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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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에 있을 때 누가 주제 사라마구책을 5권이나 사왔었다.
빌려 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전역날이 다가와서 아쉽게 열어보지 못하고 집에 와야했지만.
언젠가 봐야겠다고 생각하다가 선물받은 덕에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인간 본성에 관한 고찰..정도로들 해석하는 경향이 있긴 한데,
나는 달리 새로운 해석이라거나 하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대부분의 사람이 느꼈겠지만, 어쩌면 당연하기까지 한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 표현방식이 달랐을 뿐, 이 책에는 전혀 새로운 사실이 없다.
진실이 아니라면, 대다수의 사람이 이 책의 끝까지 가기 전에
'말도 안돼'라면서 집어던져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남이 보지 않는다'라는 사실만으로 모든 '껄쩍지근함'을 버린다.
심지어 화장실이라는, 모두가 지극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공간조차
남의 시선이 없으면 무의미하기 그지없다.

인간 사회는 '남의 시선'을 기반으로 한다.
남이 보지 않는 공간에서는 아무런 도덕과 법률이 의미가 없고
남이 보지 않는다면 그 어떤 극악한 범죄도 쉽게 저지를 수 있다.


실제로, 우리 모두 보고 있지만 눈먼 것이나 다름없을지도 모른다.
이 사회의 모든 '악'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벌어지고,
'남들이 모르도록' 권력은 악을 저지른다.

우리가 '무의미한 공부'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알아도 바꿀수 없고, 안다고 해서 추악한 권력구조를 뒤엎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눈을 감아버리면 악은 더 쉽게 생겨난다.

가끔 그 사실을 잊는 권력자에게
우리는 그가 하는 일을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을,
그의 권력행사가 '눈뜬 자들의 도시'에서 행해지는 것임을 일깨워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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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카콜라 게이트 - 세계를 상대로 한 콜라 제국의 도박과 음모
윌리엄 레이몽 지음, 이희정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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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에서 보이듯이 이 책은 금지된 조사를 하고 있다. 저자인 윌리엄 레이몽은 프랑스인으로, 코카콜라 매니아였다. 그는 코카콜라 관련 자료들을 모아나가다가 코카콜라사에 생긴 의문점을 파헤쳐나가게 된다. 저자는 책을 쓰기 위해 코카콜라사에 자료를 요청했다. 코카콜라의 대답은 책을 보여주지 않으면 자료를 줄 수 없다는 것. 다시말해 어떤 내용인지 검열되지 않은 책을 위한 자료는 없다는 뜻이었다. 코카콜라의 기적에 가까운 경영과 그 신비한 맛을 찬양하는 책이어야만 코카콜라사에서 제공하는 자료를 받을 수 있다.

결국 저자는 스스로 자료를 구하여 코카콜라의 각종 비리를 파헤친다. 맨 처음 코카콜라를 만들어낸 약제사 팸버튼과의 계약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팸버튼으로부터 직접 제조법을 전수받은 디바 브라운과의 재판, 경쟁사인 펩시콜라를 누르기위해 동원한 갖가지 수단과 편법, 그리고 정권과의 유착, 2차 세계대전중에서도 독일군에 코카콜라를 팔기 위한 나치와의 관계등 저자 개인이 밝혀냈다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많은 비리들을 폭로한다. 달리 보자면 개인적인 조사로도 밝혀질만큼 많은 비리를 코카콜라가 숨기려고 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코카콜라는 미국화의 상징이다. 코카콜라는 UN 가입국보다 많은 나라에서 팔리고 있으며 가장 미국적인 브랜드, 세계에서 가장 브랜드 가치가 뛰어난 브랜드. 미국인의 생필품이면서 물보다 싸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음료이기도 하다. 전 세계를 지배한 그들의 경영성과는 경이적이지만 그 이면에는 검은 콜라로도 가려지지 않을 만큼 더 짙은 검은 비리가 있다. 코카콜라가 미국화(세계화)의 상징이란 것은 미국인이 말하는, 그리고 우리 정부가 말하는 세계화와 코카콜라의 경영철학이 상통한다는 의미기도 하다. 코카콜라가 세계시장을 장악하는 와중에 사라진 그 많은 음료회사들처럼 세계화는 그 자유무역의 깃발을 꽂으면서 그와 같은 수만큼의 다른 깃발들을 불태우고 있다.

