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에티켓 - 나 자신과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대한 모든 것
롤란트 슐츠 지음, 노선정 옮김 / 스노우폭스북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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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가족, 친구, 지인들을 위한,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위한 에티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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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화된 신
레자 아슬란 지음, 강주헌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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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1세기에 신을 사고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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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9년 독서 정산


쓰는 게 맞나, 무슨 말을 써야 할까. 

깜빡이는 커서를 쳐다보며 한참을 생각했다. 뚜렷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들춰본 책이 없던 건 아니다. 성긴 생각만 남기고 휘발된 책들을 애매하게 부여잡는 게 의미가 있을까, 란 질문에 답하기 어려웠을 뿐. 하지만 어차피 이런 글은 다 자기만족 아닌가. 


2. 인상 깊었던 책들


(1) 이지영, 정서조절 코칭북



슬픈 이야기지만, 심리 관련 저서를 읽을 때 국내에서 나온 건 많이 거르곤 했다. 그래도 종종 각종 연구결과를 잘 소화하면서도 자기 생각을 논리정연하게 제시하는 책을 만날 수 있었는데, 이 책이 그런 책들 중 하나다.

책의 핵심은 '감정'이다. 감정이 뭘까? 감정은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 작동하는 걸까? 감정을 어떻게 마주해야 더 잘 살 수 있는 걸까? 저자는 이런 질문에 답한다. 각종 이론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실용적인 부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발싸심한 게 느껴진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들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가벼운 이야기를, 가볍게 읽고 자기 삶이 바뀌길 바라는 걸까? 적어도 쉬운 이야기를 바라지 않고, 고뇌하면서 자기가 바뀌길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빌려봤다가 새해에 샀다. 다시 읽을 계획. 소장할 만한 책이다.


(2) 마크 릴라, 분별없는 열정



마크 릴라는 컬럼비아대학교 교수다. ‘서구 사상사, 그중에서도 정치와 종교의 관계, 근대 서구 계몽주의를 주로 연구하는 정치철학자다. 

읽고 싶어 보관함에 담아만 두다가 기본 예비군과 작계 훈련 상하반기 때 빌려 가 틈틈이 읽어 완독했다. 책 소개란에 나온 것처럼 지식인의 분별없는 열정이 냉혹한 현실 정치와 잘못 만났을 때 어떤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보여준다는 말로 가볍게 퉁 치기는 어려울 정도로, 마크 릴라는 각각의 철학자 앞에서 머뭇거리며, 분석적으로 이들의 생애와 철학, 그리고 정치적인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읽으며 떠오른 생각은 많았으나 현실적인 문제로 아무런 글을 남기지 못해 아쉽다. 다음에 다시 읽고 서평을 꼭 써두고 싶은 책. 아렌트가 하이데거를 보고 자신의 에고에 지나치게 사로잡힌 사람,이라는 투로 말하던 부분이 기억에 특히 남는다.


3. 19년의 독서를 돌아보며


쓸 말이 없을 정도로 책을 읽지 못한 한 해였다. 뒤적인 책들은 좀 있었다.

 

조던 엘렌버그의 틀리지 않는 법데이비드 베너타의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도올의 스무살-반야심경에 미치다











나가노 히로유키의 (물리가 쉬워지는) 미적분과 (통계가 빨라지는) 수학력제임스 스튜어트의 미분적분학앤더슨의 통계학



















스티븐 내들러의 에티카를 읽는다발타자르 토마스의 비참할 땐 스피노자 등등.



