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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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를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초반에 피를 토해가며 죽어가는 쥐들의 모습 때문에 괴로웠다.

어떤 징조가 보일 때 예민하게 그걸 간파해 내는 사람들이 있다. 의사 리외는 자꾸 출몰하는 쥐들의 죽음에 의문을 갖지만 그의 이야기는 무시된다.

돌이킬 수 없는 때가 되어야 공권력은 움직인다.


읽는 내내 코로나 시국이 떠올랐다.

집순이인 나로서는 집에만 있어야 하는 상황이 그리 힘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기꺼이 규칙을 지키고자 했지만 내 의지가 아닌 것은 곧 자유의 박탈 같은 느낌을 주었다.

언제나 편안했던 집순이의 생활이 갑자기 답답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에도 도시가 봉쇄되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고, 도시에 발이 묶인 사람들은 자유를 그리워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자신들의 일을 묵묵히 해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이 이 고약한 역병을 물리칠 수 있었던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이 느닷없는 이별은, 어떤 모호함도 없이, 우리의 마음을 뒤흔들었으며, 아직 너무나 가까우면서도 이미 너무 멀어진 그 존재의 기억을 마주하며 우리는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었다.


준비 없이 이루어진 이별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 상처를 잘 극복하고 있는 걸까?




역병은 값을 지불하지 않죠.


역병은 값을 지불하지 않지만 인간은 많은 것을 지불했다.

다시는 그런 상황이 오지 않기를 바라지만 지금 우리 현실은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다.


카뮈는 그 시련을 겪는 동안 묵묵히 상황을 써 내려가는 관찰자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쓴다.

환자를 돌보는 리외, 어떻게든 백신을 만들어 보려는 카스텔, 도시를 빠져나가려고 애쓰다 결국 포기하고 자원봉사를 하는 랑베르.

자원봉사자들을 모아 손을 보탰던 타루.

봉쇄가 장기화 됨에 따라 피곤에 절여지는 그들의 모습에 내 숨이 막혀온다.







카뮈는 역병이 닥쳤을 때 봉쇄된 도시에서 서서히 변해가는 사람들을 그렸다.

그들은 결코 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도 코로나 이전의 나와 같지 않다.

수많은 죽음을 보았던 시간.

인간의 힘으론 아무것도 해낼 수 없었던 그 무력했던 시간들이 자꾸 오버랩된다.


그러나.

그런 시간도 흘러간다.

지금 우리는 살아남았고, '그것'을 이겨냈다.


<페스트>를 읽으며 나는 살아남은 '우리'에 대해 생각해 본다.

결코 그 이전과 같을 수 없지만 그 이전의 삶으로 서서히 복귀하고 있는 '우리'

이미 잊은 듯하지만 그것은 보이지 않을 뿐 언제나 우리의 기억에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코시국 시절에 읽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 시절에 읽었다면 나는 다른 부분에서 분노했겠지만 지금은 살아남은 사람들이 깊이 묻어 버린 것들에 대해 생각할 수 있기에 적절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이 책에서는 'peste'는 '전염병', 'la peste'는 '역병'. 'épidémie'는 '돌림병'으로 구분해 번역했다. 실제 카뮈는 그렇게 철저히 구분해 쓰고 있기 때문이다.


페스트를 읽기 전 역자의 글을 꼼꼼히 읽었다.

번역에 있어서 이정서의 번역은 많은 이들에게 화제가 되었기에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책을 읽으며 가지고 있던 다른 출판사의 페스트와 비교해 봤다.

비교해 보니 느낌이 달랐다.


번역의 중요성에 대해 알만한 출판사들이 시대가 바뀌고 독자들의 스펙트럼이 넓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오래된 번역을 그대로 쓰면서 인쇄만 재탕하고 있는 것은 분명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제일 좋은 사람이 떠나는 겁니다."



쥐들이 되돌아온 사실이 이렇게 기쁠 일이었던가!