그 코카콜라를 마신다는 것, 코카콜라의 경영철학과 세계시장을 지배한 경영자의 '유능함'에 대한 환상에 빠져있는 동안 우리는 하나하나 세계화의 깃발을 환영하며 시장을 개방하고 무릎을 꿇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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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 한국 민주주의의 보수적 기원과 위기, 폴리테이아 총서 1
최장집 지음 / 후마니타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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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는 서구 여러나라들에 비해 민주주의를 숙성시킬 시간을 많이 갖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나온 냉전반공주의의 헤게모니적 영향력이나
군부쿠데타에 의한 독재 및 그로인한 사회 전반에 만연한 군사식 문화, 권위주의...
그리고 보수와 극우만을 대표하게 된 정치구조.

그 일련의 폐단들을 '운동'으로 극복하고 형식적 민주화를 가져왔지만
87년 6월 혁명을 주도했던 운동 세력들은 그 자체로 정치세력화하지 못하고
민주화의 실현을 기존 정치세력에게 넘겨줄 수 밖에 없었다.

대표자들은 파레토의 엘리트 순환론의 실례를 몸으로 보여주는 것마냥
국민다수의 의사를 반영하지 못한 채 자리뺏기 놀이에 머물렀고
그 와중에 너나할것 없이 보수화했다.

진보적인 성향을 갖는 유권자를 대표할 수 있는 정당은 없다.
87년 6월 혁명이후 들어선 정권들을 보면
노태우 정권은 말할 것 없고...
김영삼 정권은 문민정부를 표방했지만  그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
기존 보수세력과 야합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개혁논의를 꺼내기 힘든 반쪽짜리에 불과했다.

김대중 정권은 최초로 등장한 야당정권이었지만 실질적으로 그간의 정치세력이라는 것은
김대중과 그 추종자 집단에 불과한 것이었기에 이미 보수화해 있던 기존 관료세력,
그리고 의회에서의 자민련과의 연대를 통한 도움을 구하지 않고서는
정부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는 조직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2002년에 쓰인 책이어서 뒤를 이은 노무현 정권에 대한 언급은 없었지만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렇듯 민주화세력이 그 무능함을 보이는 와중에
CEO대통령론을 들고나온 이명박이 정권을 잡은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과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누굴 뽑으나 그놈이 그놈이다'라는 한탄은 이제 한탄을 넘어선 타당성있는 현실분석이다.
실제로 '평민당-민주당-국민회의-새천년민주당(-열린우리당)이나 민정당-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의 세력은 개혁/보수로 나뉘는 세력이 아니라 협애한 이념적 대표체계에서 한결같이 보수적' 이니까.


저자가 말하는 해결의 방법은 정당주의의 강화다. 보다 많은 갈등은 개개의 갈등이 가진 골을 줄인다고 마키아벨리가 말했듯이, 더 많은 인민의 의사를 반영할 수 있는 정당 스펙트럼이 구축되어야 민주주의는 건강해지고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 그를 위해서 독일의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선거와 같은 더 공정한 선거제도를 만드는 것은 선결조건 중 하나일 뿐이다.