 







이 외에 읽은 건 대부분 수험서적이었다. 각종 경영, 경제, 재무, 회계, 적성 시험 서적들. 먹고사는 데 필요한 책을 읽었던 한 해랄까. 적성 시험공부나 경영전략, 경제학, 재무관리 공부는 적성에 꽤 맞았다. 거시적인 흐름을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고 수학을 좋아하기 때문이었고, 익숙하지 않은 세계를 알게 되는 지적 쾌감도 있었으니. 하지만 늘 그랬듯 이런 공부는 뭔가 공허하기도 했다. 이미 짜인 규칙, 프레임 안에서 상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필요한 공부보다는 규칙과 프레임의 타당성, 그 규칙이 나와 타인, 그리고 세상과 맺고 있는 인과관계 등에 더 관심이 많기 때문이었다. 그런 걸 보면 세상 편하게 사는 일은 글러먹은 것 같다. 어휴.


앞으로 어떤 책을, 어떻게 읽어나가야 할까.

 

1) 내가 조금 더 밀도 있게 공부해 기둥을 세우고 싶은 분야를 찾고 싶다

 

세상엔 내가 알지 못하는 다양한 세계가 존재하고, 나는 그 세계를 다 엿볼 수 없다는 사실이 늘 아쉬웠다. 책도 마찬가지다. 세상엔 읽어보고 싶은 다양한 책이 존재하지만 내 삶은 무척 짧기에 그 책들을 다 읽어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아쉽다. 그래서 고민이다. 어떤 책을 읽어야 하나? 

하지만 딱 '이거다!'라는 걸 아직도 찾지 못하겠다. 이것도 재미있어 보이고 저것도 재미있어 보이고, 그러다 보면 여러 선택지 앞에서 어리바리하며 시간만 보내고 정작 끈덕지게 읽지를 못하는 경우가 잦다. 내가 조금 더 밀도 있게 공부해서 기둥을 세우고 싶은 분야를 찾고 싶긴 한데 쉽진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으면 더더욱 찾을 수 없으니 눈에 먼저 들오고 잡히는 것들이라도 꾸준히 읽다 보면 뭔가 찾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바람과 함께 독서를 해나가고 싶다.


2) 책을 계획적으로 읽는다

 

책 읽기는 내게 오락과도 같기 때문에 모든 걸 계획적으로 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밀도 있게 한 주제를 파고들기 위해서는 커리를 작성해 계획적으로 읽어나가는 습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뇌과학, 심리학, 철학 분야에서 가졌던 문제의식이 연결고리가 있는 만큼 이 부분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하나씩 책을 읽어나가야겠다.


3) 불편한 책을 읽는다

 

책의 내용 자체가 불편해도 괜찮고 어려워서 불편해도 괜찮다. 뒤돌아보면 늘 불편함과 마주했을 때만 성장했다. 불편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그러니 불편한 책을 읽자.


4) 작년에 지향하고자 했던 독서 방식을 체화하고자 노력한다

 

첫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또는 강박과 초조에 휩싸여 책을 읽지 않는다. : 전보다 공허함, 강박, 초조 때문에 책을 읽는 경우가 많이 줄긴 했다. 그래도 꾸준히 더 노력하자. 초조는 죄다.

둘째, 책을 읽을 때 ''를 중심에 둔다. : 남이 어떻게 보든 무슨 상관인가. 책의 핵심은 왜곡하지 않되 책이 내게 주는 울림과 공명에만 신경 쓰자. 

셋째, 당장 내가 마주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책에 관심을 둔다. : 전에도 썼지만 무분별한 호기심은 내면에 혼란만 가져다준다. 하루하루 내가 마주한 문제, 또는 의문을 곱씹고 그와 관련된 책을 읽도록 노력하자.


2020.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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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2018년 독서정산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곱씹었다. 한 해 동안 어떤 책에 관심을 뒀고 어떤 책을 인상 깊게 읽었는지. 만족스러운 한 해는 아니었다. 천천히 깊게 읽는 게 여전히 어려웠고 그랬던 만큼 책을 읽고 바뀌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책에서 나를 찾았다. 그래도 나쁘진 않았다. 현실을 직시하는 과정에서 위안을 얻었으니까.