쥐들이 다시 찍찍거리고, 거리에 고양이가 나타난 사실로 역병이 장렬하게 전사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낀다.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는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평상시에도 적용되는 말이지만 오히려 큰일이 벌어졌을 때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게 결국은 그것을 이겨내는 원동력이 되는 것임을 또 한 번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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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몰 프레임
조성환 지음 / 미메시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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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환 작가의 <스몰 프레임>엔 두 편의 그래픽노블이 실려있다.

창조의 시간을 보여주는 <제네시스> 그리고 죽음의 시간을 보여주는 <무명 사신>


아담과 이브의 탄생처럼 먼 우주에서 무언가가 땅에 떨어지고 그것에서 거인이 탄생한다.

동물과 식물을 거리낌 없이 잡아먹고살던 거인은 외로움을 느끼고 어느 날 그의 몸에서 또 다른 거인이 탄생한다.

같지만 다른 두 거인.






과일만 먹고, 말을 하는 여자 거인에게 남자 거인은 먹을 것을 가져다주고 말을 배워보지만 지적 차이가 나는 그 둘은 서로 어울리지 못한다.


그리고 여자 거인의 몸에서 새로 태어나는 생명...


세상은 그렇게 시작한다.


아담과 이브의 공식을 살짝 비튼 느낌이 나는 <제네시스>.





건강하게 오래 살게 된 인간의 수명은 점점 늘어나고, 줄어들지 않는 인간의 숫자는 저승사자들을 피곤하게 만든다.

강제사.

의학 발달로 인해 연명되는 인간들을 강제 소환하는 저승사자의 임무를 맡게 된 신참은 사람들의 목숨을 강제로 빼앗지 못하고 인간으로 강등되고, 신참이 주고 간 신무기인 우산의 존재는 고참 저승사자 역시 감정을 누르고 있을 뿐 인간의 목숨을 강제로 뺏는 것에 부담을 느낀다는 걸 알려준다.


<무명 사신>을 보면서 이 지구상에서 공존의 이유를 모르는 종족인 인간들만 득시글해지는 현실이 보인다.

그 현실을 타개하고자 사신들은 어떻게 인간을 효율적으로 수거(?) 할지를 논하는데 그들이 말하는 모든 방법이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거나 일어날 확률이 높은 일들이기에 간담이 서늘하다..



인간 세상 모든 것들이 정해진 규칙대로 가야 하는 거라면 인간이 만들어 낸 사신의 존재도 그들의 맡은 바 소임을 다해야 하는 법.

그러나 그들에게도 애당초 감정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을 상대하다 보내 측은지심이 생기는 걸까?

어떤 인간은 미련 없이 목숨을 빼앗고,, 어떤 인간 앞에서는 유예를 주는 사신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신들도 어떤 인간에게는 자비를 베푸니  저승사자라고 다를까.



창조의 이야기와 죽음의 이야기가 한 권에 담겼다.

배우 구교환과 함께 프로젝트 구상 중에 만들어진 <무명 사신> 그래서 그런지 사신의 이미지가 구교환과 닮았다.


아주 짧은 시간에 단숨에 읽을 수 있는 그래픽노블이지만 어째서인지 찬찬히 음미하게 된다.

탄생의 의미도 죽음의 의미도 깊게 생각할 나이가 되어서 그런가 보다.


<무명 사신>을 읽다 보니 타노스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넘치는 건 모자라니만 못하다고 했다.

지구는 인간종만을 위한 것이 아닐진대... 인간은 군림하기 위해 자연과 멀어지는 길을 택했다.

자연의 역습이 인간의 최대 시련이 될 때 그것은 사신들이 최선을 다해 자신들의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 거 같다..