여러 면에서 놀랄 기회도 많았고 새겨둘만한 문장도 많았다.
비판이란 신제품의 런칭쇼를 하는 마케팅 사원처럼 머뭇거리지 않고
준비된 내용을 복기하듯 차근차근 설명해나가는 논지 역시 반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다음에 읽을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최장집 외 6명, 프레시안북 2008
(블라디미르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가져온 제목인듯)
에 나오는 장하준 교수의 말을 인용해두며 다음 포스팅이 제발 빠른 시간내에 가능하길 바란다;


"처음 영국에 유학을 갔을 때 스웨덴 친구를 한 명 사귀었는데, 그 친구는 스웨덴의 좌파 정부와 우파 정부가 80%인 실업수당을 70%로 낮출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 싸우는 걸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우파 정부라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좌-우의 판 자체가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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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카프카 -상 (양장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사상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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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는 스스로 일생일대의 작품을 썼다고 했다. 스스로 상당히 만족한 작품이라고 했는데, 과연 지금까지 하루키 문학의 집대성이라고 할 만하다. 이후로 장편소설이 나오지 않고 있는걸 보면 여기서 그만두는 건가 하는 독자로서의 아쉬움도 있지만 권택영이라는 경희대 교수가 말하는 것처럼 <상실의 시대>, <태엽 감는 새> 에서 이어지는 라인업의 완성작이라고 할만 하기는 했다.

이런 저런 해설들이 많이 있고, 해설서가 따로 나올 정도기도 하지만, 몇가지 중요한 것만 (내 수준에서 느낄 수 있는 것만) 쓰자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와 '도서관'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터프한 15살 소년' 정도다. 특히 도서관을 더할 나위없이 매력적인 공간으로 만들어낸 점이 인상적이었다. 굳이 그 장소가 반드시 도서관이었어야 할 필요는 없었을 것 같지만 (박물관이나 미술관이었더라도 별 차이 없지 않았을까) 도서관을 비롯한 매 장면의 분위기 묘사는 가히 반할만 하다. 하루키 필살기쯤 되는건가;
 

일주일간 무척이나 재밌게 읽었다. 버스에서만 읽기로 정해두고 읽었기 때문에 버스타는 시간을 하루에서 제일 기다릴 정도로 읽는동안 즐겁고 설레었는데 결국 다 읽고나니까 여기서 그만두면 무라카미 하루키는 노벨 문학상을 끝내 받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섬세한 설정이나 분위기 묘사, 나카타의 상큼한 대사들은 멋졌지만 하루키에겐 그 모든 것이 어떤 고차원적인 상징, 입구의 돌이라거나 '흰 물체'같은 것들을 설명하기 위한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느낌이다. (어쩌면 '팬들은 이런걸 좋아하니까 넣어야지'하고 넣는 걸수도)

상징성이 강한 탓도 있겠지만 여러가지로 전 세계적인 공감대를 얻기가 어려워 보였고(극우적이라고 늘 까이는 전쟁이야기가 어김없이 들어가는 데다 페미니스트들에게 일갈하는 부분까지) 다른 고전명작들에 비해 지나치게 통속적이기도 했다. 재미로 따지자면 더할 나위 없는 작품이지만 그 사이에 놓인 강한 상징이 문학가들과 독자들 사이를 가로막는 벽같이 느껴졌다.

사에키 상이 카프카의 어머니라는 건 알수 있도록 해 주지만 딱 잘라 말하지는 않고, 사쿠라와 관계하는 것도 실제가 아닌 환상속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태엽감는 새>에서 와타루 노보야가 아버지를 상징한다는 것이 솔직히 해설을 보기 전에 알 수 없는 사실이듯, 하루키류에 익숙하지 않다면 사실관계조차 머릿속에 명확히 그려지지 않을 정도로 비현실적이다. (나도 한번 보고 <태엽감는 새>를 보고 다시 두번째 봤을때 겨우 이해했다.) 이렇게 어려운데도 백만부나 팔리는 이유는 도통 모르겠다. <노르웨이의 숲>과 같은 리얼리즘 작품을 기대하는 심리 때문인가.