한 해의 독서를 갈무리하고자 읽고 훑은 책 중에서 인상 깊게 읽었던 책과 괜찮았던 책, 다 읽지 못해 아쉬웠던 책을 위주로 기록을 남겨보려 한다.


2. 인상 깊었던 책들


의도하진 않았지만 뇌리에 깊게 박힌 책들이 주로 문학 작품이었다.


(1)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



이 단어가 자꾸 나를 이 비극으로 이끌었다. 에픽하이의 백야를 통해 처음 접한 단어. 하마르티아(hamartia). ‘과녁을 벗어난 상태를 뜻하는 그리스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이렇게 말했다. '과실(하마르티아) 때문에 불행을 당한 인물이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무지해서 행한 비자발적 잘못을 비극의 주인공이 범해야만 그가 연민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여기에서 '잘못'은 우리가 이해하는 ''와는 다른 개념어다. 인간이 불완전하기에 범하게 되는 어떤 해로운 결과를 지칭하는 말이랄까.' 그게 곧 하마르티아의 핵심, '무시해서 행한 비자발적 잘못'의 의미기도 하다. 그리고 하마르티아는 근대를 뒷받침하는 개념(자유, 책임, , 이성)이 포섭하지 못하는 부분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나는 이 부분이 매력적이었다.

우리는 불완전에서 오는 '잘못'''와 섞어 쓴다. 또한, 개인의 자유가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잊는다. 덕분에(?) 한 개인에게 과도한 형이상학적 책임을 지우곤 한다. 하지만 불완전하기에 하마르티아가 가져온 결과 앞에서 전율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개체가 우리 인간이다. 고통 속에서 뭔가를 깨달아가고, 누가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없기에 오롯한 내 책임이 아님에도 많은 것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하마르티아가 가져온 비극적 결과를 회피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기 눈을 찔렀다. 그만큼 주체적, 능동적이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심리적으로 학대하거나 책망하지 않았다. 덕분에 편안하게, 숭고하게, 영웅적으로 잠들 수 있었다. 수용하고 책임졌으나 자기를 책망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여기저기 뒤틀린 자아, 책임 없는 회피, 혐오가 만연한 현대 사회에서 오이디푸스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적절한 모델이다. 적어도 내게 오이디푸스는 좇고 싶은 하나의 이상이었다.


(2) 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 수업



올해는 불교 관련 서적 뇌과학 서적과 함께 꽤 읽었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불교 서적이 이 책이다.

김사업 씨는 동대학 교수였던 장휘옥 씨와 함께 교수직을 버렸다. 그리곤 경남 통영 앞바다에 있는 오곡도에 명상 수련원을 세웠다. 직접 돌을 나르고 나무를 다듬어서.

이 책은 불교계 잡지인 월간 불광에 연재된 글을 솎아 펴낸 것이다. 연재 때부터 ''했다. 읽어보면 이해가 간다. '무아, 연기, , 자성, , 유식, 마음, 열반, 해탈' 등 불교의 핵심 개념들을 구체적인 삶과 연결하면서도 깊이를 잃지 않았다. 정갈하다. 필력도 깔끔하다.


'종자'란 키워드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유식에서는 모든 행위(, karman - 신체적 행위인 신업 + 말과 관련된 행위인 구업 + 생각과 관련된 행위인 의업)가 흔적을 남긴다고 봤다. 그리고 흔적들이 아뢰야식(알라야식)이라 불리는 '마음'에 빠짐없이 새겨진다고 생각했다.

유식에서는 이 과정을 '종자'라는 단어를 통해 설명했다. 어떤 행위든 모두 특정한 씨앗을 심는 것과 같고 그 씨앗은 하나의 잠재태로서 특정한 조건이 갖춰지면 현실태로 발현된다는 게 요지다. 그래서 사소한 게 중요하다. 뭐든 마음에 씨를 뿌리고, 그 씨는 언제든 조건만 갖춰지면 무럭무럭 자라날 수 있기 때문.

