 모기가 너무나 얄미워서 한밤 중 불을 켜고 기여코 벽 구석에 앉아 있는 모기를 둘둘 만 신문지로 탁 쳐서 죽인 일도 있었다. 깨끗한 벽지에 십 원 짜리의 다보탑만큼 뻘겋게 튄 핏방울이 얼마나 통쾌하던지!) 다만, 어떤 생명은 왜 다른 생명에게 전적으로 해가 되도록 태어났는지 그게 궁금한 거다. 그 존재에게도 어미가 있고 아끼는 새끼가 있고, 본능적으로 살고자 발버둥 치는 몸무림이 있다면 말이다.



모기들은 날면서 소리를 친다

모기들은 온 몸으로 소리를 친다

여름밤 내내

저기,

위험한 짐승들 사이에서


모기들은 끝없이 소리를 친다.

모기들은 살기 위해 소리를 친다

어둠을 헤매며

더러는 맞아 죽고

더러는 피하면서

모기들은 죽으면서도 소리를 친다 (하략)  ― 김형영의 詩, <모기> 일부



그래 가거라

너를 노리는 바람

코를 꿸 향기가 기다릴지라도

가거라

빈 근골(筋骨)에

사람피를 채워 오너라

불빛이

불빛이 감추었던 적막을 세워들고

침묵이

침묵에 감추었던 부수를 꺼내

전신을 가른다 해도

인적(人跡)을 따라 가거라

느닷없는 폭격에

산지사방 흩어질지라도

가거라, 아비가 도울 수 없는

그 길은 스스로 가야 할 길이다.

덧없이 살아보는 빈병처리장에서

때로 죽음은 삶보다 건전한 음모

사람피에 젖은 채

죽어도 그건 사람처럼 죽는 길이다.  ― 신진의 詩, <모기아비가 아기모기에게> 전편(全篇)



위 김형영과 신진의 시는 인간에게 전적으로 해가 되는 존재라는 측면에서 모기의 본질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백해무익한 해충이냐 아니냐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시각에서 그런 거고 사실 본질적인 것은 끊임 없는 세대순환의 숙명적 업(業) 속에서 모기 역시 하나의 생명을 가진 존재라는 점이다. “작은 것들 속에 깃든 신의 목소리”라는 부제가 붙은 <세상에 나쁜 벌레는 없다>는 책은 사람이 모기를 미워하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피를 빨아먹는 곤충은 사람들의 노여움을 산다. 내가 인간과 곤충의 관계에 대한 강연을 한 지난 십 년 동안(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분노가 폭발한 경우가 딱 두 번 있었는데, 두 번 다 모기 때문이었다. 그중 한 번은 이 책의 초판을 발행하고 난 뒤에 라디오 쇼에 출연해서 인터뷰를 하고 있을 때였다. 청취자가 방송국으로 전화를 걸어 사람과 모기 중에서 누가 더 중요하냐고 따졌다. 나는 “그건 잘못된 질문이라고 생각하는데요?”라고 대답했다. 그는 또 다시 내게 대답을 강요했고(목소리를 들어보니 내 대꾸에 혈압이 오른 게 분명했다), 나는 또 다시 대답하길 거부했다. 그런 질문은 “이제는 부인을 때리지 않으시죠?”하고 묻는 것과 똑같다고 말했다. 내가 자신이 유도한 방향으로 대답을 해주지 않자, 그는 내게 종교가 뭐냐고 물었다. 이때 진행자가 개인적 질문은 삼가시라고 말했더니, 그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237쪽)


모기에 대해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기 힘든 이유 중의 하나가 모기한테 물리거나 피를 나눠주기 싫어서다. 모기에 물려 아프고 불편해지는 것을 인간에 대한 공격이자 전쟁 행위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인생을 선과 악의 대결장, 곧 전쟁터로 생각하는 데서 비롯된다. 사실 인류의 모든 전쟁과 다른 종에 대한 전쟁이 이런 인생관의 틀 속에서 이루어진다. (239쪽)



