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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나쁜 벌레는 없다 - 작은 것들 속에 깃든 신의 목소리
조안 엘리자베스 록 지음, 조응주 옮김 / 민들레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말하자면 그는 한 마리의 모기가 왱왱거리는 것도 견디지 못한다. 그러니 두 마리야 말해 무엇하리. ― 프리드리히 니체, 장희창 역,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민음사, 2004, 306쪽.
여름날 저녁, 바람은 부드럽게 살랑거린다. 경첩이 삐거덕거리고, 현관문이 흔들린다. 뜰에서는 귀뚜라미가 운다. 차츰 성가신 소리가 다가온다. 처음에는 높은 음정으로 윙윙거리는 소리가 드문드문 들렸다. 하지만 차츰 그 소리가 커지고 가까워진다. 갑자기 그 소리가 바로 귀 옆에서 들린다. 사람에게는 그 윙윙거리는 소리가 마치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것과 같이 소름 끼치는 소리로 들린다. 하지만 수컷 모기에게는 그 소리가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들린다. ― 스티븐 하트, <동물의 언어>, 김영사, 1996, 49쪽.
인간으로서의 나와 다른 인간, 우리 민족과 다른 민족의 관계는 인간으로서의 나와 내가 키우는 개나 내 밭을 갈아주는 소나 내 피를 빨아먹는 모기와의 관계보다 깊고 두텁고 짙다. 따라서 나의 윤리적 배려는 모기보다는 소나 개에게, 소나 개보다는 나 이외의 인간에게 상대적으로 더 많이 가야 한다. ― 박이문, <환경철학>, 미다스북스, 2002, 180쪽.
... 모기가 내 주위를 왱왱거리며 귀찮게 할 때 그 모기를 죽이려는 순간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느라고 모기를 놓쳤을 때... ― 달라이 라마, <달라이 라마 하버드대 강의>, 작가정신, 2006, 92쪽.
과연 어떤 종교가 모기를 사랑하라고 가르치겠는가? 딱정벌레를 사랑하는 신은 상상할 수 있겠지만, 도대체 자기보다 작은 존재의 습격을 당해 병이 들고 입이 막혀버리는 숙명을 지닌 모기를 사랑하는 신이 있을 것이라고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병들어 죽어가는 모기가 허기를 채우기 위해 피를 빨다가 입을 막고 있던 기생균을 쏟아내 새로운 숙주에게 옮기는 현상은 도대체 왜 일어나는 걸까? 우리의 피를 필요로 하는 모기를 제대로 보려면 바로 이런 질문들에 답해야 한다. ― 조안 엘리자베스 록, <세상에 나쁜 벌레는 없다>, 민들레, 2004, 238쪽
△ 무한한 우주에서 한 마리 모기의 생명은 내 목숨의 무게와 같다.
최근에 읽는 책 중에 <세상에 나쁜 벌레는 없다>가 있다. 의미심장한 책이다. 뭐 요새는 다들 제 살기 바빠 하찮은 벌레에게까지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다. 먼 별빛을 보며 우주의 우수와 신비에 대한 꿈을 환기하기보다는 당장의 학교성적이나 취업, 승진과 같은 인생문제들이 더 절실한 법이고,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알에서 막 깨어난 십자매 새끼를 보면서 눈물을 글썽거리는 유치원생의 예쁜 눈망울에서 생명의 기적과 인간의 운명에 대해 묵상하기보다는 당장의 월급 삭감이나 지하철 요금인상과 같은 생활의 문제가 더 가슴에 다가오는 게 현대인들의 일상적인 모습이다.
그렇다. 오늘날은 곁길에 눈을 돌이기 쉽지 않은 무한경쟁의 시대이자, 타인의 죽음보다 내 손톱 밑에 박힌 가시 하나가 더 아쉬운 이기주의의 시대인 것이다. <그래, 내가 먼저 살아야 다음에 남을 돌아볼 정신이 나지 않겠어? 그리고 이왕이면 내가 속한 조그만 공동체(예를 들어 가족이나 민족)를 먼저 챙겨고 그리고도 여유가 남는다면 내가 속한 공동체랑 관계가 없는 그밖의 존재들(우리는 이를 흔히 타자라고 부른다)도 배려해 줄 수 있는 게 아니겠어?>라고 합리화시키는 것이 현대인의 마땅한 가치관이 되어 버렸다. 심지어 윤리학자들도 이렇게 주장하는 판이다.
