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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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적이면서 재미난 글을 쓰고 싶은데 가능한가요?

<글쓰기 강좌>를 들으면서 내가 해결하고 싶었던 문제가 단 하나, 이거였다. 그냥 편하게 친구들한테 이야기를 하듯이 신변잡기적인 글을 썼더니 소소하고 재미나다고 말을 많이 해줘서 자신을 가지고 본격적인 글쓰기를 했는데 이건 아니다 싶은 게다. 내가 무슨 글쓰기 따위를 배워봤겠는가. 더구나 단무지(단순, 무식, 지*)이라고 불리던 공대에서 6년, 그런 직장을 4년 다녔던 나인데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라고 하지만, 분명한 것은 ‘글을 한 번 써봐야지’ 하는 마음을 먹기 시작하면서 글이 안 써졌다는 것이다. 그 전에는 A4 용지 서 너장 넘어가는 글 정도는 30분 정도면 뚝딱 쓰고도 남았다. 거의 머리 속에서 생각나는 속도로 글을 적어 내려가는 수준이었다. 말하고 싶어서 입에서 근질대던 것을 거의 쏟아냈었다. 그리고 그렇게 훌렁 쓴 잡글을 내 친구들은 읽고 나면 눈물 찔끔나게 재미나다고 말해줬다. 그런데 진짜 글쓰기를 하기 시작하면서 내가 무슨 전문 작가라도 된 마냥 한 줄 쓰는데 일주일이 걸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게 마음에 드냐. 천만에. 일주일만에 쓴 그 한 문장을 백 스페이스로 지우는 순간의 그 허무함을 무엇에 비교할꼬.

답답한 마음에 남편한테 이 증상을 호소했더니, 니 편한대로 쓰면 되지 뭐가 걱정이야, 라고 역시 천하태평한 그 성격대로 말하고 주변 친구들에게 말하니 너만큼 글 잘 쓰는 사람이 없다고(친구들 중에 문학도는 없다.) 뭐가 걱정이야, 라고 역시 심각하게 살지 말란다. 역시 도움 되는 놈 하나 없군, 하면서 친구들은 돈 주고 그런 것도 배우냐는 <글쓰기 강좌>를 신청한 것이다. 도대체 나는 왜 글이 안 써지는 거죠?

공부를 해야죠.

두 번의 강의를 듣고 한 번의 전화 상담을 통해 결국 선생이란 작자가 말하는 것은 역시 선생의 답, 답다. 이 뻔하디 뻔한 답 앞에서 결국 모범생처럼 공부를 하라고 하니 해야지, 라는 생각에 무려 10권이 넘는 책을 단숨에 주문해버렸다. 단연 글쓰기 방법론(글의 기본은 되어야 된단다.) 추천 시집(멋진 말이 많단다.) 인문학적 개론서(주제 의식이 있어야 한단다.) 고전(뭐라고 해도 고전을 읽어보란다.) 그리고 남편을 위해서 이 책 ‘캐비닛’을 하나 슬쩍 껴서 샀다. 분명 10권이 넘는 책을 사면서 남편이 화장실에서 읽을 만한 소설책 하나 없으면 분명 한 소리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특별히 어디서 이 책을 추천해서 산 게 아니라 알라딘 서점 돌아다니다가 책 표지가 제법 코믹 카툰 같아서 남편이 좋아할만하겠다는 생각으로 구입한 책이다. 그리고 당연히 글쓰기 방법론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했지. 이 책 한 권 읽고 나면 뭔가 글쓰는 방법이 보이겠지. 이렇게 고민이 많아지다 보니 새벽에 잠이 안 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내가 역시 고민없이 살아서 그렇게 잠이 많았더거군. 그런데 새벽에 잠이 안 와서 글이나 쓰려고 노트북 앞에 앉았는데 여전히 한 줄도 안 써지는 거다. 잠은 안 오고 글도 안 써지는데 마침 식탁 한 구석, 남편을 위해 소설책을 두는, 그곳에 있던 이 책을 본 것이다. 그냥 저거 읽다가 잠이나 자야겠다, 뭐 이런 생각이었다. 그리고 잠을 자긴 커녕 다 읽는다고 밤을 꼴닥 샜다.

나는 그 돈으로 전부 캔맥주를 샀다. 대략 사백오십 박스 정도였고 캔으로 치면 만 개가 넘는 엄청난 양이었다. 대형 할인마트 직원은 개인이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맥주를 사는 것은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곤란하다고 말했다. 나는 이 황홀한 자본주의에서 자기 돈을 주고 물건을(그것도 화약이나 총도 아니고 캔맥주 따위를) 맘대로 살 수 없다는 직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페이지 168]

그해 여름, 나는 집 안에 틀어박혔고 캔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아무 짓도 하지 않고 집 안에 처박혀 캔맥주만 마신 것이다.
[페이지 169]

깡통을 찌그러뜨리는 것! 사소해 보이지만 이것이 아주 중요한 포인트다. 이상한 이야기 같지만 깡통을 찌그러뜨리는 순간, ‘될 대로 되라지’ 같은 파괴적인 정서가 생겨나고 그 파괴적인 정서는 다시 냉장고를 열어 새로 캔맥주를 따게 하는 힘을 준다.
자신이 왜 그런 짓을 계속해서 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지만 않는다면 누구나 죽을 때까지 그 짓을 할 수 있다.
[페이지 169]