어쨌든 이런 저런 이유로 축구선수 데코 닮은 이 아저씨의 문학이 '통속소설'을 넘어 '시대를 초월한 명품'으로 인정받기엔 아직 부족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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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 - 현대 민주주의의 위기와 선택
서병훈 지음 / 책세상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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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카 요시키의 <은하영웅전설>이라는 SF소설은 미래의 역사소설 형식을 띄고 있으면서 공화정과 제정을 비교하는 정치학적인 사유를 담고 있는 명작으로 꼽힌다.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이라는 전능에 가까운 황제를 둔 ‘은하제국’과 ‘자유형성동맹’이라는 민주국가의 대결 구도를 그린 이 소설의 메인 테마는 ‘선의의 독재’와 ‘불완전한 민주주의’ 사이의 갈등이다. 제국의 황제는 그야말로 신에 가까운 존재로, 전쟁에선 늘 승리하고, 귀족사회의 틀을 유지하면서 사회적인 불평등을 일소하여 제국을 완전에 가까운 통합으로 이끄는 인물이다. 반면 민주국가 측은 늘 반목하고, 통일되지 못한 국론을 분열하고 다수의 정치인들은 부패하고 무능하고 타락하여 국민들의 불만을 산다. 작가는 정치 구도를 독재와 민주, 통치자의 능력여부라는 두 가지를 기준으로 하여 유능한 민주정치, 무능한 민주정치, 유능한 독재정치, 무능한 독재정치로 나눈다. 유능한 민주정치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가정하고, 현실에서 선택 가능한 것은 무능한 민주정치와 유능한 독재정치라는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는 독재정치의 미화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열권에 달하는 책을 읽으면서 과연 인류에게 완전한 자유라는 것이 필요한가, 인류가 더 잘 살기 위해서는 어떤 종속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회의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포퓰리즘’이라는 용어를 처음 본 것은 노무현에 대한 비판을 적은 어떤 신문 사설이었다. 노무현에게는 어떤 개혁에 대한 의지도 없고, 단지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권력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혹자는 노무현을 보고 ‘개혁 팔아 권력 샀다’고 까지 말하기도 했고 나 역시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었기에 포퓰리즘은 부정적인 의미로 기억되었고, 이 책을 접하는 순간에도 포퓰리스트는 노무현과 같은 정치인을 말하는 것이겠거니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포퓰리즘은 결코 간단한 현상이 아니’라고 하며 포퓰리즘을 일시적인 병리현상이 아니라 현대사회의 구조가 가져올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위기라고 설명한다. 선거에 의해 정치적인 지위를 획득할 수 있는 민주주의 제도라면 언제든 대중 영합적인 인기정책과 카리스마적 언행을 보이는 포퓰리스트가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포퓰리즘 현상은 ‘은하영웅전설’에서 말하듯, 인류가 어느 정도의 강제를 원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인지도 모른다.

포퓰리즘은, 정치학적 용어가 가지는 일반적인 성질과 마찬가지로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용어다. 포퓰리즘 자체가 구체적인 실체를 갖고 있지 않고, 어떤 상황을 설명하는 용어인 때문에 학자마다 다른 상황을 놓고 포퓰리즘적인 현상이라고 말하며 그 예로 드는 상황도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일 수 있겠지만 마치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가져다 박정희가 당시의 우리나라를 ‘한국식 민주주의’라고 정의한 것과 같은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다. 때문에 저자는 우선 포퓰리즘의 기본 성격을 ‘인민주권 회복론’과 ‘선동 정치인에 의한 감성 자극적 단순 정치’로 규정하고 각각의 하위 개념을 추가로 지정하여 ‘기성 질서 안에서 신분 상승을 꾀하는 정치 지도자가, 인민의 주권 회복과 이를 위한 체제 개혁을 약속하며, 감성 자극적인 선동 전술을 바탕으로 전개하는 정치 운동’이라고 정의했다.