인간은 좀비나 흡혈귀와 같은 가상적인 존재에서부터 수인성 바이러스나 핵무기와 같은 실질적인 위협요소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생명을 해칠 개연성이 있는 것들을 두려워하지만, 사실, 식용으로 사육당하는 소나 돼지, 혹은 자신의 숲을 망가뜨리는 펜션단지 건설현장에서의 나비나 장수하늘소에게는 인간 그 자체가 좀비며 흡혈귀며, 수인성 바이러스이자, 예기치 못한 참혹한 쓰나미이자 폭탄테러인 것이다. 몇년전 땅속으로 파고들어 고단한 유년기를 보내고 이제 막 신선한 공기를 찾아 지상으로 올라오려는 매미의 애벌레를 막아 버리는 아스팔트나 콘트리트 블럭들은 인간이 다른 생명에게 저지르는 무수한 죄의 일단일 뿐이다. 매미가 지상에서 원한 것은 불과 1, 2주 정도의 짧은 삶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이 우주에 어떤 신(神)이 있어, 한 생명이 다른 생명을 전적으로 미워하고 박멸하는 윤리관을 정당화시킬 수 있단 말인가. 다른 생명을 타자화하는 이러한 윤리관이 오히려 인간 스스로를 좀 먹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러한 편견은 너무도 오래 지속되어 왔다. 사실, 앞 문장에서 “좀 먹고 있다”는 표현을 썼지만, 사실 우리에게 내재하는 이러한 표현 자체가 편견의 일단인 것이다. “좀”이 뭘 먹는 것은 숭고한 생명의 행위이고 그게 마침 인간의 옷감이어서 우리들이 기분 나쁘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의 입장에서 좀벌레를 바라본 것이다.


말은 이렇게 해도, 앞으로도 맛있게 돼지고지를 먹을 것이고, 양모옷을 입을 것이고, 석유제품을 사용하며, 숲에 난 새로운 도로를 달릴 것이지만, 그래도 다른 생명의 희생에 감사하고 그것을 소중히 여기는 자세 역시 필요하다고 본다. 다른 생명에 대한 보편적 측은지심에 따라 인간은 마땅히 그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양심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간은 다른 생명을 소중히 생각할 때, 자기 생명의 고귀함도 깨달을 수 있는 것.

 

알라딘에서 15% 디스카운트해서 10,200원에 살 수 있는 <세상에 나쁜 벌레는 없다>라는 책은 일상에 쫓기는 현대인들에게 <내가 모기 한 마리에 대해 측은지심을 품는 순간, 우주의 모든 생명들도 나를 그렇게 여긴다>는, 생뚱맞지만 마땅히 인간이 한번쯤은 심사숙고해야 할 소중한 조언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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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가지 이야기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지음, 최승자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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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처음 샐린저의 단편을 접한 것은, 삼성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 중 영미단편집에 실린 <에스메를 위하여>라는 단편을 읽고 나서이다.  중학교 시절에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은 기억이 어렴풋이 나지만 샐린저의 위대성을 느낀 것은 <사랑과 추악의 이중주>라는 멋진 부제가 붙은 <에스메를 위하여>라는 단편 때문이다. 그 뒤로 다양한 사람들의 수많은 단편소설을 접했고, 나름대로 소설작법에 대해 연구도 많이 했지만, 인간이 창작해낸 가장 위대한 단편소설을 들라고 하면 난 단연코 <에스메를 위하여>를 들곤 한다. 

2.

그렇게 샐린저에게 빠지던 때가 고3부터 대학교 1학년 시절이었다. 당시 나는 남산도서관에 다니며 공부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남산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1953년판 Nine Stories를 빌려보게 되었다. 지금껏 수많은 도서관을 다녔지만 1953년판 Nine Stories가 비치된 곳은 서울 남산도서관이 유일했다. 난 그 책을 여러 번 빌렸고, 애써 복사해서 복사판을 만들었으며, 2004년도에는 드디어 페이퍼백 원서를 구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1953년판 활자에 담긴 미묘한 아우라는 복사판이나 페이퍼백에 담길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남산도서관의 책을 훔치려고 몇번이나 노력했지만 당시 내가 가진 기독교신앙과 충돌하여 무산되곤 하였다. 지금도 내 꿈은 헤르만 헤세의 <크눌프> 독일어 원서와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과 샐린저의 Nine Stories를 하드커버로 갖는 것이다. 근데 남산도서관의 그 원서는 아직도 잘 있을까???)
<에스메를 위하여>를 원문으로 읽으면 번역판과는 또다른 뭔가의 매력을 느낀다. <바나나피쉬를 낚기에 좋은 날>도 훌륭한 소설이지만, 아무래도 <에스메를 위하여>보다는 못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3.