'이 정도면 괜찮겠지.'하는 생각이 들 때 '종자'를 떠올렸다. 내게 해로울 수 있는 건 아예 하지 않는 게 낫다.


(3) J.D.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4년 만에 홀든을 다시 만났다. 친숙하고 반가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4년 전 이 책도 그렇고 홀든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얘는 왜 이러는지. 작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이번에는 책을 거울처럼 봤다. 활자와의 공명이 표상하는 내 모습과 치밀하게 대화를 나눴고, 나를 설득했고, 책에서 샐린저의 메시지를 길어내고자 애썼다. 덕분에 책을 읽고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서평을 쓰는 과정에서 비좁은 백지에 활자를 욱여넣는 게 고됐다.

뒤틀린 홀든과의 동일시에서 오는 위안만을 좇으며 이 책을 읽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렇게 읽으면 이 책은 독이 되기 십상이다. 세상을 향한 대책 없는 분노를 키워가는 데 기폭제가 될 만한 작품이라;; 하지만 샐린저가 하고 싶은 말은 있었다. 모호하고 해석의 여지가 많긴 해도. 핵심은 세상은 이분법적 시각으로 바라볼 만큼 단순하지 않으므로, 명확한 답이 없고, 따라서 자기가 처한 맥락에 맞게 자신만의 답을 찾아나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


(4) 귀스타브 플로베르, 마담 보바리



대단한 작가다. 보바리를 읽으며 플로베르에게 푹 빠졌다. 활자를 조탁하는 장인이 작가라면 플로베르라는 작가는 진정한 장인일 것이다. 루이즈 콜레에게 '스타일의 내적인 힘'만으로 지탱되는 글을 쓰고 싶다고 했던 것처럼 그는 독자의 머릿속에 뭔가를 억지로 욱여넣으려 하지 않았다. 다만, 치밀하게 보여줬을 뿐이었다.

활자를 조탁한 장인의 솜씨에서만 매력을 느꼈던 것은 아니다. 낭만을 향한 갈망이 큰 탓에 현실의 권태를 견디지 못하는 엠마의 모습은 반면교사였다. 엠마에게서 형이상학적 갈망이 큰 탓에 현실의 권태를 견디지 못했던 나를 봤다. 또한, 그 갈망이 충족만 되면 모든 게 해결되리라던 내 치기 어린 이상이 얼마나 비현실적이었는지를 다시 한 번 느꼈다.

엠마와 같은 갈망은 종국에는 허무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비현실적인 욕망은 현실에서 충족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욕망이 있으면 그 욕망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과정과 결과에 책임을 지고, 얻은 것은 감사해하고, 어쩔 수 없는 일은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하다. 실천 없는 욕망, 책임 없는 욕망, 수용 없는 욕망은 조금씩 자아를 갉아먹으며 자아를 파괴할 뿐이다.


(5) 필립로스, 에브리맨



이런 작가를 여태 몰랐다니. 책을 덮고 들었던 생각이다. 어떻게 200페이지도 안 되는 분량에 죽음을 주제로 생각해볼 만한 고민거리를 이토록 탁월하게 담아낼 수 있는 걸까? 디테일한 묘사와 짜임새 있는 구조에 혀를 내둘렀다. 대단한 작가였다.


나는 이 작품을 '근대''죽음'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읽고자 했다.


자세한 맥락은 서평 후반부로 갈음한다.


<그는 죽는다. 자아에 약간의 균열이 가지만 완전히 부서지지는 않은 채로, 완전한 자아를 향한 갈망을 버리지 못한 채로, 흠을 찾는 루페로 완전함을 본다는 착각에 빠진 채로, 그렇게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처음부터 두려워하던 바로 그대로.” 그런데 그래서 어떻다는 건가? 딱히 뭐 없다. 로스는 죽음을 고독히, 괴롭게, 두렵게 마주하는 근대인의 초상을 냉혹히 묘사하며 적막을 선물할 뿐이다. 굳이 교훈을 끌어내자면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를 염두에 두면서 후회 없이 살도록 노력하라거나 죽음 자체를 제대로 준비하라는 정도.

