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7월 독서정산


1. 밀란 쿤데라 저, "소설의 기술", 민음사(2013), 완독 


쿤데라 소설을 읽기 전에 봤으면 좋았겠다 싶었다. 추상적이고 난해할 수 있는 그의 소설에 대한 길잡이 역할이 가능한 책이어서 그렇다. 그가 생각하는 소설의 정의, 윤리와 기능을 엿볼 수 있었고 그가 소설을 통해 하고자 했던 말이 무엇인지, 왜 그렇게 소설을 썼던 건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이런 '앎'을 통해 어릴 적 그를 향해 막연하게 가지고 있었던 환상이 많이 사라졌다. 이제는 이해할 수 있는 존재로 다가오기 때문일까, 그가, 그의 소설이. 아니,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은 다시 읽어보니 웃기다. 쿤데라는 실존적 상태만을 묘사하려고 했을 뿐, 그 부조리와 애매모호함을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견뎌내야만 하는 건 결국 나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일 테다. 결국,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맥락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 달을 돌아보며


1. 바빴다. 바쁜 만큼 퇴근 후 퍼졌고, 도파민에 전 현대인 답게 퍼진 시간에 휴식을 취한 게 아니라 핸드폰을 무엇보다 많이 찾았다. 많이 찾아야 할 건 책이었는데 말이다. 말의 목을 잘라낸 김유신처럼 과감한 결단을 통해 좋지 않은 습관을 없애고 싶은 욕망이 강한 요즘이다. 대학생 때 조금이라도 핸드폰에 신경을 쓰는 게 자각 될 때면 카카오톡을 한 달 지우고 살기도 했는데, 그때의 내 모습이 조금은 그립다.


2. 쿤데라를 읽자고 다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부고 기사가 났다. 워낙 베일에 쌓여있던 사람인 데다가 장수까지 한 탓에 별다른 느낌은 없었다. 좋게 살다 갔을까, 죽기 전에 삶이 후회되진 않았을까, 세상을 떠나가던 순간에 그의 곁에는 누가 있었을까, 구체적으로 어떤 인간이었을까, 란 몇 가지 호기심 어린 질문이 지나갔을 뿐이었다. 몇 달 전에 아리안 슈맹이 쓴 "밀란 쿤데라를 찾아서"란 책을 도서관에 신청해 도착했는데 아직 빌려보진 못했다. 개인적으로 쿤데라라는 인간과 관련된 책이 더 나왔으면 좋겠다만, 소설이 작가와는 독립된 작품으로서만 인정받길 바랐던 그의 바람을 생각해보면 흠... 뭇사람이 왈가왈부하지 않고 쿤데라라는 사람 자체는 잊어주길 바랐을 사람이니까.


3. 어느 군 부대의 비서실에서 일하던 나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기이하고도 현학적인 제목에 매력을 느껴 사령관실에 책장에 꽂혀있던 진중문고본을 손에 쥐고 한참을 쳐다봤다. (주말에 청소를 하러 나왔을 때였다)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영원회귀라는 개념을 더듬거리며 좇다가 한동안 니체에 빠졌던 기억도 난다. 물론 책도 쭉 다 읽어버렸고. 나는 당시 왜 쿤데라 소설에 기묘한 감정을 느꼈을까, 그리고 왜 빠져들었을까. 앞서 언급한 막연한 환상(현학적인 개념에 취해)의 영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실존적 갈망을 소설에 투사한 영향이 가장 컸던 것 같다. 그래야만 한다는 당위의 세계(나를 짓누르는 책임과 도덕의 세계)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욕망.


8월에 읽고 싶은 책


The Order of TIme은 계속 읽고, 오랜만에 쿤데라의 참존가를 읽을까 싶기도 하다. 일단 소설의 기술 발췌를 해야 하긴하는데. 붓다 브레인을 조금씩 읽고 있고 보통의 불안도 완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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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기술 밀란 쿤데라 전집 11
밀란 쿤데라 지음, 권오룡 옮김 / 민음사 / 2013년 1월
평점 :
품절


쿤데라가 어떤 사람인지를 잘 보여주는 책. 그가 생각하는 소설, 그가 소설에 담고자 했던 것. 작품 읽기 전에 미리 봤으면 좋았겠다 싶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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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5,6월 독서정산