어딘가에서 오늘도 열심히 자신의 일을 하고 있을 <무명 사신>

그가 고민에 빠져 생각하는 모습으로 앉아 있음에 감사해야 할 사람이 나일 수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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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자의 상속녀 캐드펠 수사 시리즈 16
엘리스 피터스 지음, 손성경 옮김 / 북하우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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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그러니까 모든 소동이 가라앉은 뒤, 의도는 더할 나의 없이 선하나 적절하지 않은 시점에 적절치 않은 말을 입 밖에 내어 분위기를 망쳐놓는 것이 설로라는 악의 없고 고지식한 인간의 특성인 모양이라고 캐드펠은 생각하게 될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또 한 번 현실을 돌아보게 된다.

교회나 천주교를 다녀본 적이 없지만 숱한 작품들 속에서 그들의 교리를 읽어왔다.

말 한마디 잘못해서 이단으로 몰리고,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이단으로 몰리는 중세 시대의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왜 지금 우리 모습과 오버랩되는 걸까?


글로만 외우고 교리에 치우쳐 세상 돌아가는 걸 모르는 벽창호 같은 사람들이 리더의 자리에 앉는 것이 어떤 불행을 가져오는 건지 절반은 속이 타고, 절반은 그것을 감싸안아버리는 포용력 앞에서 진정한 '앎'을 깨닫게 되는 이야기였다.






"명백한 죄인이자 비열한이 그릇된 교리를 늘어놓아봐야 전혀 유혹적이지 않아요. 반면 잘 생기고 평판 좋은 사람이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하는 말은 치명적인 유혹이 될 수 있지요. 저는 그것이 두렵습니다."


7년 전 주인을 따라 순례를 떠났던 청년이 돌아온다.

그는 영면에 든 주인의 관과 그 주인이 남긴 손녀에게 줄 지참금을 가지고 슈루즈베리 성 베드로 성 바오로 수도원에 당도한다.


성 위니프리드 축제일로 바쁜 수도원엔 많은 순례자들이 도착하고 있었고, 고위 성직자도 참석해 있었다.

생전에 수도원에 많은 지원을 했던 주인이 수도원에 묻히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으거라 생각했지만 한 수도사의 입방정(?) 때문에 주인의 과거 행적이 들춰지고 주인의 편을 들던 청년은 이단자로 의심을 받게 된다.


7년 만에 돌아온 고향은 변한 게 없는 듯 변해있고, 마르고 못생겼던 주인의 손녀는 아름다운 처녀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첫눈에 반한 두 사람.

그러나 일레이브가 가져온 지참금이 담긴 상자는 보통 상자가 아니었다. 캐드펠 수사의 눈에도 그 상자는 상당한 가치가 있어 보였다.


이 상자엔 무엇이 담겨 있을까?


계산적인 남자.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싶었던 남자는 일레이브와의 술자리에서 그를 교묘하게 격동시키고 그가 한 말을 가지고 그를 고발한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수도원에 고백하러 간 와중에 살해된다.


캐드펠과 휴의 안정적인 수사와 라돌푸스 수도원장의 공정함이 빛나는 이야기였지만

로버트 부수도원장의 눈치 싸움과 고위 성직자 거버트의 융통성 없는 말에 혈압이 뻗친다.


<이단자의 상속녀>엔 중세 시대 교회가 어떻게 사람들을 교리 속에 가둬두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부당함에 맞서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의 신념대로 옳고 바르게 행동하는 일레이브의 순진하면서도 강직한 모습에 마음이 몽글해지고, 포추너터의 강인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러고 보면 캐드펠 수사 시리즈에 나오는 여성들은 모두 강단이 있다.

남자에게 매어있지 않고, 자기만의 생각대로 움직이는 여성들이다.

그런 여성들을 존중해 주고, 그녀들을 지켜주는 매너 있는 남자들이 그 반대의 남자들과 더불어 재미와 감동을 준다.


실존 인물인 라돌푸스 수도원장이 실제로도 그렇게 강단 있고, 온화하면서도 판단력 좋은 분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캐드펠 수사 시리즈에서 라돌푸스 수도원장이 있어 든든하다.

로버트 부수도원장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지만 그와 제롬 수사가 초반에 비해 세가 많이 약해진 거 같아 고소하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불사하는 것이 살인이다.