이런 입장에 따르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어떤 종교창시자의 말은 오늘날, <네 이웃 중 너와 가까운 사람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리고도 여유가 된다면 그밖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라>라고 해석된다.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사랑해야 할 대상에도 차등을 두고, 물론 내게 해가 되는 것은 곧 나의 원수이니 관심을 끊고 타자화해야 하고... 이러한 차등과 차별의 원칙이 곧 현대인의 새로운 계명이 된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은 자연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먼저 인간이 우선이다. 그리고 인간이 잡아 먹거나 이용할 수 있는 소나 돼지, 그리고 꿀벌이 중요하다. 그리고 인간에게 도움이 안 되는 모든 것들은 모두 “타자”이다.
모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모기를 미워한다. 같은 곤충이라도 꿀벌이나 나비는 인간에 대한 경제적인 기여나 혹은 심미적인 아름다움 때문에 환영받는 반면, 모기는 말 그대로 인간에게 백해무익한 해충으로 치부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관점에서 정립된 이러한 평가가 이 우주에서 어떻게 윤리적인 보편성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책을 읽는 내내 떠오르는 의문이었다.
뭐, 이렇게 얘기하곤 있지만, 이 포스트에서 모기를 싸고 돌려는 것은 아니다. 다가 오는 여름밤, 모기가 내 장단지를 문다면 방 안이 이 책에서 얻은 교훈이 안개처럼 뿌옇게 모호해지도록 에프킬라를 뿌려댈지도 모른다. (사실 작년 여름에는 앵앵거리면서 내 콧등을 깨문 모기가 너무나 얄미워서 한밤 중 불을 켜고 기여코 벽 구석에 앉아 있는 모기를 둘둘 만 신문지로 탁 쳐서 죽인 일도 있었다. 깨끗한 벽지에 십 원 짜리의 다보탑만큼 뻘겋게 튄 핏방울이 얼마나 통쾌하던지!) 다만, 어떤 생명은 왜 다른 생명에게 전적으로 해가 되도록 태어났는지 그게 궁금한 거다. 그 존재에게도 어미가 있고 아끼는 새끼가 있고, 본능적으로 살고자 발버둥 치는 몸무림이 있다면 말이다.
모기들은 날면서 소리를 친다
모기들은 온 몸으로 소리를 친다
여름밤 내내
저기,
위험한 짐승들 사이에서
모기들은 끝없이 소리를 친다.
모기들은 살기 위해 소리를 친다
어둠을 헤매며
더러는 맞아 죽고
더러는 피하면서
모기들은 죽으면서도 소리를 친다 (하략) ― 김형영의 詩, <모기> 일부
그래 가거라
너를 노리는 바람
코를 꿸 향기가 기다릴지라도
가거라
빈 근골(筋骨)에
사람피를 채워 오너라
불빛이
불빛이 감추었던 적막을 세워들고
침묵이
침묵에 감추었던 부수를 꺼내
전신을 가른다 해도
인적(人跡)을 따라 가거라
느닷없는 폭격에
산지사방 흩어질지라도
가거라, 아비가 도울 수 없는
그 길은 스스로 가야 할 길이다.