1. 밀란 쿤데라 저, 이재룡 역, 『정체성, 민음사(2012), 완독

초반의 서사는 흥미로웠다. '더는 남자들이 자신을 쳐다보지 않는다'는 샹탈의 고백과 그녀를 욕망하는 익명의 편지를 보내는 장마르크의 행동, 그리고 그 익명의 시선을 통해 조금씩 변화하는 샹탈의 모습. '결국 어떻게 될까?'를 묻게 만드는 초반의 흡입력과 달리, 후반부로 갈수록 현실과 상상, 꿈 사이의 경계는 흐려지고 읽은 내용이 꿈인지 인물들 사이에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모호해지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와 함께 흡입력도 사라졌던 것 같다. 솔직히 책을 좀 더 깊이 읽어보지 않는 이상, 쿤데라와 이 꿈이라는 장치를 통해 어떤 실험을 하고자 했던 건지, 인간 실존의 어떤 부분을 탐구하고자 했던 건지 잘 알 수는 없을 듯하다.

그럼에도 생각해볼 키워드는 많았다. '여성으로서 나이를 먹는다는 일', '정체성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구성되는 건지', '정체성과 타인의 시선과의 관계' 등등.




두 달을 돌아보며

1. 책이란 단어를 들으면 떠오르는 구절이 있다. "길거리에서 이 조그만 책을 열어본 후 겨우 그 처음 몇 줄을 읽다 말고는 다시 접어 가슴에 꼭 껴안은 채 마침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정신없이 읽기 위하여 나의 방에까지 한걸음에 달려가던 그날 저녁으로 나는 되돌아가고 싶다." 좋은 책을 발견해 부푼 마음을 안고 설레하며 달려가 책을 허겁지겁 먹어치우고자 하는 욕망을 이렇게 잘 표현한 구절이 있을까? 카뮈가 그르니에의 책 "섬"에 바친 헌사에 나오는 구절이다.

2. 이 구절을 떠올릴 때면 그리움과 아득함이 느껴진다. 책에 깊이 빠져들기 시작한 10여년 전, 독서관에서 이런저런 책을 살펴본 후 대출해 설레는 마음으로 집으로 달려가던 그 때에 대한 그리움과 아득함이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3. 지금은 책에 대한 마음이 양가적이다. 호기심과 지적쾌감, 끝이 없는 욕망의 대상이자 의무감의 대상. 분명 시작은 전자였다. 그런데 지금은 후자가 강하다. 뭐를 읽어야 하는데, 뭐를 읽고 글을 써야 하는데 등등.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그냥 재밌는 책을 읽었고 그 재미남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이 많아 헛소리를 많이 지껄였다. 개똥 철학을 늘어놓아도 개의치 않았다. 그저 매일 읽고 쓸 뿐이었다. 

4. 지금은 더 깔끔한 글, 정돈된 글, 써야만 하는 글과 같은 키워드들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됐다. '이건 내가 원하는 내 모습이 아니다. 세상의 흐름을 따르려고, 타인의 욕망을 욕망 하려고 하지 말자.'라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고 하반기엔 다르게 접근해보기로 했다.

5. 그때 그 설렘을 안고 책을 보던 때로 돌아가보기로 했다. 그때 나를 사로잡았던 인물들, 책들을 다시 보기로 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떠오른 게 밀란 쿤데라였다. 특히,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짧은 기간이었지만 행복했던 철학 공부도 이 소설의 앞 부분에 나오는 니체의 영원회귀로부터 시작됐다. 여러모로 나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는 작가와 책이었다. 그래서 정했다. 올 하반기에는 쿤데라 읽기에 집중해보자고.


쿤데라 책 정리


































아직 소장하고 있지 않은 책들이 꽤 있었다. 1) 우스운 사랑들 2) 불멸 3) 느림 4) 만남 5) 향수 6) 이별의 왈츠 7) 소설의 기술 8) 배신당한 유언들 9) 자크와 그의 주인. 읽어 본 책들은 1) 참존가 2) 농담 3) 삶은 다른 곳에 4) 정체성 5) 웃음과 망각의 책(읽는 중). 6개월 동안 쿤데라만 볼 건 아니지만 좀 깊게 파볼 생각이다.


기타

이와 별개로 로벨리의 The Order of Time도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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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밀란 쿤데라 전집 9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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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결말은 아쉬웠으나 시선과 시선이 복잡하게 얽히고 설켜 한 사람의 정체성을 지탱하는 모습을 흥미로운 사건(익명의 편지)을 통해 풀어낸 점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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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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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성을 잃지 않은 말이 빚어내는 삶의 복잡성과 모순, 지난함.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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