그런데 그런 교훈은 일리치의 죽음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에브리맨이 현재 지닌 매력은 일리치보다 근대인에 더 가깝다는 데에 있는 것 같다. 더 개체화, 합리화, 세속화한 근대인 말이다. ‘가 아버지의 유품으로 루페나 다이아몬드 주머니가 아니라 시계를 고른 이유도 그 때문 아닐까. 세분화한 시간(시계)에 따라 사람을 규율하는 것은 근대의 특징이니까. 불멸을 상징하는 다이아몬드 주머니가 아니라 유한한 삶을 상기시키는 시계를 골랐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는 불멸과 구원을 믿던 아버지와 달리 철저히 세속화한 사람이었다. 문제는 유한함, 연약함, 불확실함 등을 회피, 배제하면서 완전한 자아를 갈망했다는 점이었다.

 

초월(, 불멸, 구원)을 배제한 근대인은 완전한 자아를 욕망했다. 그런데 초월이나 완전한 자아를 향한 욕망은 유한함을 직시하기보다 부정하고 회피한다는 점에서 매한가지다. 부정하고 회피해왔으니 유약함을 받아들이질 못한다. 주인공뿐만이 아니다. ‘징징거리는 걸 혐오한다며 자살한 밀리선트도 그렇고,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못 참는어떤 제조회사의 전직 최고경영자도 그렇고, ‘사람의 결함을 지워 불행으로부터 숨으려 하는피비도 그렇다. 그들은 자신의 나약함과 불완전함을 직시하며 살아가지 못했다.

 

주인공은 루페를 잘못 썼다. 루페는 십억, , 천조 캐럿짜리완벽한 행성을 보기 위한 게 아니었다. 흠을 보기 위한 것이었다. 완전, 완벽이 아니라 연약함, 결함, 불완전함을 말이다. 주인공이 시계뿐만 아니라 루페도 골라 자신의 불완전함을 들여다보고 받아들였으면 어땠을까. 삶이 조금은 덜 후회스러웠을까, 죽음이 조금은 덜 두려웠을까. 모를 일이다.

 

어쨌든 사람은 병들고, 늙고, 죽는다. 그러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6) 버드런트 러셀, 행복의 정복



3년 만에 다시 봤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그랬듯, 이 책도 다시 읽으니 더 많은 게 보였다.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읽혔던 이유가 있었다.

러셀은 추상적인 것, 뭉뚱그려 탐구하는 것을 지양했다. 의심하고, 문제를 명확히 정의하고, 원인을 구체적으로 탐구했다. 이런 합리적 사고를 통해 행복과 불행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며 처리해나가는 그의 태도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7) 보후밀 흐라발, 너무 시끄러운 고독



영광이다. 흐라발을 알게 돼서. 상징과 은유가 만들어낸 공백 덕에 나는 이 책을 다양한 방식으로 읽었다. 책이라는 메시아를 매개로 자기만의 소중한 가치, 자유 등을 지켜나가려는 한탸의 슬픈 이야기로 읽기도 했고, 근대의 한계를 '개인의 자아, 사랑'이라는 키워드와 연결 지어 이야기하는 작품으로도 읽었다. 특히, 두 번째 해석과 관련해 같은 체코 작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교차해가며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문학 동네 연말 결산 리뷰대회'에 아주 일부를 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깊이 풀어낼 능력도, 시간도 없었으니까.


(8) 구약성경(욥기)


성경을 조금 읽었었다. 특히, '유다'''이란 캐릭터가 흥미로워 잠시 파고들다가 명확한 매듭을 짓진 못하고 그만뒀다.