국내에 <아홉 가지 이야기>는 내가 아는 범위에서는 금성출판사, 범한출판사에서 세계문학전집의 일부로 완역이 된 바 있고, 삼성출판사 등에서 단편 몇몇이 번역되어 나온 것이 전부이다. 물론 난 모든 번역판을 가지고 있다. 금성출판사의 번역이 범한출판사의 것보다 조금 낫고, <에스메를 위하여>에 한해서는 적절한 의역을 수반한 삼성출판사의 번역을 따라갈 만한 번역을 아직 못 보았다. 하지만 삼성출판사의 <에스메를 위하여> 번역말고는 그 무엇도 원서의 감칠맛을 살리지 못해 늘 불만이었다. 그런데 2005년 1월 18일 오늘 오마이뉴스를 읽다가 문학동네에서 또다른 번역판을 냈다는 한줄기사를 듣고 곧바로 알라딘에 접속했다. 난 이 책을 꼭 살 것이다.

4.

난 늘 한밤에 아무도 없는 빈방에서, 아니면 수락산과 같은 서울근교의 산을 찾아 <에스메를 위하여>를 천천히 낭독한다. 한밤중의 한시간이면 고요히 내면으로 침잠할 수 있는 시간이고, 수락산 정상 인근이라면 상계동을 비롯한 고만고만한 아파트 단지가 성냥갑보다도 작게 보는 곳이다.  난 이런 시간과 장소에서 인간의 내면을 응시하거나 혹은 미니어처 같이 보이는 아파트단지들로 상징되는 세상을 비웃으면서 한문장 한문장 천천히 <에스메를 위하여>를 낭독한다. 그 때 내 이성을 명징하게 살아나고, 내 두뇌는 감동으로 전기에 감전되듯이 찌르르 희열에 휩싸인다. 읽을 때마다 상습적으로 느끼는 전율감은 만약 마약을 하게 되면 빠지는 희열감이 이렇지는 않을까 하는 추측을 할 정도로 크다....

5.

이번 일요일에 문학동네에서 이번에 발간된 <아홉 가지 이야기>를 들고 다시금 수락산에 올라볼 참이다. 그리고 오리지널 악보의 또다른 편곡을 보듯이, 좁다란 아파트단지들을 굽어보며 이 책을 한자씩 크게 낭독해 볼 생각이다...

forlux21@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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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내린밤 2005-01-20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소 감상에 젖어 마이리뷰를 쓴 후, 며칠후 도서 구입차 들어왔다가 아래 플라시보님께서 적은 마이리뷰를 읽게 되었다. 읽고 나서 적지 않게 당혹했다... 같은 책을 읽고 이렇게 반응이 다르다니??? 순간 그럴수도 있겠다 싶었다... 샐린저에 입문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배경이 있어야 했는데, 플라시보님은 그게 없었나보다... 여기서 배경이란 지식이 될 수도 있고, 경험이 될 수도 있다... 즉, 어떤 특정부류의 경험이나 정서를 공유한 사람들끼리, 그리고 그들끼리 즐기는 언어의 유희가 샐린저의 소설이다...

샐린저의 소설이 맘에 안 들더라도 실망하지 마시길... 싫으면 그냥 싫은 것이다... 사실 싫어하거나 재미가 없었다는 사람에게는 귀책사유가 없다...  오히려 샐린저의 소설을 좋아하게 된 것이 어떻게 보면 운이 좋았던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마치 길을 가다가 여러 줄의 전보대에 걸린 달을 보고 원고지의 악보같다는 느낌을 받아 같이 가는 친구에게 쳐다보라고 할때 이미 그 친구는 그 각도를 벗어난 것처럼. 그러나 다시 길을 되돌아가 쳐다보라고 하기는 귀찮은 상황... 뭐 그런거다...

마찬가지로 샐린저를 좋아하기 위해서는 샐린저가 가지고 있던 정서와 감정공유가 되어야 한다.... 쉽지 않을 일이다. 어떻게 보면 축복받은 일이기도 하고.... 마찬가지로 역으로 생각해보면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놓친 게 많아 잃어버린 작가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만일,,, 만일 내가 담쟁이가 얽힌 붉은 담을 가진 집에서 자라났으면 혹은 주위에 시한부 생명을 살아간 지인이 있었다면 난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를 미친듯이 좋아하게 되었을지도....