이유 없이 죽은 사람도 불쌍하지만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 죄를 저지른 자의 최후도 불쌍하다...


먼 길을 돌고 돌아 자기가 있을 곳을 찾아온 아름다운 상자의 여정도 신비롭다.

자신이 만든 물건보다도 오래 살지 못하는 인간의 욕심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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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카베 악바르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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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고요." 리사가 말했다. "모든 걸 상징이나 의미로 납작하게 만들지 말아요."


누군가를 선동해야 하는 사람들은 사소한 일에도 의미를 부여한다.

그들이 부여하는 의미란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다. 표면적으론 모두를 위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중동에 씐 프레임은 테러, 전쟁, 여성 혐오, 죽음, 두려움이다.

미국의 영화와 뉴스를 통해서 나는 그 모든 것을 그냥 무조건으로 받아들였다.

최근 들어 중동 문제에 대해, 그들의 역사에 대해, 그들의 문화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순교자>는 사이러스라는 인물을 통해 그들을 말한다.

사이러스는 잠을 자지 않는 아기였다. 계속 울어대는 아이였다.

그의 엄마는 육아에 지쳐 오빠를 만나러 가다가 미국이 쏜 미사일에 비행기가 격추되어 그의 인생에서 사라졌다.

아빠는 그를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왔고, 양계장에서 일생을 보냈다.

사이러스는 거의 혼자 자란 거와 다름없다.


자신의 정체성을 알기도 전에 그는 혼란에 던져졌고, 약과 술이 그를 달래줬다.

어지러운 청춘의 시간은 약과 술과 연애에 절여졌다.







"내 말은, 당신이 진정한 결말을 찾는 걸 그만두면 그 결말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에요." 오르키데가 말했다. "내 생각엔 진정한 결말이란 밖에서부터 자기 길을 찾아오는 경향이 있는 것 같거든요."



사이러스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외삼촌, 사이러스의 연인 지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사이러스의 꿈과 그가 지은 시들이 간간이 그를 이야기한다.

이 복잡할 거 같은 이야기를 읽다 보면 우리가 겪는 수많은 사회문제들과 마주하게 된다.

정말 우리가 마주하는 문제들이다.

이란인, 페르시안인, 중동인이 아닌 우리 모두가 살면서 겪게 되는 문제들인데 그것이 왜 특별한 것으로 해석돼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들이라서?

그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프레임에서 벗어난 그들이기에?


그럼 우리의 프레임이란 뭐지?


죽음을 앞에 둔 예술가는 미술관에서 관객과 소통한다.

사이러스는 그녀를 찾아가 이야기를 한다.

낯선 이에게 털어놓는 '나' 자신의 이야기는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죽음을 생각했던 사이러스 앞에 생생한 삶이 들어온다.


사이러스의 <순교자> 프로젝트는 어떻게 되는 걸까?



"하지만 역사를 이용해 모든 것을 합리화할 수는 없어. 그건 국가들이 하는 일이라는 거, 알지? 미국이 말이야. 바로 이란이 하는 일이고."


종교, 신, 전쟁, 죽음, 사랑, 동성애, 모성, 트라우마, 외로움, 의견 차이, 자기만의 소신, 인종차별 등등

인간의 생활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그 모든 문제들이 사이러스와 그 주변인들에게 모두 일어난다.

그 어디에도 종교나, 소신, 신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이건 인간 본성의 문제니까.

그러나 그 문제들은 어느 인종이냐에 따라 이해의 폭이 달라지지..



이 이야기는 반전을 품고 시작됐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다가 거의 끝나갈 때쯤 소름 돋게 피어난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의 모든 것에 깊이 스며들었던 그것은 누구의 잘못인가?라는 시답잖은 생각을 하다 말았다.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닌 그냥 일어난 일이니까.


스스로의 인생을 찾아가는 것이 잘못일 리 없다.

아마도 사이러스의 DNA에도 그런 기질이 있지 않았을까?