이후 저자는 포퓰리즘의 예로 1870년대 러시아에서 진행된 '인민 속으로v narod' 운동을 꼽았다. ‘인민 속으로’ 운동은 일종의 농민 계몽운동으로 농민들의 계급의식을 일깨워 그들을 정치화하려 한 운동이었는데 소수 지식인 위주로 진행된 운동인데다 농민들의 호응도 부족하여 사실상 실패한 사례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미국 포퓰리즘은 그 역사가 오래되었고 포퓰리즘의 개념도 다양한 분야에 걸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말하며 ‘미국 정치의 가치와 전통 속에 깊숙이 들어있다’ 고 설명하고 있다. 요컨대 미국 정치를 말하는 데 있어 포퓰리즘을 빼놓고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 만큼 미국 포퓰리즘의 사례는 인민당, 롱 주지사, 월리스 주지사, 페로 대통령 후보에까지 다양하다. 다양한 사례들 가운데에서도 저자는 ‘미국 포퓰리즘은 개혁을 지향하지만 미국 정치의 근본 틀은 바꾸려 하지 않는’ 특성을 지적하며 이상주의적인 성격과 보수적인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라틴 아메리카는 포퓰리즘이라는 단어가 곧장 연상될 만큼 포퓰리즘의 대표적인 사례들을 많이 보이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페론,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등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름의 정치인들이 많으며, 그들은 모두 카리스마적 지도력과 전통 엘리트에 대한 도전으로 국제사회에서 이름을 많이 알린 정치인들이다. 라틴 아메리카는 오랜 식민지 역사로 인해 사회 경제적 여건이 열악한 국가들이 많은 편이고 또 그만큼 사회적 불평등이 심각한 상태였기 때문에 전통적 엘리트들에 대한 대중의 반발심이 클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대중의 불만사항을 포퓰리스트들이 쉽게 파악할 수 있었던 만큼, 포퓰리즘이 성행하기 쉬운 조건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에게 보다 친숙하고 가까운 예로는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를 들 수 있다. 고이즈미의 지지율은 취임 초기에 80%대에 이를 정도로 높았으며 집권 3년차에 접어들고도 50%의 지지율을 유지했었다. 이는 역대 일본 총리중 가장 높았던 것이다. 고이즈미는 자파 세력이 미약했던 만큼 대중의 지지에 많은 것을 기댔으며 일본 정치의 고질적 문제인 파벌정치 탈피를 선언하며 일본 국민에게 높은 지지를 얻었다. 그가 만들어낸 자민당 원로들과의 전면적인 대결 구도는 그에게 ‘반 기득권, 반재벌, 반엘리트주의’의 이미지를 만들어 주기에 충분했고 일본을 바꾸겠다는 그에게 많은 일본인들은 지지를 보냈다. 고이즈미 본인은 고통스러운 개혁을 추진했다며 포퓰리스트라고 불리길 거부했지만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고이즈미를 포퓰리스트의 사례 중 하나로 꼽고 있다.