 
메시지 4 - 환난의 군대
팀 라헤이에, 제리 B. 젠킨스 지음, 김성 옮김 / 지구촌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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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소설, I레프트 비하인드I는 국내에도 일부가 번역된 소설이다...
첫째권이 모 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나온 바 있었고, 이후 다른 출판사에서 정식 저작권계약을 통해 I메세지-버려진 사람들I이란 시리즈로 출간되고 있는 상황이다. 본인은 이 중 4권까지를 읽어보았고 이 글은 이를 토대로 한 글이다.

2.

이 소설을 읽어보면 우선 그 내용이 제대로 된 소설이란 형식을 갖추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 구성이 매우 미흡하다. 이를테면 속된 말로 허접하다는 것이다. 주인공들 사이에 갈등관계 묘사가 애들 동화수준이고, 그리고 결정적인 사건의 경우 그 전환이 놀랍도록 유치하다. 거의 말도 안돼는 우연의 남발이 주류인 것이다... 따라서 소설의 문학적 가치, 혹은 더넓게 예술의 측면에서 이 소설(이것을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도 의심스럽지만...)의 가치는 거의 없거나, 아니면 잘못 쓰여진 소설의 실패사례로나 유용할 것이다.


3.

그러나,,,

일부에서 생각하듯이, 그리고 본인도 동의하지만, 소설이란게 어디 꼭 문학성만 따져서 평가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꼭 소설 본래의 문학성만 있으면 뭐하냐, 그 안에 담긴 정서나 메세지가 더 중요하지 하는 생각이 그것이다. 이 소설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그 안에 담긴 종말론적 메세지가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면 충분히 유용한 가치를 호소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소설에 담긴 메세지를 살펴본다.

4.

서양, 주로 미국에서는 소위 휴거문학이라고 불릴 수 있는 장르가 존재한다. 이는 미국 장르소설계에서 흡혈귀나 좀비를 소재로 한 소설이 있고, 웨스턴(서부극)이나 갱스터를 다룬 소설이 고정된 독자층을 가지고 꾸준히 출간되는 것이 미국 출판계의 현실인 것처럼 기독교의 카테고리 안에서도 기독교로의 개종을 다룬 간증문학이나, 귀신을 쫒는 엑소시즘이나 휴거류의 기독교 종말론을 다룬 소설 역시 꾸준히 출간된다는 점이다. (사실 휴거소설은 미국의 기독교인구에 비례하여 꽤 상업적으로 보장되는 장르이다. 이를 테면 영화 I패션 오브 크라이스트I가 미국에서 절대적인 흥행을 하는 것은 영화 외적으로 사회학적으로 분석될 수 있는 점과 유사하다.)

5.

어쨌든 미국에 I휴거문학I를 다룬 소설장르가 존재하고 이 분야에 꾸준히 소설이 출간되고 있는데 그 기원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어네스트 W. 앵글리가 쓴 I휴거I라는 소설이다. 물론 역사적으로 추적해보면 앵글리 이전에도 휴거를 다룬 소설이 있었지만, 휴거라는 개념을 가장 대중적으로 전파한 공로는 아무래도 앵글리에게 돌아가야겠다. (이것이 이 I휴거소설I장르의 원조라는 점은 브램 스토커가 1897년 발간해서 흡혈귀를 다룬 장르소설의 원조가 된 I드라큘라I에 비유할만 하다.)

원래 종말론에 있어 휴거라는 개념은, 이 자리에서 길게 설명할만한 여유는 없지만, 서구(미국)에서도 소위 근본주의자들이 옹호하는 개념이란 점만을 우선 지적하고 싶다. 근본주의라는 것은 기독교 신학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보수주의를 말한다. 즉 기독교의 일반적인 견해가 아닌 일부의 견해인 것이다. 이런 일부의 견해를 가지고 기독교 종말론을 해석하려는 것은 상당히 주의가 요하는 일이다. 대중적인 소설을 통해 이런 극단적으로 왜곡된 이념을 전파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소설 내용을 보면 반이스라엘주의(즉 아랍권 국가의 행위)는 결국 절대악이고, 이스라엘은 선택받은 민족이며, 그들이 저질르는 잘못은 모두 정의를 향한 고난이라는 잘못된 역사왜곡을 전파한다. (물론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잘못만을 제외한다. 아무리 이스라엘라도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을 잘못된다고 본다.)
또한 국제기구를 통해 벌이는 군축운동, 반전운동 등은 모두 사탄의 지령에 의한 위장평화운동에 불과하고, 좁게는 기독교 일부에서 벌이고 있는 에큐메니컬 운동, 종교간에 서로의 이해를 위한 대화운동 및 평화공존 운동은 모두 음탕한 창녀와 같이 두 남자를 섬기는 것이라는 식의 관점이 그것이다... 이런 식의 역사의식이라면 기독교의 근본주의는 세속의 어떤 가치관이나 다른 종교와 공존할 이유없이 배타적으로 자신의 이념을 고수해야 한다. (즉 이쯤되면 요새 유행하는 말처럼 "막가자는 상황"이 도래하여 기독교 근본주의와 여타 다른 가치관끼리의 정면충돌이 불가피해진다. 예를 들면 기독교근본주의 대 이슬람근본주의 대결처럼...)