욥기는 '죄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고통'이라는 (기독교에서) 골치 아픈 문제를 제기하는 작품이다. 죄 없는 자의 고통을 받아들인다면, ‘신은 전능하지 않거나 신은 선하지 않다.’라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욥의 절규, 친구들과의 논쟁, 엘리후와의 논쟁이 보여주는 죄, 인과응보, 용서 등과 관련한 묵직한 생각거리도 좋았지만, 결말이 흥미로웠다.

결말 부분에서 야훼가 직접 등장해 욥을 꾸짖고, 자기의 위대함을 자랑한다. 예를 들자면,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거기에 있기라도 하였느냐? 네가 그처럼 많이 알면, 내 물음에 대답해 보아라.

누가 이 땅을 설계하였는지, 너는 아느냐? 누가 그 위에 측량줄을 띄웠는지, 너는 아느냐?


이렇게.

애초에 내게 신정론의 문제는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욥기에 등장하는 야훼의 모습, , 당시 사람들이 이해하던 신의 모습에 주목했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야훼는 '선한 신', '인간의 고통을 이해하고 죄를 대신 짊어진 신'과 같은 이미지가 아니다. 인격화하기 이전의 신, 거칠고 두려운 자연에 가까운 신이다. 욥기를 보면 신약이 제시하는 예수의 이미지가 얼마나 기발한 지가 느껴진다. '인간과 같은 고통을 직접 느끼고, 그 고통을 헤아리고, 죄를 대신 짊어진 예수'라니!

욥기는 영화 "밀양", "시리어스 맨", 그리고 책 "오이디푸스"와 함께 읽었던 기억이 난다. 앞서 말했듯 명확한 매듭은 못 지었지만, 답은 저 위에 있는 게 아니라, 내 안에, 그리고 나와 같은 사람에게 있다는 사실 정도는 다시 한번 곱씹게 됐다.


(9) 강석경, 숲속의 방



"숲속의 방"의 소양은 "광장"의 이명준과 닮았다. 둘 모두 복잡한 현실이 개인과 집단의 갈등으로, 추상적인 말과 담론이 빚어낸 이데올로기적 갈등으로 재단되는 데 환멸감을 느끼는 캐릭터다. 둘 다 부조리 자체를 견디지 못하고, 즉 어떤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자아의 소멸'을 지향했다는 공통점도 있다.

나는 그 부조리 때문에 고뇌하고 갈등하는 소양에게 공감했다. 또한, 그 부조리 자체를 감당하지 못해 자꾸만 자아를 파괴하는 소양의 모습에 감정을 이입해 마음 졸였다. 출구는 찾지 못했지만, 내가 느낀 환멸감, 혼란이 근거가 없는 게 아니었다는 사실에 많은 위안이 됐다.


3. 괜찮았던 책들 및 제대로 읽지 못해 아쉬웠던 책들


주로 인문학(문학, 불교 서적, 철학)과 과학(심리학, 뇌과학) 류의 책을 많이 훑었다. 따로 정리는 못하겠고 몇몇 서명을 옮겨놓는 것으로 만족해야겠다. , 삶의 의미에 대한 고민, 형이상학, 존재론 등에 대한 고민의 위안처로 '들뢰즈, 스피노자, 붓다, 물리학, 생물학, 심리학, 뇌과학'에 더 확실히 기대게 됐다. 저 세 사람과 과학은 내게 종교가 됐다.


- 이반 일리치의 죽음, 위대한 개츠비, 지하에서 쓴 수기, 이방인, 햄릿






















- 공이란 무엇인가, 붓다 브레인, 설법하는 고양이와 부처가 된 로봇, 법륜스님의 금강경 강의,


 


















- 뇌와 삶의 의미, 불안, 뇌 과학 시간, 시냅스와 자아, 스피노자의 뇌




















- 고요한 폭풍 스피노자,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현대 미국 사상, 로지코믹스, 위대한 탈출, 옳고 그름, 우리는 사랑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위험한 도덕주의자, 시간 연대기, 객관주의와 상대주의를 넘어서, 차이와 반복 등.