이러한 포퓰리즘들 가운데서 특성을 꼽자면, 가장 중요한 것은 포퓰리즘의 어원에서 보이듯 인민을 중시하는 정책이다. 포퓰리즘을 둘러싼 다양한 정의들을 보아도 인민이 포퓰리즘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부정하는 정의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인민은 포퓰리스트들에 의해 ‘억눌리고 잊힌 다수의 보통사람’으로 정의되었다. 포퓰리즘의 근간이 되는 이들은 지배 엘리트들에게 늘 억압당하고 무시당하는 처지로, 포퓰리스트들은 인민과 지배 엘리트와의 대립구조를 만들어낸 후 인민들이야말로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역사는 소수의 엘리트들에 의해 주도되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생각에 의해 움직여야 하며, 보통사람들의 상식이 소수 지식인들의 지식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보통사람들은 ‘부패하고 타락한 소수 엘리트들에게 억눌리고 있’기 때문에, 포퓰리스트들은 그런 기득권 체제에 대한 전면 개혁을 추구한다. 그러면서 대다수의 포퓰리스트들은 정치를 더럽고 타락한 것으로 간주하고, 스스로를 정치에 무관심한 것처럼, 정치인답지 않은 것처럼 포장한다. 그러면서 포퓰리스트들은 기존 정치세력, 엘리트주의의 온상인 의회정치를 좋아하지 않으며, 인민주권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대의제가 불필요하다고 말한다. 인민과 직접 소통할 수 있어야 하고, ‘다수 인민이 직접 자신의 의지를 구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포퓰리즘의 가운데에서 인민 대중은 정작 정치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포퓰리스트들은 너나할 것 없이 인민을 주인공으로 모시는 것처럼 꾸미지만 정작 포퓰리즘 지도자들은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발휘하여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거나 해야 할 일을 알면서 직접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인민들에게 개혁을 위임받는다. 인민들은 ‘자기 이익에 대해 관심은 높지만 적극적인 참여 의지는 부족’하기 때문에 포퓰리스트들은 득세할 수 있다. 포퓰리스트들은 파레토의 이론에서 말하는 ‘비통치 엘리트’에 속하는 계급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이들은 호시탐탐 통치 엘리트들을 누르고 일어서기 위한 기회를 엿보고 있다. 이런 비통치 엘리트가 갖는 신분 상승에의 열망은 대중을 동원하여 집권하는 방법을 택하게 만든다. 대중을 선동하여 집권하지만 그들은 집권 후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 단순하고 이해하기 쉬운 해결책을 제시하지만 실제로 그 해결책을 실현하는 것은 애당초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중으로부터 지속적인 인기를 얻기 위해 고통이 수반될 수밖에 없는 장기간의 개혁책을 택하지 않고 순간순간의 인기정책으로 일관한다. 포퓰리스트들이 의사라고 한다면, 환자에게 몸에 좋지만 입에 쓴 약을 처방하기보다 그때 먹기 좋은 약을 처방하는 셈이다. 그들은 애당초 환자의 건강회복에 관심이 없는 것이다. 포퓰리즘이 문제가 되는 부분은 바로 여기라고 할 수 있다. 인민의 주권회복을 모토로 집권한 포퓰리스트들이 실제론 인민들의 주권 회복보다는 개인의 영달, 스스로의 권력욕을 채우는 것에 몰두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인민의 주권회복, 민주주의의 실현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어떤 전능한 엘리트의 지배가 아닌,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사회의 나아갈 방향을 정하고 실천하는 정치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다. 그렇지만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사회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 생각하고 결정한다는 것은 무리한 요구이며 따라서 대의제 민주정치가 등장한 것이다. 그렇지만 대의제 정치에서 대중을 우롱하려는 포퓰리스트들의 발호 역시 필연적인 현상이다. 서두에서 말했듯 포퓰리즘은 단순 병리적인 현상이 아니라, 현대사회의 구조가 가져올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위기다. 하지만 토크빌이 말했듯, 민주주의에 이런 구조적인 약점이 있다고 해서 우리는 전제 정치로 돌아갈 수 없다. 민주주의의 진행을 가로막으려 하는 것은 ‘신의 뜻 자체를 거스르는 것’일만큼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포퓰리즘에 휩쓸리지 않기 위한 해결책으로 ‘인민의 깨어있는 의식’을 요구한다. 석유 비축 자금을 풀어 기름 값을 내리겠다는 포퓰리즘적 공약에 미국인들은 등을 돌렸지만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박수를 보낸 것이다. 성숙한 시민의식은 포퓰리즘에 휩쓸리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든 등장할 수 있는 포퓰리스트를 경계해야하며, 스스로 사회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공부해야하는 것이다. 포퓰리즘이 정당하지 못한 시대적 흐름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 흐름에 거부해야 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과거로 밀려가면서도
물결을 거슬러 노 젓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 F.S. 피츠제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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