6.

최근 미국은 이라크에 서구적인 가치관을 전파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국제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라크를 침략한바 있다. 미국의 호전적인 이라크 침략까지도 합리화할 수 있는 이러한 역사의식에 따르면, 미국의 부시가 세계를 상대로 절대적 패악을 떨 수 있는 가치관에 도덕적 권위를 부여한다.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패악은 문학적인 예술성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왜곡된 가치관을 미국인에게 부여하고 미국의 불순한 중동정책(더 넓게는 세계정책)을 종교적으로 합리화 해준다는 것이다. (사실 자세히 분석하면 이 책은 미국의 우익적인 가치관보다 더 극우적이어서 미국의 패권주의마저 더 보수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7.

본인 역시 기독교인이고 기독교 내부에 I휴거I라는 개념이 자리잡을 수 있는 신학적 토대가 있다고 본다. 즉, 휴거라는 것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는 말이다.

하지만 I레프트 비하인드I는 아니다. I레프트 비하인드I는 죄송스럽지만 앵글리가 이미 몇십년전에 쓴 I휴거I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뛰어넘기는커녕 오히려 심각하게 퇴보하고 있다. 앵글리의 역사관보다도 퇴행한 역사의식 속에서 과연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점에서 I레프트 비하인드I는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기만과 위협을 통해 순진한 기독교인에게 반사회적인 역사의식을 심어주는 공포소설에 불과하다.

즉, I레프트 비하인드I가 아무리 상업적으로 성공했다 하더라도 이 소설의 진정한 장르는 기독교소설이 아니라 저급한 호러소설인 것이다. (저자가 그토록 부정하는 세속주의 가운데서 이 소설이 상업성에 성공했다니, 저자는 자신이 부정하는 저주받은 바빌론의 열매를 스스로 따 먹었다고나 할까...)


첫눈내린밤 forlux21@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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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1 - 버려진 사람들
팀 라헤이에, 제리 B. 젠킨스 지음, 김성 옮김 / 지구촌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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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이 소설, I레프트 비하인드I는 국내에도 일부가 번역된 소설이다...
첫째권이 모 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나온 바 있었고, 이후 다른 출판사에서 정식 저작권계약을 통해 I메세지-버려진 사람들I이란 시리즈로 출간되고 있는 상황이다. 본인은 이 중 4권까지를 읽어보았고 이 글은 이를 토대로 한 글이다.

2.

이 소설을 읽어보면 우선 그 내용이 제대로 된 소설이란 형식을 갖추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 구성이 매우 미흡하다. 이를테면 속된 말로 허접하다는 것이다. 주인공들 사이에 갈등관계 묘사가 애들 동화수준이고, 그리고 결정적인 사건의 경우 그 전환이 놀랍도록 유치하다. 거의 말도 안돼는 우연의 남발이 주류인 것이다... 따라서 소설의 문학적 가치, 혹은 더넓게 예술의 측면에서 이 소설(이것을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도 의심스럽지만...)의 가치는 거의 없거나, 아니면 잘못 쓰여진 소설의 실패사례로나 유용할 것이다.


3.

그러나,,,

일부에서 생각하듯이, 그리고 본인도 동의하지만, 소설이란게 어디 꼭 문학성만 따져서 평가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꼭 소설 본래의 문학성만 있으면 뭐하냐, 그 안에 담긴 정서나 메세지가 더 중요하지 하는 생각이 그것이다. 이 소설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그 안에 담긴 종말론적 메세지가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면 충분히 유용한 가치를 호소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소설에 담긴 메세지를 살펴본다.

4.

