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음으로부터 배운 것
데이비드 R. 도우 지음, 이아람 옮김 / 처음북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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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 내가 죽음으로부터 배운 것

주인공은 사형수를 변호하는 변호사이다. 하지만 어떤 사형수도 살리지 못한 변호사이다. 주인공의 장인은 암에 걸려 투병생활을 했다. 결국 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기르던 개 위노나 역시  병으로 죽는다.
변호를 하던 사형수 워터맨도 역시 사형을 집행받고 죽는다.
책을 처음 펼쳤을 때 장인은 암에 걸렸고 여러 치료의 단계를 거치다. 결국은 수술을 거부하고 생을 정리하기로 했다.
변호를 맡은 워터맨 역시 그랬다. 여러 탈출구를 찾아보려했지만 법원은 그리 관대하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입증해준 셈이다.
모든 사람에게 평등해야 할 법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있는 사람에게 관대한 것이 법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돈이 있어야 법의 보호를 받는 것. 결국 인간이 만든 법이라는 것도 자본의 논리이다. 그래서 돈이 있으면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텍사스를 비롯한 대다수의 주에는 범죄에 가담한 사실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법이 허용하는 최대치의 처벌을 내릴 수 있다록 하는 법이 있다. 이것은 당사자 법이라고 알려져 있다. (33)
만약 이 법이 우리나라에 적용이 된다면, 재계와 정계를 같이 처벌할 수 있을까? 업무상 배임 등 경제사범들과 정치권에서 나오는 사건들이 이 법처럼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우리 나라의 불법적 관행이 사라질까? 하지만... 우리나라나 미국이나 이처럼되지 않는다는 것이 함정이지 싶다.

죽음이라는 것을 두 가지 방향으로 탐색한 책이라 생각한다. 암이나 병에 걸려 생을 마감하는 것과 외부적 힘에 의해 생명을 잃게하는 타살. 여기서는 사형집행이라는 말을 한다. 사람의 몸은 기계처럼 대체불가하기에 오래 쓰다보면 망가지게 된다. 그래서 틀니를 하고 안경을 쓰고 보청기 등을 하지 않나. 그러나 타살은 다르다. 내 의지가 아닌 상태에서 목숨을 잃는다는 것은 어떤 표현으로도 표현할 수 없다. 이를 법적인 테두리로 끌고 들어온 것이 사형이라는 제도이다. 사형은 법적으로 살인을 용인하는 제도이다.
살인이 1:1의 폭력이라면 사형은 1:다수의 폭력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말은 이렇게 하지만, 주인공의 말처럼 나의 가족을 해한 당사자를 안다면 나 또한 그를 죽여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왜 그가 살아야 하는 정당한 이유를 난 댈수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것은 참 좋다. 하지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198)

장인어른은 평범한 인간이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두 가지 뿐이라고 말씀을 하시곤 했다. 하나는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능력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랑이었다. (273)

위 두 문장은 좋은 사람으로 사랑하며 살라는 뜻 같다. 타살이라는 사형의 이야기 중 사랑이 나온다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굿모닝 베트남이라는 영화 중 한 장면이 생각난다.  교전이 한참인 상황에서 Louis Armstrong의 "What a wonderful world"가 흘러나온다.
서로를 줄이는 현장에서 what a wonderful world라니.

책에서 처음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살면서 깜짝 놀랄 일이라는 것은 사실 없어. 우리가 무심하게 있다가 갑자기 어떤 일이 일어나면, 우린 그것을 미처 예상치 못한 놀랄 일이라고 부르는 거지. ( 28 페이지)"
그래 우린 잊고 살고 픈 일이 많은 사람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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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으로 읽을 것인가 - 아마존 ‘킨들’ 개발자가 말하는 콘텐츠의 미래
제이슨 머코스키 지음, 김유미 옮김 / 흐름출판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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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무엇으로 읽을 것인가