웃기게도 캔맥주를 한꺼번에 사백오십 박스사면 세무서에서 전화가 온다.
“다름이 아니라 맥주를 한꺼번에 사백오십 박스나 사셨는데요. 개인이 이렇게 한꺼번에 맥주를 많이 사면 용도에 대해 신고를 해야 합니다. 무자료로 불법유통되는 사례가 있어서요. 무슨 행사가 있는 겁니까? 행사가 있으면 행사 이름 좀 가르쳐주십시오. 저희도 자료를 작성해야 하니까요.”
“행사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냥 혼자 마시려고 샀습니다.”
“아니, 여보세요. 혼자 마시려고 맥주를 사백오십 박스나 산다는 게 말이 됩니까?”
딸깍!
[페이지 171]


마음에 드는 구절들이 참으로 많았는데 특히 주인공이 엄마가 돌아가서 남은 유산으로 모두 맥주를 사고 주구장창 맥주만 마셨다던 이 에피소드에서 나는 거의 데굴데굴 구를 뻔 했다. 그래 이 기분이야. 아니 산에 살고 있다는 마법사가 나와서 단군 신화 어쩌고 저쩌고 하는 부분에서, 프리셀 게임만 십 년 했다는 한 똑똑한 유학생 이야기 부분에서, 외계와 통신한다는 사람들 이야기를 하는 부분에서 그 새벽에 혼자 미친 년처럼 눈물까지 찔끔거리면서 키득거린 것이다. 만약 남편이 그 새벽에 오줌이 마려워서 화장실을 나왔다가 식탁 불빛 밑에서 머리까지 풀어헤치고 흐느끼면서 책을 읽고 있던 나를 봤더라면 정말 제가 요즘 글 쓴다고 하더니 맛이 갔군, 그랬을 것이다.

내가 소설을 읽으면서 이렇게 웃어본 적이, 이렇게 시원했던 적이 박민규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이후 오래간만이다. 난 그다지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징징대기만 하기 때문이다. 뭐가 이렇게도 관계는 복잡하고 뭐가 이렇게 인생들이 기구한지. 그래서 그 다들 좋아하던 <상실의 시대>의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도 별반 좋아하지 않았다. 도대체가 난 그의 소설만 읽으면 그의 책 제목대로 참으로 상실감만 느끼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캐비닛’은 그냥 웃긴 정도가 아니라 짠, 하면서 웃기다. 감동적이면서 재미난 글을 쓴 이 녀석, <글쓰기 강좌> 뭐 이런 거 안 만드나?

"이 자식아! 책 한 권 값이면 삼 인 가족이 맛있는 자장면으로,
게다가 서비스 군만두도 곁들여서, 즐겁게 저녁을 먹는다. 이 썩을 자식아!"

작가의 수상 소감을 밝히는 마지막 말을 읽고 나서 책 값 9800원의 가치를 아는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독서 일기를 쓰려고 다시 곰곰이 책을 읽다보니 이 작가는 자장면의 맛을 아는 놈인 것 같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딱 <캐비닛>이 그 많은 9800원짜리 음식 중에 자장면과 서비스 군만두를 먹었을 때 느끼는 그런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글이다. 외식치곤 넘치지도 모자르지 않는, 외식치곤 입가에 묻는 짜장이 곤혹스러운, 그래서 즐거운 저녁 외식 말이다.

어떻게 하면 감동적이고 재미난 글을 쓰죠?
감동적인 삶이란 없어. 삶은 그저 견디어 내고 껄껄 웃으면 되는 거야. 그리고 글쟁이는 그것을 말할 뿐이야.

결국 글쓰기 방법론 책은 반품을 해야 하나 마나 고민하게 만드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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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결 2007-09-23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음,음...리뷰 잘 읽었습니다. '감동적인 삶이란 없어. 삶은 그저 견디어 내고 껄껄 웃으면 되는 거야.'라는 구절이 저에게는 참 인상적이네요. 그저 껄껄... 추천하고 갑니다~

비로그인 2007-09-23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하는 책이죠 :)
김언수 작가 후속편이 기다려집니다 ^^

절벽마녀 2007-09-25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결님..음.......처음 리플 받아봤습니다..ㅠㅠ..이 감동을 어찌하리오..ㅠㅠ....책만 혼자 읽다가 아무래도 독서일기 혼자 쓰니깐 진도가 안나가서 오픈하면 좀 써질까 싶어서요. 저의 첫 리뷰를 자축드리옵니다.ㅋㅋㅋㅋㅋ.

절벽마녀 2007-09-25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셔고양이님. 안녕하세요. 저 역시 김언숙 작가의 후속편이 기대되는데, 한 3년또 고시원에서 생활한 뒤 내실려고 하시는지..쩝..ㅋㅋㅋ

후렛헤즈 2007-11-13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책을 사려고 검색해서 들어왔다가 리뷰가 좋아서 괜히 덧글도 끄적이고 갑니다-
글 정말 재밌게 잘 쓰시는 데요- 앞으로도 좋은 리뷰 많이 써주세요 :-]

후렛헤즈 2007-11-13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책을 사려고 검색해서 들어왔다가 리뷰가 좋아서 괜히 덧글도 끄적이고 갑니다-
글 정말 재밌게 잘 쓰시는 데요- 앞으로도 좋은 리뷰 많이 써주세요 :-]

후렛헤즈 2007-11-13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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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렛헤즈 2007-11-13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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