서양, 주로 미국에서는 소위 휴거문학이라고 불릴 수 있는 장르가 존재한다. 이는 미국 장르소설계에서 흡혈귀나 좀비를 소재로 한 소설이 있고, 웨스턴(서부극)이나 갱스터를 다룬 소설이 고정된 독자층을 가지고 꾸준히 출간되는 것이 미국 출판계의 현실인 것처럼 기독교의 카테고리 안에서도 기독교로의 개종을 다룬 간증문학이나, 귀신을 쫒는 엑소시즘이나 휴거류의 기독교 종말론을 다룬 소설 역시 꾸준히 출간된다는 점이다. (사실 휴거소설은 미국의 기독교인구에 비례하여 꽤 상업적으로 보장되는 장르이다. 이를 테면 영화 I패션 오브 크라이스트I가 미국에서 절대적인 흥행을 하는 것은 영화 외적으로 사회학적으로 분석될 수 있는 점과 유사하다.)

5.

어쨌든 미국에 I휴거문학I를 다룬 소설장르가 존재하고 이 분야에 꾸준히 소설이 출간되고 있는데 그 기원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어네스트 W. 앵글리가 쓴 I휴거I라는 소설이다. 물론 역사적으로 추적해보면 앵글리 이전에도 휴거를 다룬 소설이 있었지만, 휴거라는 개념을 가장 대중적으로 전파한 공로는 아무래도 앵글리에게 돌아가야겠다. (이것이 이 I휴거소설I장르의 원조라는 점은 브램 스토커가 1897년 발간해서 흡혈귀를 다룬 장르소설의 원조가 된 I드라큘라I에 비유할만 하다.)

원래 종말론에 있어 휴거라는 개념은, 이 자리에서 길게 설명할만한 여유는 없지만, 서구(미국)에서도 소위 근본주의자들이 옹호하는 개념이란 점만을 우선 지적하고 싶다. 근본주의라는 것은 기독교 신학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보수주의를 말한다. 즉 기독교의 일반적인 견해가 아닌 일부의 견해인 것이다. 이런 일부의 견해를 가지고 기독교 종말론을 해석하려는 것은 상당히 주의가 요하는 일이다. 대중적인 소설을 통해 이런 극단적으로 왜곡된 이념을 전파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소설 내용을 보면 반이스라엘주의(즉 아랍권 국가의 행위)는 결국 절대악이고, 이스라엘은 선택받은 민족이며, 그들이 저질르는 잘못은 모두 정의를 향한 고난이라는 잘못된 역사왜곡을 전파한다. (물론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잘못만을 제외한다. 아무리 이스라엘라도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을 잘못된다고 본다.)

6.

최근 미국의 이라크 침략까지도 합리화할 수 있는 이러한 역사의식에 따르면, 미국의 부시가 세계를 상대로 절대적 패악을 떨 수 있는 가치관에 도덕적 권위를 부여한다.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패악은 문학적인 예술성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왜곡된 가치관을 미국인에게 부여하고 미국의 불순한 중동정책(더 넓게는 세계정책)을 종교적으로 합리화 해준다는 것이다. (사실 자세히 분석하면 이 책은 미국의 우익적인 가치관보다 더 극우적이어서 미국의 패권주의마저 더 보수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7.

본인 역시 기독교인이고 기독교 내부에 I휴거I라는 개념이 자리잡을 수 있는 신학적 토대가 있다고 본다. 즉, 휴거라는 것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는 말이다.

하지만 I레프트 비하인드I는 아니다. I레프트 비하인드I는 죄송스럽지만 앵글리가 이미 몇십년전에 쓴 I휴거I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뛰어넘기는커녕 오히려 심각하게 퇴보하고 있다. 앵글리의 역사관보다도 퇴행한 역사의식 속에서 과연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점에서 I레프트 비하인드I는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기만과 위협을 통해 순진한 기독교인에게 반사회적인 역사의식을 심어주는 공포소설에 불과하다.

즉, I레프트 비하인드I가 아무리 상업적으로 성공했다 하더라도 이 소설의 진정한 장르는 기독교소설이 아니라 저급한 호러소설인 것이다. (저자가 그토록 부정하는 세속주의 가운데서 이 소설이 상업성에 성공했다니, 저자는 자신이 부정하는 저주받은 바빌론의 열매를 스스로 따 먹었다고나 할까...)


첫눈내린밤 forlux21@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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