아마존 킨들개발자가 쓴 콘텐츠의 미래인데.. 글쎄~ 읽다보니 킨들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e-book이 있다. 저렴하고 필요해서 e-book 몇 권을 iPad 다운받아서 읽어보았다. 하지만 느낌이 좀 이상했다. 종이 책을 보는 느낌과 e-book을 읽는 느낌은 무엇인가 상당히 다른 느낌이었다. 눈의 피로도도 전자책이 더 심했다. “전자책의 중요한 장점은 당신이 읽는 책을 저장하고 링크할 수 있는 기능에 있다.” (124 페이지) 라고 했지만 실제 이 링크를 따라서 읽다보면 책에 자체에 집중하지 못하는 단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저자는 전체 인구의 2.5%가 가장 먼저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는 혁신가(innovators)이고, 다음 13.5%가 조기수용자 (early adopters), 그 다음 34%가 조기다수수용자 (early majority). 여기에 포함된다면 전체 인구의 50% 안에 드는 셈.” (170 페이지) 이라고 하였다. ‘킨들을 개발한 개발자이기에 IT 제품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것 같다. 하지만 굳이 IT기기에 민감하게 받아들여야 하나? 하는 생가도 들게 한다.

종이 신문을 적게 보고 신문이 웹과 PDF로 발행이 되어도 우린 여전히 신문을 본다. 저자의 말처럼 매개체는 바뀌었지만.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컨텐츠가 아닐까? 저자가 개발자이기에 자연스럽게 매개체를 집중해서 말한 것은 이해할 수 있다.

변상증(pareidolia)은 아무도 없는데 얼굴을 보는 것처럼 착각하는 현상이라고 한다. (328 페이지)이 현상을 나타날려면 아무래도 머리에서의 상상이 있어야 할 것 같다. 대상 영속성도 이와 같은 의미일 것 같다. 이는 집중에 대한 의미이지 매개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닌 것 같다.

나처럼 종이 책을 선호하는 사람은 왜 굳이 매개체에 대해서 이야기하나 싶은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들었다. IT 분야에 있는 분들에게는 이 기기가 밥줄이고 혁신이라 할 수 있지만, 한 걸음 물러 서있는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많다.

혹시나 3D 프린터처럼 도소매업의 유통구조를 바꾸고, 산업의 구조를 바꾸는 기계라면 또 모르겠지만. 저자도 킨들이 저자에게도 이득이 되고, 책의 유통구조를 바꿀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책을 읽을 때 느끼는 종이 냄새를 느낄 수 없다는 것은 내가 전자 책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중의 하나이다.

책을 읽을 때 느끼는 종이의 사각거림과 종이 재질이 주는 느낌은 책을 읽고 있다는 느낌을 더 강하게 해준다. 이를 디지털 기기의 소리와 터치로 대체한다해도 원래의 책이 주는 느낌을 따라 올 수는 없을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서 누래지는 종이처럼, 시간이 지나면 책에 대한 기억도 바래지기는 한다. 하지만 전자책은 몇 년이 지나도 새 책처럼 볼 수 있다. 사람도 시간을 같이 보내면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것처럼, 시간이 지나 종이 냄새가 나며 그때를 회상할 수 있는 아날로그적인 종이 책이 좀 더 사람 냄새 나는 매개체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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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으로 읽는 자본주의 - <유토피아>에서 <위대한 개츠비>까지
조준현 지음 / 다시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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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고전으로 읽는 자본주의

유토피아에서 위대한 개츠비까지라는 부제를 갖고 있다. 유토피아라는 허울뿐인 망상에서 개츠비가 여성해방을 외치는 대목까지가 자본주의일까? 라는 의문은 들지만 이 책이 이렇게 쓰여져 있느니 책대로 가봐야겠다.

자본주의라는 말을 누가 사용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한다. 베르너 좀바르트가 근대 자본주의라는 책을 쓰면서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Capitalism 이라고 자본주의를 쓴다. Capital이 자본이니 자본이 생기면서 자본주의가 생겼을 것이라 추측한다.

자본이 생겼다는 것은 사유재산이 생겼다는 것이고 사유재산이 늘어남에 따라서 소유욕이 생겼을 것이고, 소유욕에는 쾌락도 포함될 것 같다. 향락과 쾌락에 빠진 인간을 구원한답시고 종교가 등장했을 것이고, 이 종교로 자신들의 자본을 종교인들이 키웠다고 생각한다.