 

 






























4. 18년의 독서를 돌아보며


작년에 세운 목표를 도중에 버렸다. 


2018년 독서의 핵심은 '좋은 삶'이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지키지 못했다. 버렸기 때문. 

'좋은 삶이 뭐지? 뭐가 필요하지?'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방구석에서 책을, 그리고 자아를 들여다본다고 알 수 있는 부류의 것이 아니었다. 또한, 작년의 내 목표는 복잡한 맥락을 사상한 추상적 원칙을 찾아 안정을 구하려는 이뤄질 수 없는 욕망에 기초했다. 그래서 나는 '좋은 삶을 살기 위해 마음에 새겨야 할 명제들'이라며 끼적인 생각을 다 버렸다. 대신, '~해야 한다'에서 벗어나 하루하루 맥락에 따른 내 내면의 목소리를 좇아 자아가 통합되는 경험을 지향하기로 했다. 

문학 작품을 주로 읽게 된 것도 추상적인 이론에서 잠시 벗어나 구체적인 맥락으로 들어간 내 모습을 상상하기 위해서였다. 한계가 있긴 했다. 어쨌든 현실은 아니니까. 하지만 여러 문학 작품을 통해 여러 삶을 살아본 일이 자아의 내적 갈등을 봉합하는 데 도움이 됐던 건 사실이다. 책 때문은 아니었지만, 책이 주는 위안을 발판 삼아,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고 목표도 달성했다. 덕분에 과거를 어느 정도 매듭짓고 새로운 미래를 상상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됐다.

이런 태도가 나를 어디로 이끌지는 모르겠다. 지금까지의 맥락과는 다른 뭔가를 지향하고, 공부하고, 고민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여하튼, 상황이 허락하는 한 부단히 읽고 쓰고 배우고 성장하며 살고 싶으니 뭐 어떻게든 되지 싶다. 아직 새로운 목표들이 명확하진 않지만 계속 나아가고 부딪치다 보면 길이 보이겠지.


'좋은 삶을 위한 독서'라는 목표만 버렸을 뿐, 작년에 지향하고자 했던 독서의 방식은 앞으로도 그대로 가져갈 것이다.


1)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또는 강박과 초조에 휩싸여 책을 읽지 않는다. 

공허함을 채우기 위한 독서. 강박과 초조에 휩싸인 독서. 경계할 대상이다. 지식을 가져다줄 뿐 지혜를 가져다 주진 않으니까. 지식은 되레 내면에 굳건한 성을 세우기 위한 재료로 사용될 수도 있다. (헛 공부한 사람이 그래서 더 무섭다)

읽어야 한다는 강박보다 읽고 싶다는 욕망에 집중하자. 많은 책을 삼킨 탓에 설사하지 말고 한 권의 책이라도 잘 소화시키자.


2) 책을 읽을 때 ''를 중심에 둔다. 

''를 중심에 두는 건 여전히 어렵다. 책의 요점을 파악한 후 저자의 생각을 자꾸 내 머리에 옮기려고만 한다. 그렇다고 책을 내 마음대로 읽고 싶다는 건 아니다. 책에서 내 생각만 찾아내기 십상이니까. 저자의 생각을 내 머리에 옮기려는 태도나 책을 마음대로 읽으려는 태도는 남는 것도 없고, 자아를 변화시키지도 않는다.

책의 핵심을 왜곡하지 않고, 책이 내게 주는 울림과 공명을 깊이 음미하자. 곱씹고, 또 곱씹자.


3) 당장 내가 마주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책에 관심을 둔다. 

무분별한 호기심은 내면에 혼란만 가져다준다. 모든 책을 당장 다 읽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현재 내가 관심을 두고 읽으면 좋을 책들을 하나 둘 읽어나가자.


2018. 12. 30

독서정산,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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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 방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14
강석경 지음 / 민음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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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도 저기도 아닌 소양은 어디로 가야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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