덧없이 살아보는 빈병처리장에서
때로 죽음은 삶보다 건전한 음모
사람피에 젖은 채
죽어도 그건 사람처럼 죽는 길이다. ― 신진의 詩, <모기아비가 아기모기에게> 전편(全篇)
위 김형영과 신진의 시는 인간에게 전적으로 해가 되는 존재라는 측면에서 모기의 본질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백해무익한 해충이냐 아니냐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시각에서 그런 거고 사실 본질적인 것은 끊임 없는 세대순환의 숙명적 업(業) 속에서 모기 역시 하나의 생명을 가진 존재라는 점이다. “작은 것들 속에 깃든 신의 목소리”라는 부제가 붙은 <세상에 나쁜 벌레는 없다>는 책은 사람이 모기를 미워하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피를 빨아먹는 곤충은 사람들의 노여움을 산다. 내가 인간과 곤충의 관계에 대한 강연을 한 지난 십 년 동안(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분노가 폭발한 경우가 딱 두 번 있었는데, 두 번 다 모기 때문이었다. 그중 한 번은 이 책의 초판을 발행하고 난 뒤에 라디오 쇼에 출연해서 인터뷰를 하고 있을 때였다. 청취자가 방송국으로 전화를 걸어 사람과 모기 중에서 누가 더 중요하냐고 따졌다. 나는 “그건 잘못된 질문이라고 생각하는데요?”라고 대답했다. 그는 또 다시 내게 대답을 강요했고(목소리를 들어보니 내 대꾸에 혈압이 오른 게 분명했다), 나는 또 다시 대답하길 거부했다. 그런 질문은 “이제는 부인을 때리지 않으시죠?”하고 묻는 것과 똑같다고 말했다. 내가 자신이 유도한 방향으로 대답을 해주지 않자, 그는 내게 종교가 뭐냐고 물었다. 이때 진행자가 개인적 질문은 삼가시라고 말했더니, 그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237쪽)
모기에 대해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기 힘든 이유 중의 하나가 모기한테 물리거나 피를 나눠주기 싫어서다. 모기에 물려 아프고 불편해지는 것을 인간에 대한 공격이자 전쟁 행위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인생을 선과 악의 대결장, 곧 전쟁터로 생각하는 데서 비롯된다. 사실 인류의 모든 전쟁과 다른 종에 대한 전쟁이 이런 인생관의 틀 속에서 이루어진다. (239쪽)
인간은 좀비나 흡혈귀와 같은 가상적인 존재에서부터 수인성 바이러스나 핵무기와 같은 실질적인 위협요소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생명을 해칠 개연성이 있는 것들을 두려워하지만, 사실, 식용으로 사육당하는 소나 돼지, 혹은 자신의 숲을 망가뜨리는 펜션단지 건설현장에서의 나비나 장수하늘소에게는 인간 그 자체가 좀비며 흡혈귀며, 수인성 바이러스이자, 예기치 못한 참혹한 쓰나미이자 폭탄테러인 것이다. 몇년전 땅속으로 파고들어 고단한 유년기를 보내고 이제 막 신선한 공기를 찾아 지상으로 올라오려는 매미의 애벌레를 막아 버리는 아스팔트나 콘트리트 블럭들은 인간이 다른 생명에게 저지르는 무수한 죄의 일단일 뿐이다. 매미가 지상에서 원한 것은 불과 1, 2주 정도의 짧은 삶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이 우주에 어떤 신(神)이 있어, 한 생명이 다른 생명을 전적으로 미워하고 박멸하는 윤리관을 정당화시킬 수 있단 말인가. 다른 생명을 타자화하는 이러한 윤리관이 오히려 인간 스스로를 좀 먹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러한 편견은 너무도 오래 지속되어 왔다. 사실, 앞 문장에서 “좀 먹고 있다”는 표현을 썼지만, 사실 우리에게 내재하는 이러한 표현 자체가 편견의 일단인 것이다. “좀”이 뭘 먹는 것은 숭고한 생명의 행위이고 그게 마침 인간의 옷감이어서 우리들이 기분 나쁘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의 입장에서 좀벌레를 바라본 것이다.
말은 이렇게 해도, 앞으로도 맛있게 돼지고지를 먹을 것이고, 양모옷을 입을 것이고, 석유제품을 사용하며, 숲에 난 새로운 도로를 달릴 것이지만, 그래도 다른 생명의 희생에 감사하고 그것을 소중히 여기는 자세 역시 필요하다고 본다. 다른 생명에 대한 보편적 측은지심에 따라 인간은 마땅히 그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양심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간은 다른 생명을 소중히 생각할 때, 자기 생명의 고귀함도 깨달을 수 있는 것.
알라딘에서 15% 디스카운트해서 10,200원에 살 수 있는 <세상에 나쁜 벌레는 없다>라는 책은 일상에 쫓기는 현대인들에게 <내가 모기 한 마리에 대해 측은지심을 품는 순간, 우주의 모든 생명들도 나를 그렇게 여긴다>는, 생뚱맞지만 마땅히 인간이 한번쯤은 심사숙고해야 할 소중한 조언을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