이후 민중의 봉기가 있었고 산업혁명이라는 혁명이 생기면서 대량생산 체계로 들어갔다. 이후 자본은 점점 거대해지고 파레토라는 법칙까지 만들어지면서 돈이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현상까지가 지금의 상태가 아닐까 한다.

이런 과정에서 책들을 소개하면서 고전으로 읽는 자본주의를 완성하고 있다.

경제학의 조류인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맬서스의 인구론 등은 현시대의 자본주의를 설명하는 가장 근본적인 책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이 책들이 다 설명하지 못한 한계는 드러났다. 생산과 소비의 균형은 깨어진지 오래이고 우린 어느새 소비를 강요당하는 사회에 살고 있지 않은가?

이 책의 마지막에 슘페터의 이야기가 나온다. 슘페터는 기업가의 혁신이 자본주의의 발전을 주도하다고 생각했다. 혁신이란 창조적으로 파괴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슘페터는 혁신을 다섯 가지로 정의했다.

첫째, 새로운 상품의 발명, 둘째, 새로운 생산 방식의 발명. 셋째, 새로운 원료의 개발. 넷째, 새로운 시장의 개발. 다섯째, 새로운 시장 구조로의 전환이다.

새로워야 혁신이라고 했다. 새로운 것은 낡은 것을 바꿔야 새로운 것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새로워야 하는지는 항상 의문이다. 핸드폰에 인터넷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만든 스마트 폰이 혁신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혁신으로 인해 어디서든 일을 해야 하는 우리는 혁신의 노예인가? 혁신과 새로움이 인간을 종속한다면 이는 자본의 노예로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슨 혁신일지는 항상 의문의 연속이다라고 본다.

혁신과 새로움이 인간에게 쉼을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혁신이 아니라 자본의 노예로서 살아가는 연장선에 불과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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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은 나의 힘 : 사회 읽기 고전은 나의 힘
박현희.류대성 엮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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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고전은 나의 힘 (사회읽기)

윤리, 세계화, 자본의 쏠림현상, , 정의, 군중, , 권력 등등 사회 현상을 말하는데 필요한 말들은 무수히 많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일테니까. 각기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이 사람들의 이야기에 카테고리를 만들어서 담아내야 하니 어렵긴하다. 하지만 각기 다른 삶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공통분모가 존재하니 끄집어내어 이야기 해야지.

예전부터 그랬던 것 같다. 발달된 사회의 사람들은 덜 발달된(?) 개발된 사회의 사람들을 보면서 예전엔 저랬을까? 아니 그랬을꺼야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요즘 방영되는 정글의 법칙도 같은 이유일 듯 싶다. 정글에서 생활하는 원시부족들을 만나고 그들만의 생활의 법칙을 배우며 원시부족의 사회를 배운다곤 하지만, 실은 우리는 동시대 (contemporary)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니까.

원시부족이라곤 하지만 그들도 문명을 알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과는 다른 복장과 언어 그리고 장비를 사용하는데 그들을 꺼리낌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부족들은 원시 부족이 아니라는 뜻이니까. 원시 부족이라면 저항하거나 달아나거나 했지 않을까?

이처럼 우린 나름 착각 속에 살고 있다. 내가 저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자만감, 성 문제에 대한 잘못된 생각, 계급과 계층간의 불균형, 국가 권력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이 오해를 근간으로 빌어먹고 있는 직업 정치인들~ 우린 사회를 살아가면서 많은 착각을 하면서 살아가는 듯 싶다.

이 착각을 나름 규범이라는 사회계약으로 묶어서 생각할 수 도 있다. 그건 자유니까. 이런 군중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행복할까? ~ 행복 스트레스라고도 하지만 그리 즐겁지도 슬프지도 않는 일상을 살아가는 듯 한 느낌이다.