죽음은 회생의 다른 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순교자>를 읽으며 하게 되었다.

진정한 나로 다시 태어나는 죽음이라면 두렵지 않을 거 같다...

자신을 구하려는 자를 신은 돕게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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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의 남자들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연수 옮김, 안지희 감수 / 히스토리퀸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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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가 원하는 데로 끌려가지 않겠다. 난 그 우울한 옥타비아의 냉정한 눈총도 받기 싫다. 저들은 날 떠밀고 가서 아우성치는 로마의 천민들 앞에 구경거리로 삼으로 하겠지만, 난 차라리 이집트 나일강 진흙 속 구더기탕에 벌거숭이로 썩어 문드러질테다. 아니면 이집트의 키 높은 피라미드를 교수대로 쇠사슬에 매달아 죽을 테다."


오래전 주말의 명화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아름다우면서도 특이한 자태를 보았다.

엘리자베스 테일러 주연의 영화였는데 짙은 눈 화장이 인상적이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마지막 파라오다.

이집트를 구하기 위해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구워삶았다.

보통 사랑이라고 칭하지만 정말 사랑이었을까?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이다.

소설만 읽다가 오랜만에 희곡을 읽으니 생소한 느낌이다.

시대상으로는 카이사르를 먼저 읽어야 했지만 희곡이 쓰인 연대가 셰익스피어가 먼저이니 우리는(같이 읽는 분들) 안토니우스를 먼저 읽었다.






한 시대를 주름 잡았던 영웅이 한 여인의 치마폭에서 허우적대는 모습이 그럴듯해 보이지 않았으리라.

그것을 사랑에 눈이 멀어 패망한 것으로 미화했을지도 모른다.

어쩜 안토니우스에게 클레오파트라는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로마를 분할해서 그녀에게 바치려 했겠지..


이 희곡에 등장하는 카이사르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카이사르의 아들 옥타비우스다.

아버지를 빼앗은 여자에게 자신의 정치적 동맹까지 빼앗겼다.

그런 찰나에 안토니우스의 아내가 반란을 일으켰다 죽는다.

이걸 빌미로 옥타비우스는 자신의 누이 옥타비아를 안토니우스와 결혼시킨다.


이 이야기에서 카이사르는 누이를 아주 소중하게 아끼는 모양새로 나오지만 그런 누이를 안토니우스와 결혼시키는 게 정상일 리 없다.

모두가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 때문이다.


자신의 아버지와의 사이에 아이까지 낳은 여자에게 빠져 있는 남자와의 결혼이라니!!


클레오파트라도 자신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 혼신을 다했지만 옥타비아 역시도 남자들 사이 완력의 희생자였다.





셰익스피어답게 주변인들을 통해 인간 본성을 잘 드러냈다.

무너져가는 안토니우스를 배신하고 카이사르에게 간 벗에게 안토니우스는 그가 두고 간 것들과 함께 더 많은 것들을 챙겨 보낸다.

그걸 받아 본 에노바르부스의 오열은 기회주의자들에게 일침이 되었을까?


영원한 적이 없듯 영원한 친구도 없다.

정치판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했던 클레오파트라.

그녀의 속마음을 아는 이가 누가 있을까?


2000년 동안 그녀는 요부로 불렸다.

역사가 씌워둔 프레임 안에서 그녀는 팜므파탈의 이미지로 세상을 누볐다.

그녀의 진가는 어디에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현대의 버나드 쇼가 쓴 희곡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가 더 궁금해진다.

더 어린 클레오파트라지만 더 정치적이고 숙련된 이집트 여왕을 만날 수 있을 거 같다.


안토니우스는 사랑과 권력 앞에서 둘 다 지키지 못했다.

그가 좀 더 치밀했었다면 클레오파트라와 자기 자신을 지켰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는 그 모든 잘못을 클레오파트라에게 뒤집어 씌웠다.


클레오파트라가 여왕이 아니라 왕이었다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른다.

아마 그랬다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로마의 역사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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