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19년 독서 정산
쓰는 게 맞나, 무슨 말을 써야 할까.
깜빡이는 커서를 쳐다보며 한참을 생각했다. 뚜렷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들춰본 책이 없던 건 아니다. 성긴 생각만 남기고 휘발된 책들을 애매하게 부여잡는 게 의미가 있을까, 란 질문에 답하기 어려웠을 뿐. 하지만 어차피 이런 글은 다 자기만족 아닌가.
2. 인상 깊었던 책들
(1) 이지영, 정서조절 코칭북
슬픈 이야기지만, 심리 관련 저서를 읽을 때 국내에서 나온 건 많이 거르곤 했다. 그래도 종종 각종 연구결과를 잘 소화하면서도 자기 생각을 논리정연하게 제시하는 책을 만날 수 있었는데, 이 책이 그런 책들 중 하나다.
책의 핵심은 '감정'이다. 감정이 뭘까? 감정은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 작동하는 걸까? 감정을 어떻게 마주해야 더 잘 살 수 있는 걸까? 저자는 이런 질문에 답한다. 각종 이론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실용적인 부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발싸심한 게 느껴진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들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가벼운 이야기를, 가볍게 읽고 자기 삶이 바뀌길 바라는 걸까? 적어도 쉬운 이야기를 바라지 않고, 고뇌하면서 자기가 바뀌길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빌려봤다가 새해에 샀다. 다시 읽을 계획. 소장할 만한 책이다.
(2) 마크 릴라, 분별없는 열정
마크 릴라는 컬럼비아대학교 교수다. ‘서구 사상사, 그중에서도 정치와 종교의 관계, 근대 서구 계몽주의’를 주로 연구하는 정치철학자다.
읽고 싶어 보관함에 담아만 두다가 기본 예비군과 작계 훈련 상하반기 때 빌려 가 틈틈이 읽어 완독했다. 책 소개란에 나온 것처럼 “지식인의 분별없는 열정이 냉혹한 현실 정치와 잘못 만났을 때 어떤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보여”준다는 말로 가볍게 퉁 치기는 어려울 정도로, 마크 릴라는 각각의 철학자 앞에서 머뭇거리며, 분석적으로 이들의 생애와 철학, 그리고 정치적인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읽으며 떠오른 생각은 많았으나 현실적인 문제로 아무런 글을 남기지 못해 아쉽다. 다음에 다시 읽고 서평을 꼭 써두고 싶은 책. 아렌트가 하이데거를 보고 자신의 에고에 지나치게 사로잡힌 사람,이라는 투로 말하던 부분이 기억에 특히 남는다.
3. 19년의 독서를 돌아보며
쓸 말이 없을 정도로 책을 읽지 못한 한 해였다. 뒤적인 책들은 좀 있었다.
조던 엘렌버그의 틀리지 않는 법, 데이비드 베너타의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도올의 스무살-반야심경에 미치다
![](https://image.aladin.co.kr/product/19967/85/cover150/8982641394_1.jpg)
나가노 히로유키의 (물리가 쉬워지는) 미적분과 (통계가 빨라지는) 수학력, 제임스 스튜어트의 미분적분학, 앤더슨의 통계학
스티븐 내들러의 에티카를 읽는다, 발타자르 토마스의 비참할 땐 스피노자 등등.
이 외에 읽은 건 대부분 수험서적이었다. 각종 경영, 경제, 재무, 회계, 적성 시험 서적들. 먹고사는 데 필요한 책을 읽었던 한 해랄까. 적성 시험공부나 경영전략, 경제학, 재무관리 공부는 적성에 꽤 맞았다. 거시적인 흐름을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고 수학을 좋아하기 때문이었고, 익숙하지 않은 세계를 알게 되는 지적 쾌감도 있었으니. 하지만 늘 그랬듯 이런 공부는 뭔가 공허하기도 했다. 이미 짜인 규칙, 프레임 안에서 상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필요한 공부보다는 규칙과 프레임의 타당성, 그 규칙이 나와 타인, 그리고 세상과 맺고 있는 인과관계 등에 더 관심이 많기 때문이었다. 그런 걸 보면 세상 편하게 사는 일은 글러먹은 것 같다. 어휴.
앞으로 어떤 책을, 어떻게 읽어나가야 할까.
1) 내가 조금 더 밀도 있게 공부해 기둥을 세우고 싶은 분야를 찾고 싶다
세상엔 내가 알지 못하는 다양한 세계가 존재하고, 나는 그 세계를 다 엿볼 수 없다는 사실이 늘 아쉬웠다. 책도 마찬가지다. 세상엔 읽어보고 싶은 다양한 책이 존재하지만 내 삶은 무척 짧기에 그 책들을 다 읽어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아쉽다. 그래서 고민이다. 어떤 책을 읽어야 하나?
하지만 딱 '이거다!'라는 걸 아직도 찾지 못하겠다. 이것도 재미있어 보이고 저것도 재미있어 보이고, 그러다 보면 여러 선택지 앞에서 어리바리하며 시간만 보내고 정작 끈덕지게 읽지를 못하는 경우가 잦다. 내가 조금 더 밀도 있게 공부해서 기둥을 세우고 싶은 분야를 찾고 싶긴 한데 쉽진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으면 더더욱 찾을 수 없으니 눈에 먼저 들오고 잡히는 것들이라도 꾸준히 읽다 보면 뭔가 찾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바람과 함께 독서를 해나가고 싶다.
2) 책을 계획적으로 읽는다
책 읽기는 내게 오락과도 같기 때문에 모든 걸 계획적으로 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밀도 있게 한 주제를 파고들기 위해서는 커리를 작성해 계획적으로 읽어나가는 습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뇌과학, 심리학, 철학 분야에서 가졌던 문제의식이 연결고리가 있는 만큼 이 부분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하나씩 책을 읽어나가야겠다.
3) 불편한 책을 읽는다
책의 내용 자체가 불편해도 괜찮고 어려워서 불편해도 괜찮다. 뒤돌아보면 늘 불편함과 마주했을 때만 성장했다. 불편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그러니 불편한 책을 읽자.
4) 작년에 지향하고자 했던 독서 방식을 체화하고자 노력한다
첫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또는 강박과 초조에 휩싸여 책을 읽지 않는다. : 전보다 공허함, 강박, 초조 때문에 책을 읽는 경우가 많이 줄긴 했다. 그래도 꾸준히 더 노력하자. 초조는 죄다.
둘째, 책을 읽을 때 '나'를 중심에 둔다. : 남이 어떻게 보든 무슨 상관인가. 책의 핵심은 왜곡하지 않되 책이 내게 주는 울림과 공명에만 신경 쓰자.
셋째, 당장 내가 마주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책에 관심을 둔다. : 전에도 썼지만 무분별한 호기심은 내면에 혼란만 가져다준다. 하루하루 내가 마주한 문제, 또는 의문을 곱씹고 그와 관련된 책을 읽도록 노력하자.
2020.01.05.