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가지 이야기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지음, 최승자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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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처음 샐린저의 단편을 접한 것은, 삼성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 중 영미단편집에 실린 <에스메를 위하여>라는 단편을 읽고 나서이다.  중학교 시절에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은 기억이 어렴풋이 나지만 샐린저의 위대성을 느낀 것은 <사랑과 추악의 이중주>라는 멋진 부제가 붙은 <에스메를 위하여>라는 단편 때문이다. 그 뒤로 다양한 사람들의 수많은 단편소설을 접했고, 나름대로 소설작법에 대해 연구도 많이 했지만, 인간이 창작해낸 가장 위대한 단편소설을 들라고 하면 난 단연코 <에스메를 위하여>를 들곤 한다. 

2.

그렇게 샐린저에게 빠지던 때가 고3부터 대학교 1학년 시절이었다. 당시 나는 남산도서관에 다니며 공부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남산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1953년판 Nine Stories를 빌려보게 되었다. 지금껏 수많은 도서관을 다녔지만 1953년판 Nine Stories가 비치된 곳은 서울 남산도서관이 유일했다. 난 그 책을 여러 번 빌렸고, 애써 복사해서 복사판을 만들었으며, 2004년도에는 드디어 페이퍼백 원서를 구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1953년판 활자에 담긴 미묘한 아우라는 복사판이나 페이퍼백에 담길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남산도서관의 책을 훔치려고 몇번이나 노력했지만 당시 내가 가진 기독교신앙과 충돌하여 무산되곤 하였다. 지금도 내 꿈은 헤르만 헤세의 <크눌프> 독일어 원서와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과 샐린저의 Nine Stories를 하드커버로 갖는 것이다. 근데 남산도서관의 그 원서는 아직도 잘 있을까???)
<에스메를 위하여>를 원문으로 읽으면 번역판과는 또다른 뭔가의 매력을 느낀다. <바나나피쉬를 낚기에 좋은 날>도 훌륭한 소설이지만, 아무래도 <에스메를 위하여>보다는 못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3.

국내에 <아홉 가지 이야기>는 내가 아는 범위에서는 금성출판사, 범한출판사에서 세계문학전집의 일부로 완역이 된 바 있고, 삼성출판사 등에서 단편 몇몇이 번역되어 나온 것이 전부이다. 물론 난 모든 번역판을 가지고 있다. 금성출판사의 번역이 범한출판사의 것보다 조금 낫고, <에스메를 위하여>에 한해서는 적절한 의역을 수반한 삼성출판사의 번역을 따라갈 만한 번역을 아직 못 보았다. 하지만 삼성출판사의 <에스메를 위하여> 번역말고는 그 무엇도 원서의 감칠맛을 살리지 못해 늘 불만이었다. 그런데 2005년 1월 18일 오늘 오마이뉴스를 읽다가 문학동네에서 또다른 번역판을 냈다는 한줄기사를 듣고 곧바로 알라딘에 접속했다. 난 이 책을 꼭 살 것이다.

4.

난 늘 한밤에 아무도 없는 빈방에서, 아니면 수락산과 같은 서울근교의 산을 찾아 <에스메를 위하여>를 천천히 낭독한다. 한밤중의 한시간이면 고요히 내면으로 침잠할 수 있는 시간이고, 수락산 정상 인근이라면 상계동을 비롯한 고만고만한 아파트 단지가 성냥갑보다도 작게 보는 곳이다.  난 이런 시간과 장소에서 인간의 내면을 응시하거나 혹은 미니어처 같이 보이는 아파트단지들로 상징되는 세상을 비웃으면서 한문장 한문장 천천히 <에스메를 위하여>를 낭독한다. 그 때 내 이성을 명징하게 살아나고, 내 두뇌는 감동으로 전기에 감전되듯이 찌르르 희열에 휩싸인다. 읽을 때마다 상습적으로 느끼는 전율감은 만약 마약을 하게 되면 빠지는 희열감이 이렇지는 않을까 하는 추측을 할 정도로 크다....

5.

이번 일요일에 문학동네에서 이번에 발간된 <아홉 가지 이야기>를 들고 다시금 수락산에 올라볼 참이다. 그리고 오리지널 악보의 또다른 편곡을 보듯이, 좁다란 아파트단지들을 굽어보며 이 책을 한자씩 크게 낭독해 볼 생각이다...

forlux21@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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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내린밤 2005-01-20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소 감상에 젖어 마이리뷰를 쓴 후, 며칠후 도서 구입차 들어왔다가 아래 플라시보님께서 적은 마이리뷰를 읽게 되었다. 읽고 나서 적지 않게 당혹했다... 같은 책을 읽고 이렇게 반응이 다르다니??? 순간 그럴수도 있겠다 싶었다... 샐린저에 입문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배경이 있어야 했는데, 플라시보님은 그게 없었나보다... 여기서 배경이란 지식이 될 수도 있고, 경험이 될 수도 있다... 즉, 어떤 특정부류의 경험이나 정서를 공유한 사람들끼리, 그리고 그들끼리 즐기는 언어의 유희가 샐린저의 소설이다...

샐린저의 소설이 맘에 안 들더라도 실망하지 마시길... 싫으면 그냥 싫은 것이다... 사실 싫어하거나 재미가 없었다는 사람에게는 귀책사유가 없다...  오히려 샐린저의 소설을 좋아하게 된 것이 어떻게 보면 운이 좋았던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마치 길을 가다가 여러 줄의 전보대에 걸린 달을 보고 원고지의 악보같다는 느낌을 받아 같이 가는 친구에게 쳐다보라고 할때 이미 그 친구는 그 각도를 벗어난 것처럼. 그러나 다시 길을 되돌아가 쳐다보라고 하기는 귀찮은 상황... 뭐 그런거다...

마찬가지로 샐린저를 좋아하기 위해서는 샐린저가 가지고 있던 정서와 감정공유가 되어야 한다.... 쉽지 않을 일이다. 어떻게 보면 축복받은 일이기도 하고.... 마찬가지로 역으로 생각해보면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놓친 게 많아 잃어버린 작가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만일,,, 만일 내가 담쟁이가 얽힌 붉은 담을 가진 집에서 자라났으면 혹은 주위에 시한부 생명을 살아간 지인이 있었다면 난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를 미친듯이 좋아하게 되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