그러기에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이 나왔으리라 본다. 뒤르켐의 자살론을 읽어봤으나 그리 크게 감명을 받았거나 자살에 대해서 잘 알 수 있지는 않았다. 자살이 심각한 사회문제이다. 울리히 벡이 위험 사회를 논하는 것도 다 같은 이유일 것 같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사회, 인격이 인격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사회, 권위와 권력으로 짓누르는 사회, 성적 억압 상태를 개선하지 못하는 사회. 이런 사회가 위험 사회이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이다.

신문 사회면을 보면 정말 각양각색의 인간사가 나온다. 하지만 대부분 사고다. 어떤 일이 벌어진 후에 그 사건을 조명하는 이야기다. 사건이기에 서술한다. 그것이 전부다. News. 새로운 사실들만을 Fact로 묶어 내보내는 매체들. 뭐 이 fact 100% 진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이 단어를 참 좋아했다. Contemporary 동시대라는 말. 너도 살고 나도 같이 사는 세상.

그러기에 이제 옆 사람 좀 같이 보고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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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은 나의 힘 : 역사 읽기 고전은 나의 힘
이철진.류대성 엮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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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고전은 나의 힘 (역사읽기)

역사는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가 있는 것 같다. 승자의 이야기라는 사람도 있고, 개개인의 삶을 묶어 큰 줄기로 그린 것이 역사란 사람도 있다. 어찌되었건 역사는 과거의 기록임에 틀림이 없다. 다만 이 기록이 어떻게 쓰여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본다. Fact를 근거로 쓰여진 것인지 아니면 그 당시 역사를 기록한 사람 또는 통치자에 의해서 미화된 기록인지. 이에 따라 역사를 보는 관점이 달라질 것은 자명한 이치니까.

고전은 나의 힘 역사읽기는 역사와 인간, 인간과 문명, 근대의 시작, 제국주의, 유럽 중심주의, 현대 역사학의 흐름으로 나뉘어져 있다.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헤겔의 역사철학 강의는 역사에 대한 전반적인 정의를 말하고 있다. 이후 인간과 문명은 역사서라고 불릴 책들이 있다. 그런데 장미의 이름은 역사서는 아닌데 왜 여기 있나 싶었다.

대학교 때 장미의 이름을 읽고 고중세 정치 사상에 대해서 논하라는 끔찍한 사건이 있어서 장미의 이름이란 책을 기억하고 있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인 장미의 이름은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다. 수도원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읽고 고중세 정치 사상을 논하라니어거 뒷통수 지대루 얻어맞은 기분이었는데그러고 보면 시대상을 기록한 책이면 그것이 바로 역사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시 해본다.

근대의 시작에서는 개인, 자본, 혁명, 합리성의 사회라는 부제를 갖고 있지만, 실제는 계급과 계층의 탄생이라고 생각한다. 막스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곧 종교와 돈의 관계를 밝힌 책이라고 본다. 중세의 기독교는 그 시대를 버티게해준 사상이었지만 이를 통해 계급과 계층이 분화되는 결과로 낳았으니까.

이후의 책 저자들도 유럽의 학자들이 많다. 유럽 중심주의를 설명한 5장에서도 그렇다. 현대 역사학 또한 유럽 중심의 학문이었다. 우리가 배우고 있는 학문들의 대부분은 유럽의 학문이다. 동양의 학문을 배경으로 한 글이 적어서 아쉬움이 컸던 책이다.

키스 젱킨스의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에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 무엇누구로 대체하고, ‘위하여를 뒤에 덧붙여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로 바꾸어야 제대로 된 물음이라고 했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현재를 통제하는 사람이 과거를 통제하고 과거를 통제하는 사람이 미래를 통제한다고 했다.

이를 기반으로 본다면 우리의 역사는 어떨까?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했고, 옆나라 일본은 평화헌법을 바꾸어 제국주의의 망령이 부활하고 있다. 봉선화라는 위안부 문제를 다룬 연극에서 이런 대사가 있었다. 세계대전 후 독일이 전범죄에 대해서 사죄한 것은 유대인들의 힘이었다고. 유대인들이 독일의 범죄에 대해서 꼼꼼히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독일은 사죄할 수 밖에 없었다고.

책 속에 있는 역사가 아닌 현실에서 역사인식부터 바로 잡을 시점이 아니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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